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복숭아의 비밀
“레아 리버런은 어딨습니까?”
“레아…… 리버런이요?”
“리버런의 네 번째 공녀, 레아델피나 루이스 리버런 말입니다.”
“리버런의 네 번째 공녀는 제인인데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리버런의 일곱 자매의 이름은 모두 왕실 명부에―.”
“일곱 자매라뇨. 레날 공작님, 황공하오나 다른 집 여식과 저희를 혼동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희 자매는 저까지 해서 모두 여섯인데요.”
이사벨라 리버런이 아름다운 황록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줄리앙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장 난 사람처럼 모든 행동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수초 후에서야 흔들리는 눈으로 이사벨라를 응시했다. 그리고 몹시도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바닥을 바라보며 계속 멈춰 서 있는 줄리앙 앞에서 이사벨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젊은 공작이 왜 대체 이름 모를 여자를 여기 와서 찾는 건지 이사벨라 리버런으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레아는 없군요.”
알아듣기 힘든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줄리앙 레날 공작은 이사벨라에게 말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되뇌는 듯이 계속해 레아 리버런은 없어, 없는 거야, 라고 중얼거렸다.
이사벨라가 줄리앙의 어깨에 슬쩍 제 손을 올리며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그녀가 아직도 제 옆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는 듯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도 이사벨라는 왠지 크게 사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선명한 검은색의 그 눈이 몹시도 상처받은 빛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줄리앙은 바로 이사벨라 리버런에게 인사를 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몇 주 후에 리버런 섬에 레날 가문의 인장이 박힌 서신이 도착했다. 무례를 용서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줄리앙 레날 공작은 그렇게 리버런 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후로 단 한 번도 그 섬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레아 리버런이라는 존재가 없었다. 그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줄리앙은 왕국 전체를, 아니 왕국을 넘어 제국까지를 십 년을 넘게 이 잡듯 뒤졌다. 온갖 귀족 집을 드나들며 정실부인에게서 낳은 후계자부터 첩의 자식까지 모든 귀족가의 영애들을 조사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레아는 없었다.
왕국 전체에서 평민가의 여식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을 여왕의 앞에서 무릎 꿇고 빈 결과였다. 하나밖에 없는 조카가 정신이 나가서 그렇게 해 달라고 비는 데에는 여왕도 도리가 없었다.
조사가 끝나고 나서도 줄리앙은 이 세상에 레아가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제 눈으로 모두를 확인하기 전에는 납득할 수 없었다. 줄리앙은 계속해서 모든 곳을 떠돌았다. 어디에도 레아 리버런은 없었다. 레아 리버런은 이 세상에 없다.
아주 소중한 보석을 잃어버린 사람이 제일 나중에 찾아보는 것이 자신의 보석함 안이라고 한다. 금화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이 끝까지 찾아보지 않는 곳 역시 자신의 호주머니 안이라고 한다. 줄리앙이 뒤늦게 카리안 알드망을 찾아간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비밀의 방 안에는 벌써 몇 생째 전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는 카리안의 마법 노트가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꽂혀 있었다. 줄리앙은 그 노트를 한 손에 쥐고 카리안 알드망이 있는 시장 안 잡화점에 들어갔다.
“레아 리버런이 없소.”
난생처음 줄리앙을 보는 카리안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단지 빠른 눈치로 선대 공작을 빼닮은 얼굴을 한 그가 레날 공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줄리앙은 한숨 한번 쉬지 않고 모든 이야기를 단숨에 털어놓았다. 자신의 필체가 그대로 적힌, 그러나 단 한 번도 제가 적은 기억이 없는 마법의 노트를 보며 카리안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의 말을 모두 믿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행동에는 그 결과가 따르는 법이지.”
“선문답할 시간은 없소.”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무언가 바뀌었겠지. 한 사람의 목숨이 끊어졌다 다시 돌아왔소. 한 존재 정도는 당신 대신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했겠지.”
“그럼 나 때문이오?”
카리안은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미안하오. 내 추측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소. 그러나 이 늙은 마법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구려.”
줄리앙은 화를 내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모두 그가 예상한 대로였다.
