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1. 전문가 (45/48)

에필로그 1. 전문가

“그래서 싸우셨다고요?”

“안 싸우고 어떻게 배기겠소? 그 여자가 내게 그렇게 구는데. 우리는 성격이 너무 달라요. 그 여자는 아주 내 피를 말리는 여자라오.”

우악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사벨라와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제 부인을 저렇게 욕하는 남자라니, 하고 혀를 차고 있는데 갑자기 저택 전체에 어린애처럼 엉엉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아, 지금 저 남자 우는 거야?”

“언니! 남의 이야기를 엿들으면 못써!”

엘리자베스가 속삭이듯 묻자, 이사벨라가 옆에서 엘리자베스를 책망했다.

“얘는, 이게 어디 엿듣는 거니? 그냥 들리니까 듣는 거지.”

엘리자베스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젯밤 줄리앙을 찾아온 방문자는 목소리가 커도 너무 컸다. 줄리앙의 집무실 안에서 나누는 대화가 1층 응접실까지 이렇게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으니 말이다. 세 자매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레아는 그저 오랜만에 레날의 영지를 방문한 언니들이 반가울 따름이었다.

“저 사람도 상담을 받겠다고 온 거야?”

웃음소리가 잦아들자(신기하게도 그에 따라 남자의 울음소리도 잦아들었다.) 이사벨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구나. 줄리앙이 수도 근처에서 부부상담 전문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게 말이야. 작정하고 시작한 것은 아닌데…….”

정말로 작정하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몇 번의 생을 반복한 것인지 이제는 꼽아 보기도 귀찮을 정도였지만 줄리앙은 여전히 레아와 함께하는 1분 1초를 귀하게 여겼다. 레아 역시 세상에서 줄리앙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줄리앙의 죽음과 그에 따른 부재를 한 번 경험해 본 후부터는 더 그랬다.

둘이 함께 있다고 해서 모든 걸 다 함께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서 따로 제 일을 했다. 줄리앙이 업무를 보고 있으면 레아는 글을 썼고, 나란히 안락의자에 앉아 서로 다른 책을 읽기도 했다. 레아가 정원을 가꾸고 있으면 줄리앙은 말을 몰았다. 그러다가도 둘 중 누군가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 언제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다.

“보고 싶었어.”

줄리앙이 말했다.

“보고 싶긴. 아침에 봤잖아. 정원일 하러 온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레아는 핀잔하듯 툴툴거리며 말하면서도 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그래도 보고 싶었어.”

줄리앙은 그렇게 말하고는 제 왼쪽 가슴팍과 레아의 왼쪽 심장을 맞대어 꼭 안아 주고는 다시 제 할 일을 하러 가는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사람이 많은 자리를 즐기는 취미는 없었기에 레날 공작 부부는 사교계 출입이 잦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왕이 작정하고 여는 궁정 무도회에 불참하기에는 레날의 영지는 수도와 너무도 가까웠다.

그날도 어쩔 수 없이 궁정 무도회에 가게 된 날이었다. 남자들 사이에서 제 부인에 대한 크고 작은 험담이 이어졌다.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생기는 사소한 다툼, 성격 차이가 화제였다. 줄리앙은 한 귀로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눈으로는 레아의 행방만을 좇았다. 저 멀리서 귀부인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신이 나서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는 레아 레날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자니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디에 그렇게 정신이 팔리셨나요, 레날 공작님?”

“네? 아, 저기…….”

고갯짓으로 레아를 가리키며 줄리앙이 씩 웃자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이 모두 얼어붙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되셨소?”

한 백작이 물었다.

“글쎄요. 십 년은 넘었지요.”

줄리앙의 대답에 이번에는 모두 경악스럽단 표정을 지었다.

“결혼한 지 십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바깥에 나와서도 부인 자취만 쫓으면서 그런 표정을 짓는다고? 줄리앙,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닌가?”

옆자리의 공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줄리앙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들에게 무얼 더 말한단 말인가. 줄리앙은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줄리앙에게 물을 것이 많은 듯했다. 그들은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가? 사랑이 그렇게 유지되는 것이?”

