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운명 (37/48)

37. 운명

“그래서, 레아를 살릴 방법은 없겠습니까?”

줄리앙이 카리안에게 제일 먼저 물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카리안은 딱 잘라 대답했다.

“바꿀 수 없는 운명도 있는 법이오.”

“하지만 인생이 반복된다고 해도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매번 뭔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줄리앙은 제일 먼저 레아의 연푸른 드레스를 떠올렸다. 아직 리버런 섬으로 가지 않았기에 이번 생에서는 또 언제 볼지 모를 그 드레스 말이다. 어떤 때에는 레아가 먼저 입고 있었고, 어떤 때에는 줄리앙이 직접 사 주었다. 어떤 때에는 그 드레스를 입고 결혼을 하였다.

또 매 삶마다 달라져 있던 왕국의 정세에 대해서도 생각하였다. 매번 똑같은 인물들이 엇비슷하게 한심한 짓거리들을 하며 귀족정을 꾸리고 있긴 했지만, 어떤 때에는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태평성대를 이루기도 했다. 줄리앙은 어떤 삶에서는 전쟁에 참가하거나 남쪽으로 토벌에 나서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여왕 친위대의 대장을 맡기도 했다.

리버런의 태풍마저도 매번 달랐다. 첫 번째 생에서 섬 전체를 잠기게 할 듯 집중호우를 뿌려 대던 먹구름은 그다음 삶에서는 리버런 섬을 찾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자연재해마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꿀 수 없다고?”

“그렇다오.”

격정을 가라앉히고 겨우 침착함을 가장한 채 묻는 줄리앙의 떨리는 목소리에도 카리안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심지어 내 아내는 매번 다른 이유로 죽고 있습니다. 매번 다른 때에 말입니다. 그런데 바꿀 수 없다는 말입니까?”

이번에는 그렇다고 대답하는 대신 카리안이 불쑥 질문을 했다.

“대체 몇 번을 산 것이오?”

줄리앙이 입을 다물 차례였다. 그는 이제는 세는 것조차 잊었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이 마법사가 살던 그 고약한 방, 레아가 남긴 향내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러나 여전히 줄리앙이 가장 자주 머물곤 하는 그 방에 걸린 흑판에는 차곡차곡 줄리앙이 살아온 숫자들이 기록되어 가고 있었다.

줄리앙이 입을 열 기미가 없자 카리안은 찻잔을 들어 입술을 한번 축이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토록 여러 번 노력했는데도 안 된다는 것은 신이 정한 운명이란 의미라오. 당신 아내는 길게 살 운명은 아닌 거지. 당신이 신이라도 된 양 오래 살며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이리저리 훼방을 놓아도 결국에는 이 게임은 승자가 정해진 싸움이라오. 신은 모든 것을 쉽게 간파하고 그 목숨을 앗아 갈 것이오.”

“왜 나란 말입니까?”

“내가 당신의 정체를 알아맞혔다고 착각하나 본데 나는 마법사이지 점성술사는 아니라오. 인간사 돌아가는 일을 내가 어찌 알겠소. 줄리앙 레날 공작.”

줄리앙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긴 이야기 내내 자신의 정체를 단 한 번도 밝히지 않았다. 놀라는 줄리앙을 바라보며 카리안이 웃었다.

“그렇게 놀라지 마시오. 선대 공작을 빼닮은 얼굴을 했는데 내가 알아채지 않고 배기겠소? 당신 할아버지가 나를 쫓아냈을 때, 여왕이 갑자기 모든 마법사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했을 때, 나 또한 그렇게 물었다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라고.”

“그래서 정답을 찾았습니까?”

줄리앙은 안타깝다는 듯이 카리안을 바라보았다. 여왕의 혹독했던 정책과 그로 인해 죽어 간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에 대해 그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앳된 소년의 티도 벗지 않은 새파란 젊은이가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게 카리안은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고통을 견디고 살아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검푸른 눈동자의 깊은 빛이 그 위화감을 덜어 주었다.

사람의 나이는 눈에서 느껴지는 법이었다. 카리안은 줄리앙이 보낸 동정 어린 시선을 그대로 돌려주며 그 나이 든 눈을 한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불쌍한 양반, 정답은 없다오. 당신은 어린아이가 개미 하나를 잡아 손으로 꾹 눌러 죽일 때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 개미를 골라 죽인 거 같소? 아니라오. 그냥 어쩌다 보니 당신이 된 것이오. 당신이 특별히 뭔갈 잘못해서도, 특별히 뛰어나서도 아니오. 누군가 장난으로 당신에게 그런 마법을 걸어 두었겠지. 어쩌다 보니 단명할 운명을 가진 여자를 만나 매번 당신 아내의 죽음을 목도해야겠지. 어쩔 수 없소. 모든 것은 운명이오.”

