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 Both sides now (43/48)

43. Both sides now

커다란 전나무로 만들어진 탁자 네 개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비밀의 방에 있던 레아의 초상화는 막 집무실로 옮겨져 탁자 위에서 줄리앙을 바라보고 있다. 잘 그린 그림은 놀랍도록 실물과 비슷하지만 그래도 레아의 사랑스러움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슴푸레한 촛대에서 나오는 불이 상앗빛으로 칠한 레아의 환한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어 내며 일렁였다.

어느덧 저택 전체가 깜깜해졌다. 양초 하나가 다 달아 불이 꺼질 때까지 줄리앙은 잠자리에 들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카리안이 던진 한 마디를 줄곧 곱씹고 있는 중이었다. 늙은 마법사는 단단한 분홍빛 복숭아를 제 손에 들어 줄리앙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 복숭아를 버리시오.”

“무슨 뜻이오.”

“당신, 이 생에서 끝내고 싶다 하지 않았소?”

“그렇소.”

“이제 아무런 미련이 없단 말은 사실이오?”

미련이 없을 수야 있겠는가. 하지만 어떤 커다란 미련도 이 고통 속에 그를 계속해서 붙잡아 둘 만큼 큰 힘은 없었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수백 번이나 봐 온 그가 아니던가. 줄리앙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붓으로 단번에 그려 넣은 듯 강한 선을 한 그의 턱이 희미하게 떨렸다. 입을 꾹 다물어 인상 짓는 대신 그는 습관처럼 웃어 보였다.

“정말이오. 그저 나는 모든 것을 끝내고 싶소, 오래된 벗이여. 단 하루도 더 살고 싶지 않소.”

“그럼 이 복숭아를 먹지 마시오. 이 복숭아가 회귀의 열쇠요.”

“장난하시오?”

“오래 사는 복숭아라 하지 않았소? 마법이란 게 그런 법이지. 인간이 만들어 낸 술수가 어찌 삶을 영원히 연장할 수 있겠소? 그릇된 방법으로 영원히 살게 할 뿐이오. 이 복숭아를 없애시오. 알아들었소?”

“말이 되질 않소. 카리안. 당신 기억에는 없겠으나 우리가 함께 이 말도 안 되는 굴레를 벗어던지려 애써 온 세월이 몇 년이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다 그냥 복숭아를 먹은 탓이라고? 그럼 내가 내 스스로―.”

줄리앙은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목이 메었다. 카리안은 가만히 그가 다시 말을 이을 때까지 기다렸다. 줄리앙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지만 낮게 깔린 목소리는 여전히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소. 눈을 뜨자마자 바로. 몇 번씩이나 그랬소. 복숭아는커녕 물 한잔 입에 대지 않았소. 그런데 그 생에서도 나는 또다시 깨어났소. 그것이 모두 복숭아 때문이라고? 내가 복숭아 때문에 계속 살고 있었다고? 그걸 알아내기 위해 몇십 년을 공부하고 수천 권의 책을 읽고 늙은 당신을 붙들고 매일 밤을 새워 가며 떠들었는데― 그러는 동안 레아는 또 수십 번을 죽었는데―.”

“모르겠소. 나도. 당신이 자살한 후 다시 살아났을 때의 일은 말이오. 다만 그 생에는 레아 리버런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복숭아를 먹지 않아도 살아난 이유도, 복숭아를 먹지 않고 살아났는데 레아 리버런이 그곳에는 없던 이유도 나로선 아직은 알아낼 방법이 없구려. 이 늙은이가 당신께 할 수 있는 충고는 하나뿐이라오. 젊은 공작이여, 오래 산 이여, 부디 복숭아를 먹지 마시오. 나는 그것에 걸린 마법을 알고 있소. 마법이 걸리게 된 연유도 알고 있소. 이제 당신도 아시잖소. 이제 당신도 그만 살고 싶지 않소.”

줄리앙은 대답이 없었다. 영원히 계속될 듯한 정적이 흘렀다. 카리안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은 후에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마법사의 나이 든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을 때 그 입에서 작고 낮게, 알겠다는 말이 나온 듯도 하다. 마법사는 더는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만찬은 끝났다.

사람의 마음에는 참으로 간사한 부분이 있었다. 줄리앙은 다시 한번 레아와의 첫 번째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도 얻고 싶은 그녀의 마음이었는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는커녕 매번 싸우고 울리기만 했었다. 단 한 번만 더 얼굴을 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서자마자 다시 레아를 보고 싶었다. 레아를 다시는 못 본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더는 바랄 게 없다는 말은 모두 다 거짓말이었다. 인간의 욕심이란 정말이지 끝이 없었다.

그가 두 번 생각할 새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면서 이렇게 고민하는 까닭은 당연히 레아였다.

“오래 사는 복숭아라…….”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이 복숭아를 던져 버리고 이 생을 포기한다면, 반복되는 고통에서 벗어나 제대로 살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레아, 레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레아는 또 죽을 것이다. 레아에게 이 복숭아를 주면 어떨까.

누구보다 삶에 미련이 많은 것이 바로 레아였다.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죽고 싶지 않다고 하던 것이 스무 살의 레아였다. 단 한 번도 길게 살아 제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레아였다. 레아라면, 반복되는 삶을 자신보다 훨씬 더 잘 살아 낼 수 있을 것이었다.