“비결은 무슨 비결이야. 레날 공작부인님을 보라고. 자태가 저렇게 고우니 저러는 것이지.”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을 단 포리안느 후작이 그렇게 말했을 때 줄리앙이 반박했다.

“그러는 포리안느 후작부인께서는 남국 최고의 미녀라 불리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직도 저렇게 아름다우신걸요.”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포리안느 후작도 다른 남자들의 부인도 모두 저마다의 매력을 갖춘 아름다운 귀부인들이었다. 레아 레날 공작부인이 남달리 빼어난 미녀이긴 했지만 레날 공작 부부의 사이가 좋은 것이 모두 그 덕이라고 하기에는 모두들 꽤나 아름다운 귀부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엣헴, 하고 헛기침만 하며 제 콧수염만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니 제 부인의 미모가 뭇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이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아무렴, 요상한 콧수염 달린 포리안느 후작과 세기의 미인이라 불리던 후작부인의 열애사 역시 10여 년 전에는 궁정을 달구던 커다란 스캔들이었다. 그런데 대체 그 사랑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포리안느 후작이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듯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공작님 부부께서는 다투지도 않으십니까? 처음에야 저희도 사이가 좋았지요. 그런데 결혼해서 함께 살다 보니 이거야 원, 사사건건 다툴 일이 이렇게 많아서야. 사이가 좋을라치면 싸우고, 정이 붙을라치면 다시 싸우니 사랑할 새도 없습디다. 이제는 저 여자 얼굴만 봐도 화만 치밉니다.”

“글쎄요. 저희는 통 싸우지를 않아서요.”

“싸우질 않으신다고요?”

“네, 부부 사이에 다툴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저 다 이해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귀담아 잘 듣고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을요.”

“성격이 잘 맞으시나 보오.”

“성격이야…….”

줄리앙은 새삼스럽게 레아와 자신의 성격이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을 이었다.

“성격은 참, 이렇게 만나기도 힘들다 싶게 다른 부분이 많소. 하지만 그래도 맞춰 나가는 것이 사랑 아니겠습니까?”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남자들이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줄리앙 역시도 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꼴이 조금 우습긴 했다. 처음부터 그럴 수 있었던 양 말하는 꼴이 말이다. 첫 생, 첫 결혼에서 레날 부부가 얼마나 많이 싸웠는지를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이 모두 결혼 생활에 크고 작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게,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그럼 어떻게 그렇게 되신 겁니까? 무슨 종교라도 찾으셨소?”

다시 한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저마다 입을 열어 이것저것을 물었다. 무도회가 무르익도록 줄리앙은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 하고 그들에게 붙들려 있었다. 오래 산 줄리앙의 가장 큰 장점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서 집에 가서 레아와 함께 있고 싶긴 했지만, 어쩌다 한번 나온 밤이니 이들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 주는 것도 좋을 듯했다. 그는 열심히도 모인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 주었다. 장장 세 시간여를 그들에게 조언해 주고 나서야 무도회는 끝났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레날 저에는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 * *

“그렇게 된 거야.”

레아가 한숨을 쉬며 사정을 털어놓자 엘리자베스가 심술궂은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지금 네 남편은 심지어 사람들 이야기까지 잘 들어 준다고 자랑하는 거야?”

이사벨라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보탰다.

“그러지 말고 언니, 빨리 말해 봐. 언니도 고민이 있어서 온 거라면서?’

“고민?”

“그래. 벨라 말이 맞아. 우리 부부도 요즘 위기야. 이번 방문은 너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줄리앙 레날 공작님을 보러 온 것이야. 뭘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니? 부부상담가 레날 공작의 명성이 왕국 전체에 퍼진 것을 몰랐단 말야, 레아?”

그랬다. 지난 생에 엘리자베스와 그의 남편 드 라넬 자작은 끝이 별로 좋지 않은 터였다. 이번 생이라고 줄리앙이 그 부부를 구출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레아는 여기까지 찾아온 베스의 행동력에 그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을 느꼈는지 엘리자베스가 다시 한번 익살맞은 표정을 지으며 레아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완벽한 레날 공작님께서는 정말로 단점이 하나도 없으시다고?”