줄리앙은 그 말을 듣고도 포기할 수 없었다.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운명을 믿었다. 레아 리버런과 줄리앙 레날이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게 된 모든 것들은 운명의 힘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 운명이라는 것에 농락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질끈 눈을 감고 줄리앙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게 사랑이오?”

카리안의 물음에 줄리앙이 감았던 두 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카리안은 가늘고 긴 눈꼬리를 누그러뜨리고 줄리앙을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건 집착이오. 그만하시오.”

“그만하려고 해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검고 커다란 눈동자가 매섭게 카리안을 노려보는 것과 다르게 줄리앙의 목소리에는 그 눈만 한 힘이 없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무력하게까지 들리는 그 목소리에 늙은 마법사는 또다시 동정이 일었다.

“그만둘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그 여자를 포기하겠소?”

줄리앙은 이제 알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레아를 살리려고만 했지, 레아를 지켜서 행복하게 살겠다고만 다짐했지, 단 한 번도 이 끝없이 반복되는 운명의 고리에서 벗어날 다른 방책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만약 이 삶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그는 레아를 포기할 수 있을까?

“내가 여기에서 벗어나고 레아가 오래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리다.”

“욕심이 많군그래. 그 여자는 죽을 운명이라니까.”

“그럼 기꺼이 나도 계속 반복해서 죽겠소.”

카리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계속 차를 마시고 있는데도 입이 자꾸 바싹 말랐다. 이 젊은이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미 결혼하셨소?”

그는 늦게도 이런 질문을 했다.

“아니오. 이제 할 겁니다.”

줄리앙이 대답했다.

아직 레아를 만나러 가기도 전이었으나 줄리앙은 언제나처럼 확신했다. 레아를 만나고 결혼하는 것 역시 레아가 죽는 것처럼 늘 반복되는 그들의 운명이었으니 말이다.

“결혼을 하고 나면 아내를 데리고 내게 오시오.”

“왜, 레아를 데리고 오면 무언가 달라집니까? 본인이 점성술사인 줄 아냐며 몇 분 전에 내 질문을 비웃은 이가 당신 아니오?”

카리안을 비웃는다기보다 스스로의 운명을 비웃는 듯한 말투로 줄리앙은 그렇게 비아냥거렸다. 이번에는 카리안이 오래 산 자의 관용을 발휘할 때였다. 그는 슬픔에 빠진 자의 비아냥에 옳다구나 성을 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보다 더 오래 산 친구여, 감정이 상했다면 미안하오. 하지만 당신 아내의 죽음에 관해서는 내가 더 해 줄 일이 없소. 다만, 나는 당신을 이렇게 망가뜨린 여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번 보고 싶을 뿐이라오. 저열한 호기심처럼 여겨진다면 미안하오. 그러나 혹시 모르지 않소? 내가 그녀를 보고 어떤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 말이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제 어깨를 다독이고 이렇게 말하는 카리안에게 줄리앙은 오랜만에 이상한 정 같은 걸 느꼈다.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아니, 주변에 사람은 많았고 친구라고 부를 만한 자도 꽤 있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줄리앙 스스로가 누군가를 ‘친구’라고 여긴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비밀이 많은 자의 삶은 괴로웠다. 그는 오랜만에 친구로 대할 수 있는 자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도 몇 번 줄리앙은 그곳을 찾아갔다. 젊은 공작이 이 누추한 곳을 찾을 때마다 카리안은 군말 하나 없이 차 한잔을 우려내어 주며 작은 의자 하나를 내주었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웬 선문답인가 싶을 이야기들을 나누다 헤어지곤 했다.

그 생에도 줄리앙은 리버런 섬으로 가 레아와 결혼을 했다. 아흔일곱 번째 결혼식 역시 여느 때처럼 아름다웠다. 줄리앙은 이상하게도 매번 반복되는 이 결혼식이 싫지 않았다.

“영원히 그대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발아래를 쳐다보며 수줍게 미소 짓는 레아의 긴 속눈썹, 동그란 이마,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는 것은 질리지 않는 일이었다.

