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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사과 (24/48)

24. 사과

“앙투안이 먼저 이상한 말을 했지. 뭐라고 했더라. 언니가 쉽게 넘어온다고 했나? 자기 걸 물려 주겠다고 했나, 뭐 그런 말을 했어. 아 또 뭐라더라? 쉬운 년? 더 말해?”

제인이 말을 하는 내내 앙투안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사색이 되어 레아의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레아가 그를 쏘아보자, 주춤거리면서 앉은 채 뒷걸음질을 쳤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레아는 앙투안에게 진짜 그런 말을 했냐고 따져 묻고 싶지도 않아졌다. 제인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그리고 처음부터 저자의 친절이 조금 꾸며 낸 듯 과장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저놈이 그렇게 말하니까 줄리앙이 주먹을 휘둘렀다고?”

“그래, 제 성질에 못 이긴 거지.”

제인의 말을 듣는 레아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처음엔 낯빛이 어두워졌다. 제가 줄리앙을 오해했던 것이 미안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동그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앙투안이 저한테 그런 저급한 말을 했음에, 그런 이를 못 알아보고 친히 여겼음에 화가 난 것이다. 그러고는 예쁜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모욕하는 말을 듣고 제 성질에 못 이겨 주먹을 휘둘렀다고?”

“그래, 뭐 언니 욕하는 게 참을 수 없었나 보지.”

“왜 내 욕하는 게 참을 수 없었을까?”

레아는 제인에게 묻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묻듯이 그렇게 읊조렸다. 그녀의 얼굴은 쌀쌀한 여름밤의 추위 때문인지 여느 때보다도 더 하얗게 빛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게. 뭐, 공작님이시니 그런 더러운 말을 하는 사람을 가만히 둘 수 없었던 걸 수도 있고, 아니면 몰래 언니를 좋아했던 걸 수도 있고?”

“나를 몰래 좋아해?”

“그래. 그런 걸 수도 있고 명예를 중요시 여기어 그런 걸 수도 있다고. 왜 한 개는 빼먹고 한 개만 듣는 거야? 언니? 정신 나갔어?”

“어, 으응, 그래.”

“어쨌든 언니로서는 잘된 거 아니야? 예전부터 레날 공작님에게 한방 먹이고 싶어 했잖아? 첫인상부터 별로였다면서? 뭐 레날 공작님이야 괜한 오해나 사고 언니에게 한 대 얻어맞았으니 억울할 노릇이지만 잘됐지 뭐야. 아무튼 앙투안 구엘의 진짜 모습을 언니가 모를까 봐 한 얘기니 그렇게 알아 두라고.”

제인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레아는 밖으로 황급히 달려 나갔다.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한 여름비 때문에 숲의 바닥은 조금 미끄러워져 있어, 속도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줄리앙은 저만치서 비를 맞으면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줄리앙!”

레아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줄리앙은 걸음을 멈추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더는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그는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철퍼덕, 하고 무언가 작은 짐승 같은 게 바닥에 처박히는 소리가 났다. 아이고, 아이고, 하는 요상한 신음소리도 났다. 그제야 줄리앙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그 작은 짐승은 레아 리버런이었다. 달려오다 바닥에 고꾸라진 것이다.

이제 달려가는 쪽은 줄리앙이었다. 큰 보폭으로 냉큼 다가와 그는 조심스레 레아를 일으켜 세웠다. 비 때문에 질척거리기 시작한 흙구덩이에 곤두박질친 그녀의 드레스는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네, 그냥 미끄러졌을 뿐이에요.”

“그러게 아무 데서나 달리지 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레아는 흙탕물이 튀겨 엉망이 된 얼굴을 대충 손으로 닦고 고개를 들어 줄리앙의 얼굴을 보았다. 비를 맞아서인지 창백해진 피부, 조각 같은 얼굴은 어둠이 만든 그늘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 그늘 속에 갇혀 있는 그윽한 눈동자는 오늘따라 많이 슬퍼 보였다. 어디서 크게 야단이라도 맞은 소년처럼 그는 실컷 풀이 죽어 있었다. 레아는 생각했다.

‘난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람에겐 더는 화를 내지 못할 거야.’

줄리앙은 가늘게 미소를 짓더니, 손을 뻗어 레아의 얼굴을 쓱 닦아 주었다.

“더러워진 손으로 닦으면 뭐합니까. 더 묻었습니다.”

