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다가가는 법
다음 날, 레아의 방 앞에 이전의 두세 배는 될 정도로 커다란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 그러고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줄리앙은 레아에게 그 초콜릿을 선물하곤 했다. 그 정도였다. 그 이상 길게 대화를 나눈 적도,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일도 없었지만, 언제나 눈치를 채 보면 레아의 옆에는 줄리앙이 있었다.
둘은 가끔은 읽고 있는 책 이야기도 했다. 가정교사가 권하는 역사서가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레아에게 줄리앙은 제가 가지고 있는 소설을 몇 권 빌려주었는데 그것은 레아가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는 종류의 책들이었다.
왕궁을 배경으로 한 기사와 레이디의 로맨스, 궁에서 누군가가 죽어 나가고 범인을 밝혀 나가는 미스터리. 레아는 줄리앙이 빌려준 책을 밤새워 다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정작 아침 식사를 즐기러 가서 태연자약하게 제 앞에 앉아 있는 그 잘생긴 면상을 보고 있자면, 그 얼굴에서 득의만만한 미소가 피어오르게 하고 싶지 않아 꾹 참고 이렇게만 말하고 책을 돌려주곤 했다.
“제법 재밌네요. 잘 읽었어요.”
그러면 줄리앙 역시 별말 없이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 책을 들고 제 거처로 돌아갔다. 레아의 예상대로 이건 지는 게임이었다. 레아는 언젠가부터 자꾸 어디에 가든 줄리앙이 제 옆에 있나를 확인했다. 정작 저쪽은 여유만만이었는데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존재는 가랑비에 옷이 젖듯 천천히 스며들어 왔다. 티타임이 끝나고 제 방으로 돌아가려 하면 줄리앙은 언제나 레아에게 에스코트를 하겠노라 청했다. 어느 날엔가, 레날의 영지에 다녀오겠다며 줄리앙이 처음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 레아는 라벤더 숲을 홀로 지나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줄리앙에게 너무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별다른 대화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레아는 그의 부재가 퍽도 서운했다.
레아가 앞서 걸어 나가면 줄리앙은 언제나 몇 발걸음 뒤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큰 키가 만들어 내는 커다란 그림자가 레아에게 드리우는 것을 보고 레아는 그가 자신의 뒤에서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그뿐이었는데, 그 그림자가 사라졌다는 것이 이렇게 서운하다니. 레아는 퍼뜩 무서워졌다.
그녀는 다시 뮤리엘을 불러다 놓고 제 맘을 털어놓았다. 이사벨라는 결혼을 해 이제 더 이상 레아의 말상대가 되어 줄 수 없었고 제인은 너무 어렸다. 뮤리엘은 본관의 집사 밑에서 일하는 사용인 하나와 막 연애를 시작한 터였다.
“뮤리엘, 있잖아. 내 얘기는 아닌데.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매일 매일 쫓아다니고, 옆에 있고 그러는데.”
“쫓아다닌다고요? 아가씨, 그거 범죄 아닌가요? 사용인을 불러다가 말할까요? 아니 이를 어째? 지금은 공작님도 안 계신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 옆에 늘 있고 가끔씩 막 선물도 주고.”
“선물이요?”
“응. 맛있는 것도 주고 또 달라고 하면 또 주기도 하고, 엄청나게 커다란 걸 주기도 했어. 아니 그게, 그랬다고 하더라구, 친구가. 그리고 매일매일 눈에 보이는 데에 있는다더라고. 그러다가 갑자기 잠깐 어디에 갔는데 그 사람이 보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든다고 하던데, 왜 그러는 걸까? 내, 어, 그 아는 사람은 말이야. 걔는 왜 그런 마음이 들까?”
“레날 공작님이 어디 가셔서 보고 싶으세요?”
“내 얘기가 아니고 아는 사람 얘기라니까?”
뮤리엘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보다 두 살 어린 귀족 아가씨가 이제야 뒤늦게 사랑에 눈뜬 모양이 뮤리엘의 눈에는 퍽도 귀여워 보였던 것이다.
“아가씨 맛있는 게 먹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공작님이 보고 싶은 거예요?”
“맛있는 것도 먹고 싶고 공작님도…… 아니 그게 아니라, 내 친구 얘기래도!”
“알았어요. 그럼 아가씨, 친구분은 초콜릿이 없으면 그분을 안 만나도 좋다고 했나요?”
“응? 초콜릿? 초콜릿이 없으면― 그게…….”
