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순애조교 위강력간물-3화 (3/119)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아르젠타의 영웅

* * *

미아는 현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외국에 나가본 경험이 없는 현재에게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지 않는다는 감각조차 낯설었다.

'외국 한 번 가본 적이 없는데 다른 세계라니. 참.'

지구의 서울에서 방문했던 집들과는 전혀 다른, 그러면서도 낯설지만은 않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걸까.

바닥에는 카페트가 깔려 있고, 구석에는 굴뚝으로 연결된 벽난로가 보였다. 다른 쪽 구석에는 침대가 놓여있었으며, 방 가운데 쯤에는 둥근 목제 테이블 하나와 그를 둘러싼 두 개의 소파가 놓여있었다.

주방은 따로인지 식생활에 관련된 물건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걸 생각해도 상당히 휑한 방이었다. 취미 생활을 위한 물품이나 서적 같은 것은 없는 걸까. 아니, 침대 옆에 커다란 궤짝이 있으니 그 안에 다 모아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재는 그리 생각했다.

"앉아."

여전히 꼬박꼬박 반말을 하는 소녀. 현재는 소파에 앉으며 경비병들이 겨눈 칼 때문에 묻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몇 살이세요?"

"열 여섯."

"저는 스물 하나인데요."

"그래서?"

"근데 왜 반말이세요?"

현재에게 있어 상당히 우스운 상황이었다. 나이에 맞는 앳된 얼굴에, 나이 치고도 너무 조그마한 소녀에게 여전히 존대를 하고 있는 상황이 우스웠다. 뭐, 식당을 찾아온 손님이라면 그러지 못할 것도 없지만, 키가 초등학생만한 소녀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신에게 반말을 하는 건 당황스럽다 못해 웃기기까지 한 일이었다.

"이봐, 존대가 뭐지?"

"상대방을 높여주는 말이죠."

"그럼 알 건 다 아네. 뭐가 이상해? 존대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에게 쓰는 말이잖아? 문제 있어?"

'문제는 당연히 있지. 아주 많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열여섯 소녀, 키는 머리통 하나보다도 더 작고 체구는 반이나 될까 싶은 소녀가 자기보다 강할 리가 없지만, 지금은 도무지 상식을 내세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세계에 왔다. 그리고 그 경비병들은 명백하게 소녀를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인간으로서 대우했다. 그렇긴 한데, 그렇다 해도, 아무리 그래도 저 겉모습으로 강하다는 게 말이 될까? 현재는 매우 심란했다.

"하긴, 당신의 실력은 아직 미지수네. 걸음걸이나 숨 쉬는 것만 봐도 약하다는 게 느껴지지만……, 혹시 힘을 숨긴 거야?"

걸음걸이나 숨 쉬는 걸로 강한지 약한지 어떻게 아는데? 현재는 따지고 싶었으나 너무 낯선 세계라 그런가 보다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가 5년은 더 살았는데, 존중? 을 해주면 안되겠냐는 거지. 웃어른을 공경하라. 그런 말 없나? 여긴?"

"나이가 많다는 건 존중 받아야 하는 일인 건가? 왜?"

소녀는 너무도 뻔뻔하게, 그런 상식이란 없다고 아주 굳게 믿는 듯이 말했다.

'그립습니다. 동방예의지국.'

현재는 눈 앞의 소녀가 존대를 쓰게 하는 일을 포기했다. 대신 자신이 존대를 하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슬쩍 말을 놓아봤는데 뭐라 안하는 걸 봐선 소녀는 존대든 반말이든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강해? 아니면 약해?"

상당히 남자의 자존심을 찌르는 질문이 왔다. 현재는 허세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 세계에 오자마자 열 명의 병사에게 포위당했던 아픈 기억에 그러지 못했다. 말실수를 한 번 하면 곧장 칼에 찔려 죽을 것 같다고 할까, 참으로 안정감이 없는 세계였다.

"강하다거나 약하다거나, 애초에 싸워본 일이 없으니까 모르겠는데."

"뭐? 싸워본 적이 없다고?"

소녀는 정말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입까지 벌렸다.

"왜 그렇게 놀라?"

"반드시 싸우는 게 직업일 거라 생각했는데. 전사라든지, 검투사라든지."

"내가 살던 곳에 그런 직업은 없거든. 싸우는 직업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경찰이나 군인, 격투기 선수 정도였다. 그나마도 경찰은 싸우는 게 주된 일은 아니고.

"그럼 그 근육은 뭐야?"

"빡센 주방에서 일하다 보니."

"주방? 요리? 생긴 거랑 전혀 안 어울리는데."