레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전 생애에 베스 언니의 이 도발에 걸려 결국엔 줄리앙이 숨기고 있던 비밀의 방의 열쇠를 찾아내어 그 방에 들어갔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렇게 비밀의 방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줄리앙이 레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럼 두 사람 사이는 지금 또 어땠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레아는 상념을 뒤로하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있어, 단점.”

그러고는 신나서 시작한 이야기가 바로 그날 아침의 일이었다.

꼭 소풍날 아침처럼 레아는 아침 일찍부터 눈이 떠졌다. 평소에는 늘 줄리앙이 먼저 눈을 떴다. 그러고는 레아가 잠에서 깰 때까지 레아의 곁에서 한참을 기다려 주었다. 어떨 땐 기다리기 지루한지 그녀의 뺨에 키스하거나 그녀를 꼭 끌어안아 레아의 아침잠을 깨우기도 했다. 그렇게 일어나서도 한참 동안 침대에서 둘이 노닥거리는 시간은 정말이지 천국 같았다.

“하루 중에 이때가 제일 좋아.”

줄리앙은 그렇게 말했다.

“응, 당신이 아침에 눈 뜨는 거 보는 거.”

그날은 레아가 먼저 눈을 떴고, 줄리앙을 기다리고 있자니 배가 많이 고팠다. 아침을 먼저 먹고 언니들을 맞이할 준비도 해 두고 싶었던 터라 살금살금 방 밖을 나갔다. 그러면서도 줄리앙이 몇 시간 후 눈을 떴다가 제가 옆자리에 없는 걸 알고 놀랄까, 레아는 귀엽게도 편지 한 장을 써 두었다. 편지라고 하기에도 우스운 정도의 짧은 글이었다.

거기에는 삐뚤빼뚤한 그림으로 키가 쭉정이같이 큰 줄리앙과, 동그란 얼굴에 커다란 눈을 한 레아가 그려져 있었다.

[잠꾸러기 줄리앙 레날 공작님께.

당신의 아내 레아 레날은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네요.

먼저 아래로 내려가 아침 식사도 들고 언니들을 맞을 준비도 해야겠어요. 푹 자고 이따 봐요, 내 사랑.]

레아 스스로 생각해도 귀여운 쪽지였다. 그런데 한 시간여 후에 줄리앙의 침실에서는 커다란 울부짖음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레아!”

레아는 1층에 내려와 있다가 한달음에 줄리앙의 곁에 달려갔다.

“무슨 일이야, 줄리앙?”

줄리앙은 침대 옆에 주저앉은 채 레아를 끌어안았다.

“편지를 남기고 가면 어떡해?”

“왜? 편지가 뭐?”

레아는 당황했다. 자신의 쪽지를 보고 줄리앙이 기분 좋게 아침을 시작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편지를 남기고 사라진 줄 알았잖아.”

“내가 편지를 남기고 사라져?”

“그래,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맡에 편지만 있으니까 너무 무서웠어.”

줄리앙은 정말로 무섭기라도 했다는 듯 레아의 등을 꽉 끌어안으며 그렇게 말했다. 레아는 웃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편지를 읽어는 본 거야?”

“몰라. 보자마자 당신을 불렀는걸.”

너무도 사랑스러운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레아는 도리가 없었다.

[아침엔 많이 배고프더라도 몰래 살금살금 나가지는 말 것. 차라리 줄리앙을 깨워서 같이 있다가 나갈 것.]

레아는 제 머릿속 줄리앙 노트에 이렇게 입력해 두었다.

* * *

“그래서 지금 네 남편은 네가 없으면 한시도 못 견디고, 아침엔 꼭 네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 단점이라는 거야?”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렇게 물었다.

“응, 좀 귀찮아.”

해맑게 웃으며 진짜 그것이 단점이라는 듯이 말하는 레아의 눈치 없는 순수함에는 베스도 벨라도 모두 두 손 두 발 들 수밖에 없었다.

벨라는 웃으며 줄리앙의 칭찬을 보태었고 베스는 마지막까지 밉살스럽게 말했다.

