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실패
줄리앙의 계획은 그의 목적만큼 단순했다. 목적은 하나였다. 레아 리버런을 하루라도 빨리 만나 그녀와 결혼하고 최선을 다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며, 가능하다면 죽지 않게 하는 것. 이를 위한 그의 계획은 줄리앙 자신이 생각할 때는 꽤나 체계적이었다.
첫째, 먼저 리버런 섬에 어떻게 해서든 들어간다.
둘째, 리버런 공에게 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네 번째 딸에게 때 이른 청혼을 할 계획을 말하며 그의 수락을 받는다.
셋째, 레아를 만나 모든 것을 다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녀와 결혼한다.
리버런 공은 속물이었다. 줄리앙이 그의 출신과 이름을 밝힌다면 결코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절차가 끝나면 줄리앙은 겨우 레아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레아를 만난다면 줄리앙은 이번에는 모든 것을 다 말할 셈이었다. 레아가 그녀의 세 번째, 아니 사실은 수백 번에 세 번을 더한 인생 때 줄리앙에게 그렇게 했었던 것처럼 솔직하게 말이다. 막무가내로 보이지만 줄리앙 나름대로는 막힘없이 실행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짠 계획이었다.
줄리앙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 이야기가 믿을 수 없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할지언정, 레아 리버런만은 믿어 줄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녀는 어떤 황당무계한 이야기라도 스스럼없이 들어 줄 사람이라는 걸 그는 알았다. 오히려 재밌어하며 그 이야기 속에 빠져들 것이라는 것, 의심 하나 없이 믿어 줄 것이라는 걸 그는 알았다.
레아는 애초에 그런 성격이었다. 첫 번째 인생 때를 떠올려 보면 그녀는 밥 먹듯이 이상한 거짓말들을 했다. 거짓말? 아니 거짓말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우스운 귀여운 장난들이었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에 푸른 하늘이 비치는 것이 유독 아름다워 보였던 어느 날, 줄리앙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당신 자매들은 모두 황록색 눈동자를 가졌던데, 왜 당신만 잿빛이지?”
“그쵸. 당신도 그게 궁금했죠?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로 뒤를 캐 보았더니 사실 저는 리버런 공작의 딸이 아니더라고요. 저희 아버지도 알고 계세요. 그래서 저를 그렇게 못마땅해하시는 거예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내용은 대단했다.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아의 얼굴을 보고 줄리앙은 그만 그 말을 믿어 버렸다. 하지만 몇 초 정도 있다가 레아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뭐 다 뻥이지만요.”
“뭐라고?”
줄리앙이 어이없어 실소를 하며 그렇게 물으면 레아는 전매특허인 그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또 속았죠?”
그렇게 몇 번을 속다 보니 줄리앙도 심심찮게 레아를 놀리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장난 어린 말을 해도 레아는 곰곰이 생각도 해 보지 않고 늘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앙, 저 호두나무는 대체 얼마나 오래된 거야? 어쩜 저렇게 커다랗지?”
“크기가 너무 큰 것도 죄가 되나?”
실실 웃으면서 능글맞은 얼굴을 하는 줄리앙의 폼이 딱 봐도 또 야한 농담이나 나올 얼굴이라 레아는 샐쭉한 미소를 지으며 혀를 찼다.
“또, 또 이상한 소리 하려고 그러지! 커다래서 그늘도 예쁘게 생기고 호두도 많이 열리고 좋긴 한데, 가끔 밤에 보면 무섭기까지 해.”
정말로 호두나무에 겁이라도 먹은 듯이 벌벌 떠는 표정을 짓는 레아가 귀여워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줄리앙이 말했다.
“저건 말야. 사실 내가 키운 거야.”
“뭐?”
“내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호두나무도 아주 작았거든. 그리고 나도 당신처럼 작았지.”
“나 안 작거든? 당신이 너무 큰 거지?”
레아는 발을 구르며 분해했다. 그런 표정을 보는 것이 좋아 줄리앙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그래, 그래. 조그만 레아.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오셔서 결정하라는 거야. 가만히 두면 너는 거인이 될 때까지 커져서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 대신 호두나무는 더 이상 크지 않는다. 아니면 너는 조금만 커지는 대신 호두나무가 엄청나게 커질 수 있다. 무엇을 선택하겠느냐 물어보셨지.”
“그래서? 그래서?”
줄리앙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다 믿기라도 하는 듯이 레아는 뒷이야기를 재촉했다.