레아는 제 방문을 열면 놓여 있던 예쁘게 포장된 커다란 초콜릿 상자를 떠올렸다. 그 초콜릿을 하나하나 맛보며 줄리앙의 근사한 얼굴을 생각하던 때도 떠올려 보았다. 눈을 위로 치켜뜨니 머리 위로 동동, 그 잘생긴 얼굴이 그려졌다.
지금은 곁에 없는 줄리앙, 눈이 맑고 말이 없다. 굳게 다문 입술은 때때로 열려 가끔 아주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 준다. 정말이지 너무하다시피 잘생긴 얼굴이었다.
흠잡을 데 없는 조각상같이 생긴 그 얼굴이 웃으면 눈가로 주름이 몇 가닥 생기고 볼이 살짝 파이는데, 그게 참 멋졌다. 처음엔 능글맞게 웃는다고, 재수 없는 미남자라고 생각했는데 꾸준히 지켜보니 그는 그렇게 경박한 사람도, 감정이 헤픈 사람도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레아는 무슨 말을 꺼낼 때마다 옆에 있는 줄리앙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레아가 꺼내는 농담에 그가 활짝 웃어 주기라도 한다면(거의 늘 그랬지만) 이상하게도 뭔가 해냈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와 더 친해지고 싶었다.
“아가씨?”
“응 그러니까, 어, 뭐라고 했지?”
“초콜릿이요. 초콜릿이 없으면 공작님을 안 만나도 좋아요?”
“아니, 초콜릿이 없어도 공작님을, 아니 그러니까 내 친구가―.”
레아는 자신을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는 뮤리엘의 얼굴을 쳐다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고는 포기한 듯이 말을 이었다.
“그래, 초콜릿이 없어도 공작님은 만나고 싶어. 내 옆에 계속 있으면 좋겠어.”
“그럼 아가씨, 그거 사랑이에요.”
“이게 사랑이라고? 이런 게 무슨 사랑이야.”
“보고 싶은 거 그거, 사랑이에요.”
“난 이사벨라 언니도 보고 싶은데?”
“아니면 하다못해 관심이에요. 저도 지금은 뭐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지만 제이크랑 처음 만났을 때 그랬는걸요. 옆에 늘 있고 싶고, 떨어지면 보고 싶고요.”
“제이크랑 헤어진다고?”
“그건 다른 얘기고요. 아무튼요, 그런 마음이 든다면서요. 아가씨, 그럼 사랑한다고 말해요. 관심 있다고 말해 보세요. 아가씨도 공작님한테 마음이 생긴 거잖아요?”
레아는 다시 머릿속에 줄리앙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이 줄리앙에게 대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도 생각해 보았다. 아까 그 사려 깊고 진중해 보이던 모습을 지우고 악마같이 웃으면서 그럴 줄 알았지, 하고 신나하는 줄리앙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럴 줄 알고 초콜릿을 주었지, 이제 다 내놔! 라고 하면서 초콜릿을 빼앗는 줄리앙의 모습이 갑자기 같이 떠올랐다. 레아는 머릿속의 쓸데없는 생각들을 지우려고 고개를 휘저었다.
“근데 그 사람은 나를 안 사랑하면 어떡해?”
“그럴 리가요. 늘 아가씨 곁에 붙어 다니고, 맛있는 것도 주시고 하잖아요.”
“거야 정혼자니까 그런 거지. 그리고 나랑 결혼하면 자기한테 떨어지는 게 있으니까 그런 거고.”
“레날의 공작님이 자기 잇속 하나 챙기겠다고 아가씨랑 결혼을 한다고요? 수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에 와서 벌써 일 년째 아가씨 옆에만 붙어 다니고 있는데요? 그럴 리가요. 제가 보기엔 공작님은 틀림없이 아가씨를 사랑해요.”
“그래? 그럼 나는 어떻게 해? 공작님은 내 뒤에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지, 나한테 저를 좋아하냐고 묻지도 않고 뭐 하나 특별히 하는 것도 없단 말이야.”
“그거야 아가씨가 첫 만남부터 공작님을 막 이렇게 째려보시고 그러셨으니까 그렇죠!”
이제 레아는 울상이 되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 나? 이제 와서 갑자기 막 사랑해요, 이러라구?”
뮤리엘은 이제 막 열여섯이 된 레아에게 아이를 타이르듯 부드럽게 조언했다.
“말이 쑥스러우시면 행동을 해 보세요. 일단 먼저 다가가 보세요.”
“다가가? 다가가서 어떻게 하는데?”