레아가 있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이 수백 번, 수천 번 반복된다고 해도 세상은 전보다 훨씬 아름다워지면 아름다워졌지 추악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침이 되었을 때 줄리앙은 다시 여느 때처럼 제가 할 일을 시작했다. 변방을 정비하러 다녀왔다. 레아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왕국은 평화로워야만 했다. 그동안 집사에게 저택의 개조를 맡겼다. 왕국 전체에서 구할 수 있는 떡갈나무란 떡갈나무는 모두 레날의 영지로 들여왔다. 디귿자 모양으로 된 레날의 저택 한가운데에 라벤더 밭이 일구어졌다. 호두나무를 옮겨 심었다. 비밀의 방의 문을 닫았다. 레아가 다시 흑판 위의 글씨를 볼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부서진 천장을 튼튼히 했다. 레아가 사고를 당했던 마구간이 폐쇄되었다. 말안장을 갈았다. 마차를 모두 정비했다. 타주 강의 다리가 튼튼하게 다시 세워졌다. 수도의 도서관 하나를 옮겨 온 정도의 규모의 서재가 만들어졌다. 레아가 좋아했던 노란색으로 내벽이 칠해졌다. 남쪽에서 가져온 쪽빛 커튼을 달았다. 집무실에 있던 레아의 초상화를 비밀의 방에 넣었다. 모든 일을 다 마치고 리버런 섬으로 갈 준비가 되었을 때서야 줄리앙은 마지막으로 옛 친구를 다시 찾았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소. 레날 공작.”

마법사는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고 주름진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오늘이 지나면 아마 한동안 못 볼 것이라 왔소.”

“이번이 당신에게 마지막 생일 텐데 더 하고 싶은 것이 많아 바쁘겠지.”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시오?”

“글쎄. 나보다 배는 더 살았겠다고 생각했지.”

줄리앙이 피식 웃었다. 그 가벼운 웃음 속에 몇백 년의 세월이 담겨 있을지 마법사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래, 하고 싶은 것이 많아 바쁜 것이 아니라면 그럼 어디 먼 길이라도 가시오?”

“내 아내에게 복숭아를 주러 가오.”

“대체 왜―.”

줄리앙이 카리안의 말을 잘랐다.

“그녀에게 복숭아를 먹이고, 언제나처럼 다시 청혼할 셈이오. 욕심 같소? 어쩔 수 없소. 나는 그녀를 영원히 살게 하고 싶다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또다시 단명할 것 아니겠소. 이것이 내 마지막 고통이라고, 참으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마지막 한 번은 오래도록 그녀와 함께하고 싶소. 당신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왔소. 고맙소. 내게 복숭아의 비밀을 알려 주어서.”

카리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치고 늙은 몸이 뒤뚱거리며 줄리앙의 앞으로 한 발 더 오더니 쭈글쭈글한 손이 그의 망토 깃을 붙잡았다. 카리안은 그 깃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절대 안 될 일이오. 공작, 부디 그러지 말아 주오.”

* * *

“저를 위해 뭘 하나 만들어 주셔야겠어요.”

여왕의 여동생이자, 레날 공작가의 안주인, 미셸 아르디가 젊은 카리안 알드망을 찾아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오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지독히도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 사무치게 외로워 보이는 그 눈. 복숭아밭으로 자신을 데려가, 키가 낮은 나무들 아래서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하고는 하얀 손가락을 파들거리며 제게 복숭아 하나를 따서 내밀었던 그 귀부인의 자태. 오랜만에 그 모습을 떠올리며 카리안은 눈을 감았다.

* * *

“자네 어머니가 나를 찾아온 것은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지. 그보다 몇 년 전, 사랑의 묘약이라는 것이 유행했을 때 한번 그것을 얻으러 내 방을 방문한 일이 있어. 선대 공작님과 혼인하기 얼마 전의 일이었네. 어떻게 해서 공작님께 그 묘약을 먹였는지, 혹은 먹이는 데에 실패했는지, 그건 나도 알 수 없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지. 그 묘약이 듣지 않았다는 것. 선대 공작님께는 이미 무척이나 사랑하는 다른 여자가 있었거든. 자네에게 레아 리버런이라는 그 공녀님이 그런 것처럼 말이야. 공작부인께서도 그걸 알았지. 억지로 시킨 정략결혼이었어. 그러나 공작부인은 선대 공작에게 첫눈에 반했네. 그럼 뭐하는가. 묘약을 써 봤자 이미 들어찬 사랑을 없앨 수는 없는 법이었지.”

“내 아버지가 완전히 무정한 사람은 아니었군.”

줄리앙의 말에 카리안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무정은커녕 너무 정이 많아 탈이었지. 그 정이 자네 어머니에게 안 간 것이 문제였다네. 공작부인께서 두 번째로 나를 찾아왔을 때, 그녀는 날 복숭아밭으로 이끌고 갔지.”

“아버지는 복숭아를 유독 좋아하셨소.”

“그래. 그때도 이미 레날의 영지는 복숭아로 유명했어. 유월에 나는 붉은 복숭아는 유난히 맛이 좋았지. 선대 공작님께서 그것을 유달리 좋아하셨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네. 복숭아 과수원이 있는 영지를 소유한 영주가 공작님의 환심을 크게 사고 있다는 것도 말이야. 그래서 복숭아였어. 복숭아라면 까다로운 공작님이 별 의심 없이 한입에 드실 만한 것이었으니. 공작부인님께서는 말씀하셨지. 복숭아를 먹은 사람이 영원히 살게 해 달라고. 오래도록 살아남아, 살고 살고 또 살아도 여생이 남아 있다면 언젠가는 옛사랑을 잊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네. 참 지독한 사랑이었어. 이미 집착에 가까워져 있었지. 공작부인님의 두 번째 부탁이 그 증거였네.”

“두 번째 부탁은 무엇이오?”

“복숭아를 먹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어. 일종의 흑마법이었던 셈이네.”

[복숭아를 먹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반드시 죽어야 한다.]

카리안 알드망의 말을 곱씹고 곱씹어 그 뜻을 확인하고 나서야 줄리앙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대로 하셨소? 내 어머니의 청을 들어주신 것이오?”

목소리가 낮게 떨리고 있었다. 카리안은 저를 노려보는 줄리앙의 검은 눈동자를 가만히 받아 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지 않았어.”