“호두나무가 안됐더라고. 그대로는 너무 작았거든. 레아 너처럼. 그래서 내가 좀 덜 커지는 편을 선택했지.”
“그래서 이 호두나무가 이렇게 커다래진 거야.”
“그렇군.”
“그렇군은 뭘 그렇군이야. 다 뻥이잖아.”
“뻥이었어?”
레아는 매 거짓말마다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단 한 번도 ‘그런 게 어딨어.’ 하며 우스갯소리로 넘기지 않았다. 줄리앙은 레아의 이런 면모도 좋았다.
“당신은 내가 하늘의 별을 따다 줄 수 있다고 해도 믿을 요량이군.”
“당신이 하늘의 별을 따다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야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겠지. 당신 말은 무조건 믿을 거야.”
“내가 거짓말을 하면?”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 데에는 또 그 이유가 있겠지. 그것도 속는 셈 치고 믿어 봐야지.”
“감동적이군.”
“원래 여자는 미남에 약해, 줄리앙.”
“참나. 말 하나는 잘하는군.”
그렇게 말하고는 씩 웃는 레아의 볼을 잡아당기며 줄리앙도 같이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 거짓말쟁이 부부는 종종 다른 사람들을 놀리기도 했다. 주로 파티나 공식행사에서 허세에 가득 찬 귀족들이나, 무례한 말들을 지껄이는 사람들에게 사소한 거짓말을 하는 정도였지만, 어쩌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연례 공식행사인 궁정 파티에서의 일이었다.
“레날 공작 부부께서는 이미 결혼하신 지 꽤 되셨지요.”
번들번들거리는 이마에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쉴 새 없이 말을 늘어놓는 피에르 백작은 레아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네.”
레아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잘라 대답했다.
“그런데 왜 아이가 없으신지, 거참. 레날 공작님께서도 애타게 기다리실 텐데, 원.”
그때 조금 멀리 서 있던 레날 공작의 귀에도 그 말이 박혔다. 두 사람은 아직 젊었고 그리 조바심을 낼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별다른 방책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닌데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줄리앙은 별생각 없었다. 하지만 레아는 달랐다. 아이를 빨리 갖고 싶어 하는 레아에게는 이것이 큰 상처가 될 말이라는 걸 줄리앙은 알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피에르 백작 쪽을 향했다. 뭐라고 강하게 면박이라도 주려 발길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레아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그건 제가 악마의 자식이라서 그렇답니다. 보세요. 눈도 기분 나쁜 잿빛이잖아요. 아이를 낳을 수 있을 턱이 있나요.”
“네?”
이런 대답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는 듯이 피에르 백작의 빛나는 이마에는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왜요. 궁금하시면 증거를 보여드릴까요? 잠깐 눈 좀 감아 보세요.”
레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네? 누, 눈은 왜?”
“감아 보시라니까요. 안 그러면 눈뜬 채 흑마법에 당할 거예요.”
“……흑마법이요?”
피에르 백작이 마지못해 눈을 감자 레아가 그 번쩍번쩍 빛나는 이마를 손으로 후려갈겼다. 줄리앙도 맞아 봐서 알았다. 레아의 손은 작지만 꽤 매웠다.
“아!”
“어머, 손이 왜 여기에. 거봐요, 악마의 자식 맞죠? 조심하세요. 아이도 못 낳고 막 맘대로 손이 움직이고 그렇습니다. 제가.”
“이, 이런 일을 하고도!”
피에르 백작이 무엄하게도 레날 공작부인에게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줄리앙이 적시에 등장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백작님.”
“아, 아닙니다.”
“이마가 빨개지신 걸 보니 악마의 자식에게 한대 후려갈겨 맞기라도 하셨나 봅니다.”
피에르 백작은 얼굴이 빨개져서 발 둘 곳을 못 찾는 눈치였다. 줄리앙이 그의 커다란 귀를 잡아당겨 귓속말로 몇 마디 말을 하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는 황급하게 퇴장했다.
“뭐라고 한 거예요, 대체?”
“뭐긴. 당신은 절대 들으면 안 되는 욕이지.”
레아와 줄리앙은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날 두 사람은 그렇게 불쾌하게 표정이 일그러질 수도, 눈물 젖은 채 돌아갈 수도 있었던 일을 웃음으로 때웠다.