“남자는 접촉을 좋아하는 법이라고 하잖아요. 스킨십. 스킨십 아시죠? 아가씨의 보드라운 살결이 닿는다면 레날 공작님도 맥을 못 추실걸요!”
뮤리엘의 작은 날갯짓이 레아에게로 가 커다란 폭풍이 될 것을 이 어린 하녀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 말을 했을 때 뮤리엘이 생각한 스킨십이란, 함께 라벤더 숲을 걸으며 손이라도 살짝 잡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줄리앙의 추천 이후 열심히 궁정 로맨스 소설을 읽어 재낀 레아의 머릿속에서 스킨십은 그보다 더한 것이었다.
그래서 줄리앙이 리버런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레아의 밤 산책길을 돌봐 주던 때가 오자, 라벤더 숲을 한참이나 걷다가 제 방 앞에 도달한 레아는 팽 뒤돌아, 1년을 넘게 제대로 된 대화 몇 번 한 적 없는 줄리앙 레날 공작에게 뚜벅뚜벅 다가가서는 이렇게 말하고 만 것이다.
“줄리앙 레날 공작님!”
“네, 레이디 리버런.”
“제안할 것이 하나 있어요.”
“네, 말씀하십시오.”
“우리 한번 자요.”
* * *
“그때도 내가 먼저 자자고 그랬다고요?”
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줄리앙은 한숨을 푹 쉬는 시늉을 했다. 눈가엔 어느새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혹시 매번 그랬나요?”
레아의 물음에 줄리앙은 대답 없이 실실 웃기만 했다. 때로는 침묵만큼 큰 긍정이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아는 사람처럼 말이다. 이번에는 레아가 한숨을 쉴 차례였다.
“아, 못살아. 나는 내가 아줌마가 되어서 이러는 줄 알았더니.”
“정말이지 매 생마다 단 한 번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좀 일렀지요. 당신은 고작 열다섯 살이었으니까요.”
“열다섯이요?”
“네. 그날 일을 기억합니다. 밤이 긴 유월 초입이었죠. 아직 해도 지기 전이었고요. 당신은 며칠 후면 열여섯이 되려는 참이었습니다.”
“발랑 까졌네요.”
레아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줄리앙이 웃음을 터뜨렸다. 레아는 줄리앙이 실컷 웃게 내버려 두다가 다시 한번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설마 나랑 잤어요?”
“열다섯이랑요?”
줄리앙의 잘생긴 눈썹 끝이 위로 올라갔다. 레아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왜요. 열다섯 살 때 나 제법 예뻤는데.”
“초콜릿을 더 먹고 싶어서 절 노려보던 어린아이인데요?”
이제 둘은 눈을 마주치고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작은 방 안에 눈물이 아니라 웃음이 번졌다. 웃음소리 사이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레아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보며 줄리앙은 그녀를 너무도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식사도 못 하고 이야기를 했군요. 이쯤에서 접어 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갈까요?”
“그 초콜릿이나 줘 봐요. 어디서 난 거길래 그렇게 맛있었던 거예요?”
“매일 먹고 있지 않습니까? 레날의 파티시에가 만드는 바로 그건데요.”
“아, 얘기하니까 또 먹고 싶네요.”
이미 새벽이 지나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둘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정찬을 즐겼다. 버터에 구운 야채를 올린 채소 타르트와 랍스터 반절을 집어넣은 수프가 두 사람의 식은 몸을 따뜻하게 덥혀 주었다. 허겁지겁 대구찜에 구운 닭까지 해치우는 레아의 먹성에 줄리앙 역시 동참했다.
모든 것을 다 말하고 나니 그 역시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를 다 들어 주고, 그 모든 추억을 함께할 사람이 지금 여기 바로 옆에서 맛있게 아침 식사를, 그러니까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좀 과한 식사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레아는 후식으로 나온 초콜릿 퍼지 케이크까지 거뜬히 먹어 치우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남자의 눈빛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지만, 레아는 자신을 쳐다보는 줄리앙의 눈빛을 보고 있자면 정말이지 이 사랑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줄리앙은 너무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레아를 지그시 바라보고 생긋 웃으며 다시 한번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 * *
레아가 열다섯에서 열여섯으로 넘어가려고 준비하고 있을 무렵, 그러니까 줄리앙은 이미 스물한 살이었던 그때였다.
“우리 한번 자요.”
갑작스러운 레아의 말에 줄리앙은 마시던 물이라도 있으면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
“우리 한번 자자고요.”