줄리앙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듯 카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했겠지. 우스운 일은 공작님께서는 그 복숭아를 맛보러 레날의 영지로 오시기도 전에 전쟁터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네. 공작부인이 복숭아밭을 소유한 영주를 거의 몰락 직전까지 빠지게 한 것으로 봐서 나 혼자 짐작할 따름이네. 그 흑마법이 얼마간 성공을 거둔 모양이라고 말이야. 진정 몰랐네. 그 복숭아가 만들어졌고, 살아남았고, 그 아들인 자네에게 갔다는 사실은.”

“그거 아시오, 카리안? 당신은 언제나 같은 이유로 죽는다오.”

“……내게 그것을 말해 복수할 셈이오?”

눈가가 붉어지도록 저를 노려보는 줄리앙 레날 공작을 향해 마법사는 쓸쓸히 웃어 보였다. 줄리앙은 마법사를 노려보는 눈에 힘을 풀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이제 보니 그 눈은 마법사를 노려보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로 분출해야 할지 모르는 회한과 아픔이 눈물로 흘러나올까 애써 참으며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니, 그럴 생각은 없소. 내가 당신에게 복수할 필요가 있겠소.”

“말해 주어도 좋소. 내 나이에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를 알아도 상관없지.”

줄리앙에게는 이미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모두 같은 이유로 죽었어. 같은 이유로 살았고. 하지만 내 아내는 언제나 다른 이유로 죽었지. 이 방법을 피하면 저 방법으로.”

“그것이 흑마법의 힘이라오. 어떻게든 약속한 것을 들어주지. 있는 힘을 다해서 말이오.”

마법사는 다시 무력하게 웃어 보였다. 이미 지나간 고통에 대해 그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힘없이 읊조릴 뿐이었다. 그 복숭아를 가지고 가지 말라고, 그 복숭아를 이제라도 버려 버리라고 말이다.

대화가 끝나고 줄리앙은 잡화점 앞에 둔 제 말도 잊은 채, 그대로 터벅터벅 저택까지 돌아왔다. 자신에게 복숭아를 진상하러 온 말라비틀어진 사나이의 축 처진 어깨, 선한 눈동자, 부들부들 떨리는 손, 그 손이 가엽고 측은하여 매번, 탐스러운 복숭아를 칭찬하며 한입씩 베어 물었었다. 줄리앙이 복숭아를 먹었기에 레아는 언제나 죽었다. 아마 줄리앙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레아는 죽지 않았을 것이었다. 다 지난 일이었다. 자신을 미친 듯이 괴롭게 한 모든 일들이 단 한 여인의 애증, 그 애증을 한순간도 들어주지 못한 어느 사내의 무정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것을 이제 와서 탓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사실 모든 이를 탓하고 싶었다. 어머니를 탓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탓하고 싶었다. 선대 공작이 사랑하던 복숭아나무가 아까워 베지 못한 이를 탓하고 싶었다. 그 복숭아의 가장 높은 가지에서 나는 복숭아를 유월 첫날부터 따 가지고 와서 저에게 복숭아를 바친 이를, 그리고 그 마음이 애처로워 매번 아낌없이 복숭아를 먹은 자신을, 탓하며 꿇어앉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누구를 탓해도 지난 세월이 다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 그저 지금부터는 그 복숭아를 먹지 않으면 될 일이다.

아침 해가 밝으면 바로 복숭아 과수원에 직접 찾아갈 것이다. 그 나무를 줄리앙이 직접 제 손으로 베고, 주인에게는 심심한 위로금을 전할 것이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사정을 어떻게든 둘러대고, 그 밭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나는 복숭아를 달라고 하여 마음을 달래 줄 것이었다. 이제 모두 끝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줄리앙은 그날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전나무 탁자 위의 외로운 촛대는 그날 밤도 쉼 없이 불을 밝혔다.

아침이 되었을 때 그의 말은 예정대로 복숭아 과수원을 향했다. 그러나 나무를 베는 대신 높이 난 그 복숭아를 보았다.

왕궁을 거쳐, 여왕의 허락을 받은 후 그가 다시 과수원으로 향한 날은 유월 첫날이었다. 그는 그 복숭아를 제 손으로 따고서는 다시 황급히 말을 몰았다. 그의 품에는 커다란 복숭아 한 알이 들어 있었다. 연한 분홍빛이 복숭아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꼭지 가까이는 붉은색이 묘하게 돌았다. 껍질은 손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벗겨질 터였다. 입에 넣으면 바로 사르르 녹을 듯이 몰랑몰랑 달콤한 그 식감을 줄리앙은 익히 알고 있었다.

* * *

이제 회상은 레아의 몫이었다. 그녀는 이미 아득해진 두 생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리버런 섬에도 복숭아밭이 있습니까?”

오랜 세월이 지나, 드디어 다시 레아 리버런 앞에 선 줄리앙 레날 공작은 그렇게 물었었다.

“아뇨. 한 번도 맛본 적이 없어요. 레날의 영지에서만 난다는 유월의 복숭아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지요.”

레아 리버런은 이렇게 대답했다.

“부드러워서 칼로는 손질할 수 없습니다. 껍질을 손으로 직접 까먹어야 합니다.”

줄리앙 레날은 정원으로 나갔다. 분수대 근처의 조각상에서 졸졸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고, 줄리앙은 결벽증적으로 공들여 손을 씻었다. 그러고는 그 귀공자 같은 하얀 손에 과즙을 묻혀 가며 복숭아를 손수 까 주었다.

“손이 더러워져요.”

“괜찮습니다.”

과즙이 뚝뚝 흐르고, 손이 끈적끈적해지는데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6월 한낮의 응접실은 서늘했다. 그의 하얗고 서늘한 손이 복숭아 껍질을 열심히 벗겨 레아의 입 안에 직접 넣어 주었다.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무는 순간 그의 긴 손가락이 레아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 레아 리버런은 세 번의 삶을 반복했지만, 언제고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순간을 말이다.

“너무 맛있어요. 달아요.”