비를 맞아 젖었을 텐데도 줄리앙의 손은 따뜻했다. 레아의 얼굴이 차가워져 있어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제 볼을 다정히 어루만지는 그 손길에 레아는 왠지 울컥했다. 뱃속 깊이에서 가슴까지 뭔가 격렬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줄리앙 역시 그랬다. 마음이 이상했다. 흙투성이가 된 레아를 일으키면서 그랬고 비에 젖은 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걸 보며 그랬으며 엉망진창이 된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보고 그랬고 열심히 훔쳐 내었다고 하나 더 더러워진 하얀 얼굴을 보고 그랬다. 꿀꺽, 무언가 먹으면 안 되는 걸 삼켜서 가슴이 답답해진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둘 다 서로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데면데면한 대화의 장이 펼쳐졌다.

“제인이 있었어요.”

언제나 그렇듯 레아가 먼저 침묵을 깼다.

“제인이요?”

“네. 제 바로 아래 동생이요. 처음부터 다 들었다고 했어요.”

“그렇습니까.”

“네. 제인이 다 말해 줬어요.”

“듣지 않아도 좋을 이야기를 들으셨겠군요.”

차분히 그렇게 말하는 줄리앙의 낮은 목소리에 레아는 또 울컥했다. 코끝이 찡했다. 누가 저를 톡 건드리면 바로 툭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해서 그런 것일 거다. 줄리앙을 때린 것이 미안해서 말이다.

“……때려서 미안해요.”

레아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오늘 깨달은 사실이지만 살다 보면 주먹이 앞서는 순간도 오더군요. 당신 조그만 주먹쯤이야 맞아도 아프지도 않았고.”

줄리앙은 농담을 치듯 그렇게 말했다. 농담하는 사람치고는 너무 조용조용한 말투였지만 말이다.

“왜 때렸어요?”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당신이랑은 상관없는 얘기잖아요.”

“상관있습니다.”

레아는 그다음 말을 기다린다는 듯이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줄리앙 역시 아직 자신이 말할 차례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입술을 굳게 다무는 대신 한숨 같은 숨을 한번 쉬더니, 한참 있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 친구이지 않습니까.”

“친구, 그렇죠. 우리 친구죠.”

레아는 자신이 더 무슨 말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왠지 그 대답으로는 마음이 다 차지 않았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레아는 저도 알 수 없는 제 감정을 잠시 저리로 미뤄 둔 채 줄리앙에게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했다. 고마워요, 라는 말에 줄리앙은 대답 대신 그런 말 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집에 가려는 거 아니죠?”

레아가 이렇게 묻자 줄리앙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는 가라면서요?”

“가지 마요. 알았죠? 친구로서 하는 명령이에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줄리앙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웃자 레아는 왠지 안심되었다. 줄리앙은 줄리앙대로 왠지 가슴이 찡했다. ‘가지 마요.’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의 안에 있던 견고한 벽 같은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줄리앙은 레아에게 인사를 하고 별채로 돌아갔다.

레아가 다시 응접실로 돌아오니 앙투안은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제인이 부른 건지, 소리를 듣고 달려온 건지 하인들이 와서 열심히 깨진 유리를 주워 담아 쓸고, 창문 새로 들어오는 비를 막느라 응접실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그 소란 통에서 제인을 찾아 뭔가 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곁으로 다가온 하녀가 레아를 불렀다.

“아마 손님들 중 하나가 여기 두고 가신 듯해요. 아까 제인 아가씨께서 레아 아가씨 물건인 것 같다며 전해 주라고 하셨어요.”

“제인은 이미 갔나요?”

“네, 방금 돌아가셨어요.”

내려다본 상자에는 작은 카드 하나가 꽂혀 있었다. 카드 안에는 짧은 서명이 있었다.

[아름다운 나의 레아에게, 줄리앙 아르디 레날.]

악필이었다. 하지만 흘려 쓰지는 않았다. 열심히 또박또박 쓰려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아름다운’이니, ‘나의’니, 쉽게 쓰는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레아는 그 카드가 아주 소중한 것처럼 여겨졌다.

방에 돌아와 열어 본 상자 안에는 근사한 드레스가 담겨 있었다. 척 봐도 몹시 비싸 보이는 고급 실크로 된 연푸른색의 드레스는 캄캄한 밤을 밝히는 어두침침한 촛불 하나에도 제 은은한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가슴팍에 달린 반짝거리는 보석들은, 드레스를 요리조리 흔들어 대며 몸에 대어 볼 때마다 이리 반짝, 저리 반짝 빛났다.

마침 이틀 후에는 메인홀에서 열리는 큰 무도회가 있었다. 별채의 객들뿐만 아니라 리버런 섬 안에 사는 귀족들 모두가 초대받은 꽤나 성대한 무도회였다.

그 이틀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이틀 내내 그치지 않을 듯 세차게 비가 퍼부었다. 사계절이 건조한 리버런 섬에서 이렇게 큰 비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다음 날 아침, 점심때 예정되어 있던 모든 행사들은 취소되었다. 레아는 꼼짝도 못 하고 방 안에만 있어야 했다. 무도회 당일이 되어서야 비는 그쳤다.

