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He loves you so
말을 마치고 그는 혼자서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이 얼마간 침묵을 지켰다. 레아는 그의 등 너머 흑판을 흘긋 보았다. 흑판 가득 채워져 있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숫자들. 그 숫자들이 모두 레아 자신의 죽음일 것을 생각하니 아득해졌다. 숫자는 세 자리 수를 넘어서 있었다. 242가 마지막이었다. 줄리앙 아르디 레날,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 남자는 그럼 대체 내가 죽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단 말인가. 말라붙은 입술을 한번 꾹 깨물고는 레아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체 이걸 다 어떻게 버텼죠?”
“그리 힘들진 않았습니다.”
“힘들지 않았다고요?”
줄리앙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좀 버티기 힘들었지요. 당신은 내가 죽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걸 목도하는 것은 꽤 사람을 망가뜨리는 일이랍니다.”
그는 전혀 진지하지 않게, 아니 웬걸 너스레라도 떨 일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말을 이었다.
“신께서 사람들을 벌주러 고안해 낸 수많은 방법들 중 이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란 생각이 듭니다.”
레아는 잠시 눈앞에서 줄리앙이 갑자기 죽는 모습을 상상해 내고 눈앞의 것을 지우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줄리앙의 죽음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고개를 좌우로 저어 대는 레아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줄리앙은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다 목이라도 다치시면 어쩝니까, 레아.”
매사에 다정스럽게, 그러나 시종일관 별 걱정을 다 하던 그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청혼하러 레아의 방에 오던 길, 창가에 매달려 있던 레아를 보고 놀라서 무뚝뚝하게 굳던 표정이나, 마차를 타고 수도로 오는 내내 살뜰하게도 레아를 챙겨 주던 모습들, 계단 하나 내려갈 때조차 에스코트를 자처하던 모습들 말이다. 걱정도 병이다 싶었는데 제가 틈만 나면 죽어 댔다면 그 모든 야단스러운 행동들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레아는 고갯짓을 멈추었다. 모든 것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 거라는 생각에 갑자기 속이 아렸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 앞에 있는 거죠?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걸 다 버텼나요?”
“계속하다 보니 괜찮아지더군요. 어차피 계속 반복되고 당신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날 걸 생각하니까요. 당신을 또 볼 수 있으니 내가 버텨 내야 하는 건 잠깐의 끔찍한 슬픔과 긴 기다림뿐이지 않습니까?”
끔찍한 슬픔과 긴 기다림.
말로 하니 몹시 간단하고 쉬웠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할 일은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의 모습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어쩜 저렇게 매사에 여유가 흘러넘치는 것일까.
그러나 이제 석 달을 줄리앙의 곁에서 매일을 함께한 레아는 그래도 제 남편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줄리앙은 무슨 일이든 가볍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곤 했다. 야속함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컸다.
레아는 줄리앙을 다시 한번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주 강해 보이는 커다란 남자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그 강함이 무색해질 만큼 순수한 빛을 내는 소년 같은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아는 그를 향해 물었다.
“얼마나 오래 나를 기다렸는데요?”
“글쎄요.”
줄리앙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웃었다.
“얼마나 오래요?”
“기다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당신을 못 보는 것이 조금 힘들었지만, 원래 기다림이란 게 그런 거 아닙니까.”
“그게 돼요?”
“레아 리버런, 나의 아내. 당신은 참 성미가 급하시죠. 저도 예전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제법 인내심이 강해졌답니다. 나중에는 기다림의 시간을 적절히 활용하는 법도 배웠지요.”
줄리앙이 턱을 들어 그 멋진 턱 선을 뽐내며 레아 옆에 놓인 그녀의 초상화를 가리켰다.
“줄리앙, 당신이 그린 건가요?”
줄리앙은 끄덕였다. 그러고는 과장해서 우쭐거리는 척을 했다. 레아를 웃음 짓게 할 요량인 것이다.
“제가 얼마나 그림에 재능이 없었는지 아셨다면 당신이 제 노력을 알아줄 텐데 말입니다.”
