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첫 만남
카리안 알드망의 잡화점에서 나온 줄리앙은 곧바로 여왕의 성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조카의 알현 요청을 여왕은 반가이 맞이하였다.
“가겠습니다. 리버런 섬에요.”
“바로 지난달에 이곳에 와서 이사벨라 리버런과 결혼할 수 없다고 한 것이 자네 아니던가? 무슨 심경의 변화인가? 왜, 집에 가서 초상화를 한번 떠올려 보니 목석같은 조카님께서도 마음이 동하던가? 글쎄. 벌써 구혼자들이 리버런 섬에 도착한 지도 꽤 되었을 터인데.”
“이사벨라 리버런과 결혼은 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저는 리버런가의 네 번째 영애와 결혼할 것입니다.”
여왕은 잠시 리버런가의 일곱 자매의 순서를 떠올려 봤다. 일곱 모두가 미녀라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사벨라 리버런이나, 어린 시절부터 명석한 걸로 이름을 떨쳤던 다섯째 제인 리버런 외에 다른 이름들은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게 누군가?”
“레아델피나 루이스 리버런. 올해 14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곧 15세가 되겠군요.”
“15세면 가까스로 결혼 적령기에 들기는 한다만, 너무 이른 것 아닌가? 조카님께 그런 취향이 있었나?”
음흉스러운 여왕의 목소리에 줄리앙은 아랫입술을 꾹 다물고 여왕의 얼굴 대신에 바닥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지금은 발톱을 숨기고 간절히 부탁해야 할 때였기 때문이다.
“레아 리버런과 결혼하겠습니다. 단, 결혼식은 3년 후에 올릴 것입니다. 3년 동안 제가 리버런 섬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폐하.”
“3년이라고?”
여왕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여왕의 여동생, 줄리앙의 어머니가 세상을 뜬 지도 벌써 3년이 더 되었다. 어린 가주였지만 그동안 누구보다 현명하게 레날의 영지를 다스리던 것이 줄리앙이었다. 레날의 영지는 주인이 그곳을 버리고 가도 알아서 잘 돌아갈 정도로 조그마한 마을이 아니었다.
“자네 영지는 어쩔 셈인가? 조카여, 자네는 내가 죽는다면 섭정 공의 자리에 올라야 할 몸이라네. 지금 함부로 영지를 3년씩이나 비우겠다고 하는 건가?”
“대리자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저택은 잘 돌아갈 것입니다. 제가 가끔 왕래할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리버런 섬에 가겠다고 하는 이유가 뭔가? 레아 리버런과 결혼하려면 3년 후에 가서 해도 좋지 않은가?”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여왕 폐하, 부디 이 조카의 마음을 헤아려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번이 아니면 전 영원히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왕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 나이에 어미 아비를 모두 여의고 어느새 훌쩍 커서 성인 남자의 몸을 갖춘 여왕의 조카는 언젠가부터는 말수도 적어져 묻는 말에도 네, 아니오, 외에는 대답하는 법이 없었고, 여왕의 명이라는 거창한 분부를 내리지 않는 한은 저를 보러 오지도 않았다. 그런 줄리앙이 마치 어릴 때처럼 여왕의 앞에서 감히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가지고 싶은 게로군.”
“레아는 물건이 아닙니다. 갖겠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요. 제가 이미 그녀의 것이라 그렇습니다.”
여왕은 잠시 줄리앙이 리버런 섬에 들어간 적이 있었던가를 떠올렸다. 여왕이 알기로는 그런 일은 없었다. 리버런의 일곱 자매가 섬 밖으로 나온 일도 알려지기로는 전무했다. 그렇다면 이사벨라 리버런의 것이 그렇듯 또 네 번째 영애의 초상화가 어딘가의 호사가들 사이를 떠돌고 있고 그녀의 조카는 그것을 보고 단번에 반한 것이 분명했다. 너무도 어린 젊은이다운 일이었다. 여왕은 다시 한번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좋네. 그럼 내가 조카님을 도와드리지. 리버런 공에게 연락하여 허락을 받아 둠세. 자네는 다른 구혼자들과 경쟁할 필요 없네. 채비가 되는 대로 언질을 주게.”
