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포기 (34/48)

34. 포기

“울지 마세요. 울지 마세요.”

눈물은 끝 간 데 없이 쏟아졌다. 수십 년의 기다림과 아픔을 한꺼번에 쏟아 낼 듯이 말이다. 그런 그의 곁에서 레아는 잘도 그를 다독여 주었다. 난생처음 본 사람을 말이다.

눈물에 레아의 얼굴이 흐린 날의 달처럼 이지러졌다. 그것이 싫어 그는 안간힘을 다해 눈물을 멈추었다. 일어나 예를 표했을 때 레아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비밀로 해 드릴게요. 이렇게 제 앞에서 운 건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레아는 대답이 나올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계속해서 말했다.

“원래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잘 울 수 있거든요. 저도 그래요.”

대체 언제 그녀가 모르는 사람 앞에서 울었을까, 왜 모르는 사람 앞에서 운단 말인가,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매들은 대체 왜 열여섯밖에 안 되는 레아를 모르는 사람 앞에서 울게 만든단 말인가.

그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화가 났다. 줄리앙은 이렇게 또 레아랑 같이 있으면 별것도 아닌 일에 불쑥불쑥 화가 나는 자신을 직시하며 생각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라고 말이다.

두 번의 생을 반복했음에도 아직도 줄리앙 안에는 레아에 관한 일이면 아주 사소한 것에도 크게 화가 나는 성미 고약한 청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날 줄리앙은 처음으로 레아를 포기했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청혼하는 대신 황급히 리버런 섬을 떠났다. 성문에 다다랐을 때 수문장 왈도가 그를 보고는 물었다.

“왜 리버런 섬을 떠나시는 겁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그를 아는 누구에게라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줄리앙은 왈도 앞에 서니 왜인지 모든 것을 다 고백하고 싶었다. 레아 말대로 모르는 사람이라 그러는지도 몰랐다. 앞으로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사람이기에 더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레아 리버런을 본 적이 있소?”

“네. 저는 그냥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일 뿐이라 공녀님들을 뵐 일이 흔치 않지만 레아 리버런 아가씨만큼은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아가씨가 미스터린지 뭔지 하는 책을 좋아하셔서 아버님 몰래 육지에서 그 책들을 들여와 본다는 것은 리버런 성내의 공공연한 비밀이지요. 다른 아가씨들도 그렇게 리버런 공작님께서 금지하신 걸 가끔 들여오시곤 하시는데 뭐 그게 큰 범죄까지도 아니고 그 마음도 알겠고 해서 저희들도 그런 짐쯤이야 그냥 눈감아 보내고는 합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성 밖까지 나오시더니 이번에 몰래 들여와 준 소설이 엄청나게 재밌으셨다고 자랑을 하시면서 저희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해 주셨지요. 그러고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라면서 달콤한 쿠키를 주시더군요. 몇 년 전에 그렇게 나와서 인사해 주셨을 때는 아직 요 정도밖에 안 되는 꼬마 아가씨였는데 이제 이렇게 공작님께서 청혼을 하러 오신 걸 보니 어엿한 레이디가 되셨겠지요. 어찌나 사려 깊으신 분인지 모릅니다.”

줄리앙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너무도 레아다운 에피소드였다. 그는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왈도에게 물었다.

“그래, 아름답던가요?”

“암요, 눈부시게 아름다우시죠. 그 총기 어린 눈동자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요. 어마어마하게 귀여운 아가씨지요.”

“나와 결혼하면 그 아름다운 얼굴에 분홍빛이 채 가시기도 전에 죽을 거라는 걸 알고도 내가 결혼을 해야 할까요?”

왈도 마크햄은 입을 다물었다. 침착하게 돌아 버린 미친광이인지, 흑마법에 빠져 버린 불쌍한 귀공자인지 알 수 없는 이 젊은 공작에게 그가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줄리앙이 다시 말을 보탰다.

“나는 하지 않을 거요.”

“공작님께서 힘드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영영 못 볼 수도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고요.”

이번에는 옆에 있던 자크가 물었다. 왈도는 자크가 육지에 연인 제이나를 두고 왔다고 하는 것을 몇 번 들은 터였다. 자크 입장에서는 그런 식으로 감정이입이 된 것도 이해되었다.