현재는 이 낯선 세계에서 작은 소녀에게 자주 듣던 익숙한 말을 듣자 조금 가슴이 아려왔다. 세계를 건너뛰어도 요리랑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는구나, 싶어서.

"조폭 같이 생겨서 죄송하게 됐수다."

소녀는 갑작스레 다가와 현재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현재는 갑작스런 접촉에 당황했다. 그는 모태솔로. 여태까지 모친 이외의 여자 손을 잡아본 일이 없었다.

"뭐하는 거야?"

현재는 깜짝 놀라 손을 빼려 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소녀의 힘은 셌다. 성인 남성, 그것도 주방일로 단련된 현재를 간단히 압도할 정도로.

"설마 이게 다는 아니지? 좀 더 힘 써서 벗어나봐."

현재의 자존심이 갈가리 찢겼다. 머리통 하나 반은 작은 소녀에게 손힘으로 눌리는 이 상황에. 그래서 그는 안간힘을 썼다. 소녀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게 어떠한 대단한 업적이라도 되는 듯이. 그러나 모든 힘을 다해도 그 손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마설마 했지만, 진짜 그건가?"

힘이 없어 괴롭힘 당한 것은 현재 쪽이었는데, 소녀는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양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현재는 참담한 심정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뭔데?"

"정말로 신의 축복이 없는 거야 당신? 다른 세계의 능력도 없고?"

"축복이니 능력이니 그런 거 없고, 그냥 평범한 인간인데."

"평범한 인간이면 축복이 있어야지."

소녀는 그제서야 손을 놓고 물러섰다. 벌레라도 본 듯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태창, 이라고 해도 정말로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현재는 아주 작은 기대를 했다. 아까는 안 됐어도 지금이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상태창."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더 집중했다. 집중하면 뭐가 바뀌기라도 할 것처럼.

"상태창!"

현재는 마지막으로 힘을 모아, 간절히 또 우렁차게 기도하듯 외쳤다. 여지껏 부족했던 것이 간절함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상태차앙!"

그러나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는 포기했다.

"역시 아무 것도 안 변하는데."

"다른 세계 사람이란 게 정말인 건가.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힘을 숨기는 건가."

"거짓말 한 적 없어."

현재는 소녀의 추궁에 진심으로 억울하여 부정의 말을 토해냈다.

"당신이 진짜 다른 세계에서 왔고, 신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면, 그 사실은 숨기는 게 좋아."

소녀는 현재를 믿는지 안 믿는지를 확실히 해주지 않고, 그저 믿는다고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신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는 건, 해석하기에 따라선 신의 미움을 샀다고 들릴 수도 있는 거니까."

"이곳 사람들은 다 신실한 종교인인가?"

"신실해? 이상한 표현이네. 신이 있는 건 당연하고, 의심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어. 그리고 배교를 저질렀을 때, 확실한 심판이 내리지."

"우리 세계에선 신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가 않아서, 그런데 정말 신이 있는 게 확실하다 해도 배교하는 사람이 있구나?"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이랄까 종족 전체가 신을 등지는 일이 두 번이나 있었지. 그 때문에 네 종족 중에 아직 은총이 남은 건 두 종족 뿐이야."

"네 종족? 인간 말고도 지성체가 있는 거야?"

"그래. 인간, 엘프, 오크, 고블린. 이렇게 네 종족이 신의 은총을 받아 한때 대륙을 사분하던 지성체들이었지만, 지금은 두 종족이나 신을 저버리고 타락해, 짐승보다 못한 신세가 됐지."

"오."

현재는 생각했다. 오크와 고블린이 타락한 게 분명하다고. 왜냐하면 대부분의 게임에서 그 둘은 인간의 적 몬스터였기 때문에.

"오크랑 고블린이 타락한 거지?"

"아니, 엘프와 고블린인데?"

"뭐?"

"오크와 고블린을 안다는 건, 당신네 세상에도 그 종족이 있는 거야?"

"아니, 진짜로 있는 건 아닌데.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나 할까? 누구나 아는 전설 같은 걸로?"

"그렇다면 존재하다가 멸종한 건지도 모르겠네. 이렇게나 똑같이 생긴 인간이 있다면, 나머지 종족도 있으리라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아무튼 이 세계의 엘프와 고블린은 타락했고, 신의 저주를 받았어. 엘프의 경우엔 물의 저주를 받아 물에 닿으면 극한의 고통을 겪고, 그래서 사막 이외에선 살아갈 수 없게 되었지. 고블린의 경우엔 아예 지성을 잃고, 땅으로부터 어떠한 수확도 거둘 수 없게 되었어."