“그러니까 잠을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레아가 한숨을 푹 쉬고는 한 손으로는 오케이 사인을 만들듯 동그라미를 만들고 다른 손은 검지만 펴고 다 접고는 동그라미를 만든 손에다가 검지를 집어넣었다 뺐다 했다.
“이거요.”
줄리앙이 갑자기 딸꾹질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레이디 리버런, 그런 건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몰라요. 하인들이 이러던데? 아니에요? 아무튼, 그거요. 섹스요. 아, 그리고 이제 레아라고 불러도 좋아요.”
“대체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셨을까요?”
줄리앙은 침착을 찾고 물었다. 이 상황에서 침착을 찾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오래 산 자만이 가진 관록이 있었다.
“글쎄요. 뮤리엘이 그러던데요. 한번 자 보라고요.”
“뮤리엘이요? 당신 하녀 말입니까? 뮤리엘이 왜 그런 말을 했습니까?”
줄리앙은 레아에게 정황을 캐물었다. 그러고 나서야 감이 왔다. 레아가 대체 어쩌다가 이런 결론에 이르렀는지 말이다.
“그러니까 요점은 제가 보고 싶었다는 것이지요?”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요.”
“딱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아, 저를 사랑하시나요?”
한번 자자고 말하고 이상한 사인을 만들면서도 태연하던 레아의 작은 얼굴이 갑자기 활화산처럼 달아올라 새빨갛게 변했다.
“어, 그러니까 사랑하는 거 같아요.”
“제가 보고 싶어서요?”
“네. 그런가 봐요.”
레아는 갑자기 정말 소녀가 된 듯 쭈뼛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약한 어깨를 열다섯 소년처럼 늠름하게 펴며 당당히 서 있었는데 말이다. 그 모습이 귀여워 줄리앙은 그만 아까부터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웃겨요?”
“죄송합니다. 웃겨서가 아닙니다. 레아, 그러니까 제가 보고 싶어서 저를 이제 사랑하는 거 같다는 결론에 이르셨는데 그걸 말할 용기는 없어서 뮤리엘에게 조언을 구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런데 뮤리엘은 몸으로 부딪쳐 보라고 했고요. 그래서 저랑 자기로 마음먹었군요.”
레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너무도 순수한 감탄을 드러냈다.
“어쩜 그렇게 요점정리를 잘하세요? 공작님 공부도 잘하시죠?”
줄리앙은 삐죽삐죽 흘러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고, 웃음기만 머금은 채 다시 레아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됐네요. 저한테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몸으로 부딪치는 건 이제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저, 저는!”
제 말을 끝마친 줄리앙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려 하자 레아가 줄리앙이 그랬던 것처럼 쪼르르 달려와 줄리앙의 앞에 서서 그의 길을 막았다.
“그래도, 저는 아직 당신을 사랑하는 거 같지, 사랑을 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요. 자, 자 보면 알 거 같은데요. 그쵸? 자 보면 알잖아요. 당신이 빌려준 소설들에서는 그러던데요.”
줄리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설, 그만 빌려드려야겠습니다. 자 보지 않아도 전 압니다. 그리고 사랑, 아직 안 해도 괜찮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하면 되지요.”
소설을 그만 빌려주겠다는 이야기에 커다란 눈빛이 흔들리는 레아를 보며 줄리앙은 이 귀여운 여인을 바로 와락 안아 고양이에게 그러듯 맘껏 볼을 비벼 대고 싶은 마음을 정말이지 주체할 수 없었다. 호흡을 한번 길게 내뱉고 다시 걸음을 바삐 하려는 줄리앙을 레아가 한 번 더 멈춰 세웠다.
“그, 그래도요! 그래도 여자가 자자고 했는데 남자가 그냥 가는 법이 있어요? 소설에는 없던데요? 그렇다고 소설을 빌려주지 말지는 말고요. 진짜 재밌게 보고 있어요.”
말끝을 늘이며 사족을 붙이고는 순한 강아지처럼 커다란 잿빛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아에게 줄리앙은 정말 강아지 어르듯 손짓으로 이리 한 발짝 와 보라는 시늉을 했다. 레아가 조심스럽게 그의 앞에 서자 그는 커다란 두 손을 그녀의 양어깨에 올려 조심스럽게 가느다란 어깨뼈를 거머쥐었다. 레아의 작은 몸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얇은 천 아래로 느껴지는 작고 여윈 몸을 따라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팔을 타고 흘러 팔꿈치 쪽으로, 다시 손목으로 갔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조그마한 양손을 꼭 쥐었다가, 다시 풀어 깍지 껴 쥐었을 때 레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의 상체가 천천히 그녀에게 기울었다. 이건 키스다, 하고 레아는 생각했다. 키스, 드디어 키스인 것이다. 섹스의 전초전 같은 키스. 소설에서 보는 것처럼 이 남자가 뱀처럼 혀를 날름날름 거리면서 레아의 입을 열고 뜨겁고 말캉말캉한 혀를 마구 휘감아 올 것을 기대한 채 레아는 입을 쪽 내밀었다.