결혼식은 한 번도 완벽하지 못했다. 언제나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일어났다. 언젠가는 줄리앙이 전쟁에 참가하느라 레아 혼자서 결혼식 준비를 하고는 심통이 나 결혼식 전날 크게 다툰 적도 있었다. 또 언젠가는 드레스 자락을 밟고 미끄러진 레아를 줄리앙이 간신히 구해 낸 적도 있었다. 작은 사고에도 마음이 떨리던 때라 결혼식 내내 줄리앙은 식은땀을 흘렸다.

어떤 날에는 결혼식 축하 선물이라며 여왕이 보낸 궁중 음악대의 기나긴 연주에 하객들이 다 같이 졸아 버린 일도 있었다. 어떤 때에는 때아닌 더위에 결혼식 음식이 완전히 상해 버려 초대객들이 한꺼번에 배탈이 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불완전한 결혼식이라고 해도 레아는 언제나 즐거워했다. 커다란 눈동자를 행복이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일은 질릴 수 없는 일이었다. 녹초가 되어 드레스를 벗고 첫날밤을 보낼 때마다 그녀는 잠을 못 이루었다.

“너무 흥분해서 잠이 안 와요.”

“첫날밤에 그렇게 크게 흥분했다는 것도 내겐 좋은 일이긴 합니다.”

“뭐예요. 또 그런 이상한 소리는!”

“그런 얘기 아녔습니까?”

“그냥…… 이제 당신이랑 내가 부부인 거잖아요. 아내잖아요, 내가.”

“그래요. 내 아내.”

“평생 앞으로 나만 사랑할 거라고 했지요?”

커다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렇게 묻는 레아를 바라보고 줄리앙은 웃으며 물었다.

“왜, 의심됩니까?”

레아는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는 아니, 뭐, 하고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사랑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처음 감정이 계속되나요.”

“당신은 내가 첫사랑이라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레아?”

“그야 제가 글로는 사랑을 많이 접했으니까요.”

“당신이 보여 준 그 글에서는 사랑이 변하지 않던데요.”

“그렇긴 해요. 그런데 그렇게 영원히 사랑하고 행복하게 사는 건 소설 속에나 있는 일이잖아요. 우리 엄마랑 아빠를 보세요. 처음에는 분명 아빠도 엄마를 사랑했을걸요. 언니들만 봐도 그렇고요.”

“그래서 나한테 뭘 묻고 싶은 겁니까, 레아.”

줄리앙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첫 번째 인생 때 언제나 ‘나를 사랑하나요?’ 하고 묻곤 하던 레아, 그 레아였다. 언제나 똑같이 사랑스럽고 귀엽고 다정하지만, 고집 세고 신경 쓰이는 그 모습, 줄리앙은 다시 한번 마음이 쓰렸다. 그때 그는 레아가 이런 말들을 하면 성질을 내곤 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를 얼마나 사랑할 거예요? 지금처럼요. 오 년? 십 년?”

줄리앙은 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레아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만년은 더 사랑할 테니 안심하세요, 나의 아내여.”

“만년이 지나서도 살면요?”

“그럼 만년을 더 사랑하지요.”

레아는 거짓말이라며 삐지는 시늉을 하면서도 행복해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줄리앙은 첫 번째 인생 때부터 이렇게 그녀가 원하는 만큼 지치지 않고 안심시켜 주었더라면 우리 운명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다시 한번 줄리앙은 후회의 맛이 씁쓸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첫날밤에 들었다.

레날의 영지에 도착한 후 여독을 풀자마자 줄리앙은 레아를 카리안에게로 데려갔다. 시장거리로 향하는 마차에 타서 타주 강을 건너면서 레아는 여느 때처럼 또 조심성 없이 마차 밖으로 몸을 쭉 빼었다. 이제 줄리앙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화로 표현하지도, 성급하게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다정하게 그녀를 달래는 방법을 깨달은 지 오래였다.

잡화점 문을 열자마자 카리안은 바로 레아를 알아보았다.

“당신인가? 레아 리버런이?”

바로 제 이름을 말하는 저 표독스럽게 생긴 눈매에 쫄 법도 하건만, 레아 리버런은 언제나 그렇듯 레아 리버런답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레아 레날이지요.”

카리안은 아무 말 없이 일어서서 비틀거리면서 낡은 서랍장을 열어 찻잎 몇 가지를 꺼내고, 수백 개의 찻잔 중에서도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연하늘색 찻잔 하나를 꺼내어 차를 우려내었다. 별다른 말도 없이 차를 따라 주는 카리안에게 감사를 표하고 뜨거운 차를 꿀꺽꿀꺽 잘도 마시더니 레아는 신이 나서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돌아다녔다.