그는 싱긋 웃었다. 유월 정오의 햇살처럼 환한 웃음이었다.

“유월의 복숭아를 먹으면 영원히 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벌써 청혼하시는 건가요? 저랑 영원히 살자고요?”

줄리앙 레날 공작은 대답 없이 웃었다. 소년 같은 미소를 바라보며 레아는 저렇게 웃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남은 생애 내내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잠시 동안 그와의 미래를 그려 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날 이후로 그녀의 앞에서 사라졌다. 여름 내내 그와 한번을 마주치지 않았다.

[복숭아를 먹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레아 리버런, 이제 레아 레날이 된 여인은 회상을 잠시 멈추고 눈을 떠서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다정한 빛으로 저를 향하고 있었다. 그 눈 속에는 한가득 빼곡히 레아 자신의 모습만 담겨 있다. 아마 자신의 회푸른 눈도 온전히 그만을 담고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그만을 바라보고 그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세 번의 생을 거쳐 이제야 드디어 그만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왜 내게 복숭아를 주었나요?”

석양이 지기 시작했다. 작은 창으로 내리쬐는 해가 줄리앙의 얼굴에 근사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높은 눈썹 뼈가 깊은 눈가에 음영을 만든 탓에 그의 눈이 어떤 빛을 내고 있는지 레아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레아의 남편은 아마 웃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다정하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었다.

“당신이 언제까지 살지 나로선 알 수 없었으니까.”

레아의 추측처럼 작고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줄리앙은 그렇게 말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레아는 복숭아의 저주 때문에 죽은 것이다. 분명 그랬다. 나무 아래 서 있다가 마른하늘의 날벼락을 맞고 죽은 때에도, 갑자기 무너진 천장 때문에 죽은 때에도 줄리앙은 신 혹은 악마가 공들여 레아를 죽일 방법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죽음은 어떤가. 레아는 줄리앙과 싸웠고, 비에 맞았고, 그러다가 늘 그렇듯 감기에 걸렸고, 약한 체력 때문에 폐렴으로 번져 결국 호흡곤란에 고열로 생을 마감했다. 굳이 누군가 저주를 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줄리앙이 리버런으로 떠나기 전날 밤 전나무 탁자 사이에서 골똘히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는 보지 않아도 외우고 있는 흑판에 적힌 수많은 죽음, 그중 몇몇은 흑마법의 저주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몇몇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 있을 법한 죽음들이었다. 레아의 명이 거기까지여서 그렇게 죽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냥 두면 레아는 줄리앙과 함께 늙어 죽을 때까지 살 수도 있었고, 아니면 운명이 레아에게 정한 대로 스물 남짓 하던 때에 아주 자연스럽고 그럴듯한 이유로 죽을 수도 있었다.

줄리앙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아. 줄리앙, 난 죽고 싶지 않아. 죽으면 행복할 수가 없는데, 행복해지고 싶은데, 난 죽고 싶지 않아.’

레아의 첫 번째 죽음은 수많은 죽음을 반복한 후인 지금도 여전히 줄리앙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죽고 싶지 않다고 중얼거렸었다. 행복해지고 싶다고, 오래 살고 싶다고,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고 하던 레아의 힘없는 목소리, 핏기 없는 얼굴 역시 눈앞에 선했다.

‘레아에게 복숭아를 주어야 한다.’

줄리앙은 생각했다.

[복숭아를 먹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줄리앙은 다시 한번 그 말을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레아가 저를 사랑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줄리앙은 알았다. 그 사랑스러운 여자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줄리앙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든 그와 마법처럼 사랑에 빠졌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다. 한 번쯤은 그렇게 되지 않아도 이해했을 텐데, 정말이지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어김없이 줄리앙을 선택해 왔다. 레아가 사랑하는 사람, 그렇기에 반드시 죽는 사람은 아마 줄리앙이 될 것이었다.

신탁의 명령처럼 열심히 지켜지고 있는 복숭아의 저주를 풀 방법은 없었다.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레아가 겪을 고통이었다. 레아에게 줄리앙이 경험한 그 지독한 고통을 대신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나은 일임을 줄리앙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방법은 정해져 있었다. 줄리앙은 절차를 차근차근 밟기만 하면 되었다.

첫째, 레아에게 복숭아를 먹이고 돌아온다.

둘째, 레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도록 레아와 접촉하지 않는다.

셋째, 레아가 다른 사람과 사랑하고 행복하게 결혼 생활을 하든, 아니면 혼자 살든 뒤에서 지켜본다. 자신이 빠진 인생, 복숭아의 저주가 없는 인생에서 레아가 오래 살 수 있는지, 죽지 않는지를 본다.

괜찮은 방법이었다. 만약 레아의 명이 애초에 짧은 것이라면, 레아는 줄리앙과 살 때 죽었던 이백 몇 가지 방법 중의 하나와 꼭 같은 방법으로 죽을 것이다. 레아의 운명이 허락하는 딱 그 순간까지만 레아는 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괜찮다. 복숭아를 먹였으니 레아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줄리앙이 그랬듯이 레아는 모든 기억을 안고 다시 살아날 것이다.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삶의 굴레를 안은 채라고 해도, 레아는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몇백 년이고 다시 살 수 있다. 그런 레아 곁에서 줄리앙 역시 이 모든 기억을 지닌 채 레아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레아가 이렇게 살아 있구나, 저렇게 늙어 가는구나 하는 것을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레아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렇게 반복되는 삶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줄리앙의 욕심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단명하는 것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욕심, 있는 힘껏 수명을 늘려, 어떻게든 족할 만큼 오래오래 살아남아 행복해지는 레아를 보고 싶은 욕심 말이다.

레아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제 삶에 만족하게 되는 그날까지 줄리앙은 레아의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지켜 줄 것이다.