쪽, 소리가 나며 줄리앙의 마른 입술이 닿은 곳은 레아의 볼이었다.
레아가 천천히 눈을 뜨자 줄리앙은 그녀의 이마에 한 번 더 쪽, 소리를 내며 가벼운 키스를 날렸다. 입술은 금세 레아의 볼에서, 이마에서 떼어졌지만, 레아는 줄리앙의 그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가만히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줄리앙이 제 손을 꾹 잡았을 때에야 레아는 그 근사한 입매를 한 입술에서 눈을 올려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레아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는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몇 초 후 아주 천천히 휘어지며 웃었다.
“키스도 무서우면서 무슨 잠입니까? 레아 아가씨, 어서 방으로 들어가서 주무십시오.”
그러고는 레아가 정신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상냥한 미소를 한 공작은 그녀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레아는 그러고도 몇 분을 그렇게 라벤더 숲에 서 있다가 뮤리엘이 부르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방으로 들어와 한참을 제 볼을 어루만지다 생각하니 이것 참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그 검은 눈의 공작에게 매번 이렇게 놀아나는 기분이 들어서야 안 될 노릇이었다. 어떻게 된 것이 여자가 먼저 자자고 하는데 입술도 아니고 볼에 키스 한번 하고는 그냥 가 버리다니, 그럼 제 꼴이 뭐가 되느냔 말이다.
뮤리엘도 뮤리엘이었다. 몸으로 부딪치면 된다고 하더니 아예 와락 안아 버릴 걸 그랬나, 자신이 먼저 나서 스킨십을 제의했는데도 눈동자 한번 흔들리지 않던 공작의 모습을 떠올려 보다 레아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괜히 뮤리엘에게 투덜댔다. 레아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는 뮤리엘의 말을 따랐다가 괜히 창피만 당한 격이었던 것이다.
“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아가씨. 무슨 화난 일이라도 있으세요?”
뮤리엘이 그렇게 말을 걸어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레아는 속사포처럼 방금 전에 레날 공작과 있었던 일을 쏟아 냈다. 다 듣고 난 후 레아의 방에서 뮤리엘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뮤리엘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부끄러워하는 레아를 앞에 두고 한마디로 이 사건을 결론지었다.
“줄리앙 레날 공작님께서 아주 신사시군요.”
레아는 아직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레아의 이해력이야 어떻게 되든 간에 시간은 예전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돌아온 레날 공작은 예전처럼 모든 일에 레아와 함께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라벤더 숲을 걸어가는 길에는 레아의 뒤에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레아의 옆에 서서 레아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는 것이었다.
여름이 다가와도 서늘한 리버런 섬에서, 라벤더가 부딪치며 내는 사락사락 소리를 들으며 줄리앙 레날 공작의 따뜻한 손을 잡고 걷는 해 질 무렵의 시간이 레아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레날 공작은 조금 달랐다. 레아를 그렇게 제 방이 있는 곳까지 바래다주고는 밤 인사를 하고 그녀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는 시간, 그 시간이 그에게는 하루 중 제일 행복한 때였다.
낮에도 두 사람은 전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낮의 만남은 동생들과 어머니 모두가 모여 있는 곳에서 이루어졌고 대개는 줄리앙이 빌려준 책에 관한 이야기들뿐이었다.
레아의 열여섯 번째 생일에 줄리앙은 궁정 미스터리 소설 한 질과 최고급 깃털로 만든 깃털 펜 한 자루, 깃털 펜에 묻혀 쓸 수 있는 푸른색 잉크, 그리고 그 펜으로 글을 쓸 최고급 종이로 만든 노트 한 권을 주었다.
“당신은 글을 쓰면 잘 쓸 겁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는데요?”
“나야 모든 걸 알고 있지요.”