“그렇담 이젠 죽을 수도 없겠군.”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인사도 하지 않고 잡화점을 나갔다. 카리안은 그 후로 오랫동안 그 젊은 공작의 담담한 눈을 기억했다. 그는 미처 노트를 건네줄 만큼 줄리앙을 알지도 못한 채 죽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카리안이 어느 곳에 노트를 보관하고 있는지부터 그가 노트를 보관하는 서랍을 여는 열쇠가 어디 있는지, 심지어 카리안이 어느 날 죽는지까지 줄리앙은 모두 다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삶을 줄리앙이 어떻게 버텼는가는 알 수 없다. 줄리앙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어쨌든 그는 마흔 살까지 살았다. 그는 전쟁에 참여했으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카리안의 노트를 되찾았으며 노트에 적힌 고대어를 해석할 만큼의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여 막을 수 있는 대부분의 비극을 막았다.
그는 콰이건 강에서 낙마할 뻔한 마차에 탄 사람들을 구했고, 호두나무가 벼락 맞아 타 죽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나무를 옮겨 심었다. 타주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다시 만들었고, 다리가 무너져서 죽을 사람들을 구했다. 전쟁이 크게 번지지 않도록 북방을 지켰고, 리버런 섬이 침략당하지 않도록 군비를 강화했다. 저택을 개조했고 카리안의 장례를 치렀으며 레날의 영지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고를 미연에 방지했다. 모든 것들이 기계적인 행동이었지만 그 기계적인 행동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불행을 피했다. 줄리앙 자신을 빼고는 모두가 행복한 듯싶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쓸쓸해하기엔 이미 그가 겪은 고통은 너무 컸다.
레아의 죽음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죽음도 때때로 그러했다. 줄리앙이 믿고 의지하던 그의 집사는 이번 생에서 유난히 빨리 죽었다. 줄리앙은 몇십 년, 아니 사실은 몇백 년, 몇천 년을 함께한 사람의 죽음을 처음 겪으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자신이 징그러웠다. 차곡차곡 삶을 살아 나가는 동안 눈물은 메말라 버렸다. 지옥 같은 인생이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인생은 누구에게나 얼마간은 지옥 아니던가.
행복은 작게 찍은 점이고 고통은 선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선. 그리고 그 선은 언제나처럼 어느 날 뚝 끊겼다. 마흔 살이 되던 해 그는 눈을 감았다. 눈을 다시 뜨면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이번에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매번 이날만 기다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여왕에게 줄리앙은 말했다.
“오늘 당장 가겠습니다.”
가타부타 않고 바로 리버런 섬에 간다면 그는 이사벨라 리버런의 정혼자의 자격으로 리버런 섬에서 삼 개월을 살게 될 것이다. 상관없었다.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일단 알았다고 하고 떠나는 것이 제일 빨리 리버런 섬에 갈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줄리앙은 채비 하나 갖추지 않고 그길로 왕궁을 떠나 말 하나를 몰고 리버런 섬으로 달렸다. 쉬지 않고 달리니 리버런 섬까지 이틀이 걸렸다. 이틀을 잠 한번 자지 않고 물 한번 마시지 않았다.
이윽고 리버런 섬에 도착하여, 그의 오랜 벗, 그러나 매번 처음 보는 사람 보듯 그를 바라보는 이, 리버런의 수문장 왈도와 문지기 자크를 만났을 때쯤, 그는 완전히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대리석을 깎아 놓은 듯한 그 얼굴, 형형히 빛나는 검은 눈마저도 먼지에 뒤덮여 그 빛을 조금 잃었다. 레날과 아르디의 문장이 새겨진 검이 없었더라면 아무도 그가 한 공국의 주인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을 것이었다.
성문을 통과하여 10여 분을 달리면 바로 라벤더 숲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거짓말처럼 레아 리버런이 서 있었다. 줄리앙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있는 동쪽 탑을 향하여 천천히 걷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줄리앙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레아를 부르면 그녀가 다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말을 건다면, 그녀는 웃을 테고 그러고 나면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었다. 유월이었다. 아직 열다섯이 되지 않은 레아는, 한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고 가는 그 몸은 얼핏 보면 그의 딸 델피나 같기도 했다.
놀랍게도 줄리앙 레날 공작은 이번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는 울지 않았다. 아니 울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다만 바라보았다. 레아가 존재하는 이 세상의 정경을. 결국, 레아는 죽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그러면 되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시 바라만 보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그는 그저 저 앞에서 걸어가는 레아가 라벤더 숲의 울창함에 묻혀 점점 작아질 때까지, 연보랏빛 숲의 노란색 작은 점처럼 보일 때까지 넋 놓고 그곳에 서 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레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그곳에 서 있다가 무너지듯 주저앉은 줄리앙 레날 공작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라벤더 숲에 제 몸을 숨기고 주저앉아 별이 뜨고 다시 새벽이슬이 맺힐 때까지 그는 이틀간의 선잠에 빠져들었다. 꿈에서 언뜻 레아의 환한 미소를, 델피나의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듯도 싶었다.