만약 레아가 이백여 번 죽은 이유가 모두 복숭아의 저주 때문이라면, 이번 생에서 레아는 단명하지 않을 터였다. 줄리앙이 그랬듯이 마흔 살에, 아니면 빌어먹을 흑마법이 원하는 게 언제든 간에 삶을 다 살아 내지 못하고 중간쯤에 다시 삶의 초기로 돌아올 것이었다. 그게 언제든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레아는 꽤나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더 좋았다. 줄리앙은 다시 돌아온 레아와 이번에는 진짜 인생을 살면 되었다.

리버런 섬에 도착한 첫 주, 줄리앙은 레아에게 다가가 복숭아를 건네며 이렇게 물었다.

“리버런 섬에도 복숭아밭이 있습니까?”

“아뇨. 근데 레날의 복숭아는 먹어 보긴 했어요.”

레아의 대답은 줄리앙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먹어 보셨다고요?”

“네. 아주 달고 맛있더군요. 입에서 살살 녹았어요.”

“레날의 복숭아는 레날의 바깥으로는 나가지 않는데, 혹시 제 영토에 오신 적이 있습니까?”

“아뇨. 공작님이 직접 갖다 주셨잖아요.”

“네?”

줄리앙은 잠시 사고 회로가 마비되었다가 몇 초 후에야 겨우 입을 열어 제가 들은 것이 확실한 것인지를 반문했다. 혹시 레아에게 내가 복숭아를 가져다준 이번 삶이 처음이 아니던가? 몰랐다. 만약 자신의 예상대로 레아가 복숭아를 먹고 회귀했다면 그 삶에 대해 줄리앙 자신은 기억 못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

이제야 제 계획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깨달은 줄리앙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럼 어떻게 물어봐야 할 것인가. 레아에게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이번 생이 혹시 몇 번째 생입니까?’라고 물어도 될까. 괜히 혼란만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여러 고민이 뒤섞인 얼굴로 줄리앙이 레아의 얼굴을 바라보자, 레아는 심드렁한 얼굴로 씩 웃으며 대답했다.

“농담이에요. 처음 먹어 봐요. 레날의 복숭아는 부드러워서 칼로는 손질할 수 없다던데, 껍질은 직접 까 주실 거죠?”

농담이라는 말에 잠시 안심했던 가슴은 다시, 레날의 복숭아를 잘 알고 있는 듯한 레아의 말에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어쩌면 이것이 레아에게도 두 번째 삶은 아닐까. 줄리앙의 여물지 못한 심장 속에 작은 희망이 제 싹을 틔웠다. 일단 마음을 진정하고 정원 개수대 근처의 버드나무 그늘에 가서 복숭아를 깨끗이 씻어 껍질을 깠다. 과즙이 손에 묻어 끈적해졌다.

“손이 더러워져요.”

“까 달라고 하셨잖아요.”

툴툴대듯 그렇게 말했지만, 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앞에 아주 오랜만에 레아가 있었다. 탐스러운 하얀 볼, 총기로 빛나는 잿빛 눈, 재기 어린 목소리로 제 말에 대답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까 주는 복숭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즙이 흐르는 것에 끈적해진 손목이 불편하여 줄리앙이 팔을 들자, 레아가 나섰다.

“줘 보세요.”

레아는 아주 능숙하게 줄리앙의 팔을 잡고 소매를 두 번 접어 올려 주더니, 손목뼈를 타고 흐르는 복숭아 과즙을 살짝, 핥아 올렸다. 그리웠던 저 따뜻한 손과, 너무도 익숙한 저 귀여운 혀에 줄리앙은 그럴 순간이 아닌데도 괜히 코끝이 찡해지는 제 자신이 조금 주책맞게 느껴졌다.

“달아요.”

전에 없이 요염한 얼굴을 하고 복숭아 과즙을 핥아 올리는 레아 리버런, 수백 번 넘게 처음으로 만나고, 결혼하고, 수백 번을 잠자리를 하고 수천 번을 키스한 제 아내를 보며 줄리앙은 새삼스럽게 낯이 붉어지는 제 자신이 우스웠다. 이번 삶의 레아는 이상하게도 ‘결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터라 들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매번 같은 장소로 돌아와 언제나와 똑같은 레아 리버런을 만나지만 이 여자는 늘 색달랐으니까. 이번엔 또 무슨 일이 있어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줄리앙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어차피 줄리앙이 해야 할 일은 복숭아를 먹이고 레아의 시야 밖으로 벗어나 천천히 그녀를 지켜보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녀가 앙투안이나 로즈몬드 같은 놈들과 결혼하는 것을 보느니 홀로 살아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그로서는 한결 수월한 일이었다.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결심은 왜 한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줄리앙이 그렇게 묻자 레아는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어차피 공작님은 제게 청혼하려는 맘도 없으시잖아요.”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그렇게 레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번의 인생을 산 이야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행했던 삶의 이야기, 그리고 이제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이야기까지 말이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레아와 시간을 많이 보낼 필요도 없었다. 복숭아만 주고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레아와 만난 터였다. 그녀의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 옆에 있고 싶었던 것이다.

* * *

“당신이 나를 만난 게 벌써 세 번째라는 것은 몰랐지. 한 번 정도는 덜 돌아갔어도 될 뻔했는데.”

줄리앙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세 번째에라도 내가 먼저 말했기에 망정이지, 대체 날 얼마나 반복해서 살게 할 셈이었어요? 제일 중요한 걸 잊으면 어떡해요?”

줄리앙은 고개를 으쓱했다.

“어차피 한 번은 나와 결혼했겠지요. 언젠가는 나와 사랑에 빠졌을 겁니다.”

“내가요?”

“왜요. 아닙니까?”

“매번 복숭아만 주고 쌩하고 가 버리는데 어떻게 사랑에 빠지나요?”

레아가 볼멘소리하자 줄리앙이 레아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언제든 당신은 그랬으니까요. 늘 나를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레아의 볼에 닿은 차가운 입술은 아래로 내려와 촉촉한 입술에 다시 닿았고 오래간만에 제 짝을 찾은 입술들이 달콤하게 얽혀들어 서로를 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레아.”