그렇게 말하고 웃는 줄리앙의 얼굴을 보고 레아는 다 아는 척하는 게 퍽도 재수 없다고도 생각했고, 얄미운 구석이 많은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또 어디론가 멀리 가서 한참을 안 온다면 보고 싶다고도 생각했고, 매일 봐도 적응 안 되게 잘생긴 얼굴이라고도 생각했다. 자기 전에 눈을 감으면 레아는 그의 심연같이 검은 눈을 떠올렸다. 그 눈동자에 상냥한 빛이 어리는 것을, 눈과 눈 사이에 잘 빠진 코가 멋진 곡선을 그리고 내려오는 것을, 굳게 다문 입술이 벌어지며 묘하게 웃을 때의 모습을, 남자다운 목울대를, 곧게 선 등뼈를, 커다랗고 하얀 손, 기다란 손가락을, 그 손이 제 손을 쥘 때 느껴지는 작은 악력을 생각했다. 가끔은 그의 꿈도 꾸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줄리앙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뭔가 지는 것 같아서였다.
‘사랑, 아직 안 해도 괜찮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하면 되지요.”
줄리앙 레날 공작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복기하며 레아는 굳게 결심했다. 그가 먼저 자신에게 애걸복걸하기 전에 자기가 다시 그에게 자자고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이다. 언제나 여유로워 보이는 그 얼굴이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아는 그 모습을 보게 된다.
겨울이 지나고, 새해가 밝아 올 때쯤이었다. 성안에 커다란 사건이 있었다. 큰 사건 전에는 언제나 그 전조가 되는 작은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이번의 작은 일은 뮤리엘에게서 시작되었다. 뮤리엘이 드디어 그녀의 애인, 제이크에게 이별을 고한 것이었다.
문제는 제이크가 그맘때 많이 보이는 고약한 심성의 젊은 남자들처럼 거절당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그에게는 뮤리엘과의 이별은 곧 죽음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식으로 첫사랑의 이별 선언은 곧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일이라고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제이크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뮤리엘의 죽음이었다는 게 그만의 유별나고 고약한 구석이었다.
제이크는 일주일간 뮤리엘을 쫓아다니며 못살게 굴었고 그 후 일주일 동안 번민하였으며 그 후 또 사흘간을 울부짖었다. 그러고 나서도 또 하루 동안 제 딴에는 치밀한 계획을 세운 끝에 뮤리엘이 레아의 방에서 세탁물을 가지고 나왔다가 티타임이 끝난 레아를 데리고 가는 점심시간을 노려, 옥수수 밭에서 튀어나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제이크의 계획은 비열한 데가 있었다. 그는 뮤리엘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단지 뮤리엘의 그 반반한 얼굴에 상처를 입히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칼 대신에 뜨거운 물을 준비했다.
제이크가 씩씩대며 펄펄 끓는 물을 한 양동이 가져와 뮤리엘의 앞에 뿌리려고 했을 때였다. 줄리앙이 뛰쳐나와 제이크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제이크가 가지고 있던 양동이에 있던 물이 첨벙거리며 앞으로 튀었다.
줄리앙의 뒤에 선 뮤리엘의 입에서 꺄악,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줄리앙은 얼른 두르고 있던 망토를 앞으로 둘러 뜨거운 물을 막았지만, 그의 팔은 옷 아래로 펄펄 끓는 물을 그대로 받았다.
티타임이 끝나고 레아가 두고 간 소설을 돌려주러 뒤에서 천천히 걷고 있던 참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줄리앙도 예상하지 못했다. 매번 생에서 조금씩 다른 일들이 펼쳐졌고, 단 한 번도 제이크 같은 녀석이 그의 생에 등장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레아는 다행히 몇 방울이 손등에 튄 것을 빼고는 아무 상해도 입지 않았다. 뮤리엘 역시 티끌 하나 없이 무사했다. 하지만 줄리앙은 왼쪽 어깨에서 팔꿈치 사이에 꽤 심한 화상을 입었다. 제이크는 공작의 몸을 해친 만큼의 벌을 받을 터였다.
레아는 그때 처음으로 안절부절못하며 저를 끌어안는 줄리앙의 모습을 보았다. 펄펄 끓는 물이 망토와 셔츠를 뚫고 그대로 닿아 퍽이나 아팠을 텐데도 줄리앙은 제 몸 걱정은커녕 제일 먼저 레아에게 달려왔다. 레아는 너무 놀라 눈만 꿈뻑꿈뻑하고 있었다.
줄리앙은 급하게 레아의 온몸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팔 두 짝을 들어 보이고, 가슴에서 허리까지를 제 손으로 휙휙 확인하고, 손, 발을 확인하고, 겨우, 손등에 튄 물방울 몇 개 때문에 생긴 작은 화상 외에는 아무 데도 다친 데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줄리앙은 레아를 와락 껴안았다. 그것이 그들의 첫 번째 포옹이었다.
