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제 14화. 용사의 선봉대.
* * *
정말인가?
내 권속인 린의 말을 의심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됐지만.
5일이 지났다는 사실도 말이 안되긴 마찬가지였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 뱉으니, 갑자기 린을 향하던 아우렌의 시선이 날카로워 지는 것이 보였다.
일단 오해가 생길 소지가 있기에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린은 아우렌과 함께 아이린을 찾아 다녀 줘. 찾는대로 곧바로 내가 있는 쪽으로 와주고."
그 말에 아우렌이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지호."
"응."
그 와 다르게 아무 걱정 없다는 듯이 방긋 웃는 린의 모습.
"그리고 세라자드는 나랑 바로 지하 1층으로 이동하자. 린. 혹시 내 새로 생긴 권능으로 층간 이동을 사용 할 수 있을까?"
"응. 당연하지. 아마 가서 권능을 살짝 발동해 보면 사용하는 법이 머릿속에 들어올 거야."
거의 확실하다시피 고개를 끄덕인 린의 말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린이 권능을 다시 한번 발휘하자, 방금 전 튀어나온 자그마한 버섯 엘리베이터보다 조금 커다란 버섯 기둥이 솟아 올랐다.
"아쉽지만, 아무래도 나도 권속이다 보니 권능에 제한이 있어서."
린이 그렇게 말하면서, 방금 소환한 버섯 엘리베이터에 아우렌을 태우고, 처음 소환했던 자그마한 버섯 엘리베이터에 자신이 올라탔다.
"지호. 아이린이 사용하던 버섯은 저 쪽에 있어."
아우렌의 말에 가리킨 방향에 시선을 집중하자 흐릿하게 파출소 크기만한 버섯 건물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아우렌이 머무는 53층의 입구에서 정반대의 방향.
"내 여동생인 아우라스에게 안내해달라고 하면 될 거야."
아우렌이 근처에 흩어져 있던 미노타우르스 걸 중에 가장 큰 덩치를 가진 미노타우르스 걸을 가리켰다.
흑발인 아우렌과 달리 은발의 머리를 한 거유의 미인이 아우렌의 지목에 슬쩍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흐응."
아이린처럼 콧소리를 늘어뜨리며 자리에서 가볍게 일어난 은발의 미노타우르스 걸이 다가왔다.
새하얀 눈이 생각날 정도로 하얀 얼룩 위에 하얀 얼굴이 그려진 가죽 비키니를 입고 있는 백옥같은 피부의 은발의 미녀.
그러고 보니 아우렌과 달리 가슴이 비정상적으로 큰편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들 중에도 저런 가슴은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수박만한 크기의 가슴을 가진 미인이었다.
아니지 수박보다 조금 더 큰가?
잠시 가슴 크기를 감상하고 있자니, 어느새 아우렌과 린이 탑승한 자그마한 버섯 엘리베이터가 사라지고, 그 앞으로 세라자드와 아우라스가 자리했다.
아우렌과 다르게 광포한 여전사의 느낌보다는 약간 프라이드가 높아 보이는 여기사 처럼 느껴지는 분위기를 가진 아우라스의 모습.
"아우렌의 동생 아우라스라고 했지?"
"네."
마치 절도 있는 기사의 표본?
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딱부러지게 대답하는 아우라스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가까이서 보니 눈이나 눈꺼풀 심지어 속눈썹까지 하얗다 보니 뭔가 진짜 얼음공주 같은 이미지도 느껴지는데?
"아우렌 언니께 대충 설명은 들었습니다. 이세계에서 오신 용사면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용사가 아니라 반신이 되셨군요."
아우렌에게 이미 설명을 들었던 걸까?
왠지 거부감 없어보이는 표정으로 똑 부러지게 말해오는 아우라스를 보니까 세라자드와도 비슷한 느낌이 나는 것 같았다.
"응. 어쩌다보니... 그건 그렇고 앞으로 나를 좀 도와줘야 할 것 같아."
"반신님께서 원하신다면. 당연히."
"응?"
"언니께 부탁 받은 것도 있고, 저희는 마신님을 섬기는 미노타우르스 걸 부족입니다. 마신님께 인정받은 반신님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순리이지요."
마신의 인정이라...
그러고 보니 나를 반신으로 만든 외우주의 신 말고도 마신에게도 축복을 받은 적이 있었지.
잠깐. 그러면 예전에 있던 상태창은 완전히 사라진 걸까?
상태창.
머릿속으로 상태창을 떠올렸는데 맨 처음 반신이 되었을 때 간략하게 알려주던 상태창 조차 이제 눈 앞에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머릿속에 있는 권능의 일부가 마치 VR 세계마냥 심상세계에 펼쳐졌다.
눈으로 보이는 시야와 다르게 느껴지는 권능의 세계.
내가 숲으로 만들어 놓은 권능의 세계와 동시에 초상화가 어렴풋이 존재하는 것이 느껴졌다.
초상화에 집중하려 하면 다시금 현실의 시야가 좁아지면서 모든 감각이 서서히 가라 앉는 느낌.