“뭔가요?”

“당신의 인생에서 나는 죽었습니까?”

레아는 문득 줄리앙에게 몹시 미안해졌다. 수백 번의 생을 거쳐 그녀만을 사랑한 남자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미안했지만, 그녀의 첫 번째 삶에서도 두 번째 삶에서도 줄리앙은 정말이지 복숭아 하나만 달랑 주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 후로 레아는 줄리앙의 소식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다.

“미안해요. 기억이 안 나요. 아, 그런데…….”

“그런데 뭐요?”

“한번은 당신이 나를 도와주었던 적이 있어요. 내 나이가 그때 서른셋, 넷 정도 되었을까요.”

“내가 당신을 도왔다고?”

“가난한 내 옛 남편의 복숭아밭을 거금을 주고 사들인 적이 있었죠. 왜 그런 짓을 했나 궁금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레아가 그렇게 말하고 겸연쩍은 듯이 웃자, 줄리앙은 자신도 기억 못 하는 과거의 자신이 한 일에 뿌듯한 것인지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럼 당신 남편들은 죽었습니까?”

“내 남편들이요? 설마요. 내가 마흔에 돌아왔으니 앞일을 알 수 없지만 가만두었으면 백 살은 살았을걸요.”

골골대며 평생 간다는 말을 기억하며 레아는 앙투안의 허약한 몸과, 못된 성미를 곱씹고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줄리앙은 그런 레아를 보며 웃다 그 웃음기를 다 지우지도 않은 목소리로 걱정 말라고 그들을 다 죽여 주겠다고 말해 레아를 경악시켰다.

“아서요. 그 사람들은 그때도 오래 살았고 아마 이번 생에도 오래 살 거예요. 원래 나쁜 사람일수록 오래 살거든요.”

“그럼 당신 말대로 당신은 그들 중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셈이로군요.”

“그게 내 문제였다니까요. 내 마음을 모르고 아무나와 결혼한 죄를 톡톡히 치른 셈이죠. 줄리앙, 난 복숭아를 먹고 당신과 사랑에 빠져서 당신이 내 앞에서 죽었더라도 후회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니 당신이 복숭아를 먹고 내가 죽었던 그 많은 생에서도 난 아마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을 거예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하고 행복했더라면, 언제 죽어도 후회스러운 삶은 아니에요.”

레아의 말에 줄리앙은 방긋 웃었다. 레아의 수백 번의 삶과 죽음 모두 줄리앙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했다. 레아 자신은 스스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억하고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레아가 한 말은 정말이지 사실이었다.

레아는 언제나 후회 한 점 남지 않을 만한 삶을 살아갔다. 매 삶, 줄리앙은 아낌없이 레아를 사랑했다. 언제 죽을지 모를 레아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을 주어 왔다. 그러나 레아는 언제나 질 수 없다는 듯 줄리앙이 그녀에게 준 것보다도 더 커다란 사랑을 나누어 주었다.

줄리앙이 보기에 레아는 신의 농락과도 같은 삶 속에서도 언제나 제가 원하는 길을 걸어가는 듯 보였다. 그리고 매 삶, 죽는 그 순간까지 늘 행복했다. 복숭아 안에 가둬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당신이 죽는 건 싫어요. 이번 생에 당신이 준 복숭아를 맛볼 새가 미처 없어서 다행이었어요.”

레아가 덧붙인 말에 줄리앙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먹지 않았습니까?”

“그럼요. 그 복숭아, 두 번이나 먹었는데요 뭐. 그날은 당신이랑 정원을 뱅글뱅글 돌며 얘기하느라 바쁜 통에 복숭아를 먹을 새도 없었잖아요. 당신 팔을 핥긴 했지만 그런 것쯤이야 복숭아를 먹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요.”

줄리앙이 방긋 웃으며 안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내가 당신 앞에서 죽을 일은 없겠군요, 내 사랑하는 아내여.”

레아가 놀랐다는 표정으로 줄리앙에게 물었다.

“내가 복숭아를 먹은 줄 알았어요, 그럼?”

“먹은 걸 본 적은 없으니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 알 길이 없었지요.”

“그럼 어쩌려고 나랑 결혼한 거예요?”

“사실은 당신과 결혼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냥 연푸른 드레스를 입은 모습만 한 번 더 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리고 단념하고 다음 생을 기약하려고 했는데, 당신의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바보처럼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이런 도박을 한 거예요? 당신의 목숨을 걸고?”

줄리앙은 근사하게 생긴 그 입꼬리를 한쪽만 위로 올리고는 입을 삐죽이며 레아의 표정을 흉내 내었다.

“그럼 뭐 어떻습니까. 당신이 돌아가서 다시 나를 만나 주면 되는걸요.”

그는 정말 개의치 않는 듯했다. 한두 번 더 불행한 삶을 산들, 서너 번 더 죽은들 그에게는 아무 다를 것이 없다는 태도에서 레아는 다시 한번 그가 살아온 수백 번의 삶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줄리앙과 레아 사이에는 이제 어떤 장애도 없었다. 그들의 결혼식이 수백 번이 넘는 시행착오를 거쳐 드디어 모든 것이 완벽했던 것과 같이 그들의 삶 역시 비로소 모든 면에서 완전해졌다.

레날 공작 부부는 왕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사이가 좋기로 유명했다. 조각 같은 외모의 줄리앙 레날 공작이 사랑스러운 레아 레날 공작부인을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조심조심 다루며 어디고 함께 다닌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언제나 서로 경어를 쓰며 사석에서든 공석에서든 서로를 위하고 다정하게 바라보는 둘을 시기하는 자들도 몇 있었지만, 그래 봤자 레날 공작 가문의 위세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북쪽 끝에 위치하여 고립되어 있던 리버런 공의 영지도 레날 공작과의 혼인으로 수도와의 연결점을 찾았기에 리버런 공은 제 딸의 배우자를 몹시도 아꼈다. 미워하던 아버지가 자신의 배우자를 그렇게 어여삐 여기는 것이 레아는 가끔 우스워 보이기도 했지만, 레아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수많았던 리버런가의 정적들이 레날 가문 덕분에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다. 두 가문의 결합이 너무도 강하여 아르디 왕가를 위협할 수준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처음 그런 말이 오갔을 때 레아는 깜짝 놀라며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런 소리가 들리다간 여왕님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을 거예요.”