새벽 해가 밝을 무렵 그는 눈을 떴다. 그길로 다시 리버런 섬을 떠났다.
“성문 밖을 나가서 시장으로 가면 오른쪽 골목 열다섯 번째 구역에 카리안의 잡화점이 있소. 그곳에 가서 카리안 알드망을 불러오시오.”
주인의 말에 집사는 깜짝 놀랐다.
“레날 공작님, 대체 어떻게 카리안 알드망의 이름을 아십니까?”
“불러와 주시오, 부디.”
줄리앙은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리안 알드망이 레날의 저택에 도착했다. 줄리앙이 별말도 않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오랜만입니다, 옛 친구여.”
집사를 비롯한 모든 사용인이 화들짝 놀랐지만, 이상하게도 그 늙은 마법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줄리앙이 이끄는 대로 제가 예전에 쓰던 방, 줄리앙의 집무실 옆의 비밀의 방에 순순히 따라 올라갔다. 그 방에 앉아 줄리앙은 이 속 깊고 눈치 빠른 늙다리 마법사에게 지금까지 수십 번을 반복해서 한 이야기를 또다시 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카리안이 꺼낸 말은 과연 그다웠다.
“이 이야기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했을지 모르겠지만 여태껏 한 번도 나를 이곳으로 불러온 적은 없군.”
“그렇소. 어떻게 아셨소?”
“내가 이곳에 왔다면 온 적이 있었다는 증거를 남겼겠지.”
카리안은 고개를 슬쩍 돌려 작은 방 전체를 휙휙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줄리앙이 피식 웃었다. 가벼운 웃음이었다. 그렇게 웃고는 그다지 무거울 것도 없는 말투로 그는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을 없애 주시오. 이제는 레아와 만나지 않겠소. 행복해지는 것도 원치 않소. 죽어도 좋소. 아니 제발 죽고 싶소. 그저 모든 것을 없애 주시오. 나를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오.”
“이미 죽어 보았다고 하지 않았소?”
카리안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딱하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묻자 줄리앙은 다시 한번 웃어 보였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는 것이 너무도 힘들어 보였기에 이 마법사는 참던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웃지 마시오. 웃지 않아도 되오.”
자신의 늙은 벗의 낡은 망토를 부여잡고 줄리앙은 처음으로 다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든 상관없소. 나를 바보로 만들어 주시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그건 가능하지 않소? 제발 이렇게 살지 않게 해 주시오. 부탁이오. 제발 부탁이오.”
어느새 줄리앙은 흐느끼고 있었다. 카리안은 그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그에게는 한 번도 그렇게 해 준 적이 없는 아버지처럼, 그를 늘 그렇게 매만져 주던 레아처럼.
줄리앙의 흐느낌은 어느새 울부짖음으로 바뀌었다. 짐승의 괴성, 아니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생물체의 신음소리가 비밀의 방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듣고 사용인 몇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 울음소리는 멈추었다. 울다 못해 혼절한 거구의 젊은 공작을 부여잡고 카리안은 버릇처럼 무슨 조언이나 위로라도 하려고 입을 뗐다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집사가 문을 두드린 것은 한참 후였다. 레날의 공작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카리안 알드망을 만찬이 차려져 있는 회장으로 안내했다. 손님은 오로지 단 한 명, 카리안뿐이었지만 20명이 앉아도 텅 비어 보일 만큼 커다란 떡갈나무 식탁을 꽉 채우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두 시간여에 걸친 식사를 했다. 이런 음식을 먹는 것은 그도 반세기 만의 일이었다. 아까까지의 이야기가 다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줄리앙 레날 공작은 웃으며 그를 응대했다. 다정한 손자 녀석처럼 그에게 옛 활약을 들려 달라고 하기도 했고, 잡화점의 사정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 역시 들어 주었다. 어디가 아프고 저기가 쑤시고 하는 이야기부터, 마법의 시대에는 누구든 알고 있었던 위대한 마법사들의 모험 이야기까지 카리안이 목이 아파 더는 이야기하기가 힘들 때까지 줄리앙은 지치지도 않고 모든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식사가 끝나고 배를 두드리고 있을 때 줄리앙이 복숭아 하나를 대령했다.