집중을 풀자, 다시금 현실의 세계가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상태창. 일명 시스템이라 불리던 그것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신하여 내 몸의 기능과 권능이 감각적으로 내 육체가 내뿜을 수 있는 능력과 한계에 대해 알려주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어렸을 적에 칠판에 선생님이 문제를 딱 적으면, 적어나가는 그 문제를 딱 보기만 해도 못 풀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감각?
내가 신체적으로 벌일 수 있는 능력과 그 한계가 딱 느낌적으로 들어오면서, 그것을 뛰어넘으려면 권능과 권속이 좀 더 강해져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권능과 내 신체 상태의 점검을 마친 내가 가볍게 몸을 풀면서 입고 있는 정장을 내려다 보았다.
이제는 팬티와 망토차림으로 다닐 때는 끝났지.
정장을 딱 빼 입은 내 모습과 젊어진 육체에 기분 좋은 쾌감을 느끼면서 눈 앞에 서 있던 세라자드와 아우라스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세라자드는?"
"저야. 주인님께서 원하시는대로..."
"그 주인님은 뺄 수 없겠어?"
"그...그럼. 지호님이라고."
주인님보다는 나은 것 같긴 한데. 뭐 사실 주인님이든 지호님이든. 사실 크게 상관은 없다.
다만 세라자드가 나를 부를 때 불편할까 봐 그런 것인데. 지호님이라는 단어가 편하다면 뭐.
"네가 그게 편하면 그렇게 불러도 돼."
"넵... 지호님."
그러면서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고개를 숙이는 세라자드에서 시선을 떼 아우라스에게 옮겼다.
"저쪽에 있는 커다란 버섯 건물이 아이린이 이용하는 순간이동 건물 맞지?"
"네. 맞습니다."
"그럼 일단 이동 부터 할까?"
"다른 부족원들은 어떻게 할까요?"
아우라스가 주변에 둥그렇게 모여서 누워 있는 미노타우르스 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 같이 가지 뭐. 어차피 여기서 뭔가 꼭 해야 하는 건 없잖아?"
"네. 그럼."
아우라스가 손짓을 하자, 주위의 미노타우르스 걸들이 전부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우렌이 3미터에 달하는 키였다면 아우라스는 그보다 손바닥 크기 만큼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다. 주변에 일어선 미노타우르스 걸들도 전부 그 쯤 키가 되어 보였다.
단숨에 나보다 약 1미터는 큰 장신의 거유 미녀들이 나를 둘러싼 모습이 되자, 잠시 침을 꼴깍 삼켰다.
그나저나 뭔가 잊은 것 같은...
아!
"아우라스."
"네?"
"저기 있는 벼와 곡물들 있잖아. 저것도 좀 챙겨서 올라가자."
거의 끝없이 펼쳐진 논과 밭을 지목하면서 말하자, 아우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규모의 이동.
거의 파출소 크기의 커다란 버섯 건물 내부가 꽉 들어차듯이 미노타우르스 걸들과 나, 그리고 세라자드와 아우라스는 내 권능을 이용해 아이린의 마법을 펼쳤다.
슈웅.
엘리베이터라고 칭한 건물내부가 흔들리면서 이동 마법진이 순식간에 나와 일행을 감쌌고, 지하 1층으로 설정한 내 마법에 따라서 곧 우리는 미궁 지하 1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숨이 막힐 듯이 풍겨져 나오는 젖 냄새에 이성의 끈을 잃기 전에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온 나는 그 앞에 기다리고 있던 루루를 만날 수 있었다.
"오빠. 너무 늦었잖아!"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던 루루가 내게 다가와 품 안에 안기듯이 나를 덥썩 끌어 안았다.
그러다가 순간 화들짝 놀라더니 뒤로 주춤 물러섰다.
"오...오빠?"
휘둥그레진 눈동자와 함께 루루가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곧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권능이 서서히 깨어나면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라, 루루의 몸에 흡수 되기 시작했다.
촤라락.
갑자기 내 손바닥 위에서 자그마한 블랙홀이 생겨나면서 손바닥 크기의 얇은 수첩 같은 것이 소환되었는데, 그것이 루루의 손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듯이 날아갔다.
"오빠! 이건!"
수첩을 받아 든 루루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수첩을 빠르게 펼쳐서 안에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미쳤어... 이건..."
갑자기 독서에 빠진 루루와 함께 건물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한 세라자드와 아우라스, 그리고 미노타우르스 걸들이 내 뒤에 주르륵 늘어서기 시작했다.
"어...어..."
빠르게 수첩의 내용을 읽던 루루가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다시금 쳐다보았다.
"왜?"
"오빠... 반신이 된 거야?"
수첩을 조심스럽게 로브 안에 밀어 넣는 루루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떻게 하다 보니까."
"미쳤어... 아니. 진짜. 미쳤어..."
계속 미쳤다는 말만 반복하던 루루가 발을 동동 구르며, 생각에 빠진 표정을 짓다가 이내 빠르게 고민하고 고뇌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가, 아 하고 뭔가 깨달은 듯이 엄청나게 빠른 표정 전환을 했다.
마치 마임이나,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 장면에 살짝 웃음이 튀어나올 뻔 했다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루루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오빠가 지금 이 상황에 반신이 됐다는 건...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생겼다는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