자크는 이미 줄리앙이 아까 말했던 눈이 휘둥그레지는 말들을 완전히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왈도 마크햄 역시 절반 이상은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이 청년의 눈빛은 미치광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줄리앙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다.

“상관없소. 살아 있다면.”

* * *

“그래서 내가 살았나요?”

비밀의 방에 오래도록 간직되었던 낡은 옛 레아의 숄을 두른 채, 현재의 레아가 줄리앙에게 물었다. 창으로 들어온 햇살 한 줌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줄리앙은 그녀의 쓸쓸한 목소리만 들어도 그 눈빛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렴, 생과 생을 반복해 오는 내내 보이지 않을 때도 그려 오던 그녀의 얼굴이었으니 말이다.

그녀의 등 뒤로는 초상화 속의 레아가 줄리앙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줄리앙은 두 명의 레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세 명의 레아였다. 지금 줄리앙이 하고 있던 이야기 속의 레아, 그 앳된 레아까지 함께 말이다.

비밀의 방에 앉아 있는 훌쩍 큰 키의 마른 여인보다 두세 살은 더 어렸던 레아의 얼굴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었다. 하지만 줄리앙은 언제고 그녀의 얼굴을 이렇게 똑바로 바라볼 때쯤이면 그때 라벤더 숲에 앉아 자신을 달래 주던 레아, 처음 만났던 날의 불같이 화내던 레아, 두 번째 삶, 세 번째 삶, 네 번째 삶, 바로 이전 삶의 레아까지 수많은 레아가 한꺼번에 보였다. 모든 것이 그의 레아였다. 그는 그 레아들과 함께했던 수백 번의 삶에 대한 상념을 떨쳐 내느라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아주 오랜만에 이 방에 들어온 레아, 비밀의 방의 한편에 앉은 레아는 지금 그래서 자신이 살았냐고, 줄리앙과 결혼하지 않아서 죽지 않고 살았냐고 묻고 있었다.

“아뇨.”

줄리앙이 대답했다.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결혼했었겠군요. 이번에는 또 어떻게 죽었죠?”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해 리버런에는 앙투안도 로즈몬드도 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가지 않았으니까요. 누가 당신의 구혼자가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질 않는군요. 듣지 않으려고 애썼으니까. 어쨌든 당신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레아.”

“그게 가능한가요? 우리 아버지 아래에서요? 그럼 어떻게 됐죠?”

“도망갔습니다.”

“내가요?”

“네.”

“구혼자들이 영 아니었나 보군요. 얼마나 별로였으면 앙투안과도 로즈몬드와도 하는 결혼을 안 하고 도망갔을까요?”

줄리앙과 레아는 동시에 피식,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실소였지만, 두 사람의 웃음이 이제 어두컴컴해져 더 음습하게 느껴지는 작은 방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밝혀 주었다.

“아마 당신을 봐서 그랬을 거예요. 당신이 우는 걸 봐서. 당신이 우는 걸 보고 반해서 아무와도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레아가 농담처럼 그렇게 말하자 줄리앙이 받아쳤다.

“그럼 아마 그때도 저 때문에 죽은 걸 수도 있겠군요.”

그렇게 말하고 눈썹을 위로 올리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는 줄리앙을 보니 레아는 마음이 아려 왔다. 레아 역시도 생을 반복하는 자의 피곤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아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기다려야 하는 심정은 알지 못했다. 이 남자는 대체 그렇게 내가 죽는 것을 몇 번이나 보고 산 것일까.

레아는 흘끔 흑판에 쓰인 글자들을 보았다. 설마 저 많은 것들이 다 내 죽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레아는 갑자기 두려웠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두려움을 쫓고자 레아가 다시 말을 꺼냈다.

“당신은 사라졌습니다. 리버런 섬에서 도망갔지요.”