“그래, 원래 결핍이 있을수록 사람들은 제 행복을 뽐낸다고 하지. 나도 너희한테야 우리 부부 사이에 불화가 있다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만 늘어놓는단다. 레아, 네 마음속에도 뭔가 한 가지 정도는 불안한 요소가 있겠지.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뭐, 흥.”

“언니는 뭐 그런 말을 해. 정말 성격이 못됐다니까.”

레아 대신 벨라가 먼저 발끈해서 베스를 마구 타박했기에 레아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자꾸 남았다.

[결핍이 있을수록 행복을 뽐낸다.]

이상했다. 레아와 줄리앙 사이에 결핍이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상대를 잃고 혼자 지내는 시간을 겪었다. 끔찍할 만큼 커다란 결핍이었다. 하지만 모두 이미 지나간 일이다. 기적처럼 다시 서로의 곁에 서 있다. 두 사람 사이에 베스 언니의 미운 말처럼 ‘결핍’ 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레아의 마음은 계속 찜찜했다.

‘내가 행복을 과장해서 숨길 만한 불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와서도 레아는 계속해서 그 생각만 하고 있느라 줄리앙이 털어놓는 오늘의 부부상담 이야기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된 거야. 다행이지?”

“으응? 응. 그러네.”

“그래서 말인데, 우리도 한번 해 볼까?”

줄리앙이 그렇게 물었지만 앞 이야기를 모두 놓친 터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딴생각을 하느라 하나도 못 들었으니 뭘 하자는 건지 다시 말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레아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번 해 보자.”

“그래, 그럼 당신부터 말해 봐.”

줄리앙이 그렇게 말했다.

“응? 어, 아니야. 당신부터 말해 봐.”

우물쭈물하는 레아의 얼굴을 보고 줄리앙은 웃음을 터뜨렸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꼴이 안 봐도 뻔했다. 또 딴생각을 하고 있느라 줄리앙의 이야기를 놓친 것이다. 어디서부터 놓친 것인지 몰랐지만 줄리앙은 제가 이야기하는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귀여운 아내를 너그러이 용서하고 모른 척 다시 말해 주기로 했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 혹시라도 서로 불만인 게 있으면 일주일에 한 번씩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방법을 해 보기로 한 거지? 오늘 우리 집에 왔던 로니에가 그렇게 해 보기로 한 것처럼? 그렇지, 레아?”

“응, 응. 당신부터 말해 봐.”

“음, 글쎄. 나는 이번 주는 없어. 자, 이제 당신 차례야.”

줄리앙이 바통을 레아에게 넘겼다. 레아는 다시 한번 레아와 줄리앙 사이에 어떤 결핍이 있어 이렇게 찜찜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상하게 마음 한편이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줄리앙에게 특별히 불만을 품은 기억은 나질 않았다.

“나도 이번 주는 없는 것 같아.”

“그래? 그럼 다음 주 이 시간에.”

줄리앙은 장난스럽게 그렇게 말하며 불을 끄고 부부 침대에 누웠다. 언제나처럼 등을 맞대고 레날 부부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다시 평화로운 아침이 왔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랬다. 레날 저택 안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레아는 언제나처럼 라벤더 정원에 가 있었다. 그러는 동안 줄리앙은 또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터였다. 어떨 땐 집무실에서 집무를 보기도 했고, 어떨 땐 말을 몰고 있기도 했으며, 어떨 땐 서신을 정리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라벤더 정원에 있는 내내 단 한 번도 레아를 부르지 않았다. 정원에 앉아 한참 책을 읽다 레아는 아주 자연스럽게 줄리앙을 찾아 나섰다.

계단을 오르고 침실을 지나 작은 방의 문을 열었다. 아주 작고 두터운 창으로 조그마한 햇살 한 줌이 새어 나오는 어둡고 천장 높은 방에서 담비 털을 엮어 짠 초록색과 파란색이 섞인 숄을 카펫 삼아 주저앉아 줄리앙이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가 레아의 인기척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레아!”

그 순간 레아는 깨달았다. 둘 사이에 있는 결핍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랬다. 줄리앙은 너무도 자주 이 방 안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레아가 생각하는 두 사람 사이의 결핍이었으며, 레아가 베스와 벨라에게 털어놓아야 할 줄리앙의 단점이었다.