“이게 뭐예요?”

“악몽을 쫓아 준다는 장신구요.”

“와, 너무 예뻐요.”

“가져가시오.”

“이건 뭐예요?”

“가지고 있으면 운이 좋아진다는 돌이요.”

“우와, 신기해요.”

“그것도 가져가시오.”

뭘 예쁘다고 할 때마다 다 가져가라고 안기는 카리안의 꼴은 영락없이 오랜만에 찾아온 손녀딸을 어떻게 예뻐해야 할지 모르는 할아범 같았다. 레아는 카리안이 가져가라고 이것저것을 안겨 줄 때마다 사양도 않고 고맙다고 하며 방긋 웃었고, 카리안은 계속해서 레아에게 이것도 저것도 주고 싶은 눈치였다.

레아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낮은 천장 때문에 문턱 같은 곳에 이마라도 찧거나, 낡아 빠진 바닥 덕에 어딘가에서 못 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할라치면 줄리앙은 대경실색해서 레아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면 카리안은 또 그런 줄리앙을 보고 혀를 차며 안쓰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불면 날아갈 듯, 만지면 깨질 듯 구는 이유를 알기 때문에 그는 줄리앙이 불쌍해 견딜 수 없었다.

줄리앙은 줄리앙대로 그 둘을 관찰했다. 한참을 바라보다 그는 새삼스러운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는 레아가 정말이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을 정도라는 것, 다른 하나는 카리안도 이제 많이 늙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다리도 조금씩 절고 있는 노인네는 어두침침한 잡화점에 레아 리버런이 가져온 활기에 기분이 좋아진 눈치였다.

“다락방도 구경할 테요?”

그곳은 줄리앙도 한 번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서랍장 한편에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작은 계단이 있었지만, 정작 다락방 문은 쇠사슬로 꽁꽁 잠겨 있었다.

올라가서 문을 열자마자 줄리앙은 카리안이 왜 이곳을 그렇게 꽁꽁 잠가 두었는지 깨달았다. 다락방은 사방이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일종의 서재였다. 그리고 그곳에 꽂혀 있는 모든 책들이 마법서였다.

진귀한 책들이 많았다. 대체로 마법의 역사나 방법, 비책을 다루는 책들이었으나 군데군데에 마법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들이 끼어 있었다.

“와, 이런 건 처음 읽어요.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소설에조차 마법이 등장할 수도 없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소설이네요.”

레아는 줄리앙을 보고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또 오고 싶다는 말을 전하려는 듯이 말이다. 눈치가 빠른 카리안이 레아가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선수 쳐 대답했다.

“가져가시오. 원하는 만큼. 공작부인께서 또 언제 이곳에 오시겠소. 가져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몰래 보시고 태워 버리시오.”

“그래도 되는 거예요? 아니에요. 몰래몰래 보고 꼭 다시 돌려드릴 거예요. 그렇죠, 줄리앙? 당신이 돌려주실 거죠?”

줄리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돌려줄 시간은 있을 것이었다. 그가 가진 것은 언제나 넘쳐나는 시간들뿐이었으니까.

레아는 낑낑거리면서도 혼자서는 못 지고 갈 만큼 책을 빌리고, 찻잔을 한잔 더 비우고 나서야 집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레아를 마차에 태우고 나서 줄리앙도 함께 타려고 할 때 카리안이 줄리앙을 불러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늙고 외로운 마법사 양반. 어서 내 아내에게 가야 합니다.”

“서두르는 마음은 알겠소만, 잠깐 기다려 보시오.”

카리안은 손짓을 하며 다시 잡화점 안으로 줄리앙을 들어오게 했다. 그러고는 열쇠 하나를 줄리앙에게 건넸다.

“저 여자를 살리는 게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소. 사람의 생명에 관련된 마법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오. 하지만 당신 둘을 잇고 있는 이 고리를 끊어 내는 법 정도야 내가 알아낼 수 있지 않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며 책상 서랍에서 낡고 두꺼운 노트 한 권을 꺼내 보여 주었다. 줄리앙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카리안이 저에게 이 노트를 주려 한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죽으면 이 서랍을 열고 이 노트를 가지고 가시오. 그리고 다음 생에서 꼭 내게 다시 건네주시오.”

줄리앙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이 생에 다 끝낼 수는 없을 것 같아 미안하오, 친구여.”