레아는 도망갔다. 레아의 언니 이사벨라와 그의 배우자 제이미 오를 공이 레아를 도왔다. 성문을 지키고 있는 수문장 왈도 마크햄과 문지기 자크, 그리고 문지기의 아내 제이나 역시 그녀가 무사히 리버런 섬을 나가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레아는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녀는 성벽 밖으로 나가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갔다. 오를 공작의 영지에서 멀지 않은 어느 자작가에 몸을 의탁한 그녀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곳에는 리버런 섬과 같이 아름다운 자연환경이나 풍요로운 음식들은 없었다. 라벤더 향을 더 이상 맡을 수 없다는 것이 유감스러웠지만 그럭저럭 살 만한 저택이었고, 오를 공작 부부의 입김이 작용한 덕인지 자작 가문에서는 그녀를 깍듯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녀만을 위한 방은 작았지만 채광이 좋았고 널찍하고 서랍이 13개나 달린 책상이 하나 있었다. 그곳의 서랍 곳곳에 물건을 넣어 두고는 그녀는 잘도 잃어버렸다. 그 물건들을 찾아 대며 레아 리버런은 그곳에서 글을 세 편 완성했다. 나이 든 자작부인은 그녀의 글을 읽고 감명받아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었고 책을 찍어 내 줄 만한 사람까지 소개해 주었다.

첫 번째 작품은 로맨스 소설로 수도의 아녀자들 사이에서 소소한 성공을 거두었다. 두 번째 작품은 그보다 더 크게 흥행했다. 리버런 섬에서 떠나온 지도 2년이 흘러 막 열아홉이 되었을 때쯤 그녀는 세 번째 작품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 안에는 늘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하고 거울같이 깊은 눈동자를 지닌 귀공자가 나왔다. 그녀가 열여섯의 여름에 만났던 정체 모를 그 미남자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그윽한 눈동자에서 한없이 쏟아지던 맑은 눈물을 떠올리면 그녀는 까닭 없이 저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남자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도,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괜스레 그랬다. 자작가의 어린아이 하나가 그녀에게 이렇게 묻기도 했다.

“레아 언니는 결혼할 생각은 정말 없으세요?”

“그럼,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거 아니겠니?”

“그럼 언니는 사랑도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그녀는 묘한 미소만 지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그때 그 남자가 생각났다. 어쩌면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다 포기하고 아버지 말대로 아무나와 결혼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원동력이 열여섯의 어느 날, 잠시 만나 몇 마디밖에 나누지 못한 이름도 모를 남자라는 것은 좀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사실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다 보면 어쩌면 언젠가는 다시 그와 만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레아 리버런은 생각했던 것이다.

리버런 공의 추격은 2년 만에 성공을 거두었다.

“드디어 눈치채신 것 같아.”

이사벨라가 오랜만에 직접 자작가를 방문하여 레아에게 언질을 주었다.

“1년만 더 있으면 제인의 구혼자들이 모일 시기이니, 그 전에 나를 찾아 먼저 결혼을 시켜야 한단 생각이 드셨나 보지.”

“어떻게 할 거야, 레아?”

“어떻게 하긴. 내가 이제 와서 리버런 섬으로 다시 돌아갈 것 같아?”

이사벨라가 돌아가자마자 레아는 황급히 짐을 꾸렸다. 좋아하는 책 몇 권, 집필 중이던 원고, 아끼는 깃털 펜 몇 자루와 옷가지 한두 벌만 든 작은 짐을 가지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오르기 직전에 레아는 황급히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만요.”

그러고는 언제나 그녀가 글을 쓰던 작은 책상, 한편에 놓인 유리병에 꽂힌 작은 라벤더 꽃 한 송이를 가지고 왔다.

“이걸 가져오려고 한 거요?”

“그러게요. 웃기죠?”

우습지만 어딜 가나 라벤더 내음을 맡으면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었다. 마차를 타고 가는 도망길이라도, 단 한 송이일지언정 라벤더가 곁에 있다면 조금은 덜 초조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레아의 이러한 노력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마차는 콰이건 다리를 지나 수도로 가는 길에 술 취한 어느 마부가 몰던 마차와 맞닥뜨려 전복 사고를 당했다.

두 마차 모두 강으로 추락했다. 그리 큰 사고는 아니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무사했다. 단 한 명만이 운이 나쁘게 강으로 추락하다 강둑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즉사했다. 시체는 며칠 후 끔찍한 모습으로 강 위에 떠올랐다. 사상자의 이름은 레아델피나 루이스 리버런, 리버런 공작가의 네 번째 여식이었다.

줄리앙은 그 소식을 그로부터 몇 주 후 자신의 자택에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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