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레아델피나 리버런 레날
두 사람이 첫날밤을 맞이하고, 결혼식까지 무사히 치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줄리앙과 레아 사이에 처음으로 아이가 생겼다. 아직 리버런 섬을 떠나기도 전의 일이었다. 두 사람이 임시로 신혼방을 꾸린 별관의 방에서 둘의 첫아이가 생긴 것이다.
지금까지 백몇 번의 삶을 반복하며 줄리앙와 레아는 짧게는 1년, 길게는 7, 8년까지 결혼 생활을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둘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줄리앙은 이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난 원래 그렇게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야. 애 볼 줄도 모르고. 레날 가문? 내 대에서 끊긴다고 해서 아쉬운 게 있을까? 우리 아버지께서 나랑 놀아 주신 적이 없으니 나도 아이와 놀아 줄 줄 모르는 아빠가 될 거야.”
“마리안느랑은 잘만 놀면서 그래?”
레아는 줄리앙의 그 모든 말들이 레아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심산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괜히 심통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마리안느는 완전 어린애는 아니잖아. 그리고 그 애는…… 그 애는 당신이랑 좀 닮았거든. 마치 어린 레아 같아 보이곤 하지. 눈동자 색을 제외하고는.”
“벨라 언니 아들 루이가 와도 당신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하잖아.”
“아기들은 원래 잠깐만 볼 때가 귀여운 법이야. 어때, 레아. 그냥 우리 둘이 사는 것도 좋잖아. 내가 당신 아기를 하지. 나를 돌봐 줘. 당신은 내 아기를 하고. 이리 와. 내가 밥을 먹여 줄 테니.”
“싫어. 저리 가.”
방 안 가득 두 사람의 쫓고 쫓기며 깔깔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야기는 진지하게 끝나는 법이 없었다. 줄리앙 역시 아이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원래 아이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레아를 닮은 여자아이라면 한번 보고 싶기도 했다. 남자아이가 레아를 닮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분명 아주 씩씩하고 용감한 아이가 될 터였다. 섬세하고 귀여운 데가 있어 여자의 마음도 아주 잘 알아주는 다정한 아이로 자랄 것이라고 줄리앙은 생각했다. 아니면 줄리앙도 조금 닮으면 어떨까.
두 사람 사이의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지, 아주 어린, 갓난아이 때의 레아와 줄리앙의 얼굴이 그 아이에게서 보인다면 얼마나 사랑스러울지 줄리앙은 그런 것들을 상상해 보곤 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로 레아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줄리앙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레아, 단 한 사람이었다.
사실 그의 생각엔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끝없이 생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과, 언제나 빨리 죽고 마는 레아 사이에 아이가 있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아마 두 사람의 운명에 아이는 없을 것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그는 아이를 갖는 것은 체념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레아에게 아이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너무 빠르게 말이다.
레아는 제일 먼저 줄리앙에게 알리고 싶었다. 누구보다 먼저 줄리앙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비밀을 제대로 지킬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엄마, 있잖아. 내가 태어났을 때 기분이 어땠어?”
이렇게 물으며 아직 나오지도 않은 제 배를 한참을 어루만지고 있으니 ‘너 임신했구나?’ 소리를 듣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제인, 있잖아. 너는 조카가 생긴다면……. 음, 만약에 말야. 만약에 생긴다면 여자애가 좋아, 남자애가 좋아?”
“왜, 언니 임신했어?”
“아니야, 그런 거.”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 놓고는 아직 홀쭉한 제 배를 감싸고 헤헤 웃는 얼굴을 보고는 아직 열다섯밖에 안 된 제인도 레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레아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깨닫고 나서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서 온 성에 레아 리버런이 줄리앙 레날의 아이를 가졌노라 하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은 물론 줄리앙에게도 전달되었다.
