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2. 시간의 틈
85번째였다. 아니면 86번째였던가. 그 생은 조금 이상했다.
“줄리앙, 듣고 있어?”
“……에드몽?”
“그래, 내가 만난 아가씨 이름이 말이지. 크리스틴이라고 하는데.”
이상했다. 분명 한 시간 전에 줄리앙은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 그는 마흔 살이었고 어김없이 혼자였다. 레아가 죽은 지도 15년이 흘렀을 때였다. 힘든 15년이었다. 이번 생은 유달리 그랬다.
그것이 드디어 끝이 났으니 오늘 그는 왕궁에 있어야 했다. 여왕 폐하의 앞에서 이사벨라 리버런의 초상화를 보고 있어야 했다. 제법 미인이라고 말했다가 그 말은 너무 심하다며 여왕에게 타박을 당한 후 어서 리버런 섬에 가서 결혼하고 오라는 성화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 대신 지금 그는 에드몽의 곁에 있었다. 얼핏 보아도 자세히 살펴도 에드몽은 마흔 살이 아니었다. 아주 젊었다. 아니, 어렸다.
“에드몽.”
“왜 그러나.”
“크리스틴을 만났다고?”
“그래, 그 아가씨 이름이 크리스틴인데, 포리냐크 백작가의 여식이라 하더군.”
에드몽이 크리스틴을 만난 해라면 아직 스물이 되기 전이었다.
“에드몽 자네 나이가 지금 어떻게 되지?”
“자네라니, 줄리앙, 너 왜 그렇게 나이 든 사람 같은 말투를 쓰는 거야? 나야 지금 열일곱이지.”
에드몽이 열일곱이라면 줄리앙도 열일곱이었다. 줄리앙은 또다시 지긋지긋한 톱니바퀴를 돌아 과거로 돌아갔고,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많이 돌아간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줄리앙이 제일 먼저 한 생각은 자신이 열일곱이라면 레아는 열한 살이겠군 하는 것이었다. 레아의 나이가 몇이든 줄리앙의 나이가 몇이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는 레아를 보기 위해 리버런 섬으로 향했다.
열일곱의 그가 어떻게 리버런 섬에 초대장도 없이 들어갈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없다. 막무가내로, 정공법대로(그러니까 몰래 숨어서), 혹은 생각보다 허술한 리버런 섬의 문지기들의 감시를 이미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등으로 훗날 세간이 추측했던 바가 그대로 역사서에 실려 있을 뿐이다.
어쨌든 그는 리버런 섬으로 갔다. 다리를 건너, 숲을 지나, 성문 안에 들어가 라벤더 밭을 지나면 레아의 방이 있는 동쪽 별관이었다.
줄리앙이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열일곱이라면 줄리앙이 막 공작이 되었던 때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이다. 갑작스레 너무 빠른 시기에 도착한 소년, 줄리앙 레날은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괜찮다. 시간은 많았다. 내일부터 생각하면 된다. 지금은 다만, 열한 살의 아이라도 좋으니 레아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15년을 기다렸지 않은가.
때는 밤이었다. 잠에 들어 있을 터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딸기 빛 등불을 켜고 책을 읽다가 곯아떨어져 있을 것이다. 줄리앙은 손쉽게 나무를 타고 레아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 창문 밖에서 레아를 바라보았다.
레아는 줄리앙이 처음 보는 소녀 시절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롯가에는 장작이 타고 있었고, 침대에는 토끼 모양을 한 인형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레아의 머리맡에는 놋쇠로 된 그릇 하나가 있었다. 그 안에는 물이 잔뜩 들어 있었고, 옆에는 수건이 걸쳐져 있었다. 레아는 끙끙 앓고 있었다. 감기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감기에 잘 걸렸고, 한번 걸리면 잘 낫질 않았죠.’
레아의 언니 이사벨라가 해 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웃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줄리앙은 피식, 웃음이 났다. 그 후로도 매 삶 레아는 많이도 감기에 걸렸고, 한번 걸리면 잘 낫질 않았다. 레아가 아무리 조심해도, 그가 아무리 열심히 간호해도 말이다.
열일곱 소년 줄리앙 레날의 가벼운 몸이 공중으로 도약했다. 나무에서 창문까지의 거리는 그리 가깝지 않았지만, 줄리앙은 운동신경이 좋았다. 겨우 창문턱을 붙잡고 올랐다. 문은 열려 있었다.
‘이러니까 자꾸 감기에 걸리지.’
그렇게 투덜거리며 줄리앙은 레아의 방에 들어갔다. 레아는 줄리앙이 뛰든 말든 무슨 소리가 나는지도 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다. 열에 달뜬 레아의 얼굴은 딸기색 등불 빛을 받아서 그런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 열한 살밖에 안 되었지만 줄리앙이 처음 만났던 열다섯, 아니면 열일곱, 혹은 스물, 스물다섯, 스물일곱, 서른, 모든 얼굴의 레아가 그곳에 다 들어 있었다.
줄리앙은 조용히 걸어가 레아의 침대 맡에 앉았다. 그리고 끙끙 앓는 레아의 이마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잠에 빠진 것인지 열이 너무 올라 의식을 잃은 것인지 모를 레아가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아빠, 아빠― 하고는 잠꼬대 비슷한 소리를 냈다.
“그래, 레아.”
“아빠―.”
“응, 레아.”
“으응―.”
“그래, 레아. 괜찮아.”
수도에서 리버런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터라 줄리앙의 손은 차가웠다. 그날 밤 줄리앙은 몇 시간이고 거기에 앉아 제 손 역시 레아의 이마처럼 따뜻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레아의 이마를 짚어 주었다.
새벽이 다가오고, 끙끙거리는 소리마저 줄어들 때쯤에 그는 놋쇠 그릇에 걸쳐 있는 수건에 물을 적셔 레아의 이마에 얹어 주고 리버런을 떠났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줄리앙은 다시 여왕 폐하의 궁전에 있었다. 그의 앞에는 이사벨라 리버런의 아름다운 초상화가 놓여 있고 말이다.
시간도 사람처럼 가끔은 제 갈 길을 모르고 방황하는 때가 있었다. 그 방황의 틈에 잠시, 자신이 끼었다 나온 것이라고, 줄리앙은 그 일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리고 시간의 틈 사이에서 벌어진 그 사건은 박제되어 레아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된 것이다.
* * *
‘언젠가 내가 아주 많이 아파서 있는데 무슨 소리가 났어요. 아빠가 내 방에 들어오는 것 같더니 내 침대 머리맡에 앉는 거예요. 자고 있지 않았지만, 눈을 꼭 감고 자는 척을 했지요. 자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아빠가 아셨는지 아님 몰랐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더니 내 이마를 이렇게 손으로 쓰다듬어 주시는 거예요. 한참을요. 어느 틈에 잠에 들었는데, 깨고 나니 아빠는 없었어요. 그 후로도 감기에 걸릴 때마다 아빠가 또 오셔서 그렇게 해 주시길 바라면서 잠에 들었어요. 하지만 그런 일은 다시는 생기지 않았어요. 사실 아빠가 그럴 분이 아니시거든요.’
‘꿈을 꾼 건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걸요. 아직도 그때 그 일이 생각나요. 왜 그때 그렇게 다정하게 제 이마를 짚어 주셨을까요? 그래서 아직도 아빠를 완전히 미워할 수 없어요. 모든 기억이 다 나쁜 기억일 뿐인데도, 그 일 하나 때문에요. 우습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