레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줄리앙을 좀 귀찮게 하고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사고를 치고 다니긴 하지만 언제나 밝은 여자, 아니 어둠이 있어도 웃을 줄 아는 여자, 어떤 일이든 농담으로 무마시킬 줄 아는 여자, 턱없이 이상한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해 대는 여자, 머릿속에 무슨 꿍꿍이가 든 건지 다 보여서 더 귀여운 여자, 못 미더운 소리 하나하나도 다 진심으로 들어 주고 믿어 주는 여자.
첫 번째 인생에서 둘이 크게 싸웠던 어느 날, 줄리앙은 레아에게 이렇게 물었었다.
“레아, 당신은 대체 왜 이렇게 나를 사랑해 주는 거지?”
“뭐가?”
“그냥…… 우린 맨날 싸우는데도 당신은 또 이렇게 천사같이 내 옆에 앉아 있잖아.”
“어제까지만 해도 묵묵부답이더니 오늘이 되어서야 우리 공작님께서 화가 풀리셨군. 당신은 꼭 미안하면 그런 걸 묻더라.”
“미안해.”
“알아.”
“그래도 미안해.”
“나도 미안해라고 말하면 좋은데 난 이번엔 진짜 안 미안했어.”
“알아. 내가 다 미안해.”
레아는 아기처럼 배시시 웃고는 말했다.
“줄리앙 내가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이 날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아서야. 당신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가끔 당신이 애처로워질 정도야.”
“애처로워?”
“그래. 불쌍해. 당신이야말로 왜 그렇게 나를 많이 사랑해?”
물음인 듯, 대답인 듯 그렇게 말하고는 레아는 우뚝 서서는 줄리앙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이리 와, 안아 줄게, 라고 말했다. 줄리앙이 다가가자 그 조그마한 손으로 터프한 척 그의 몸을 잡아당기더니, 줄리앙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영차―.”
“뭐 하는 거야?”
“당신 어깨 붙잡고 올라가는 거야.”
줄리앙의 어깨를 붙잡고 의자 위에 올라간 레아는 이제, 줄리앙보다 더 커다래진 키로 줄리앙을 불러 세웠다.
“이리 와, 진짜로 내가 안아 줄게.”
줄리앙이 다가서서 레아를 올려다보자, 줄리앙보다 머리 하나는 커진 레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내려다보니까 더 불쌍하네.”
“불쌍해서 날 사랑하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너무 고민하지 마. 당신이 그렇게 불쌍할 정도로 날 많이 사랑해 주는 한 나도 계속 당신을 사랑할 거야.”
줄리앙은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면?’ 하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알았다. 그가 레아를 사랑하는 일을 멈출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레아의 허리를 꽉 끌어안자 레아는 줄리앙이 그녀에게 그렇게 하듯, 허리를 구부려 그의 등을 토닥토닥거려 주었다. 줄리앙이 그녀를 그대로 들고 의자 아래로 끌어올리자 깔깔대며 연신 웃던 레아가 말했다.
“줄리앙, 나도 미안해. 알지?”
“아냐. 내가 더 미안해. 사랑해. 레아.”
두 번째 인생에서도 공교롭게 줄리앙은 레아에게 또 그렇게 물었다. 이번에는 유치한 싸움도, 달콤한 화해도 없었지만 질문은 완전히 같았다.
“레아, 당신은 대체 왜 이렇게 나를 사랑해 주는 거지?”
“줄리앙, 그건 내가 물어야 할 것 같은데요?”
“누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어. 그리고 내가 먼저 물었잖아.”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니까요. 당신은. 내 소녀시절 왕자님이잖아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레아의 눈에는 처음부터 그랬듯 신뢰가 가득 차 있었다. 줄리앙은 그제야 깨달았다. 첫 번째 인생 때 레아가 자신을 보며 어떻게 생각했을지를 말이다. 상대가 나를 너무도 믿고 너무나 많이 사랑한다는 게 느껴지면, 그것만으로도 이상한 애처로움이 든다는 것을 줄리앙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다. 줄리앙은 이렇게나 레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면 레아가 믿어 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짠 계획이었다.
하지만 줄리앙은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을 레아에게 말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문을 가볍게 통과하여 리버런 성에 들어서고, 그의 검은 말이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앞으로 앞으로만 돌진하여 이윽고 라벤더 밭에 다다랐을 때, 그는 곧바로 마주치고 만 것이다.
리버런 공을 만나 허락받기도 전에, 생각을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레아 리버런, 사랑하는 그의 아내를 말이다.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보이자마자 줄리앙이 느낀 것은 깊은 절망감이었다.
‘꿈인가.’