성내를 한 바퀴 돌면서 신나하다가 둘만의 임시거처로 돌아오자 줄리앙이 창문 밖으로 레아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레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벨라 언니에게 아이가 생겼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이사벨라는 그때 마침 리버런 성에 머물고 있었다. 제이미 오를 공작은 서신으로 이사벨라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꼬박 이틀은 걸릴 거리를 한걸음에 달려와 한 아름도 넘는 커다란 꽃다발을 선물하고 벨라를 껴안고는 엉엉 울었다. 순수한 사람이었다. 언니 부부의 모습을 떠올리자 레아의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어렸다.
줄리앙에게 아이를 가졌다고 말한다면 어떤 표정을 할까. 모르긴 몰라도 제이미 오를 공작보다 훨씬 더 요란스레 기뻐할 터였다. 레아를 끌어안고 뱅뱅 돌릴지도 몰랐다. 엄청나게 거대한 초콜릿을 선물할지도 몰랐다. 줄리앙이 창문가에서 레아를 바라보고 서둘러 아래로 내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레아는 꿈에 부풀었다.
“정말입니까?”
줄리앙이 매서운 눈을 하고 물었다.
“네?”
“아이를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맞아요.”
“아직 확실하지는 않은 거지요?”
“아뇨, 확실해요.”
달거리가 석 달은 밀리고 있었다. 늘 정확했던 레아인데 말이다. 성안의 주치의에게도 이미 보인 터였다. 곧 배불러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줄리앙은 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무언가 걱정되는 일이 있을 때의 그의 버릇이었다.
“그렇군요.”
줄리앙은 혼자 중얼거리듯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가만히 서서 레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우울해 보이는 눈을 보고 있자니 실컷 들떠 있던 레아의 기분도 축 가라앉았다.
“줄리앙, 기쁘지 않아요? 우리에게 아이가 생길 거예요.”
줄리앙은 레아의 두 어깨를 잡고 제 품으로 레아를 슬며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꼭, 마치 아빠가 아이를 안는 듯이 포근하게 레아를 안고 중얼거렸다.
“네, 기쁩니다. 기쁘고말고요.”
그러고도 줄리앙은 내내 우울해 보였다. 말이 없고,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고 멍하니 레아의 얼굴을 바라보고, 괜히 레아의 볼을 어루만지고 그러다 다시 창문가를 보고는 했다.
레아는 처음에는 저 사람이 왜 저러나 싶다가 그 후에는 뭐 다른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싶다가 나중에는 좀 화가 났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그렇지 이제 막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은 아빠가 저렇게 행동하는 게 말이 되는가.
밤이 오자 잠자리에 들어 침대 꼭대기에 걸린 커튼을 바라보다가 말고 레아는 불쑥 화가 치밀었다.
“줄리앙, 일어나 봐요.”
제게 한쪽 어깨를 내주고 옆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제 남편을 흔들어 깨우며, 그래도 그렇지 밤에 자는 사람을 깨워서 화내는 건 좀 그런가 하고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줄리앙은 스르르, 눈을 떴다. 아마도 잠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레아.”
“나 알겠어요. 당신이 왜 그렇게 화내는지.”
줄리앙의 눈빛이 흔들렸다. 줄리앙의 입장에서는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 어쩔 수 없었다. 아이가 생긴다는 기쁨보다 먼저 줄리앙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은 걱정이었다. 아이를 낳다가 죽는 여인들이 많은 시대였다. 레아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일렀다. 이제 막 결혼한 터였다. 레아는 아직 열일곱이었다. 열여덟이 채 되지 않았다. 아이를 낳다 죽는다면, 줄리앙이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좀 더 조심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여태껏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방심했던 것이다.
“……알겠다고요?”
“네. 우리 이제 다음 달이면 레날의 영지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내가 아이를 가져서 그것이 늦어진 게 싫은 거지요? 나도 다 알아요.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요.”
줄리앙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잠자리에 앉아 분노를 내뿜고 있는 제 사랑스러운 아내를 잡아당겨 다시 제 품 안으로 뉘었다.
“레아, 사랑스러운 레아.”
