소설리스트

이세계 순애조교 위강력간물-4화 (4/119)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아르젠타의 영웅

* * *

"이곳 영주님은 어떤 사람이야?"

보증인을 구할 수도 없고, 금화 스무 닢을 벌 수도 없다. 하여 현재에게 유일하게 가능하다 생각되는 방법은 영주의 인정을 받는 것 밖에 없는 듯이 보였다.

그렇다면 문제 되는 것은 단 하나, 영주의 성향, 성격, 성정, 아무튼 그러한 것들이다. 현재는 생각했다. 예를 들어, 영주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자신이 재미 있는 지구의 이야기들을 해준다면, 그것만으로 마음에 들어 신분을 얻을 뿐 아니라 큰 상을 받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긍정적인 상상을. 말주변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아예 다른 세계에서 온 이상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리 생각했다.

"설마 영주님께 찾아가서 부탁 드린다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

"……."

정곡을 찔린 현재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당신 세계에는 귀족이란 개념이 없었어?"

"신분제는 철폐됐지만, 귀족이 어떤 건지는 알지."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가자마자 목이 달아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평민이 되고 싶은 노예가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은 바보라서 부탁 드리지 않는 줄 알아?"

이곳의 영주는 철저히 귀족적인 인물인 모양이었다. 아랫것들의 목숨 따위 날파리 만큼이나 하찮게 여기는 존재. 그럴 수록 허영이 심해 남들은 모르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더 잘 통하지 않을까 여겨지는 측면도 있으나, 겨우 가능성에 목숨을 맡기기에 현재는 자신의 입담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보증을 서줄 사람도 없어, 금화를 벌 수단도 없어, 영주님을 만나서도 안돼. 그럼 아무런 답이 없잖아."

"그렇지. 답이 없지. 답이 아예 없는 게 당신의 상황이야. 당연하잖아? 당신이 평생에 걸쳐 쌓아올린 모든 것들은 당신이 살던 세계에 있어. 몸만 달랑 이곳에 떨어졌는데 살기 편하다는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소녀의 선고에 현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왈칵 하고 안에 든 것들을 토해냈다.

"그렇게 자꾸 들이밀지 않아도 좆같은 상황이란 건 잘 알아! 다 알고 있는데 그렇게 몰아붙일 필요 없잖아? 해결법을 내줄 것도 아니면서 갈구기만 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어? 남을 괴롭히는 게 재밌냐?"

편하게 살고 싶다는 것도 아니다. 이전의 생활도 전혀 편하지는 않았다. 지옥 같은 주방에서 악마 같은 선배들과 쉐프에게 시달리던 삶. 딱 그 정도면 되었다. 힘들게 일하더라도 먹고 잘 곳 걱정만 없다면 그걸로 충분했는데.

위로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아니, 실은 위로해주고 걱정해주기를 바랬다. 머리통 하나 반이 작은 소녀라도 자신을 안쓰러이 보고 도와주겠다 나서기를 바랬다. 하지만 소녀는 그러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현재는 낯선 세계 낯선 땅에 아무 기댈 곳 없는 외따로이 떨어진 이방인이라는 신세를 계속해서 자각해야만 했다.

"아니 전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네. 당신, 계속 그렇게 물렁한 태도로 간다면 며칠 버티지 못하고 죽을 거야. 이방인이란 그런 거야."

그리고 그것은 소녀가 원하는 바였다. 소녀는 현재가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인식하기를 바랬다. 힘도 없고, 돈도 없고, 아는 이도 없다. 즉 완전한 무소유. 그런 상태에서 현재가 살아나는 방법 따위, 어느 부잣집의 노예가 되는 정도 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취직'이라는 것은 자유민 신분에서나 가능한 꿈이었다.

"당신에게 선택지는 단 두 개지. 도시를 나가거나, 노예가 되어 살아가거나."

현재는 그 둘 모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리 말했다.

"됐어. 너의 말은 더는 듣지 않겠어. 나는 내 알아서 살 길을 찾아볼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하려 했다. 그 앞을 소녀가 막아섰다.

"당신 정말, 진짜로 상황을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구나."

그 손에는 뽑힌 검이 들려, 현재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내가 한 이야기는 모두 당신을 믿는다는 가정 하에서 한 조언이고, 나는 당신을 아직 믿지 않는다고 했지? 당신은 수상한 사람이라 나한테 연행된 거고, 나는 수상한 당신을 거리에 풀어둘 생각이 전혀 없어. 그러니까 나가고 싶다면 증명해. 네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줘."

"머리색."

"검은 머리야 드물기는 하지. 하지만 없는 건 아니야.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증거는 안돼."

"복장은?"

"독특하긴 하지만 못 만들 옷은 아니야. 그런 걸로 증명이 된다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거야?"