줄리앙은 깜짝 놀랄 때 레아가 짓는 표정이 좋았다. 찡그린 눈썹, 아래로 축 처지며 동그래지는 눈동자 같은 것들이 말이다.

“당신같이 귀여운 사람은 절대 여왕 폐하의 노여움을 살 수 없을 거야.”

줄리앙은 웃었다. 실제로 여왕은 레아를 무척이나 아꼈다. 여왕의 귀에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들어갈 리는 없었지만,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여왕은 웃어넘기며 이렇게 말할 터였다.

‘내 후사가 없어 내가 죽으면 왕위를 누가 이을 것인가 걱정했는데 자네들에게 주면 되겠구먼그래. 어서 자손이나 보시게.’

둘 사이에는 아이는 없었다. 줄리앙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젠가 생길 수도 있었고, 생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것이 델피나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아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 것에 마음 졸이고 가슴 아파하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고, 고통과 괴로움의 나날들이 마음에 안겨 주는 생채기는 너무 크다는 것을 줄리앙은 알았다. 어떤 일은 그냥 묻어 둬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델피나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줄리앙과 레아는 매우 행복했었다. 그 행복한 때의 추억에만 집중해야 했다. 슬픈 날들을 들여다보고 있기에는 인생은 너무 빨리 흐른다.

레아는 가끔씩 줄리앙을 졸라 대어 전 생애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백 번이 넘는 인생의 이야기를 해 달라고 레아가 조를 때마다 줄리앙은 죽는 장면을 빼놓고는 모든 것을 기억나는 한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당신은 질투 나지 않아요?”

“뭐가 말입니까?”

“당신은 단 한 번도 다른 여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나는 당신 말고 다른 사람들과 냉큼 결혼해 버렸다는 것이 말이에요.”

“질투 나지요.”

줄리앙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전혀 질투 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기에 레아는 괜스레 심통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반대의 입장이었더라면 레아는 줄리앙에게 꼬치꼬치 캐묻고, 어떻게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할 생각을 했냐면서 닦달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초연한 표정으로 레아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물을 생각도 안 하는 줄리앙의 모습은 레아로서는 어디가 좀 고장 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묻지 않아요?”

“저도 궁금합니다. 어쩌다 그 사람과 결혼했는지, 그래도 행복한 순간은 있었을지, 결혼식은 어땠는지, 그 사람이 당신에게 잘해 주었는지. 때로는 괴롭기도 합니다.”

“그건―.”

“저도 당신이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불쑥불쑥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그런 것들로 당신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최대한 당신을 편하게 해 주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을 믿으니까요. 지금 당신이 나만 사랑한다는 것을요.”

“그래요. 믿어요. 그러게 왜 나를 사로잡지 않았어요. 그때도 당신이 조금만 내게 말을 걸어 주었더라면 난 당신을 사랑했을 텐데.”

줄리앙이 레아와 눈을 지그시 맞추고 웃었다. 대답이 없어도 그 눈을 보면 레아는 알았다. 그가 몹시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검은 눈 한가득 들어차 있는 제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그 거울 같은 눈이 너무도 다정하게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레아는 문득 눈물이 나곤 했다. 이렇게 오래 돌아와서 찾은 사랑이 벅차서 그랬고 너무나 큰 사랑을 자신이 받고 있다는 사실에 그랬다.

“왜 우나요, 레아.”

“그냥 너무 행복해서요.”

“그거 압니까? 예전엔 당신이 울면 너무 화가 나서 울지 말라고 소리치곤 했어요.”

“그건, 당신이 나빴네요.”

레아가 눈물을 훔치고 딸꾹질을 해 대면서 더듬더듬 그렇게 말하자 줄리앙은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는 게 싫으면 이렇게 달래 주면 되는 것을. 왜 그랬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줄리앙은 레아의 볼 가에 흘러내린 눈물방울들을 제 손으로 하나하나 닦아 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난 알아요.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던 걸 거예요.”

줄리앙은 웃으면서 짭짤한 레아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랬다. 그들은 매우 달랐지만, 몹시 사랑했고, 처음 하는 사랑이라 너무도 서툴렀다. 이제야 그들의 사랑은 평화를 찾았다.

레아 리버런 레날 부인은 서른셋이 넘어서도 살아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줄리앙은 그것이 너무도 기뻤다. 이제야 모든 죽음을 피했고, 그 둘은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아주 오래, 서로에게 질릴 때까지 둘은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늙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쭈글쭈글해진 손을 매만지고, 아침잠이 없어진 뿌연 눈으로 새벽을 맞이할 것이었다.

레아의 나이 서른일곱 살 때였다. 둘은 레아의 생일을 기념하고자 리버런 섬으로 향했다. 라벤더 숲에서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리고, 리버런 호에서 맘껏 수영을 하고, 레아의 언니들과 모두 모여 생일을 축하할 참이었다. 예전처럼 과하게 호위무사들을 데려갈 필요도 없었다. 쓸데없이 매일매일을 조마조마하게 살 필요도 없었다. 레아가 리버런호에 빠져 죽을 위험은 이제 없었지만, 그래도 줄리앙은 레아에게 호수에서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열 번은 더 이야기하고 있었다. 레아가 말을 돌렸다.

“잔소리쟁이 줄리앙 레날 공작님, 그거 아세요? 내가 당신 다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아마 우리 언닌가 봐요.”

“이사벨라 말입니까?”