“왜 그래요. 미워요. 정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신 아이를 임신한 내 앞에서 그렇게 티 나게 우울해할 필요는 없잖아요.”
레아 입장에서는 줄리앙이 기뻐하지 않는 게 화가 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어차피 어디서 어떻게든 레아는 죽을 것이고 그것을 자신이 막을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는 것을 줄리앙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냥 솔직히 털어놓는 쪽을 선택했다.
“레아, 나는 그냥 걱정이 되어서 그랬습니다. 당신은 아직 어리고 몸도 약하지 않습니까.”
“누가 내 몸이 약하대요. 당신은 제가 책만 보고 글만 쓰는 줄 아는데 라벤더 숲도 가꿀 줄 알고 말도 탈 줄 알아요.”
“네, 알아요. 압니다. 그냥 당신에게 너무 빨리 아이를 갖게 한 게 미안해서 그랬습니다. 엄마가 되기엔 너무 이른 나이니까요. 당신 몸도 걱정되고요.”
“미안하다고요?”
“네.”
“그럼 싫은 게 아니에요?”
“싫긴요. 정말 많이 기쁩니다.”
말을 해 놓고 보니 정말로 줄리앙의 마음 한구석에 몰래 숨어 있던 기쁨이 제 나래를 펼쳤다. 갑자기 가슴이 벅차 왔다. 자신의 인생에, 자신과 레아의 인생에 아이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차곡차곡 접어 숨겨 놓았던 꿈이 이뤄질 것이었다.
“진짜예요?”
줄리앙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정말이지 눈물이 나도록 기쁩니다. 레아.”
두 사람은 그날 밤 그대로 꼭 끌어안고서 잠에 들었다. 새벽 해가 밝도록 아이를 가질 미래에 대해 그려 보느라 레아는 잠들지 못했다. 제가 그린 미래를 옆의 줄리앙에게 종알종알 떠들어 대었으니 줄리앙 역시 잠에 들지 못했다.
해가 중천이 되도록 잠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르던 두 사람은 다음 날, 리버런 섬을 떠나는 것을 1년 후로 미루기로 결심했다. 줄리앙과 레아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계속 리버런 섬에서 지내기로 한 것이다. 줄리앙만 이따금 레날의 영지에 다녀오곤 했다. 다녀왔다는 말이 무색하게 급하게 돌아온 것은 하루라도 더 레아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의 마음의 반절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만, 나머지 반절은 아직도 불안감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언니들이 그러는데 배가 작은 걸 보니 여자아이일 거래요.”
“그게 그렇게 됩니까?”
“사실 벨라 언니도 베스 언니도 첫아이는 여자애였거든요. 그래서 괜히 나도 여자아이를 갖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당신을 닮은 남자아이면 좋을 텐데.”
“난 당신을 닮은 여자아이 쪽이 더 맘에 듭니다.”
“날 닮은 남자아이면 안 돼요?”
“그것도 좋지요. 어느 쪽이든 이름은 레아라고 지을 거예요.”
줄리앙은 자못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선언했다.
“그런 게 어딨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요. 레아는 내 이름이잖아요. 빨리 다른 이름을 생각해 봐요.”
“레아, 나는 그냥 레아라는 이름의 존재가 세상에 하나 더 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조그마한 레아가 당신 손을 붙잡고 돌아다니면 얼마나 귀여울까 생각만 해도 행복해집니다.”
“당신만 닮을 수도 있어요. 칠흑같은 머리에 까만 눈동자에 잘생긴 얼굴의 레아는 좀 이상하잖아요?”
“그것도 좋겠네요. 아마 당신을 닮은 구석이 하나는 있을 겁니다. 초콜릿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든가 하는 거요.”
줄리앙은 그렇게 말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가 계속해서 아이 이름을 레아라고 짓게 해 달라며 조르는 탓에 레아도 마지못해 그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정말로 레아를 똑 닮은 아이가 태어났다. 레아의 나이 열여덟 살, 줄리앙의 나이 스물네 살 때의 일이었다.