줄리앙은 끄덕이다 만 고개로 신발 끝만 바라보았다. 고마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에 이 늙고 외로운 노인에게 곧 다가올 죽음에 쓸쓸한 마음이 뒤엉켜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만 고개를 들어 그 아름다운 눈을 내게 보여 주시오, 나보다 더 오래 산 친구여.”

카리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카리안의 노트는 얼마 안 가 줄리앙의 손에 들어왔다. 그 생에서도 레아는 어김없이 죽었다. 줄리앙은 남은 생 내내 비밀의 방에서 그 노트를 읽고 또 읽었다. 그 노트는 언제나 비밀의 방에 보관되었다. 줄리앙이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이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노트를 찾아 카리안에게 건네주고, 다시 한번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일이었다.

목표가 있었기에 줄리앙의 여생은 조금 덜 외로웠다. 레아의 죽음을 추모하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계획을 세우며 줄리앙의 남은 삶은 몹시도 분주했다.

줄리앙의 그러한 분주한 삶은 물론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노트를 보관해 두었다가 다시 카리안에게 건네주는 일, 아무것도 모르는 노인네에게 매번 처음부터 설명하는 일을 줄리앙은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노트 속에 끄적여 있는 고대어를 제대로 알기 위해 줄리앙은 인생의 수십 년을 고대어 연구에 바쳐야 했다. 괜찮았다. 시간은 넘칠 정도로 많았다.

덕분에 101번째 삶 즈음에는 왕국 내의 내로라하는 고대어 전문가가 되었고, 학술원에까지 들어가 고대어를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다년간 축적된 줄리앙의 고대어 지식을 따라갈 자는 아무도 없었다. 스무 살밖에 먹지 않은 줄리앙이 여느 노학자 못지않은 고대어 지식을 자랑하는 데에는 모두들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줄리앙 레날 공작은 그 빼어난 미모와 뛰어난 무훈에 이어 높은 지식으로 왕국 내에 그 이름을 드높이게 되었다.

고대어 연구를 어느 정도 끝마치고 나니 노트 속에 카리안이 적어 둔 여러 마법의 이름이 보였다. 비밀의 방을 만들 때 그가 걸어 둔 마법이었다.

읽을 수야 있었고 그 뜻도 알 수는 있었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엉켜 비밀의 방을 영속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괜찮았다. 지금 알 수 없다는 것은 언젠가는 알아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규칙을 알고 나서부터 줄리앙의 삶은 조금은 더 견디기 쉬워졌다.

이제 마법서에 손댈 차례였다. 줄리앙 인생에서는 참으로 드문 일이지만 이번 일은 좀 쉽게 흘러갔다. 마법서는 모두 카리안의 다락방 안에 있으니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며 마법서를 찾아낼 필요는 없었다.

이제 줄리앙의 일정에는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카리안에게 가서 그의 마법 노트를 전달하고, 그를 설득하여 다락방에 있는 수천 권의 책을 빌리도록 하고, 황송하게도 이 노마법사에게 직접 그 모든 주문의 의미를 배우는 일까지 말이다.

그의 명이 그리 길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떨 때는 레아가 죽기도 전에 노마법사가 먼저 죽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줄리앙은 카리안의 다락방 안에 틀어박혀 혼자 마법을 공부했고, 그 후에는 저택으로 돌아가 이번에는 레아와 함께했던 비밀의 방에 틀어박혀 레아가 남긴 흔적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곤 했다.

언제나 1년이 한계였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비밀의 방 안의 레아의 숨 냄새는 사라지고 말았다. 우습게도 사라지고 나면 그 향기를 다시 기억해 내는 것이 힘들었다. 레아가 걸치던 숄에서는 이제 먼지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몇 번째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어떤 생에선가 줄리앙은 여생을 다 바쳐서 레아의 향을 복원하는 데에 몰두했다. 카리안의 마법서들이 가르쳐 준 모든 복원 마법들을 활용해 말이다.

하지만 고대어로 적힌 마법 주문을 이해하는 것과, 마법을 직접 행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학식 높고 명예로우며 무공도 뛰어나고 지나치게 아름답기까지 한 젊은 레날 공작에게는 마법사의 피가 흐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복원 마법이라곤 음식을 따뜻하게 하거나, 꽃을 더 파릇파릇하게 만드는 정도의 간단한 잡마법 몇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한 생에서 다음 생, 그리고 또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연구 속에서 줄리앙은 매번 카리안조차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가설을 세워 갔다.