“이미 모든 채비를 꾸리고 왔습니다.”
다시 한번 여왕의 웃음소리가 웅장한 알현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래, 내 바로 연락하지. 행운을 비네. 조카여.”
그리고 그 행운 역시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줄리앙 레날 공작이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북쪽으로 옮기는 동안 리버런 섬에서는 또 다른 소란이 펼쳐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 * *
“언니는 마법의 여름을 갖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야?”
아침 일찍부터 레아의 방문을 뻥 차고 들어온 것은 다섯째 제인 리버런이었다. 혼자 오기는 멋쩍기라도 했는지 제인은 아직 마법의 여름이 뭔지도 잘 모를 막냇동생 마리안느 리버런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그렇다고 하더라.”
“그게 말이 돼?”
“지금 네가 억울할 거 같니, 내가 더 억울할 거 같니?”
제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레아 역시 이제 고작 열넷이 지난 어린 소녀였다. 동생의 마음을 헤아려 달랠 만한 여유는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이사벨라 리버런의 마법의 여름이 시작된 지도 이제 보름이 넘었다. 다섯 명의 귀공자들이 리버런 섬에 오고 나서부터 성내는 매일매일 축제 분위기였다. 그들이 몰고 온 휘하의 사용인들은 성 밖 출입이 자유로웠다. 덕분에 조용한 리버런 섬 안의 몇 안 되는 상점 거리도 올해따라 꽤나 복작복작해졌다고 전해 들었다.
엘리자베스 리버런의 마법의 여름에 레아는 갓 열 살을 넘겨, 아직 무도회나 티타임에 드나드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었다. 레아에게도 이번 여름은 특별했다. 난생처음 무도회를 위한 드레스를 몇 벌씩이나 맞추고, 매일같이 다섯 명의 미남자들과 함께 만찬이며 조찬회며 무도회며에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궁정 로맨스 소설에서나 보아 온 세상에 처음으로 들어온 듯했다.
리버런 섬은 수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사교계 데뷔라는 건 리버런가의 사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단어였다. 오직 마법의 여름만이 리버런의 일곱 자매가 사교계 비슷한 것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한데 오늘 아침, 청천벽력 같은 리버런 공작의 선언이 있었던 것이었다.
“마법의 여름도 이번이 끝나면 7년 동안 없을 터이니 총력을 다해 무도회를 진행하게.”
“네? 당신도 참. 3년 후면 레아가 열일곱 살이 될 텐데요?”
“레아의 결혼 상대는 이미 정해졌소. 그해 여름에는 구혼 과정은 없을 것이야.”
줄리앙 아르디 레날 공작. 여왕의 조카이자 레날 공작 가문의 가주. 그가 지금 리버런 섬을 향해 오고 있는 중이라 했다. 그가 이곳에 도착하면 레아는 바로 줄리앙 레날을 만나 혼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리버런 공작의 설명이었다.
그런 게 어딨냐고 항변할 기회조차 없었다. 이미 정해진 것이다. 별수 없었다. 리버런 섬에서는 리버런 공의 말이 곧 법이었다. 아버지가 그렇다고 하면 그래야 하는 것이다.
제인 리버런으로서는 자신의 구혼 과정에 앞서 언니들의 마법의 여름에 참가하며 사교계 데뷔 비슷한 것을 경험할 기회를 완전히 놓쳐 버리는 것이 되었다. 억울한 마음은 레아도 이해했다. 하지만 구혼 과정 자체를 겪지 못하게 되는 자신보다 억울할 리는 없었다.
분노는 제인에게서 레아에게로, 다시 레아에게서 이사벨라에게로 흘렀다.
레아는 조찬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고 혼자 방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는 씩씩거리며 이사벨라의 방으로 찾아갔다. 제인이 그랬듯이 방문을 뻥 차 버리는데 누군가 후다닥 자리를 옮기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언니?”
“레이디 레아 리버런, 오늘 아침때 못 뵈었던 걸 여기서 뵈니 반갑군요.”
그렇게 인사하는 것은 구혼자들 가운데에서도 이사벨라와 유독 자주 붙어 다니는 제이미 오를 공작이었다.
