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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친구 (21/48)

21. 친구

그때 마침 두 남자가 등장했다. 십 분은 더 늦은 시간이었다. 레아는 표정을 풀고, 두 남자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천사 같은 미소였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 여자인 줄은 몰랐다. 자기한테 화를 낼 때와는 얼굴이 딴판이었다.

줄리앙은 레아의 옆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화원을 향한 전면 창에서 들어오는 따가운 낮 햇살이 레아의 회색 눈에 비쳤다. 회푸른색 눈이 참 예뻤다. 줄리앙의 시선은 레아의 심기를 더 불편하게 하는 듯한 눈치였다. 레아는 단 한 번도 줄리앙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에게는 말도 걸지 않았다.

티타임이 끝나고 나서 앙투안과 로즈몬드는 좀 더 남아 레아와 함께 리버런호에서 배를 탈 작정이라고 했다. 두 놈들이 맘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어떻게든 리버런가의 지참금을 얻어 보려고 하는 꼴을 보고 앉아 있기도 피곤해 줄리앙은 혼자 거처로 돌아왔다.

“이제야 돌아왔군. 어디 제대로 사과는 했는가, 친구.”

에드몽은 혼자 서재에 처박혀 있다가 줄리앙을 보고 물었다.

“사과? 무슨 사과?”

“어제 그 아가씨가 우리 얘길 들은 게 아니었나?”

“들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사과도 하지 않았다고?”

“사과할 건 또 뭔가? 다 사실이었는데.”

에드몽은 벌떡 일어서서 맹렬히 줄리앙을 비난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남의 이야기를 뒤에서 하다 걸렸으니 사과하는 것이 당연하다, 게다가 내용도 적절하지 않았다, 사과를 안 한다는 게 말이 되냐, 라는 게 에드몽의 이야기였다.

그의 이런 똑바른 성정이 줄리앙은 좋았다. 어린 나이에 공작의 지위에 올랐고, 여왕의 유일무이한 조카라는 명함에, 얼굴도 드물게 말쑥하고 잘생겼다. 그런 줄리앙에게 이렇게 바른 소리를 해 주는 사람은 에드몽밖에 없었다.

사실 줄리앙도 에드몽이 뭐라고 할 줄은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강하게 어필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미안하면 자네라도 가서 사과하는 건 어떤가?”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할 셈이네! 자네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나도 사실은 좀 미안한 마음은 있어. 하지만 에드몽, 내 계획을 알지 않는가. 이참에 내가 그 아가씨의 미움을 샀다면 내게는 잘된 일이지.”

“일부러 그랬다고 하는 얘긴가?”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대화를 하다 보니 이 아가씨의 미움을 크게 사서 구혼 과정에서 탈락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에드몽은 더 크게 화를 냈다.

“그렇다면 줄리앙, 나는 정말 자네에게 큰 실망일세.”

실망이라는 말을 함부로 남발하는 에드몽이 아니었다. 줄리앙은 눈이 번쩍 띄었다. 에드몽은 정말이지, 죄책감이 안 들 수 없는 눈을 하고는 줄리앙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줄리앙, 자네야 그 대화를 통해 자네 목적을 달성했다고 치자고. 그 아가씨는 무슨 죄인가? 애초에 자네가 끼어서 나머지 둘도 변변찮은 놈으로 뽑은 거 같은데 이 셋 중에 하나를 골라 결혼하게 된 그 아가씨야말로 제일 불쌍하지 않은가. 그 아가씨에겐 이 구혼 과정을 거절하고 다른 기회를 노릴 방법도 없는데.”

“……그렇군.”

“줄리앙, 구혼 과정에서 탈락하겠다는 목적 때문에 그 아가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건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쩜 그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나? 여기에 온 게 그렇게 못마땅하면 여왕님께 뭐라고 하게나. 여왕님 마음에 상처를 입히라고, 이 친구야!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려야 빠져나갈 수 없는 그 아가씨한테나 큰소리치지 말고 말이지. 자네는 아주 비열한 짓을 한 걸세.”

줄리앙은 잠자코 에드몽의 책망을 들었다.

“그래.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 맞네. 에드몽, 네가 좋은 말을 해 줬어. 조언 고맙게 받아들이겠네.”

에드몽 역시 이런 줄리앙의 모습을 좋아했다. 듣지 않으려면 충분히 안 들을 수도 있는 에드몽의 조언을 언제나 줄리앙은 귀담아들어 주었다. 자신이 책망하는 소리를 해도 바로 인정하고는 스스럼없이 사과했다. 에드몽이 보기에는 그것도 놀라운 재능이었다. 기분 나빠하지 않고 충고를 듣고 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능력, 그만한 지위를 가진 남자들은 절대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줄리앙은 달랐다. 그것이 에드몽이 생각하는 줄리앙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다음 날 조찬 모임에서 줄리앙은 레아와 다시 만났다. 레아는 녹색빛 공단으로 된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잡고 무릎을 구부리며 인사를 했다. 슬쩍 숙이는 고개는 줄리앙을 향해 있었지만 그 눈은 줄리앙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줄리앙은 모임 내내 레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어떻게든 말을 걸 기회를 노렸지만 기회는 없었다. 어젯밤 내내 에드몽의 책망에 대해 생각해 본 터였다. 레아가 한 말은 다 바른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 그런 식으로 대꾸한 것이 생각할수록 미안했다.

조찬 모임이 끝나고,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갈 때가 되고 나서야 줄리앙은 레아에게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레이디 리버런,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기다려 주실 수 있소?”

“레날 공작님, 왜 그러시나요? 또 절 모욕하시게요?”