―고대 마법사 아냐스 아시오? 그의 복원 마법이 실패했을 때 반복된 삶을 산 토끼가 있었소. 나도 혹시 그런 존재는 아닐까 싶소.

―죽기 전에는 늘 호두나무를 보았소. 처음 생에서도 호두나무 열매를 줍고 나서 다시 깨어났고 말이오. 지난번 생에도 호두나무 가지를 치다가 다시 스무 살로 돌아왔지요. 바로 전 생에도 호두나무를 쳐다본 후에 정신을 차리자 여왕의 앞에 서 있었던 것 같소. 이상하지 않소? 그 가지를 지금 가져왔소……. 당신 다락방의 두 번째 책장 다섯 번째 칸에 보면 나무에 관한 마법들만 모아 놓은 서적이 대여섯 권 있더군. 그중 호두나무와 관련되었을 만한 마법을 내가 찾아왔으니 한번 봐 주시오.

―라벤더 숲, 라벤더 숲이 비밀일 것 같소. 레아는 늘 라벤더와 함께했고 라벤더와 함께 숨졌소. 라벤더에 비밀이 있지 않겠소? 마법사 양반, 나와 함께 리버런 섬에 가 보지 않겠소?

줄리앙이 이런 말로 카리안을 놀래키면 이번에는 카리안 차례였다. 줄리앙이 연구해 간 모든 방법들을 활용해 여러 가지 가설을 검증해 보았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줄리앙이 돌아오는 법, 레아가 죽는 방식, 매 삶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사소한 것들,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 많은 것들을 아우르며 이 기묘한 삶의 방식을 설명할 만한 마법을 카리안은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안의 존재는 줄리앙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생의 맨 처음 시작이 늘 정해져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 노인을 만나 노트를 건네주고 모든 일을 털어놓고 대화하는 것이 줄리앙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레아가 죽고 난 후에도 자신에게는 할 일이 있다는 것, 차근차근 하다 보면 조그마한 불씨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줄리앙에게는 커다란 희망이 되어 주었다.

백아흔세 번째 삶도 언제나와 같았다.

“그래, 이번에도 리버런 섬으로 가 그 여자와 결혼할 참이오?”

“네.”

“그게 사랑이오?”

줄리앙은 피식, 웃었다. 카리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웃으시오.”

“그 질문을 몇 번째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카리안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허허, 하고 웃자 줄리앙이 말했다.

“매번 같은 질문으로 반겨 주시니 참 익숙하고 좋습니다.”

“그래, 그럼 당신 대답도 늘 같았소?”

줄리앙은 이것 역시 몇 번은 연습해 본 적이 있다는 듯 대답했다.

“처음에는 대답하지 못했지요. 그런 질문이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네 사랑입니다. 집착도 병도 아닙니다. 저는 열렬히 그녀를 사랑합니다. 수백 번을 함께했는데도 또다시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이렇게 설레고 행복하면 그것이 사랑 아닙니까, 마법사 양반?”

카리안은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레날 공작, 그럼 그냥 맘대로 하시구려.”

“네?”

“그렇게 설레고 행복하다면 말이오. 다 잊고 맘대로 하시오. 그 여자를 살리겠다는 둥, 지키겠다는 둥 이런 말씀 마시고, 그놈의 저택 개조고 뭐고 내가 알아서 해 줄 테니 어서 가 보시구려.”

“하지만―.”

“뭐가 하지만이오? 지금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지 않소? 십몇 년을 기다리지 않았소? 그만 생각하시오. 그냥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시오. 당신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만 생각하시오. 그게 내가 낸 비책이오.”

줄리앙이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서 있자 카리안은 다시 말했다.

“왜 그렇게 보시오? 이 말도 이미 했던 말이오?”

“아닙니다. 처음 하신 말씀입니다.”

줄리앙은 이번에는 웃으며 잡화점을 나왔다. 그리고 딱 일주일 뒤, 그는 리버런 섬에서 레아 리버런과 백아흔세 번째 첫 만남을 갖는다. 여느 때처럼 리버런 성 안의 메인홀에서 열린 무도회에서였다.

레아는 붉은 공단으로 된 난생처음 보는 드레스를 입고 줄리앙 앞에 서서 자매들과 함께 얌전히 인사를 했다. 베스와 이사벨라가 차례차례 줄리앙에게 인사를 하고 나자 그때까지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레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줄리앙을 바라보며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었어요!”

아름다운 잿빛 눈동자에는 푸른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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