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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다시, 연푸른 드레스 (23/48)

23. 다시, 연푸른 드레스

이상했다. 첫 만남이 그렇게나 최악이었는데 레아는 줄리앙과 함께 있는 게 재밌었다.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로즈몬드는 뒤로하자. 앙투안만 해도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는 레아한테 누구보다 잘해 주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와 함께 있을 때보다 줄리앙과 같이 있을 때가 더 편했다.

줄리앙과 함께 있으면 레아는 꾸미지 않고 레아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뭐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줄리앙 역시 그랬다. 레아에겐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무례하게 굴었는데도 다 잊고 이렇게 다정히 상대해 주는 것만 보아도 그녀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다.

자기 의견을 말할 땐 누구보다 영민하고 똑똑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런데 툭하면 넘어지고, 헐레벌떡 달려가고, 뭔가를 까먹고, 눈치 없이 헛다리 짚으며 잘못된 범인을 추측하곤 한다. 그런 모습은 참 의외성이 있어 귀여웠다.

혼자 있으면 자꾸 레아 생각이 났다.

그날 오후만 해도 그랬다. 줄리앙은 에드몽과 함께 리버런 성 내의 번화가로 마차를 타고 나갔다. 리버런 섬에는 리버런 공작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타펠 자작가, 윈스럼 백작가도 리버런 섬 안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들이 사는 작은 성과 고급 상점가가 모여 있는 거리가 리버런 섬의 가장 큰 번화가였다.

그곳의 커다란 양장점에서 줄리앙은 리버런의 강렬한 여름 햇볕을 막아 줄 모자와 서늘한 밤에 입을 셔츠 한 벌을 구입했다. 에드몽은 잠시 다른 볼일이 있다며 줄리앙을 두고 다른 길로 갔다. 에드몽을 기다리며, 이리저리 걷다가 줄리앙은 눈을 멈추었다. 양장점 바로 옆의 고급 드레스 숍이었다.

그곳에는 아주 연한 푸른색의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줄리앙은 그 드레스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아주 타이트하게 재단된 실크로 된 연푸른 드레스는 레아의 가녀린 몸에 딱 들어맞을 것 같았다.

어제도 오늘도 레아는 진녹색 공단으로 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것도 제법 예쁘지만, 이 드레스를 입는다면 그녀의 회푸른 눈이 더욱 아름답게 빛날 것을 줄리앙은 알았다.

“자네 대체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건가.”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에드몽이 줄리앙에게 물었다.

“저거, 사려고.”

“저거? 저걸 뭐 하러―.”

에드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줄리앙은 상점에 들어갔고, 에드몽이 주춤주춤 따라 들어갔을 때는 이미 상점의 주인이 드레스를 보기 좋게 포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최고급 크리스털 비즈를 썼다는 둥, 실크가 뭐라는 둥 하는 주인의 설명을 줄리앙은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그저, 이 드레스를 입는다면 레아가 아주 예쁠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값은 부르는 대로, 아니 그보다 더 쳐주었다. 주인은 드레스를 입어 보지도 않고 맞추는 것이 어딨냐며 언제든 가봉을 하러 다시 들러도 좋다고 말했다. 줄리앙은 드레스가 맞지 않아 가봉하게 되면 당신이 성안으로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하고 가게를 나섰다.

“그 아가씨는 자주 넘어지거든. 여기까지 오다가 또 어디서 넘어질지 모르니 말이야.”

에드몽은 갑자기 드레스를 사 재끼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리버런 성으로 돌아가는 친구가 영 이상했다. 이게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리다 얻어맞아서 미친 건 아닌가 싶기까지 했다.

“그 드레스는 누굴 주려고 그러는가?”

“누구긴. 레아 리버런이 입으면 아주 예쁘겠지 않겠나?”

“레아 리버런? 왜? 사과의 의미로?”

“그것도 있고. 뭐, 그냥. 어울릴 것 같아서.”

레아에게 그 드레스를 입혀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줄리앙은 서둘러 리버런 성으로 향했다.

레아는 앙투안과 로즈몬드와 함께 저녁 만찬을 마치고, 라벤더 숲을 거니는 중이었다. 앙투안은 레아에게 언제나 그렇듯 온갖 미사여구를 바치고 있었다.

“레이디 리버런, 오늘따라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제가 오늘의 당신과 거니는 달밤을 위해 지은 시를 읊어 볼까요?”

“아, 시요? 네.”

레아는 이제 슬슬 매일 계속되는 똑같은 시를 듣는 게 따분했지만, 앙투안에게 그런 속내를 말하는 건 왠지 무례를 범하는 일 같아 꾹 참고 그의 시를 듣고 있었다.

“어떻게, 맘에 드시는지요?”

“네, 음, 달 이야기가 나오고 제 이야기가 나왔죠? 네, 좋았어요.”

“안색이 좀 안 좋으신데 괜찮으십니까?”

“밤바람이 좀 추워서 그런가 봐요.”

사실은 하품이 나오는 걸 참느라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레아의 거짓말에 앙투안은 바로 제 외투를 벗어 주었다. 이런 다정함은 참 고마웠다. 다정치 못한 아버지에게서 자란 레아는 앙투안같이 잘해 주는 남자가 좋았다. 그도 레아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왜일까, 줄리앙이랑 같이 있을 때와 같은 느낌이 없었다.

줄리앙은 무례하고, 자기 멋대로에, 어린애 같은 남자인 데다, 나랑은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도 말했는데, 이상하게도 레아는 그와 함께 있는 게 재밌었다.