줄리앙은 무도회가 시작하기 한 시간 전에 이미 메인홀에 도착해 있었다. 그 바람에 시끄러운 귀족들과 쓸데없는 잡담을 많이도 나눠야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레아 역시 시간 하나는 칼 같은 여자였다. 아마 10분이나 15분쯤은 먼저 도착할 테고, 그럼 잠깐이라도 리버런 공이나 다른 구혼자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레아와 대화할 수 있었다. 아니 그에게는 대화가 문제가 아니었다. 줄리앙은 그냥 레아의 얼굴이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에드몽, 자네는 내가 안 보이면 좀 보고 싶은가?”

“그게 뭔 소린가, 줄리앙.”

“아니, 친구란 그런 거 아닌가 싶어서 말일세. 안 보면 보고 싶고, 얼굴이 자꾸 그립고. 그렇지 않나?”

“미쳤는가? 자네는 내 얼굴이 보고 싶나?”

“설마.”

“참나, 그럼 왜 나한텐 자네가 보고 싶으냐고 묻는가?”

“아니, 자네는 못생겼지 않은가. 그래서 보고 싶지가 않은 거고…….”

에드몽은 실소를 지었다. 누굴 기다리며 전전긍긍하고 있는지가 그의 눈에는 뻔히 보여서였다.

“왜, 누구 보고 싶은 친구라도 있는가?”

“아닐세.”

줄리앙의 속은 뻔했다. 에드몽은 친구를 더 놀려 주고 싶었지만, 스물이 훌쩍 넘어서야 겨우 저런 감정을 느끼고 무언가를 깨달을락 말락 하고 있는 어린 공작님이 귀여워서 그만하고 친절히 알려 주기로 했다.

“난 자네는 아니고 크리스틴이 보고 싶네.”

“크리스틴?”

“그래. 안 보면 보고 싶고 얼굴이 자꾸 그립고 그렇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겐 크리스틴이 그런 존재라네, 친구.”

여기까지면 꽤 큰 힌트였다. 그때, 막 회장의 무거운 문이 열리고, 누군가 새로운 손님이 도착했다. 아니 손님이 아니라 이곳의 주인, 레아 리버런이었다.

줄리앙은 깜짝 놀랐다. 말 그대로 깜짝 놀랐다. 풀숲에서 뱀을 보거나, 전쟁터에서 뒤통수를 치려는 상대와 마주했을 때처럼 말이다. 너무 놀라, 1미터쯤 위로 뛴 것도 같다. 레아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저렇게나 아름다운 여자였던가. 줄리앙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눈부시군요.”

겨우 침착을 가장한 줄리앙이 한숨을 내뱉듯이 이렇게 말했을 때, 레아는 표정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또 놀리시는 거예요?”

“아뇨.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 옷이 당신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더 빛나게 하는군요.”

답지 않게 진지한 줄리앙의 모습에 레아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심정이었다. 레아가 겪고 있는 곤란에는 아랑곳 않고 줄리앙은 뚫어져라 레아의 얼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뭇 진지한 눈빛이었다.

“언제는 잿빛 눈이 고양이 같고 이상하다더니.”

레아가 어색함을 어떻게든 없애 보고자 그렇게 말하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줄리앙이 대답했다.

“전 고양이 좋아합니다. 고양이 사랑합니다.”

“……네? 뭐, 고양이가 좀 귀여운 생물체긴 하죠.”

“엄청 귀엽죠.”

그렇게 작은 동물에 대한 견해 피력의 장으로 대화가 넘어가려는 시점에서 에드몽이 둘 사이에 적절히 끼어들었다.

“줄리앙이 이 옷을 보자마자 당신 옷이라며 말릴 새도 없이 얼른 들어가 샀습니다. 저는 입어 보지도 않고 이렇게 비싼 옷을 사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렸지요. 그런데 이 친구가 옳았네요. 레이디 리버런, 정말 당신에게 딱 맞는 옷이군요. 아름다우십니다.”

레아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에드몽의 찬사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줄리앙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아니, 왜 내 앞에선 그렇게 안 웃고 저놈 앞에서만 그렇게 천사 같은 미소를 보여 주는 겁니까?”

“천사같이 굴 기회를 주셔야 그렇게 하죠, 줄리앙.”

“뭐, 그 옷을 입으니 그렇게 입을 내밀고 있어도 천사 같긴 하군요.”

삐죽거리면서도 결국 칭찬만 하고 있는 줄리앙의 모습이 귀여워 레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 옷은 왜 사 주신 거래요?”