레아는 울컥, 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참았다. 다음 주, 다음 주에 다시 줄리앙이 한 주의 불만을 말해 보라고 하면 그때 조곤조곤 천천히 말하면 되었다. 하지만 어디 레아 레날이 그런 여자던가. 성격이 급하고 경솔한 것은 생을 반복해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제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것도 그랬다. 결국 채 저녁이 되기 전에 줄리앙이 먼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비밀의 방을 레아가 아예 이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줄리앙이 죽었을 때에 레아도 가끔 그곳에 갔었다. 그곳에 보석함을 하나 두고, 거기에다 줄리앙의 편지며 선물들을 모아 두었었다. 줄리앙이 모아 둔 다른 물건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비밀의 방에서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일을 줄리앙에게 듣기도 했다. 하지만 레아에게 그곳은 일종의 저장고 같은 곳일 뿐이었다. 반복되는 삶이 이미 끝난 지금은 아무 의미 없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줄리앙은 그 으스스한 방을 아주 아꼈다.

“비밀의 방, 없애면 안 돼?”

레아가 그렇게 말하자 예상대로 줄리앙은 아주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그렇듯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라고 바로 말하지 않았다.

“왜 없애고 싶어?”

줄리앙이 조심스럽게 그렇게 물었다.

“너무 자주 그곳에 있는 것 같아. 너무 자주 거기서 이것저것을 살펴보고.”

“그렇게 자주 있는 것 같다고는 생각 못 했는데. 그래, 그럼 이제 줄일게. 아니면 당신도 같이 있자.”

“거기서 다른 여자 생각하잖아.”

레아가 입을 삐죽이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줄리앙은 그만, 심각했던 분위기를 와장창 깨는 너털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여자?”

“그래, 딴생각하고 있는 게 다 보이지. 그 여자는 어떻게 생겼대?”

“꼭 당신같이 얼굴이 동그랗고 당신같이 뺨이 발그레하고 당신같이 입술이 뾰족하고 도톰하지.”

“내 입술이 어디가 뾰족해?”

레아가 그렇게 말하자 줄리앙이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쓱, 거울을 들이밀었다. 그 거울 속의 레아 얼굴은 정말로 입술이 댓 발은 나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웃지 않고 한숨만 푹 쉬는 레아의 볼을 어루만지며 줄리앙이 조용히 물었다.

“레아, 내가 비밀의 방에서 다른 레아를 생각하는 게 싫어?”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줄리앙이 만나고, 사랑하고, 살아왔던 모든 레아는 자신이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만 없을 뿐이었다. 줄리앙 역시도 레아가 기억하는 첫 번째, 두 번째 생, 그리고 두 사람이 결혼해서 살아갔던 세 번째 생까지 모조리 다 잊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 사이에는 기억의 편차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둘 모두 서로만을 사랑해 왔다. 그런데도 레아는 그 비밀의 방에서 줄리앙이 자신이 모르는 추억 속에 빠져 있는 것이 괜히 속상했다. 레아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이런 마음을 줄리앙이 어떻게 이해해 줄 수 있겠는가?

“이해해.”

줄리앙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레아는 너무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줄리앙은 딸꾹질이 커다란 병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떨면서 물을 가져다주고, 우유를 데워다 주고, 다시 깜빡하고 안 가져왔다며 우유에 넣을 시럽을 가지러 갔다 오는 통에 이야기는 잠시 중단되었다.

잠시 후, 안정을 되찾은 레아의 옆에서 줄리앙은 그녀의 무릎 위로 제가 깔고 있던 숄을 덮어 주며 말했다.

“내가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당신을 걱정하느라 호들갑을 떠는 사람인 건 바꿀 수 없을 거야, 레아.”

“알아.”

레아가 말했다.

“나랑 당신이 모르는 당신 사이에 많은 추억이 있는 것도 바꿀 수 없고.”

“그것도 알아. 그리고 나도 있어.”

“그래, 나도 그게 가끔은 궁금하고 질투 나.”