아이 레아는 신기하게도 줄리앙의 검은 머리도, 심연 같은 눈도, 커다란 키도 닮지 않았다. 회푸른색 눈동자, 금발의 머리칼, 하얗고 보드라운 통통한 볼따구니, 작고 귀여운 귀까지 모두 레아 그대로였다. 아이의 이름은 줄리앙의 주장대로 엄마의 이름을 땄다. 레아델피나 리버런 레날이라고 명부에 올라갔고 가족들은 주로 델피나라고 불렀다. 어려서부터 아빠가 가르쳤기에 피아노를 잘 쳤고 그림도 제법 잘 그렸다. 아빠를 닮아 운동에 능했고 바깥에 나가 뛰노는 것을 좋아했다. 농담처럼 말한 것이 이루어진 것인지 원래 아이들이 다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레아를 닮아 초콜릿에는 사족을 못 썼다.
* * *
“아이가 있었다고요?”
레아가 물었다. 이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것은 레아 쪽이었다.
“네.”
“그리고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죠?”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자랐지요. 아직 덜 자란 키에, 화가 나면 잔뜩 부풀어 복어처럼 보이는 볼, 새하얀 피부, 잿빛 눈동자, 금발의 머리칼, 환한 미소까지 말입니다.”
줄리앙이 레아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요?”
“당신은 서른셋까지 살았으니 그 아이가 열다섯이 된 모습까지 보았겠지요. 좋은 엄마였습니다. 레아.”
“줄리앙―.”
“다시 배가 고파지지 않았습니까?”
“줄리앙, 말해 줘요.”
레아의 목소리는 이제 듣기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줄리앙은 태연히도 말을 돌렸다.
“계속 앉아 있다 보니 좀이 쑤시는군요. 밖에 나가서 잠시 산책이라도 할까요?”
“줄리앙, 제발 말해 줘요.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지요? 나는 어떻게 죽었나요?”
* * *
왕국력 1789년 제2차 제국전쟁이 발생했다. 제국은 아르디 왕국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최북단에 있는 몰리샴 왕국과 손잡고 북쪽을 제일 먼저 쳤다. 북쪽 끝에 있는 리버런 섬이 제일 먼저 초토화되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 레날 부부는 델피나와 함께 레날의 영지로 떠났다. 레아도 델피나도 레날의 영지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리버런 섬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라벤더 숲은 없었지만 레날의 영지는 수도 근처라 델피나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수많은 것들이 있었다. 리버런 섬보다 따뜻하기에 겨울도 더 편안하게 날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던 해, 레날 부부는 영지 안에 델피나를 위한 작은 정원을 만들어 줄 계획을 세웠다. 몇 년 후면 수도로 가서 사교계에 데뷔할 나이였다. 더 커서 이제 엄마와 놀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졌다고 툴툴대기 전에 레아는 딸 델피나와 더 오래 함께하고 싶었다. 자신의 소녀시절 취미였던 꽃 가꾸기를 가르쳐 주고 싶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라벤더 밭에서 뛰놀며 자라 왔던 델피나 역시 이 계획에 찬성을 표했다.
레날의 영지에도 리버런 섬처럼 커다란 라벤더 숲이 생길 것을 떠올려 보니 줄리앙 역시 웃음만 나왔다. 날씨나 다른 조건들이야 카리안의 마법서를 읽으며 익힌 복원 마법 몇 가지, 그가 물려주고 간 물약 몇 개를 쓰면 해결할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씨앗이었다. 라벤더 씨앗 여러 개와 튼튼한 모종 몇 개만 가져온다면 라벤더 숲 일구는 일은 금세 진척을 보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해 여름, 레아와 그녀의 딸 델피나는 라벤더가 개화하는 초여름을 맞이하여 리버런의 선선한 날씨를 즐기고 여러 친척들도 방문하며 라벤더 씨앗을 한 움큼 가져오겠노라는 부푼 꿈을 가지고 리버런 섬으로 향했다.