“귀한 복숭아입니다. 유월의 첫날, 레날에서도 가장 맛있는 복숭아가 나기로 유명한 복숭아밭의 제일 큰 나무에서 나는 복숭아입니다. 그 나무에서 가장 높이 달린 복숭아를 먹으면 오래 산다는 이야기가 있다더군요.”
“내가 죽는군. 그래서 이렇게 성대한 초대를 해 준 것이군.”
카리안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줄리앙은 웃음을 터뜨렸다.
“마법사 양반, 당신이 죽는 것은 맞소. 하지만 좀 더 후의 일이지요, 그건. 당신은 이상하게도 내 아내와 달리 매번 같은 때 같은 이유로 죽더군. 시일은 말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시오. 내일 죽는 것은 아니니 그것도 안심해도 좋소.”
“그럼 왜 이렇게 내게 잘해 주오?”
“한 번은 당신을 옛집에 불렀어야 했는데, 내 일이 급해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못한 것이 마지막이 되니 미안해서 그러오.”
“참나, 그렇게 오래 만나 왔으면서 정말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오?”
“그러게 말이오. 자, 드셔 보시오.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내게 이 나무의 복숭아를 못 먹게 했지. 탐스럽고 아름답게 생겨서는 붉은빛이 살짝 나는 연분홍색이 도는 것이 달콤한 향까지 나는 게 어려서는 정말이지 맛있게 보여서 그 맛을 상상만 했었다오.”
“자네 어머니라 함은 레날 공작부인 말이오?”
“그렇소. 어머니는 아예 복숭아 과수원이 있는 쪽 영주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어.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아버지가 사랑하던 곳이라 그랬나 보다 하지. 여자의 복수심 같은 거라고 할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 영지를 내가 관리하게 되면서 한 바퀴를 돌았을 때 복숭아 과수원을 관리하던 이가 내게 와 이 복숭아를 바쳤소. 섭정 노릇을 하던 어머니와 달리 내가 제 땅과 사람들을 좀 잘 보아 주기를 바랐던 거야.”
“혹시 시장 건너 마을의 배 밭 근처에 있는 그 복숭아 과수원 말하는 거요?”
“그렇소. 역시나 알고 계시군그래. 그곳에는 아주 유명한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하오. 그 나무를 만지기만 해도 무슨 영험한 효과라도 볼 듯 아주 커다랗고 높았지. 아시오? 복숭아나무는 원래 그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말이야. 과수원 주인은 늘 내게 와서 말한다네. ‘나무 꼭대기에 달린 복숭아를 유월 첫날에 따 와서 공작님께 바칩니다. 선대께서 명하셨기에 아무에게도 진상하지 못하였습니다. 공작부인님께서는 저를 밉보시어 복숭아나무를 베고 그것에서 나는 복숭아를 다 버리라 명하였사온대, 이 늙은이 차마 선대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나무를 베지는 못하였나이다. 청컨대 공작님, 한 번이라도 이 복숭아를 맛보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복숭아를 드시면 오래 산다고 합니다. 부디 받아 주십시오.’”
“그래서 그 복숭아를 매번 드신 게요?”
“그럼, 안 먹고 배기겠나? 처음 내게 와서 벌벌 떨며 그렇게 말하던 그 나이 든 자의 애처로운 눈은 잊히지가 않아. 아버지와는 퍽도 사이가 좋았나 보다 하였지. 그래 봬도 우리 아버지는 아랫사람들에게는 꽤나 너그러운 사람이었으니 말이야. 어머니의 눈 밖에 난 것도 당연했지. 우리 어머니에게 아버지와 친한 모든 자는 적이었으니. 그간 당한 고초들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어. 얼마나 간절한 목소리이던지 몰라. 스무 살밖에 안 된 내게 오래 살 테니 어서 잡숴 보시라고 하던 그 목소리가 말이야. 그렇게 스물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맛보았지. 영주의 눈빛이 어찌나 선하던지. 복숭아를 바치던 그 손은 얼마나 부들부들 떨리던지. 매년 그것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네, 친구. 하나 나는 이제 오래 살 필요가 없소. 간절하게 죽고 싶소. 한 번쯤은 당신에게 이 복숭아를 주어도 용서해 주겠지.”
카리안은 복숭아를 들지 않았다. 다만 이상한 눈빛을 하고 줄리앙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오. 오랜 벗이여. 이미 배가 부르시오?”
“그 복숭아를 들지 마시오. 공작. 내가 비밀을 푼 것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