하지만 레아는 첫 포옹을 한다는 감동을 느낄 새도, 드디어 공작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었다. 그 포옹은 너무 숨 막히고,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마치 레아를 어디 깊숙한 곳에 감춰 두려는 듯, 꽉 잡아 두려는 듯, 어떤 절실함까지 느껴지는 포옹이었다.
“뜨거워요.”
레아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화들짝 제 몸을 레아에게서 떼어 낸 공작은 그제야 아픔이 느껴졌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급하게 사람이 왔다. 화상이 꽤나 심각했던지 공작은 이 주일이 지나서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에도 레아는 몰래몰래 공작의 거처가 있는 별관에 숨어들어 그가 치료받는 모습을 보았다.
한쪽 몸에 흉측한 상처가 나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난리 통에 도망치던 제이크가 바로 잡힌 것이 다행이었다. 저 잘난 몸에 상처를 입힌 벌을 꼭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레아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뮤리엘이 공작님의 팬이 된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라며 뮤리엘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공작의 이야기를 해 댔다.
레아는 매일매일 뮤리엘의 도움을 받아 별채로 숨어들어 갔고, 줄리앙이 그 탄탄한 몸, 넓은 어깨, 굵은 어깨뼈, 군살 하나 없는 드넓은 등을 뽐내며 치료를 받는 모습을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 주 후, 드디어 줄리앙이 멀쩡한 모습으로 레아의 앞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자신의 결심을 또다시 번복하고 말았다.
“손.”
“네?”
“손은 좀 괜찮아졌습니까?”
레아가 줄리앙의 팔을 묻기도 전에 줄리앙이 먼저 레아의 손등에 대해 물었다. 이미 잠시 잡혔던 작은 물집조차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는데 말이다. 레아는 킥킥대고 웃으면서 응답했다.
“지금 내 걱정을 하는 거예요?”
하지만 줄리앙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걱정스레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레아는 멀쩡해진 지 오래라며 제 손등을 들어 보이고는 줄리앙에게 말을 꺼낼 준비를 했다.
일단 고맙다고 말해야 했다. 하녀 뮤리엘과 자신이 다치지 않게 해 주어 고맙다고 말이다. 그리고 별채에 몰래 가서 훔쳐본 것도 고백해야 했다. 나중에 알게 되면 좀 부끄러우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감정에 대해서도 말해야 했다. 도와줘서 고맙고, 안 보이면 보고 싶고, 늘 당신 얼굴을 생각하고, 분하지만 당신에게 조금 반한 것도 같고, 당신이 다쳤을 때는 많이 걱정도 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대신 레아가 제일 먼저 꺼낸 말은 생뚱맞은 이야기였다.
“곧 내 생일인 거 알지요?”
“곧……이요? 여름 아니었습니까?”
“6개월 후면 곧이죠!”
“아, 네.”
저를 노려보는 레아의 눈빛에 줄리앙이 주춤하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초콜릿 더 드릴까요? 아니면 뭐 혹시 가지고 싶으신 게 있으십니까?”
“초콜릿은! 더 주면 좋아요. 하지만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왜―.”
왜 갑자기 6개월이나 남은 생일 얘기를 하는지 줄리앙은 도무지 레아의 속마음을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천 살 먹은 노인의 마음으로 어찌 열여섯 소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생일이 지나면 저도 열일곱 살이에요.”
“그렇지요.”
“열일곱이 되면 당신과 결혼할 거고요.”
“그렇게 된다면야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서둘러야겠어요. 내일모레, 당신이랑 나랑 잘 거예요.”
“네?”
줄리앙은 이번에는 마시던 차가 있었기에 지난번과 달리 정말로 입에서 물을 뿜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잘 거라고요. 그렇게 알고 있어요. 거절할 권리는 없어요. 저도 이제 열일곱 살이고, 당신의 아내가 될 몸이니까요.”
뭔가 큰 결단을 내리고 한 말인 듯 씩씩거리며 그렇게 말하고는 총총총총 발소리를 내면서 저 멀리로 달려가 버리는 레아의 뒷모습을 보며 줄리앙은 너털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 * *
“그래서 이번엔 잤나요?”
초콜릿을 입 한 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이제 열여덟이 된 레아 리버런이 그의 남편에게 물었다.
“그럼요.”