“그, 그러니까 저는 지금 여기, 그러니까 레이디 이사벨라 리버런 양이 책을 빌려주신다고 해서요.”
이사벨라의 얼굴이 발그레해져 있었다. 오를 공작은 한술 더 떠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이사벨라는 재빨리 가빠진 숨을 골랐다. 레아인 게 다행이었다. 레아는 깜깜한 밤에 등불 하나 켜 놓고 책을 읽어 온 탓인지 눈이 밝지 못했다. 눈치도 그 눈을 따라 어두운 편이라고 이사벨라는 늘 생각해 왔다. 그녀라면 이상한 낌새를 전혀 감지하지 못할 터였다. 예상대로 레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오를 공에게 다가갔다.
“네, 제가 좀 추천해 드릴까요? 제가 더 잘 알아요.”
그렇게 이사벨라의 방에 있는 온갖 책들을 다 가지고 그 방에서 쫓겨난 오를 공의 속마음을 짐작도 못 한 채 레아는 이사벨라에게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털어놓았다.
“레아, 이게 좋은 것 같니?”
“좋아 보이던데?”
순간 이사벨라의 얼굴이 빨개졌다.
“뭐, 뭐가?”
이사벨라의 생각을 모두 짐작이라도 한 듯 레아가 말했다.
“내가 눈치가 없긴 하지만 또 이런 쪽으로는 빠르거든. 궁정 로맨스 소설에 보면 꼭 이상한 핑계를 대고 이렇게 밀회를 나눈단 말이지.”
당황해서 딸꾹질까지 해 대는 언니를 보며 레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됐어. 나한테 걸린 게 뭐가 어때서 그래. 말 그대로 좋아 보인다고.”
“넌 뭘 안다고 어린애가 그렇게 능글맞게 조숙하게 말하는 거니?”
“나도 마법의 여름이 이렇게 행복한 때라는 걸 알 만큼은 컸지.”
잠깐, 자신에게는 마법의 여름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가 떠올린 모양인지 환하게 웃던 레아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게 뭐가 좋다고 그래, 레아?”
“전통이잖아. 재밌고. 여름 내내 축제 분위기인 것도 좋고.”
“전통? 아빠가 딸내미들을 통해서 좋은 집안과 연을 맺으려고 대충 짜 놓은 게 뭐가 전통이야? 언제 결혼해야 할지,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가 다 정해져 있는데 레아 너는 그게 좋다고?”
조금 전까지 제이미 오를과 그렇게나 뜨거운 사이를 뽐내더니, 이제 와서 마법의 여름을 즐기지 않는 척하는 이사벨라에게 레아는 심통이 났다.
“덕분에 그래도 언니는 직접 선택이란 걸 한 거 같은데 왜 그래? 귀족가의 영애들 중에 정략결혼이 아닌 결혼 하는 사람 봤어? 어차피 내가 누구와 결혼할지는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언니. 그래도 우린 형식상이라고 해도 고를 수 있었잖아.”
벨라는 한숨을 쉬었다. 동생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이사벨라 역시 아버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터였다. 하지만 이사벨라에게는 이 선택의 과정이 꽤나 괴로웠다. 다섯 중에 누굴 골라야 할지, 내가 마음에 든 사람 역시 나를 좋아하기는 할지, 저 사람이 내게 구혼을 하지 않는다면 나 혼자 망신을 당하고 끝나는 것은 아닌지 보름 내내 재고 따지자니 이사벨라 입장에서는 레아가 부럽기만 한 것이었다.
“레아, 너와 결혼할 사람이 누구인지도 들은 거니?”
“줄리앙 레날 공작이라지.”
레아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래, 공작님께서 직접 너를 택했다는 소문이 있더라. 순서상 내가 먼저인데도 말이야. 너는 그래도 확신을 가지고 너와 결혼하겠다고 여기에 오는 남자 하나를 만나면 되는 거야. 난 그게 부러워.”
“언니, 그 줄리앙이니 뭐니 하는 남자가 무슨 로맨스 소설처럼 나랑 스쳐 지나가면서 무도회에서 내 얼굴이라도 봤더라면 나도 로맨틱하네 싶었을 거야. 근데 그런 게 아니잖아. 그 남자가 날 선택해서 여기 온 이유가 뭐겠어? 3년이나 리버런에 살겠다고 하던데? 아들이 없는 우리 집에 와서 리버런 섬을 먹어 버릴 셈이겠지.”