레아의 수많은 죽음 중에 두 번, 두 번씩이나 레아는 리버런 섬으로 가는 길에 죽음을 맞이했다. 여름을 맞아 두 사람이 리버런 섬에 간다고 했을 때, 레날 공작이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매해 매해가 줄리앙에게는 유리 조각으로 된 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조마조마한 일이었다. 레아가 죽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델피나 나이가 열 살이 넘고 레아 나이가 서른이 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요즈음 들어서는 자꾸 희망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저주는 모두 풀린 것이 아닌가?
줄리앙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곧 마흔 살이 될 터였다. 이 모든 것들을 두고, 두 여인을 뒤로하고 다시 스무 살부터 시작하라고 한다면 그보다 더 허무한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좋았다. 일단 그가 해야 할 일은 레아를 죽음으로부터 지키는 일이었다.
어마어마한 수행원들과 휘황찬란한 마차, 단지 여름 휴가차 리버런 섬에 가는 행렬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거한 무장을 한 호위무사들을 대동하고 공작은 직접 그 둘을 리버런 섬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두 모녀와 함께 그해 여름을 리버런에서 보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제국군이 리버런 섬을 침략했던 그날, 레날 공작은 마침 거기 없었다. 바로 전날 그는 여왕의 부름을 받았고, 하루바삐 다녀오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레아와 델피나에게 별의별 잔소리를 다 하고서는 수도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전쟁 소식을 듣고 줄리앙이 말을 돌려 리버런 섬에 다시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아름다운 라벤더 숲도 뾰족한 첨탑이 연녹색으로 칠해져 있던 리버런 성도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섬 전체가 불바다가 되어 있는 앞에서 줄리앙은 목 놓아 울 새도 없이 두 사람을 찾았다.
다음 날 아침, 새까맣게 불타 버린 라벤더 숲에서 줄리앙은 이번에는 살아 있는 두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의 시체를 찾아 헤맸다. 온전한 유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레아가 언제나 손가락에 끼고 다니던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것을 근거로 유해의 일부를 찾았다. 그 유해보다도 더 작은 유해가 까맣게 그을린 채 그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두 사람의 사인은 알 수 없었다. 불에 타 죽기 전에 자상을 입었을 수도 있고 연기에 질식사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화염에 휘감겨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불에 타 죽었을 수도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연보랏빛 라벤더를 바라보았을까. 그 보랏빛 눈은 감은 채 죽은 것일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내 이름을 불렀을까. 불러도 불러도 오지 않을 자신의 남편을, 아비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아니, 원망이라도 하였더라면 좋았다. 레아는 아마 죽는 그 순간까지 제 남편을 걱정했을 것이다. 라벤더를 움켜쥐고, 델피나를 끌어안고,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줄리앙의 안위를 걱정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레아의 흔적은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앙상한 뼈와, 거짓말처럼 멀쩡한 블루 다이아만 남아 있었다. 줄리앙은 간신히 찾아낸 두 유해의 흔적들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시기의 아르디 왕국은 태평성대였어야 했다. 아니 태평성대가 아니더라도 이런 전쟁이 발생하지는 않았어야 했다. 비록 인생의 이 시기를 제정신으로 지낸 적은 없었지만, 줄리앙은 알았다. 반복되던 생 가운데 한 번도 리버런 섬이 이렇게 처참한 지경에 이른 적은 없었다. 그 인생들과 지금의 인생들에서 다른 점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아도 줄리앙은 스스로 답할 수 있었다. 줄리앙 아르디 레날 공작은 제 분수에 맞지 않게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여 감히 생각지도 못한 사랑스러운 딸을 얻었고 과하게 행복한 삶을 사느라 변방을 지키러 나가지도, 북방을 토벌하지도, 제국 전쟁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세력을 키운 제국의 군사가 왕국을 정복하고자 마음먹었다고 한다면, 이 모든 것은 줄리앙이 제 할 일을 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윽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기절했다. 의식을 잃은 그의 꿈에는 끊임없이 레아와 델피나가 나왔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두 여인은 불길에 휩싸인 채 지치지도 않고 줄리앙의 이름을 불러 댔다. 