“그래요. 내가 당신을 만나지 못했던 그 인생에서, 우리 언니가 죽은 것 같거든요.”

“지금은 살아 있으니 다행입니다.”

이제 모두 농담 같은 이야기였다. 괴로웠던 그 모든 세월도 레아의 옆에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어젯밤의 꿈같이 느껴졌다. 마차의 덜컹거림이 심해져 줄리앙이 레아의 자리를 걱정할 무렵, 갑자기 마차가 더 세게 흔들리더니 말이 우는 소리가 한번 들리고는 완전히 멈추어 섰다. 호위대장 하나가 무어라 크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바로 마차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리버런을 향하는 길은 평온한 산길일 뿐이었다. 이곳에 이렇게 갑자기 습격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상스러운 일이었다. 창문을 통해 습격자 무리를 엿본 줄리앙은 그 대장격인 남자가 범상찮은 칼을 차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여왕의 부군, 몽테스 가문의 인장이 박힌 칼이었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아르디 왕가보다 리버런과 레날의 결합이 더 인기 좋다는 사람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여왕의 부군에게는 위협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여왕의 부군을 음해하려는 다른 세력이 일부러 쥐여 준 칼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이 습격자들은 줄리앙과 레아를 노리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줄리앙은 낮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래도 노파심에 호위대장으로 잔뼈가 굵은 인물을 데려온 것이 다행이었다. 수십 명의 호위무사들이 후발대로 따라오고 있는 것 역시 습격자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줄리앙은 레아를 껴안았다. 밖으로 나가 같이 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호위대장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같았다. 그때 호위대장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놈들이 마차 뒤에 불을 질렀습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호위대장과 줄리앙의 손을 붙잡고 레아 리버런이 마차 아래로 내렸을 때였다. 공중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서슬 퍼런 호위대장의 칼보다 기세가 더 빨랐다. 화살은 명백히 레아를 노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레아 리버런 공작부인은 제 남편의 따뜻한 품에 안겨 있을 뿐이었다.

“……줄……리앙?”

레아는 잠시 제가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후발대가 도착했다. 몇십 명의 호위무사들이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 습격자들은 황급하게 제 몸을 숨겼다. 혼비백산이 되어 달아나는 그들을 쫓는 말발굽 소리 사이로 레아와 줄리앙이 타고 온 마차는 불에 타고 있었다. 아무도 그 불길을 잠재울 기력이 없었다.

레날 공작의 커다란 몸은 레아의 위로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등에는 네 발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레아는 줄리앙을 끌어안고 소리쳤지만, 줄리앙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피범벅이 되었을 망토를 레아가 흰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더듬고 있는 것이 거슬릴 뿐이었다. 저러다가는 피가 다 묻어 더러워질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찡그리다 말고 줄리앙은 제 아내와 눈을 마주치고는 마지막으로 환하게 웃었다.

이야기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오래 살았고 행복했다고, 이렇게 죽을지는 몰랐지만 괜찮다고, 예상치도 못하던 꿍꿍이들이 발생할 만큼 당신과 오래 살아 좋았다고, 이 또한 괜찮은 죽음이라고, 내가 죽고 나서도 생을 이어 나가면 된다고,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줄리앙이 입을 열었을 때 나온 것은 한 덩이의 피뿐이었다.

레아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운다고 화내는 대신, 울지 말라고 달래 주어야 하는데, 동그란 볼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저 눈물을 다 닦아 주어야 하는데 줄리앙은 제 손을 올릴 힘이 없었다. 대신에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말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아주 작게, 엉망진창으로 쉰 채로 레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레아 레날.”

눈이 감기기 전에 사람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그립던 시절을 본다고들 한다. 줄리앙 레날 공작의 눈앞에 보인 것은 우습게도 비가 오던 날의 일이었다.

미치도록 답답하고 괴로웠던 그날, 제 말을 하나도 들어 주지 않는 레아와 실컷 싸우고 비를 맞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레아에게 정말이지 화가 났던 그날, 우는 레아를 데려와 우유 한잔을 데워 주면서 화를 삭였던 그날 말이다.

호두나무는 언제나처럼 높고 크게 서 있었다. 레아는 그 앞에서 울고 있었다. 줄리앙은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녀는 아프지 않았다. 비는 다음 날 거짓말처럼 개어 있었다. 레아는 반짝거리는 눈을 뜨고 언제나처럼 뒤끝 하나 없이 줄리앙을 꼭 안아 주며 말했다.

‘줄리앙, 날이 밝았어요. 산책하러 가요. 참 행복한 인생이지요?’

줄리앙은 웃었다. 라벤더 숲을 걷던 순간부터, 호두나무 아래에서 싸우던 때까지, 델피나와 함께 있던 때부터 둘만의 지금 인생까지 레아는 줄리앙의 생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내 삶의 주재자, 나의 사랑, 나의 아내, 나의 주인.

줄리앙은 입을 열어 말했다. 그때와는 다르게 말이다.

‘레아 레날.’

‘왜 그렇게 심각하게 쳐다봐요, 줄리앙.’

‘살아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 그렇지?’

‘응. 살아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요, 줄리앙.’

레아는 이제 울고 있었다. 호두나무는 없었다. 이제 완전히 누워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줄리앙의 얼굴을 껴안고 흐느끼고 있는 레아를 바라보며 줄리앙은 마지막 힘을 짜내 말했다.

“레아, 당신은 강하고 언제고 나를 사랑했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여자야. 살아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 행복한 인생을 살고 나한테 와야 해. 그래서 자랑해야 해. 알았지?”

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편해졌다는 듯 줄리앙이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행복한 인생이었어.”

그랬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행복했더라면 언제 죽어도 후회스러운 삶은 아니었다. 레아가 말했던 것처럼.

줄리앙 레날 공작은 그렇게 리버런 섬으로 가는 마차 앞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내의 작은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2세 때의 일이었다. 행복한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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