“다 얘기해 줬잖아.”

레아가 책으로까지 써서 모든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준 것을 생각하며 줄리앙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레아. 다 얘기해 줬어. 나도 다는 기억나질 않지만 당신에게 얘기해 줬고.”

“응, 알아. 줄리앙. 그래도 내가 모르는 게 많잖아. 가끔 당신이 여기 한참 있는 걸 보면 조금 속상해. 내가 모르는 당신의 시간들이 궁금하기도 하고.”

“당신이 모르는 내 시간들은 레아, 당신으로만 가득 차 있었어. 지금 내가 제일 많이 시간을 보내는 곳은 비밀의 방도, 서재도, 집무실도 아닌 당신 곁이잖아.”

“아냐, 서재야.”

레아가 툴툴대며 반박했다.

“그야 레아 당신이 늘 서재에 있으니 서재가 당신 곁이 되니까 그러는 거고.”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그러고 나서 줄리앙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뭐부터 시작해 볼까. 오늘은 이 파란색 숄 얘기를 해 줄까?”

“파란색이랑 초록색이랑 담비털이 섞인 숄이야, 줄리앙.”

“묘사에 까다로운 것을 보니 내 아내가 맞군그래. 그래, 이 숄은 말야. 당신이 100번째 삶에―.”

줄리앙의 이야기는 무엇 하나 슬프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언제나 레아가 죽으면서 끝났기 때문이다. 레아가 죽고 나서 버리지 못하고 이 방 한편에 둔 여러 가지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 역시 이제는 레날 부부의 하루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슬픈 이야기였지만 그 속엔 언제나 행복이 있었다. 결혼기념일에 레아가 줄리앙에게 준 선물들, 레아를 그리기 위해 줄리앙이 고군분투했던 흔적이 담긴 스케치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서신, 줄리앙에게는 소중하기만 했던 레아의 모든 흔적들, 하나하나 들어 나갈 때마다 레아 역시 줄리앙처럼 비밀의 방을 사랑하게 되었다.

며칠, 몇 주, 몇 달이 지나 이윽고 비밀의 방의 물건들에 대한 줄리앙의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났을 때 이미 비밀의 방은 줄리앙 혼자만의 추억으로 가득한 방이 아니었다. 파란색과 초록색이 섞인 데다 담비 털을 함께 엮어 아주 따뜻하고 오래된 숄을 덮고 두 사람이 끝없는 담소를 나눈 공간이었다. 줄리앙의 인생에 레아가 결핍되었던 모든 순간 동안, 그가 그 결핍을 채우려 담아 둔 모든 행복한 물건들로 가득한, 그 물건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로 넘쳐나는 곳이었다. 둘만의 결핍 없는 방에서 레아가 말했다.

“있잖아. 언젠가 우리도 죽겠지.”

“그래. 늙어서 머리가 새하얘지고.”

“나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귀여운 할머니가 될 거야?”

“응.”

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줄리앙이 웃으며 그래, 귀여운 할머니 하고 말을 이어받았다.

“그렇게 늙고 나서 언젠가 죽는다면 우리, 이 방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같이 앉아서.”

“허리가 꼬부라져서 이렇게 바닥에 앉으면 힘들 수도 있어.”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두 사람은 다시 얼굴을 마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우스운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좋았다. 비밀의 방으로 들어오는 작은 햇살, 두 사람의 무릎을 덮고 있는 숄, 두 사람의 모든 과거가 들어 있는 지워지지 않는 흑판, 지금 나누는 이야기들, 모든 것들이 말이다. 그래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죽자.”

“그래, 그렇게 죽고, 지금은 일단 사랑부터 하자.”

벽에 기대어 앉은 채로 줄리앙이 레아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레아의 작은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레아는 늘 이 순간이 좋았다. 가벼운 키스 안에 가득 담긴 사랑. 언젠가는 둘 모두 늙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다시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레아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과 기억하는 결핍들 모두를 통틀어 줄리앙만을 사랑했고 줄리앙 역시 그랬다. 정말이지 꽉 채워진 인생이었다.

“행복해.”

레아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줄리앙이 조용히 나도, 하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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