삼 일 밤낮을 말로 달려 리버런 섬에 도착했는데, 기진맥진한 상태로 기어코 수문장을 설득했는데, 모든 것이 꿈이었다. 어디서부터가 꿈인지 몰랐다. 이번 생의 시작부터? 아니면 여기에 오기 위해 말을 탔을 때부터? 어쨌든 이것은 꿈이 확실했다.
라벤더 숲의 한가운데에 선 레아 리버런은 연푸른 드레스를 입고 등을 보이며 서 있었다.
라벤더 숲, 등만 보이고 서 있는 레아, 연푸른 드레스. 줄리앙이 지난 십여 년간 지겹도록 꾸어 온, 하지만 질리지 않는 꿈이었다.
줄리앙은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하지만 그녀를 부를 수가 없었다. 깊은 피로와 슬픔에 목이 잠겨 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부른다면 그녀가 사라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꿈에서는 늘 그랬다. 레아를 부르면 레아는 뒤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의 기억은 이제 레아의 얼굴을 되살리지 못했다.
그렇기에 늘 꿈은 거기서 끝났다. 언젠가 그는 그녀의 등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넋 놓고 바라보다 깬 적도 있었다. 라벤더 숲에서 등만 보이고 서 있는 연푸른 드레스를 입은 레아의 모습을 말이다.
부르면 바로 사라질 것을 알기에 한없이 바라만 보았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레아, 라고 소리 내어 말하지도 못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지없이 아침은 그를 찾아왔고 꿈은 사라져 버렸다.
이제 그는 또 가만히 레아의 뒷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또 깨어 버리겠지만, 그래도 깨기 전까지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말이다.
하지만 이번 꿈은 달랐다. 레아는 아무렇지 않게 뱅글 돌더니 줄리앙을 쳐다보았다. 그 하얗고 조그마한 얼굴에 가득 찬 커다란 잿빛 눈동자에 물음표가 어렸다.
“레아.”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그런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구……세요?”
레아가 그렇게 물으며 라벤더 숲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숲은 길었다. 무성하게 꽃을 피우고 서 있는 그 푸른 보랏빛을 가로지르며 레아가 줄리앙의 앞에 서더니 이렇게 물었다.
“왜 울고 계세요?”
그제야 줄리앙은 제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태껏 몰랐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많은 눈물을 쏟으며 그는 울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아니 꿈이라도 상관없었다. 이것이 꿈이라면, 오랜만에 레아의 얼굴이 나오는 꿈이었으니 그걸로 좋았다. 줄리앙은 그리움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녹여 내는 감정인지는 몰랐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에 그는 무릎을 꿇었다. 당황한 것은 레아 쪽이었다.
“울지 마요. 울지 마세요.”
열여섯 살의 레아는 줄리앙과 함께 주저앉아서는 그렇게 그를 달래 주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으니 겁날 만도 하건만, 그녀는 일말의 두려움도 내비치지 않고 연푸른 드레스 자락이 땅에 닿아 더러워지는데도 아랑곳 않고 그의 옆에 앉아 계속해서 그의 등을 쓸어 대며 말했다.
“왜 그렇게 서럽게 울어요. 괜찮아요? 울지 말아요. 제발 울지 마요.”
그렇게 줄리앙이 짜 놓은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도리가 없었다. 그저 흐르는 눈물을 쏟으며 레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 *
“그래서 그때에도 당신은 나와 결혼했나요?”
레아의 목소리에 줄리앙은 옛 생각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와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제 다시 비밀의 방이었다. 이 습내 나는 방에 앉아 두 사람은 몇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한 셈이었다. 레아의 뒤로는 그녀의 초상화, 그리고 빼곡히 글씨가 쓰인 흑판이 보였다.
수백 번하고도 세 번의 인생 만에 드디어 줄리앙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레아 리버런이 대답 없이 앉아 있는 줄리앙을 향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처음엔 당신이 나한테 화해의 선물로 연푸른 드레스를 주었다고 했었죠.”
“그렇습니다.”
“두 번째 때는 더 일찍 그 드레스를 사서 그걸 입고 결혼을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만나자마자 내가 그 드레스를 입고 있군요.”
“사소한 균열이 매번의 생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났지요. 연푸른 드레스는 그 표식처럼 매번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말을 꺼내려다 말고 레아는 눈물인지, 회한인지, 한숨인지 모를 무언가를 꿀꺽 삼켰다. 목울대로 무언가 묵직하고 아주 안 좋은 것이 넘어가는 느낌이 났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결혼했었나요?”
레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줄리앙이 대답할 차례였다.
“아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