“내 눈엔 당신 말고는 아무도 입을 수 없는 옷 같아 보였습니다. 당신 몸에 딱 맞잖습니까.”

“그게 이유예요?”

“그렇습니다.”

“그것뿐이에요?”

“또 뭐가 있단 말입니까?”

레아는 어느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줄리앙만 몰랐다. 에드몽 역시 한 발짝 물러나 둘의 모습을 지켜보며 웃고 있었던 것이다.

“줄리앙, 앙투안은 왜 때렸어요?”

“어제 말했잖습니까. 재수 없는 말을 하니까요.”

“왜 내가 때리는 걸 가만히 맞았어요?”

“내가 당신에게 한 짓들은 맞을 만했으니까요.”

“언제까지 나한테 미안해하려고 그래요?”

“글쎄요, 생각날 때마다 사과해도 될까요?”

“왜 갑자기 나한테 이렇게 잘해 줘요?”

“글쎄요.”

“미안해서 그래요?”

“그건 아닙니다.”

“선물도 주고, 내 얘기도 다 들어 주고, 책 읽으라고 하면 읽어 오고, 앙투안도 때려눕히고, 내가 때리면 맞고, 자꾸 나한테 예쁘다고 해 주고.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그야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까요.”

스무고개처럼 이어지는 레아의 질문들에 결국 줄리앙은 엉겁결에 그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말하고 나서야 스스로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니, 머릿속에도 없던 말이 어째서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걸까. 줄리앙은 알 수 없었다. 언어가 생각을 결정한다는 말은 맞는 말인지, 입 밖에 내고 나서야 줄리앙은 스스로 깨달았다. 뭘 봐도 이 여자에게 가져다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온종일 레아 생각만 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 매일 밤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후회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오늘도 라벤더 숲에 가서 얼쩡거리다 보면 레아 리버런을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오지 않을 게 뻔한데도 혹시나 하고 나갔다 비에 쫄딱 젖어 돌아왔었다. 그랬다. 줄리앙은 레아를 좋아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요?”

레아가 물었다. 눈빛이 줄리앙보다 배는 더 어른스러웠다.

“……그럼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친구도 하고 얘기도 하고 그러겠습니까?”

줄리앙이 이렇게 말하고 넘기려고 하자 레아는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친구, 그놈의 친구.”

작지만 분명 줄리앙에게도 들리는 정도의 목소리였다. 그는 뭐라고 더 말을 이어야 할지 몰랐다. 이런 상황은 어느 병법서에서도, 정치학 서에서도, 처세술 교과서에서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이 옷은 정말 나한테만 맞겠다 싶어서 준 건가요? 아니면 내게 미안함이 아직도 남아서 사 준 건가요?”

레아는 오늘따라 질문이 많았다.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사 준 겁니다. 여자들이 마음이 상했을 때는 아름다운 걸 사다 주는 게 좋다고 전에 에드몽이 그러기도 했고요.”

“그놈의 여자들.”

레아의 말에 줄리앙은 피식 웃었다. 그러게 말이다. 그놈의 여자들.

레아의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남자들은 어떻게 사과하면 좋아하나요?”

“그건 내게 왜 묻습니까? 당신은 여자가 어떠니 남자 어쨌니 하는 말 싫어하지 않습니까, 레아.”

“그냥요. 알아 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글쎄. 약간의 미소, 그리고 입맞춤 정도?”

줄리앙은 피식 웃고 골똘히 고민하다 그렇게 말했다. 레아가 빌려준 로맨스 소설에선 다 그렇게들 하면 화를 풀었던 것이다.

“미소? 그리고 입맞춤이요?”

레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 발짝, 줄리앙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좁혀진 거리에 당황한 줄리앙이 반 발짝 뒤로 물러서자 이번에는 더 많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둘 사이의 거리는 반 뼘이 채 되지 않았다. 더 뒤로 물러날 기회를 살피며 살짝 곁눈질한 순간 바로, 레아의 입술이 줄리앙의 입술에 안착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아주 살짝, 줄리앙의 입술과 맞닿았다가 이내 떨어졌다. 도저히 예상도 못 한 레아의 행동에 줄리앙이 어버버 하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에 레아는 이미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그녀의 회푸른색 눈동자가 줄리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이내, 가볍게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그녀의 근사한 입술도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톰한 입술이 열렸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줄리앙의 귓가에 들어왔다.

“이건 때린 거에 대한 사과.”

레아는 그렇게 말했다. 줄리앙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고장 난 것처럼 한참을 그러고 있자, 레아는 쿡, 줄리앙의 허리를 찌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한테는 안 할 거예요?”

“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줄리앙이 대답하자, 레아가 다시 말했다.

“사과, 생각날 때마다 한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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