줄리앙은 웃으며 이번에는 잤냐는 레아의 물음에 긍정을 표했다.
“어떻게요?”
레아가 익살맞은 표정으로 그렇게 묻자, 줄리앙은 레아에게 눈을 감아 보라는 시늉을 했다. 레아가 커다란 눈을 살짝 감고, 그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렸을 때, 줄리앙의 마른 입술이 아주 오래전에 그랬듯이 또다시 레아의 볼 위에 안착했다.
“또요?”
“뽀뽀가 뭐 어떻다고 그러십니까?”
“안 잤군요.”
줄리앙은 웃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부정의 표시를 했다. 그러자 레아는 열다섯 소녀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줄리앙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어떻게 잤는데요? 어디서요? 라벤더 밭에서 뒹굴었나요? 제 방까지 데려갔어요? 당신 방에서 했나요? 빨리 말해 줘요.”
레아가 그의 옆구리를 간질이며 추궁하자 줄리앙은 웃으며 장난스레 레아를 끌어안았다. 레아는 줄리앙의 품에 안긴 채로 한 바퀴 뒹구르르 굴렀다. 나무 바닥에 레아를 눕히며 줄리앙은 제 손으로 레아의 머리 아래를 받쳤다. 그의 이런 섬세한 배려가 레아는 좋았다. 가장 격렬한 섹스를 하는 순간에도, 레아의 몸 어느 한구석이라도 부딪치거나 상처나 아픈 데가 없는지를 은근슬쩍 살피고 조심해 대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늘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제 와 보니 그 모든 것들이 그가 겪었던 수많은 생의 고통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레아는 제 손을 올려 자신의 목을 편안히 받쳐 주는 그의 커다란 손을 빼냈다. 그러고는 그를 꼭 껴안고 빙그르르, 돌았다.
“그래서 이렇게 저를 눕히고 했어요?”
줄리앙은 상체를 일으켜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는 벽에 기대어 앉아 제 무릎 위에 레아를 올렸다. 그러고는 레아를 꽉 껴안고 그녀의 목선에 고개를 파묻고 말했다. 그래, 그렇게요. 당신이 좋아하는 그 방식대로요.
“그리고요, 그리고요.”
“그리고 여름이 되었고. 당신과 결혼했지요. 우린 아주 행복하게 살았고…….”
“그때의 난 꽤 오래 살았군요. 서른셋이면.”
“서른셋은 아직 어린 나이지요. 하지만 당신이 가장 오래 산 삶이긴 했습니다.”
“그리고 죽었고요.”
“네.”
줄리앙은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대로 입을 다물고는 창가를 바라보고 가만히 있었다. 세 번째 삶을 살고 있는 레아도 이제는 작은 침묵 정도는 너끈히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이 생겼다. 그의 가슴팍에 귀를 대고 제 남편이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을 그녀는 잠자코 기다렸다. 줄리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내려갈까요?”
“내게 하려던 이야기는 이게 전부인가요? 우리가 만났고, 또 사랑에 빠졌고, 내가 가장 오래 살아서 기뻤고요.”
“네. 이게 전붑니다. 당신이 행복한 이야기를 더 해 달라면서요.”
줄리앙의 무릎에 앉아 있던 레아가 자세를 똑바로 했다. 아래로 떨구어진 줄리앙의 고개를 제 양손으로 잡아 저를 바라보도록 해 놓고 레아는 정확한 발음으로 천천히 물었다.
“아니잖아요. 줄리앙.”
줄리앙은 말이 없었다.
“더 할 얘기가 있잖아요. 당신이 분명 그랬어요. 당신 손으로 죽은 적이 있다고요. 이 삶에서 그랬다고요. 왜 죽었나요.”
“당신이 오래 살고 죽어서 더 힘들었으니 그랬나 봅니다.”
“뭔가 더 있다는 걸 알아요. 줄리앙.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이해해요. 하지만 이건 당신 인생 이야기지만 내 인생 이야기이기도 하잖아요. 말해 주세요. 들을래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커다란 눈, 그 눈 자체가 이 세계 전체 같은 저 회푸른 눈, 잿빛으로 반짝이는 눈, 그 눈에 잔뜩 담긴 연민과 고통, 걱정 어린 호기심과 마주하며 줄리앙은 레아의 손을 쥐었다. 어느새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그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가 호호 불어 따뜻하게 덥힌 후, 줄리앙은 다시 한번 힘겹게 입을 뗐다. 방 안을 달구고 있던 훈훈한 온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행이었다. 따뜻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