현재는 비행기에 깔리기 전 잃어버린 스마트폰이 너무 아쉬웠다. 지갑이 멀쩡히 주머니 속에 있는 걸 보면 스마트폰도 꼭 쥐고 있었다면 함께 왔을 텐데, 트럭 운전사를 위해 119를 부르려고 꺼내들었다가 비행기를 피해 도망치며 던져버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현재는 딱히 지구의 문명을 증명할 물건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말주변이라도 좋았다면.'

전혀 다른 세계에 왔다. 그러니 분명 증명할 방도는 있을 것이었다. 허나 현재는 그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고, 그것 하나 생각해내지 못하는 자신의 머리에 화가 났다.

"은총이 없잖아. 수인도 아닌데."

"그건 당신의 말을 믿을 때의 이야기고, 실제로 없는지 당신이 숨기고 있는 것 뿐인지는 알 수 없지."

생각해내야 한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증거. 그것이 없으면 이 집을 벗어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러나 듣기만 해도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알 수 있는 증거 따위 그는 몰랐다. 이곳의 문명이 500년 전의 수준인지 1000년 전의 수준인지는 몰라도, 박사 석사 과정은 커녕 대학도 나오지 않은, 조리 고등학교 졸업의 유현재에게 과시할 만한 지식은 없었다.

블랙홀이니 뭐니 하는 우주에 대한 잡지식을 말해봤자, 별의 개념도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단 하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몸만 왔는데 증명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네가 믿지 않는데."

"당연한 일이지. 사람을 믿는 건 절대로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야."

"믿어줘. 나는 거짓말은 하나도 하지 않았어."

눈 앞에 있는 소녀의 온정에 기대는 것 뿐이었다. 그리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시작되지 않았다.

"믿음에는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해. 감정에 호소한다고 믿어주는 건 바보 같은 일이야."

그러나 소녀는 뻗은 손을 쳐내고,

"하지만 이래서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네. 맨몸으로 도시 바깥에 나가봤자 개 먹이 밖에는 안되겠지. 그러니까 단 한 번 호의를 베풀어 줄게."

구원인지 무언지 헷갈리는 동앗줄을 내밀었다.

"내 밑에서 일하도록 해. 곁에 두고 지켜보겠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거절하면 성 밖으로 추방인 거지?"

"완전히 답 없는 바보는 아닌 것 같네."

현재는 잠깐 고민했다. 이 제안을 무시하고 도시 바깥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도시 근처에는 뭐가 있어?"

"많은 밭, 숲, 그리고 길. 하지만 조심해. 면식 없는 농가 근처를 기웃거리단 작물 도둑으로 의심 받아 죽게 될 거고, 숲에 들어가면 야수들과 싸워 살아남아야 하고, 길을 따라 걸어도 도적을 만나 죽고 말 테니까."

"무슨 전부 다 죽는 길 밖에 없냐."

서울에서 인천까지 걸어간다고 해보자. 그럼 분명 발은 아프겠지만, 어설프게 차도로 걷다가 치이지만 않는다면 죽을 일은 없다. 현재가 아는 도시라는 것은 그랬다.

하지만 이곳은 다른 세계, 21세기의 한국과는 전혀 다른 친절하지 못한 세계였다. 도시 바깥으로 나간다는 건 그 자체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할게. 네 밑에서 일할게. 내가 믿을 만하다고 여겨지면 자유민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 맞지? 그 후에는 내가 요리 기술을 써서 살아갈 테니까."

"좋아. 그럼 결정. 일단은 저녁 준비를 해줘. 계속 자랑하는 그 요리 솜씨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봐야겠으니까."

현재는 기대했다. 이게 게임이라면 여기서는 자신의 음식을 맛본 소녀가 '이런 맛이 있었다니! 대단해!' 그리 감격하며 바로 귀족의 주방에 주방장으로 추천해주는 그런 전개가 일어나지 않을까. 그런 망상을 품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주방을 본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게, 주방?"

가스레인지가 없으리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싱크대가 없으리란 것도 떠올리고는 있었다. 허나 그 둘을 대체하는 것이 무엇이 되는지, 상상력이 부족한 현재로서는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래. 아까 받아온 재료들이 많으니 뭐든 자신 있는 걸 만들어 봐."

어쩌면 익숙한 식재들에 방심했는지도 모른다. 베이컨, 양파, 사과 따위를 잔뜩 받아왔기에 평범한 주방을 기대했는지도.

그러나 주방의 화로는 장작에 불을 피워 직화로 요리하는 원시 수준이었고 불조절을 어떻게 할지는 커녕 불을 붙이는 것부터가 난관인 듯 보였다. 싱크대 대신 쌓여있는 물통 몇 개는 음식에 사용할 때는 물론이고 설거지를 어떻게 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게 이 세계의 주방이었다.