아마 얼굴 때문일지도 모른다. 줄리앙의 잘생긴 얼굴 말이다. 남자가 얼굴이 단가, 하고 중얼거리며 레아는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그런 남자와 사랑에 빠져 봤자 레아의 손해였다.

“뭘 그렇게 중얼거리세요, 레이디 리버런?”

“아, 아니에요.”

“어, 잠깐만요. 여기, 머리카락이 묻었네요.”

앙투안이 레아의 어깨 자락 위에 있는 머리칼 하나를 떼어 줬다. 손이 미묘하게 오래 어깨에 머물러 있었다.

줄리앙이 라벤더 숲으로 걸어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레아에게 선물할 드레스를 들고 왔지만, 두 사람이 함께 걷는 모습을 보니, 그걸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매가 좀 음흉스럽긴 해도 꽤나 미청년인 앙투안과 레아는 이렇게 보니 제법 잘 어울렸다.

줄리앙은 인기척을 숨기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응접실 한구석에 드레스 상자를 처박아 두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앙투안도 그곳으로 들어왔다.

“사이가 좋더군요.”

줄리앙이 어둠 속에서 말을 걸자, 앙투안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다가 응접실 의자를 잘못 밟아 넘어졌다.

‘저런 짓을 하는 것은 레아와 똑같군.’

둘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줄리앙은 왜인지 자꾸 배알이 꼬였다. 앙투안은 넘어진 의자를 발로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했다. 저런 성질의 청년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제대로 화가 난 모양이다.

“저 계집, 잠깐 듣기 좋은 소리만 해 주면 바로 넘어오니까요. 아무 구절이나 읊어 줘도 박수를 치고 좋아합디다.”

앙투안이 의자를 걷어찬 후 그런 소리를 하자, 줄리앙은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계집?”

“레아 리버런 말입니다. 공작님께서는 결혼할 맘이 없다고 했죠? 아마 나랑 하게 될 겁니다. 쥐색 눈동자를 한 주제에 뭐가 예쁘다고 그렇게 비싼 척하는지. 말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입을 다물리려면 거기에 내 것을 물려 줘야 하는데, 뭐 그것도 얼마 안 있―.”

앙투안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줄리앙이 앙투안의 입에 자신의 주먹을 박아 넣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몸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줄리앙은 자기도 모르게 그만 주먹을 휘두르고 말았다.

앙투안은 씩씩대며 일어서더니 어린애같이 높은 목소리로 괴성을 지르고 줄리앙에게 달려들었다. 줄리앙은 이성을 되찾고 더는 상대하지 않으려 몸을 피했는데, 앙투안은 제힘을 못 이겨 그만 응접실 창문에 처박히고 말았다.

와장창, 하고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악, 하고 앙투안은 소리를 지르더니 별의별 욕을 다 쏟아부었다.

“왜, 내가 돈줄 물고 가려고 하니까, 갑자기 저 계집 하얀 속살이 야들야들해 보여 아쉽냐? 쉬운 년 같으니까 너도 한번 하든가. 어차피 난—.”

그 말을 듣자, 줄리앙은 다시 한번 앙투안에게 달려드는 저 자신을 이겨 낼 길이 없었다. 앙투안은 줄리앙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고 다시 한번 고꾸라졌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 응접실로 달려온 레아 리버런이 벌컥 문을 연 시점은 바로 그때였다.

레아가 보기에 상황은 뻔했다. 줄리앙 레날, 저 성미 고약한 공작이 뭔가 또 맘에 안 드는 것이 있었던 게다. 또 뭔가 심사가 뒤틀렸던 거지. 좀 지루하긴 하지만 순하디순한 앙투안을 상대로 주먹을 휘두른 것을 보면 말이다.

“그만해요!”

레아는 제 몸으로 앙투안을 가렸다. 줄리앙은 한방 더 먹이려 들었던 주먹을 내렸다.

“이제 주먹까지 쓰시는 거예요?”

뭔가 억울하긴 했지만, 맞는 말이긴 했다. 분명 자기가 흥분해서 주먹을 먼저 휘두르긴 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전쟁터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던 그였던 것이다.

레아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줄리앙에게 터벅터벅 다가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세차게 쳤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줄리앙의 고개가 옆으로 확 돌아갔다.

“맞으면 아프죠? 다른 사람들도 그래요. 그만 사람들한테 상처 줘요. 당신은 정말 최악이에요. 아까 보니 성 밖으로 나가던데 그냥 아예 집으로 가 버리지 그랬어요? 어차피 난 당신과 결혼하지도 않을 거니까요.”

“사과하겠습니다.”

“사과는 앙투안에게 해야죠.”

레아가 뒤쪽에 누워 있는 앙투안을 가리키자, 그는 뭔가 켕기는 게 있는지 주춤주춤거리며 더 뒤로 물러섰다.

“아니, 저 사람한텐 사과할 거 없습니다. 당신에게 상처 줘서 미안할 뿐입니다. 당신은 잊는다고 했지만, 나는 잊지 않고 계속 생각하겠습니다.”

“줄리앙―.”

레아가 뭔가를 더 말하려고 하는데 줄리앙은 벌떡 일어났다.

“그럼 이만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당신 말대로 곧 내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듯싶군요.”

뒤를 돌아 걸어가는 줄리앙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커다랗고 넓은 어깨가 아래로 푹 내려간 모습을 보고 있자니 레아는 기분이 묘했다. 그때였다. 응접실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레아의 동생, 제인 리버런이 나왔다.

“제인,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글쎄, 제일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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