이사벨라 역시 줄리앙 레날 공작이 어찌 된 까닭인지 리버런에서 3년을 머물고 나서 결혼식을 올릴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터였지만 미처 그 까닭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터였다.
“레아, 쪼그마한 머리를 굴려 고민하느라 고생했겠구나.”
이사벨라는 황금색이 섞인 초록빛 눈동자를 휘며 레아를 향해 웃어 보였다. 왕국 최고의 미녀가 보여 주는 미소의 위력이란 참으로 커다란 것이라 레아는 언니의 아름다운 웃음과 작은 위로만으로도 조금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쪼그마한 머리라니!”
“괜찮아. 좋게 생각하면 리버런 섬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거 아니겠니? 그리고 너, 모든 소문을 다 들어 놓고서 이 소문만은 못 들은 척하려나 본데, 줄리앙 레날 공작님께서 그렇게 미남이라고 하더라.”
레아는 얼굴을 붉히며 지금 그런 것이 문제냐고 소리를 쳤지만, 이미 화가 한결 누그러진 터라 그 커다랗고 낭랑한 목소리에 짜증은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
언니와의 대화를 통해 조금 진정하고, 그 잘생겼다는 얼굴에 대해 생각하며 다시 방으로 돌아온 레아는 내일 있을 무도회에서 입기 위해 주문해 둔 붉은 공단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마법의 여름 전에 이사벨라는 열 벌의, 레아는 다섯 벌의 새 드레스를 맞추어 두었다. 붉은 공단 드레스는 그중에서도 레아가 제일 맘에 들어 하는 것이었다. 이 드레스를 입고 그를 맞이하고 인사해야 했다. 앞으로 평생을 그녀와 함께할 그녀의 정혼자를 말이다. 레아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제멋대로의 정혼이었지만 말이다.
어릴 적부터 꿈꿔 오던 낭만이 가득한 연애도, 라벤더 숲을 거닐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일도, 모든 남자들이 레아의 앞에 무릎을 꿇어 청혼하면 그중 단 한 사람을 뽑아 그가 레아의 손에 키스하는 일도 이제 영영 물 건너갔다. 레아는 거울을 바라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내가 웃어 주나 봐라.”
그 시각, 줄리앙 레날은 레아의 그 얼굴 하나를 보려 서둘러 리버런 섬에 향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줄리앙이 도착한 바로 그날 저녁, 무도회가 열렸다. 리버런 공작은 여독을 풀고 내일 인사를 하자 했지만 줄리앙의 입장에서는 아니 될 말이었다. 카리안이 말한 대로 그는 자신이 행복해지는 그 길만을 쫓기로 했다. 그것이 레아도 행복해지는 길일 거라는 확신이 그에겐 있었다.
“바로 참석하겠습니다.”
“허허, 젊은 공작이 열정이 있군.”
회장 문이 열리고 리버런가의 자매들이 한 명 한 명씩 차례대로 걸어 들어왔다. 베스와 이사벨라, 레아는 차례대로 서서 줄리앙의 앞에서 인사를 했다. 아직 키가 덜 커서 줄리앙의 어깨에도 채 오지 않는 열네 살의 레아는 줄리앙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바닥만 바라보며 걸어왔다. 아마도 그녀의 첫 무도회일 터였다. 부끄러워 저러는 것인가, 그럴 성격이 아닌데 하고 생각하며 줄리앙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체 얼마 만에 바라보는 아내의 얼굴이란 말인가.
이번 첫 만남은 가장 첫 번째 인생을 생각나게 했다. 그때는 이미 키가 훌쩍 커 제법 어른 태가 나던 늘씬한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그때는 첫 만남부터 별로 좋지 않았는데, 하고 잠깐 줄리앙은 풋내 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게 안 좋은 감정으로 관계를 시작할 일은 이제 다시는 없을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리버런 드 라넬, 줄리앙 레날 공작을 뵈옵니다.”
“줄리앙 레날 공작입니다. 드 라넬 자작부인, 수도에서 한번 뵈온 적이 있지요.”