그림은 레아 옆에 바로 둔다면 누가 실제고 누가 그림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실물에 가까운 세밀화였다. 솜씨가 아주 좋았다. 매우 공들여 그린 그림이었고 시간 또한 오래 걸렸을 것이 분명했다. 레아의 잿빛 눈동자, 그 속에 든 약간의 푸르름, 도톰한 입술, 아주 살짝 들린 윗입술의 뾰족함, 말간 얼굴빛, 양 볼이 패며 웃는 모습을 그대로 다 살려 낸 그 그림을 보면 누구라도 화가가 초상화의 주인과 매우 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애정이 깃든 그림이었다.
“못 그린다고요?”
“처음에는요. 운 좋게도 전 그림 연습할 시간적 여유가 매우 많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줄리앙은 웃고 있었지만 레아는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불쌍한 사람, 너무도 불쌍한 사람이었다. 대체 무엇이 이 사람을 끝이 없는 윤회의 고리 안에 집어넣은 것일까. 이 사람은 얼마나 강한 사람이길래 아직도 나를 포기하지 않고 또 여기에서 나와 결혼해 살고 있는가.
그녀는 잠시 줄리앙이 자신을 얼마나 큰 크기로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를 가늠해 봤다.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그가 몹시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듯 줄리앙이 한 발짝 레아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미 결혼한 지 몇 달이 되었고 잠자리를 가진 것도 수십 번인데, 아니 그의 입장에서는 수백 번, 수천 번일 수도 있는데 여전히 그의 모든 제스처는 놀랍도록 정중했다.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당겨 제 품안에 레아를 가두고는 그는 양팔로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안고 있으니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안고 있으니 제 얼굴이 보이지 않아 레아는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눈물을 참아 낼 수 있었다. 우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지금은 그녀가 울 시기는 아니었다. 그녀보다 훨씬 더 많이 슬퍼 보이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 왜 그녀가 운단 말인가.
“이제 괜찮습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줄리앙이었다.
“뭐가 괜찮아요?”
“당신이 알았으니까요. 당신이 알아주니까요. 기다림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나 사이에 있던 모든 일들이 다 없던 일이 되어 버리는 건 매번 겪어도 적응하기 힘들더군요.”
“더, 더 말해 줘요.”
“무엇을 말입니까.”
“당신은 알고 나는 모르는 우리 얘기를요.”
“듣기 좋은 이야기들은 없습니다.”
연신 짓고 있는 그 사람 좋은 미소 사이로 어둠이 살짝 스쳤다. 레아는 그가 안쓰러웠다. 슬픈 내색도 힘든 내색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줄리앙 레날이었다. 잠시 스치는 쓸쓸함 하나만으로도 그 ‘듣기 좋지 않다는 이야기’들 속에서 그가 얼마나 마음 아팠을지 그녀는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레아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줄리앙이 표정을 고쳐 짓고는 다시 말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고 웃어요, 레아. 우리 이제 또 같이 있잖습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이상한 불안이 레아를 엄습했다.
‘내가 또 죽어 버리는 건 아닐까. 그럼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대체 또 어떻게 죽을까. 이 사람 앞에서 내가 죽으면 이 사람은 그걸 또 어떻게 참지.’
갑자기 천장이 곧 무너지고 바닥이 바로 땅으로 꺼질 것 같아 무서웠다.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주저앉고 나서야 레아는 깨달았다. 줄리앙이 처음부터 자신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은 이유를 말이다.
그는 아마 알았을 것이었다. 레아가 이런 감정을 느끼리라는 것을 말이다. 죽을까 두려워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이 심정을 그는 다 헤아렸던 것이다.
줄리앙은 주저앉은 레아를 얼른 붙잡고 그 옆에 서서 안색을 살폈다. 쇼크사라도 할까 걱정하는 것일까,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하얗다 못해 파랗게 보였다. 줄리앙의 손을 잡아 그를 안심시키며 레아가 물었다.
“……내게 이 이야기를 다 한 적이 있었죠?”
그는 대답이 없었다.
“전에도 내게 모든 것을 말한 적이 있군요. 그리고…….”
그리고 아마 결과는 좋지 않았을 것이다.
줄리앙은 말없이 그냥 서 있기만 했다. 레아가 그의 답을 재촉하듯 다시 한번 꾹 그의 손을 눌러 잡자 그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어떻게 됐죠?”