그나마 도마와 식칼은 알아볼 수 있게 도마와 식칼다운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그조차도 상당히 옛스러운 모습이라 낯설기만 했다. 푸줏칼을 닮은 커다란 흉기는 일반 가정의 주방에 있기엔 너무 거친 모습이었다.

'겉모습만 딴 편리한 게임 세계가 아니야. 진짜배기 중세다.'

주방을 살피며 요리의 견적을 짤 수록, 거기 놓인 조리도구들을 보면 볼 수록 평탄치 않은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현재를 짓눌렀다. 이런 곳에서 정말 살아갈 수 있을까?

'냉장고가 없는 주방이라니. 정말 여기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나마 여름이 아닌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가을의 선선한 날씨인지라 뭐든지 금방 상해버리지는 않겠지만, 냉장고 없는 공간에 무슨 재료를 얼마나 보관할 수 있을까.

현재는 아무튼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요리만은 자신 있다고 그렇게나 말해놓고 제대로 된 것을 내어가지 못하면 그만한 참사가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불을 붙이는 것부터가 말도 안되는 난관이었다. 버튼 하나 돌리면 강력한 화력의 불꽃이 일어나던 주방의 화구와 달리, 이쪽의 화로는 부싯돌로 불똥을 틔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그야말로 원시의 화기였다.

수십 번, 어쩌면 백에 달하는 횟수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현재는 불을 쓰는 것을 포기했다. 마침 너무나도 완벽하게 엄선된 재료가 '그것'을 만들라고 호소하는 듯이 보여서.

현재는 식재료들을 일부 잘라내 맛을 보았다. 한국에서 먹던 것들과 약간씩은 달랐으나, 그렇게 커다란 위화감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식재의 맛마저 완전히 달랐다면 그가 가진 지식은 단 하나도 활용을 할 수 없었을 테니.

칼과 도마, 그리고 지금 있는 재료들. 불을 쓰지 않는 생식 밖에는 만들 수가 없었지만, 다행히도 빵과 베이컨은 이미 불을 통해 조리된 것들이었다.

현재는 올리브 오일과 소금, 후추, 그리고 마침 알맞게 준비된 재료들을 사용해 BLT 샌드위치를 만들어냈다. 빵은 접시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딱딱한 겉면을 잘라내고 속부분을 사용했다. 불을 쓸 수 없는 상황에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엄청 빨리 끝났네? 불도 피운 것 같지 않고."

현재는 불 붙일 줄 몰라서 못했다는 소리는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다. 소녀는 혼자 사는 듯 한데 화로에 사용한 흔적이 있는 걸 보면 능숙하게 불을 피울 수 있을 것이었다. 벽난로도 있고. 그런데 덩치가 산만한 자신이 불 하나 피우지 못한 탓에 불을 쓰지 않고 요리를 해왔다는 것은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나중에 몰래 불 피우는 연습 좀 해봐야겠다.'

"자. 일단 먹어봐."

현재는 약간 불안하면서도 설레였다. 불을 쓸 수 있었다면 어떻게든 소스를 만들어 맛을 더할 수 있었을 텐데. 불 없이 더할 수 있는 조미료라고는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 정도 뿐. 이런 경우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렸다'라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너무 심심하다'며 실망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편이었다.

소녀는 어느 쪽일까. 소녀가 샌드위치를 베어물고 작은 입을 오물거려 씹는 동안 현재는 심사위원에게 요리를 넘긴 대회 참가자처럼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맛있네. 응."

다행히도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다.

"요리를 배웠다는 것마저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지? 있는 재료만으로 이렇게 맛있게 만들다니. 제법이야."

'기적 같이 여기 있는 식재료 중에 BLT가 전부 있었을 뿐이지만.'

맛있다는 것이 허언은 아니었는지 소녀는 작은 입으로 열심히 샌드위치를 씹어 뱃속으로 밀어넣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현재의 마음 속에 작은 안도감과 기분 좋음이 차올랐다.

이래뵈도 경력 좀 있는 요리인. 손님이 맛있게 먹어줄 때가 가장 기분 좋고 보람을 느끼는 때인 것이었다. 요리사가 되면 맛있는 걸 많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는 단순한 아이의 소망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그 삶의 전부이자 또 목표이기도 한 직업이었다.

'빨리 불 쓰는 법도 익혀야겠다.'

불은 요리의 모든 것,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불을 쓰지 못해서야 반푼이는 커녕 10분의 1인분도 못하는 요리사, 요리사라고 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요리계의 수치 같은 존재인 것. 현재는 어서 이 시대의 불을 다루는 법을 익혀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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