“이사벨라 리버런, 줄리앙 레날 공작을 뵈옵니다.”
“줄리앙 레날 공작입니다. 레이디 이사벨라 리버런, 마법의 여름의 주인공을 뵈어 영광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벨라의 모습 역시 반갑기 그지없었다. 줄리앙은 계속해서 입꼬리가 벌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제 한 발짝, 한 발짝만 더 옆으로 걸으면 드디어 레아와 인사할 수 있었다.
열네 살의 레아를 만나는 경험은 줄리앙의 기나긴 인생에서도 몇 없었다. 그는 늘, 그러니까 수백 번 반복되었던 인생 중 단 한 번, 레아와 결혼하기를 포기했던 적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공작저를 안전가옥으로 만드는 작업을 먼저 하고 나서야 리버런 섬으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레아는 줄리앙이 생전 본 적 없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붉은빛 공단으로 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자그마한 레아는 꼭 인형처럼 귀여웠다.
줄리앙은 자신과 수많은 인생을 함께한 아내, 비록 단 한 번도 함께 늙어 갈 기회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언제나 그의 곁에서 성숙한 아름다움을 뽐내어 주던 여인, 그의 침대를 붉게 수놓던 그 여자가 아니라, 아주 어린 여동생을 바라보듯 순수한 시선으로 레아를 바라보게 되는 스스로가 신기했다.
이 꼬마는 연애 상대라기보다는 한없이 사랑스럽고, 지켜 주고 싶은 작은 친구 같았다. 줄리앙은 앞으로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 것인가를 기쁘게 상상해 보며 레아를 마주했다. 이미 결혼을 확정 짓고 정혼자로서 만나는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이었다. 카리안의 말대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며 줄리앙은 그녀를 바라보고 웃을 준비를 했다.
‘레아 리버런, 내 사랑, 내 운명의 주재자, 이번엔 또 얼마나 귀여운 소리로 나를 놀래 줄 셈일까?’
그때까지 바닥만 바라보고 있던 레아가 고개를 들어 한 말은 확실히 그를 놀라게 하기는 했다.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었어요!”
그렇게 소리치고는 잿빛 눈으로 줄리앙을 실컷 노려보고서는 레아 리버런은 언니들에게 질질 끌려 나갔다.
“……줄리앙 레날 공작입니다. 나의 정혼자시여.”
레아의 등에다 대고 읊조리는 줄리앙의 말들은 회장의 소란스러움에 공허히 묻힐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줄리앙과 레아의 백아흔세 번째, 레아로서는 언제나 그렇듯 첫 번째 만남이었다.
* * *
레아는 가슴 한가운데가 아려 왔다.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었어요.’라니, 그 말을 듣고 줄리앙이 느꼈을 씁쓸한 감정을 레아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정작 현실은 그 말의 정반대였는데 말이다.
레아는 지금 자신 때문에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사내를 앞에 두고 있다. 그 사내는 길어진 이야기에 레아가 감기라도 들까, 아주 오래전에 그녀가 덮고는 했다는 담비 털 숄을 차가운 나무 바닥 위에 깔고, 레아를 앉혔다. 그것도 모자라 제가 입고 두르고 있던 망토를 레아에게 둘러 주고는 저는 높은 지위와 어울리지 않는 찬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옛이야기라도 하듯 다정히 소곤거리고 있었다.
“화가 나지는 않았나요?”
줄리앙은 별말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나였으면 화가 나서 같이 싸웠을 거예요.”
레아가 그렇게 말하자 줄리앙은 그들이 연푸른 드레스를 입고 정원을 거닐며 대화했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레아의 모든 말이 유쾌하다는 듯 그렇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 상상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아마 난 늘 그렇게 화를 냈나 보죠?”
“네. 나는 늘 그런 당신과 싸워 주기로 약속했고요.”
싱글벙글 웃는 줄리앙을 쿡쿡 찌르며 레아는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어서 해 봐요. 그래서 어떻게 나를 골탕 먹였나요, 능글맞은 레날 공작님.”
“골탕 먹이긴요, 부인. 앞서 말했듯, 그 생은 우리 인생 중 최고로 행복했던 때였는걸요.”
줄리앙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