“이 글씨를 알아보았습니까, 레아?”
줄리앙은 갑자기 흑판을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레아는 242번의 죽음이 쓰인 흑판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흑판의 제일 윗부분에는 레아 자신의 글씨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글씨가 아닌 삐뚤빼뚤한 악필이 보였다. 그러다가 조금 더 뒤로 가서는 아주 아름다운 정자체가 적혀 있었다.
“앞부분은 제가 쓴 건가요?”
“네.”
줄리앙은 그 글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
“이곳에서 이걸 모두 다 내가 썼군요. 그리고…….”
“이 모든 죽음을 피하려 노력했죠, 당신은.”
“이곳에서 나가지 않고요.”
“네.”
아무리 눈치 없는 레아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서 죽음을 피하며 그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말이다. 겨우 온 이 행복을 이른 죽음으로 놓쳐야 하다니 아니 될 일이었다.
“당신이 날 가두어 두었을 리는 없으니 내가 스스로 그랬겠군요.”
“그렇게 하면 죽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 또 이렇게 있는 것이다.
레아의 글씨는 72번에서 끊겨 있었다. 그다음은 앞서 말한 악필이 뒤를 이었다. 그건 아마 줄리앙의 글씨일 것이다.
그러니까 꼭 지금처럼 모든 이야기를 다 알게 된 레아는 1번부터 72번째까지를 차곡차곡 제 글씨로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73번째의 죽음을 맞이했다. 어떤 기록도 레아가 죽음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73번째 죽음 역시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후로는 모든 글씨가 줄리앙의 손으로 쓰여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레아의 글씨는 더 이상 없다. 줄리앙은 73번째 삶 이후로는 레아에게 다시는 이 사실을 말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레아의 머릿속에는 불현듯 커다란 물음표가 하나 그려졌다.
‘이 글씨들은 대체 어떻게 여태까지 남아 있는 것일까? 무언가 대단한 술수라도 있었던 걸까? 혹시 마법이라도 배워 두었던 것일까? 글씨에 어떤 저주라도 걸어 둔 것일까? 1번부터 72번까지의 모든 삶을 제어하려고 했고 결국 실패했던 여자, 이 글씨들을 모두 남기고 죽어 버린 그때의 나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그녀는 다시 입을 열어 슬픈 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사랑하는 남편에게 물었다.
“그때의 나는 어떻게 살았었나요?”
줄리앙은 대답 없이 가만히 흑판만 응시했다. 그 흑판 속 글씨들을 찬찬히 살펴보다 시선이 ‘73’이라는 숫자에 이르렀을 때쯤 레아는 자신이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73. 무너진 천장에 깔려 사망(25세)
줄리앙의 글씨였다. 유난히 진하게 꾹꾹 눌러쓴 글씨. 레아는 글씨에도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것을 보고 처음 알았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절망감이 느껴지는 글씨였다.
레아가 말을 함과 동시에 흑판을 응시하는 것을 보고 줄리앙은 그녀에게 이미 대답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거기에 서서 이렇게만 말했다.
“그만 보세요. 사랑하는 나의 아내, 레아. 그만 나를 봐요.”
여유만만하던 줄리앙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지고 쉬어 있었다.
줄리앙은 잠시 그때를 떠올렸다. 이 방에서 나가질 않고 하루 종일 처박혀 단둘이 행복해하던 때를 말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넓었다. 천장이 무너지는 사고 후에 그는 공사를 다시 하며 이 저주받은 방을 최대한 좁혔다. 하지만 넓었던 때도 이 축축한 습내는 그대로였다. 약간의 빛이 새어 들어오는 북쪽 끝의 작은 이 방에서 줄리앙은 하루의 절반 이상을 레아와 함께했다.
정말로 죽을 때까지 이 방에 갇혀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밖에 나가서 레아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이 방으로 나르는 일을 했다. 나갔다 오는 동안에 레아는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했다. 레아의 안색은 언제나 창백했다. 줄리앙은 괜한 소리를 해서 레아를 이렇게 틀어박히게 만든 것이 후회되었다. 그녀에게 미안했고, 그녀가 안쓰러웠다. 밖에 나가서 제대로 생활하는 게 맞다고, 언젠가 죽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줄리앙은 생각했었다.