숲의 엘프가 사막으로 쫓겨난 건가. 고블린은 고블린이고. 현재는 완전히 낯설지만 않은 세계에 기묘한 친근감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은 종족 전체가 저주를 받았지만, 인간이라고 배교자가 없는 건 아니야. 인간의 배교자는 저주를 받아 짐승과 뒤섞인 모습이 되고 말지. 그런 인간들은 수인이라 부르고 모두 노예로 삼아. 당신은 겉모습은 인간이니까 그런 취급을 당하지는 않겠지만, 은총이 없다는 걸 밝힐 때는 신중하도록 해."

'곰수인이 어쩌고 하던 게 그건가? 그 수인이란 게 얼마나 섞이는 건지 모르니까 뭐라 못하겠지만, 진짜 나를 곰하고 섞였다고 생각한 건가.'

현재는 경비병의 막말에 뒤늦게 열이 올랐다.

"하지만 큰일이네. 역전의 용사처럼 생겨가지고 싸움이라고는 아예 할 줄 모르는 허깨비라니."

안쓰러움, 분명한 연민을 담은 눈빛으로 소녀는 현재를 바라보았다.

"꼭 싸워야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이렇게 멀쩡한 도시가 있는데."

그게 얼마나 우스운 말인지는 현재 또한 알고 있었다. 다른 세계로 떨어진다는 지극히 특이한 현상, 그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세계 구석구석을 여행해야만 하겠지.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당연히도 일정 이상의 무력이 필요할 것이었다. 그리 평화로운 세계가 아니라는 건 경비병들이 칼을 꺼내 들이대는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으니.

하지만 자신이 계속해서 깎아내려지는 기분이 들자 방어기제로써 변명이 나온 것이었다. 싸우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지 않겠냐는 그런 변명이.

"이 도시는 당신의 도시가 아니야."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내겐 요리하는 기술이 있어."

호텔 주방에서야 양파 마늘이나 손질하는 막내였지만 아예 초보자는 아니었다. 조리 고등학교 출신인 그는 이미 양식 일식 중식 한식 조리사 자격증이 모두 있는 요리인이었다. 굶지 않기 위해 배운 기술, 설마 다른 세계에 떨어질 줄은 몰랐지만 그런 기술을 가졌기에 여기서도 굶지 않을 수는 있을 것이다.

'기계 기술을 배운 게 아니어서 다행이지.'

전기나 용접 기술 등을 배웠다면 이 세계에서는 전혀 쓸 수 없었겠지. 없는 기계를 고칠 수도 없을 뿐더러 제로부터 만드는 것은 더욱이 말이 안되니까. 현재는 요리를 배우기로 선택했던 자신을 칭찬하기로 했다. 낯선 세계, 낯선 땅의 낯선 건물들, 긍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었다.

"대충 아무 식당에라도 어떻게든 취직하면."

"신분증도 없는 수상한 인간을 누가 고용해준다는 거야?"

현재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은 정말 뚝 떨어진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그에게는 이곳에서 통용되는 신분이 없었다.

"신분이라는 건 얻기 어려운 거야?"

"얻기 쉽지. 얻으려는 신분이 노예라면 말이야."

소녀의 말에 현재의 얼굴이 밝아지려더가, 이어지는 말에 도로 어두워졌다.

"평민? 자유민? 아무튼 그런 신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자유민의 자식이면 되지만, 그 얼굴로 갓난 아이라 우길 수는 없을 테니 안되고."

아마 농담인 듯 했지만 현재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사안이 너무 중해서 웃어넘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세 명 이상의 보증인. 없겠고. 금화 스무 닢. 당연히 없지? 영주님의 인정.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럼 방법은 없다야."

"보증인 세 명이라는 거, 네가 지인을 모아서 도와주면 안돼?"

현재는 염치 불구하고 부탁했다. 취직이 안되면 당장 먹고 살 방도가 없지 않은가? 지갑 안에는 체크 카드가 있지만 이 세계에서 사용 가능할 리는 없는 것이었다.

"당신 아직도 이해 못한 거야?"

현재의 부탁에 소녀의 눈빛과 말투가 모두 싸늘해졌다. 온도가 5도씨는 내려간 느낌으로.

"아직 나도 당신을 믿지 않아. 그런 나한테 보증인이 되어달라니 어이가 없네."

소녀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얼마나 말랑한 세계에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명심해. 아무도 믿지 마. 힘도 돈도 인맥도 없는 너는 함부로 아무나 믿었다간 절대 살아남지 못해."

'그럼 너도 믿지 말라는 소리잖아.'

투덜거리려던 현재는 어째서인지 소녀가 슬퍼보인다고, 그리 생각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