꿈에서 깨어났을 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였는데 그의 칠흑같이 검던 머리칼 전체가 은색으로 희어져 있었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는 다시 레날의 영지였다. 기절한 채로 며칠이 지났는지, 레아와 델피나의 유해는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새끼손가락에는 누가 끼워 둔 것인지 레아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랫사람들은 모두 어디 간 것인지 저택 안에는 통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전쟁이 한창일 것이다. 북쪽은 이미 다 먹힌 것일까. 뇌리를 지나치는 생각들을 모두 지워 버렸다. 그런 것은 이제 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바로 걸어 나갔다. 라벤더 정원 한가운데에 언제나처럼 커다란 호두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그 오른쪽 옆으로는 레아와 델피나가 함께 가꾸려 터를 봐 두었던 라벤더 숲 자리가 있었다. 그는 가만히 그곳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언제나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호두나무를 쳐다보았다.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그는 허리춤에 꽂혀 있는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제 목 한가운데에 찔러 넣었다.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자리를 다 뒤덮을 때까지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몇 시간 후에야 그는 유명을 달리했다. 애통한 죽음이었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목숨을 끊는 것은 왕국의 커다란 손실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죽음을 느끼고 의식이 점차 흐려지고 겨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자, 그는 또 여왕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이사벨라 리버런의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제법 미인이라니, 사랑하는 조카여, 왕국 최고의 미녀에게 그런 평가는 너무 냉혹하군.”
그는 이번에는 1초도 더 망설이지 않았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었다. 그는 여왕의 앞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줄리앙 레날 공작, 뭐하는 겐가?”
여왕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그는 성의 꼭대기로 올라가 제 몸을 던졌다. 이번에도 즉사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다시 한번 눈을 떴을 때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었다.
“제법 미인이라니, 사랑하는 조카여, 왕국 최고의 미녀에게 그런 평가는 너무 냉혹하군.”
* * *
“그만해요.”
레아가 흐느끼며 말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녀는 더 이상 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참을 도리가 없었다. 저보다 더한 슬픔을 겪은 자는 눈물 한 방울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끝내고 서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가슴에 매달려 그 넓은 가슴을 제 작은 손으로 끊임없이 어루만졌다. 울지도 않는 제 남편의 가슴속에 맺혀 있을 고통이 이렇게 하면 모두 씻겨 내려갈 거라는 듯이.
줄리앙이 그런 그녀를 양팔로 끌어안아 주었다. 호두나무처럼 커다란 키를 한 그는 레아의 온몸을 그렇게 양팔로 감싸 안고는 다 괜찮다는 듯이 천천히 토닥, 토닥,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대체 몇 번을 죽은 거죠?”
“죽어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지칠 때까지요.”
“대체 왜…….”
왜, 다음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레아는 몰랐다. 왜 죽었나요, 왜 지금까지 살아 있나요, 왜 그렇게 되어 버린 건가요, 왜 이 모든 것을 견디고도 울지 않나요. 어떤 것도 그녀가 진짜로 그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아니었다.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왜’가 아니라 모두 ‘어떻게’로 시작되었다. ‘어떻게 그 모든 일을 겪고 내 앞에 이렇게 다정하게 서 있을 수 있나요?’ 그것이 정말 레아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줄리앙은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덤덤히, 아니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얘기했다.
“레아 리버런, 예전에 제가 얘기한 적 있지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밤 산책을 하시는 것이 취미였다고요. 아주 추운 날이 아니면 언제고 밤마다 영지를 돌며 호두나무 앞까지 가서는 키가 큰 아버지가 어머니를 한번 토닥토닥, 어린 나를 한번 토닥토닥 해 주셨다고 말입니다.”
레아는 우느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여는 대신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레아의 대답 따위는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줄리앙이 천천히 이야기를 이었다.