“죽잖아요.”
레아가 대답했다.
“내가 죽지 않게 지켜 주겠습니다.”
“실패하면요?”
줄리앙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이미 수십 번을 실패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그녀를 지키지 못한 자에게는 침묵만이 허락되었다.
“실패하면 당신이 너무 가엾잖아요. 나의 사랑.”
그렇게 말하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는 레아는 미소를 지으며 줄리앙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죽음 후에 남을 줄리앙이 걱정되는 것이었다. 그토록 따뜻하고 커다란 사랑이었다. 도리가 없었다. 그에게는 그녀의 고집을 꺾을 힘이 없었다.
* * *
“말도 안 돼요. 차라리 죽여 버리지 그랬어요.”
아마 그때 그 레아의 고집은 지금의 레아만이 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줄리앙은 생각했다. 자신을 죽여 버리는 게 낫지 않냐며 입을 삐죽 내밀고 말하는 레아 리버런을 보며 줄리앙은 오랜만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가요? 당신을요? 당신을 살리려고 평생을 살아왔는데?”
“그럼 차라리 죽어 버리지 그랬어요.”
레아는 같이 웃는 대신,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러지 말라고 했거든.”
줄리앙은 마치 처음 인생으로 돌아간 듯, 그녀에게 다시 반말을 했다. 모든 인생의 모든 레아를 사랑했지만, 그에게는 마치 첫사랑처럼, 처음, 그러니까 정말로 처음 레아를 만났던 그때 그 삶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수백 번의 삶을 반복하며 얻은 모든 고통을 망각의 강에 흘려 버리려고 노력하던 순간들 속에서도 그는 단 하나, 그때 그 삶의 기억만큼만은 부여잡아 두고 싶었다. 그가 가장 어리석고, 레아 역시 가장 경솔했던 그때의 기억들이 왜 그렇게 소중한지는 알 수 없었다.
“안아 줘요.”
레아는 마치 자신도 그 삶을 기억한다는 듯이 그렇게, 갑자기 안아 달라고 말했다. 첫 번째 생에서 수백 번을 지겹게 들어 온 말이었다. 줄리앙은 갑자기 나온 그 말에 놀라지도 않고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안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가 다시 풀어, 그녀가 좋아하던 그 방식대로 고쳐 안았다. 커다란 키를 한 제 등을 푹 수그리고 그녀의 키에 맞추어 그녀의 양팔 안으로 제 팔을 넣어 제 왼쪽 가슴팍과 그녀의 왼 가슴을 맞대고 천천히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레아는 레아대로 제 팔을 쭉 뻗어 그의 수그린 등을 꼭 끌어안고 넓은 등을 열심히 쓸어 주었다. 그는 그냥 꽉, 레아를 끌어안기만 한다면 어떤 방식이든 좋았지만 레아는 이상하게도 이렇게 안는 것을 좋아했다.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려요. 당신이 큰 키를 나에게 맞추어 내려 주는 것도 좋고.’
그렇게 말하고 레아가 배시시 웃을 때면 줄리앙도 도리가 없었다. 언젠가부터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포옹이 그들만의 방식이 되었다. 이렇게 끌어안으면 정말 레아의 말대로 서로의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등을 토닥토닥거리는 동안 그녀가 물었다.
“당신은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었나요?”
“있었지.”
줄리앙은 계속해서 처음의 생처럼 말했다. 레아는 그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 턱이 없을 텐데도 별말 없이 말투의 변화를 받아들였다.
“언제요?”
그가 몸을 레아에게서 떼어 내어 손끝으로 흑판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세 자리 숫자가 적혀 있었다. 193번. 여느 숫자와 마찬가지로 사인과 사망할 때의 연령이 적혀 있었다. 레아는 다시 한번 쓱 흑판 전체를 훑어보았다. 193이라는 숫자, 그리고 그 옆에 적힌 33이라는 숫자를 노려보다가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이것은 레아가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삶이었다.
“내 온 생을 통틀어 이때가 가장 행복했었지.”
그의 눈이 다시 살아난 이처럼 빛났다. 소년 같은 웃음을 보며 레아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줄리앙이 다시 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