“그게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당신이 내게 해 준 얘기지요. 앞으로 누가 아버지 어머니 얘기를 물으면 그렇게 대답하라고요. 그러면서 내 등을 이렇게 쓸어 주었지요. 나는 당신의 등을 토닥여 주었고요. 그럴 때마다 당신 심장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습니다. 나는 그것이 참 좋았어요. 아니 사실은 둔한 나는 그런 건 모르고 있었는데, 당신이 말했지요. 이렇게 안으면 심장 소리가 잘 들려서 좋다고요. 기억합니까?”
레아는 울음을 그치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당신과 나와 델피나도 매일 밤, 그렇게 산책을 했는데, 그리고 내가 당신을 그렇게 토닥여 주었는데 그것은 기억합니까? 그렇게 안을 때마다 당신 볼이 내 볼에 닿는 것이 나는 퍽이나 좋았습니다.”
레아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세게 고갯짓을 하면 목이 다친다고 말했잖습니까? 제가 한 천 번은 말한 것 같습니다.”
레아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줄리앙이 한 발짝 더 다가와 레아의 눈가를 섬세한 손길로 닦아 주었다.
“울지 마세요. 레아. 당신이 그랬습니다. 기억은 만드는 것이라고요. 나는 오로지 그 말에만 의지해 살았습니다.”
무덤덤한 목소리로 줄리앙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 * *
죽어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줄리앙은 왕궁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보았고, 단검으로 제 목을 베어도 보았다. 제 몸에 불을 질러도 보았고, 벼랑에서 떨어져도 봤다. 손목을 끊어도 보았고, 약을 먹어도 보았다. 하지만 어김없이 눈을 떴다가 감으면 이사벨라 리버런의 초상화가 제 앞에 있었다.
얼핏 보면 레아랑 좀 닮은 것도 같고, 하지만 전혀 닮지 않은 것도 같은 그 얼굴을 수십 번 보고 나서야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왕의 앞에서 예전과 똑같이 스무 살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네. 지금 당장 리버런 섬으로 가겠습니다.”
그 밖에 다른 어떤 것을 계획할 힘도, 생각할 여력도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리버런 섬으로 향했다. 달라진 것은 그의 발걸음의 무게 하나였다.
그는 예전처럼 레아를 만날 생각에 들뜨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보면 물론 사무치게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행복함을 느낌과 동시에 못 견디게 미안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제 막 열넷이 된 레아 리버런은 열다섯이 되자마자 죽어 버린 그의 딸, 델피나와 판에 박힌 듯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제 그의 딸은 이 세상에 없다. 영원히 없을 것이다. 다시 레아와 아이를 만든다고 해도 그 아이는 델피나가 아니다.
아니 이것은 아마 신의 농락일 것이었다. 이제 슬슬 모든 일에 익숙해진 그가 그럭저럭 잘 견디는 꼴이 보기 싫었던 신이 부린 장난일 것이었다. 아마 앞으로 레아와 줄리앙 사이에 아이는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이번 삶은 지난번 삶과는 달랐다. 모든 것이 그대로가 되었지만 단 하나, 어떻게 해도 되살려 낼 수 없는 존재가 있었다. 그의 딸은 이제 이 세상에서 영영 볼 수 없는 존재였다. 그것을 견뎌 낼 수 없어 수십 번을 죽은 것인데, 그럼에도 모든 것이 똑같아 이제 죽는 것을 그만둔 것인데도 그 생각에 빠져들 때마다 줄리앙은 자신이 땅에 발을 딛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버거웠다. 이 생이 버거웠다.
그럼에도 그가 리버런 섬으로 갔던 건 단순한 본능 때문이었다. 어미를 찾는 새끼처럼, 물을 찾는 사막의 수도자처럼, 그의 본능이 레아를 한 번만 보면 살겠다고, 레아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도착한 리버런 섬에 레아는 없었다.
“리버런의 네 번째 딸, 제인 리버런이 줄리앙 레날 공작님께 인사드립니다.”
“네 번째 딸이요?”
“네. 네 번째 딸, 제인 리버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