“어제는 내가 잘못했소. 정식으로 사과하겠소.”

“왜 갑자기 사과를 다 하세요? 어제는 다 사실이니 사과할 일 없다고 하셨잖아요.”

“사실, 이 자리에 오고 싶지 않았소. 아, 당신 탓은 절대 아니오. 리버런의 아름다운 자매의 이야기야 나도 들었고 당신은 내게 과분하게 아름답지. 하지만 난 개인적인 이유로 결혼에 큰 생각이 없소. 어떻게 이 자리를 모면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당신이 내 무례한 뒷이야기를 듣고 화가 났고, 이참에 당신의 미움을 크게 사면, 그걸 이유로 청혼을 안 하고 넘어갈 수 있겠다 생각했을 뿐이오.”

레아는 가만히 줄리앙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제와는 달리 정중해진 말투에 조금 마음이 누그러지긴 했다. 결혼에 큰 생각이 없는 건 레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레아에겐 줄리앙과 같은 선택권은 없었다. 레아는 내심 줄리앙이 부럽기도 했다. 저런 생각은 줄리앙이 남자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줄리앙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이 이야기도 다 무례한 말들인 것을 아오. 그리고 내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맘대로 당신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 정당화된다고도 생각하지 않소. 하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소. 조금이라도 마음이 풀렸으면 좋겠소.”

레아가 느끼기에 줄리앙의 사과는 정중했고, 진실했다. 레아는 애초에 그렇게 뒤끝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언니들과 놀 때도 크게 화를 내고 싸운 다음에도 돌아서면 바로 헤헤 웃는 것이 레아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레아의 마음은 풀렸다. 레날 공작에 대한 레아의 평가는 ‘저 재수 없는 자식’에서 ‘재수 없지만 사과할 줄은 아는 자식’ 정도로 고쳐졌을 뿐이지만 말이다.

이제 레아는 한참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레날 공작의 애처로운 눈빛에 대답해야 했다. 검은 눈은 어제는 그렇게 비열해 보일 수가 없더니, 오늘은 또 비를 쫄딱 맞고 온 어린애처럼 안쓰럽고 마냥 투명해 보였다.

“받아들일게요. 그 사과.”

선뜻 사과를 받아 주는 레아의 행동에 줄리앙은 놀랐다.

“정말이요? 날 용서해 주는 거요?”

“네. 공작님께서는 본인의 잘못을 다 아시는 것 같고 사과도 진실하였으니 용서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요.”

“그럼 이제 우리 사이엔 아무 앙금도 남아 있지 않은 거요?”

“그럼요. 전 뒤끝은 없는 성격이랍니다. 그리고 아까 그 점은 염려 마세요.”

“염려라니?”

“결혼하시기 싫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당신과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걱정 내려놓으시고 푹 쉬다 가시면 되겠어요. 리버런 섬에서의 앞으로의 석 달이 공작님께 좋은 시간이 되었으면 해요. 그럼.”

말끔한 용서였다. 하지만 뭔가 선을 긋는 듯한 말에 줄리앙은 괜스레 찜찜했다. 다시 한번 어제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줄리앙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좀 못되게 굴기는 했다. 그럼에도 레아는 선을 넘지 않고 줄리앙의 말에 조목조목 반박했다. 마음이 많이 상했을 텐데도 사과하자마자 가타부타 더 보태는 말 없이 바로 받아 주었다.

‘참 괜찮은 여자군.’

줄리앙은 새삼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벌써 뒤를 돌아 저만치 빨리도 걸어가고 있는 레아를 향해 줄리앙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레아!”

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몸을 휙 돌리자, 탐스러운 금빛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바람에 흔들렸다, 복숭아처럼 동그스름하고 말간 얼굴이 줄리앙을 바라보는 순간 무언가 덜컹, 가슴 위쪽에 있던 게 아래로 내려앉은 듯한 느낌이 들어 줄리앙은 동작을 잠시 멈추었다.

“제가 언제 레아라고 부르라고 허락했죠?”

뾰족한 말투는 아니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다시 한번 레아는 줄리앙의 무례를 지적했다.

“미안하오. 레이디 리버런.”

“됐어요. 이미 불러 놓고서. 더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내 사과를 받아 준 거라면 결혼 같은 건 저리 두고 우리, 이제 친구로 지내는 건 어떠하오?”

“친구요?”

레아의 한쪽 눈썹이 기묘한 모양으로 올라갔다. 레아는 황당했다.

친구라니.

“그래, 친구. 신실한 벗. 그대 눈에는 내가 아주 몹쓸 놈 같아 보이고 친구로 지내려는 마음도 들지 않겠지만 난 당신이 무척 맘에 드오. 처음부터 그랬소. 무도회장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친구의 여자를 추켜세워 주느라 조금 과장하다 보니 그런 것이오.”

“어제는 잿빛 눈이 어쩌고 하셨잖아요?”

“사실 당신 눈은 무척 아름답소. 햇살을 받으니 푸르게 변하더군. 웃을 때는 상냥해지고 나를 쏘아볼 때는 생생하다가 지금은 장난기가 어려 있지. 이건 진심이오. 정말 예쁜 눈동자라고 생각하오.”

레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럼 조건이 있어요.”

줄리앙은 그 말을 듣자마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조건이 있다는 것은, 조건을 들어주면 친구를 해 준다는 이야기였다.

“무슨 조건? 아, 알겠소.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입혔으니 당신도 내게 맘껏 말하시오. 내 얼굴에 대해 험담을 해도 되고 우리 아버지에 대해 막말을 해도 좋소. 사실 우리 선친에 대해 막말을 하려면 할 말이 엄청 많지. 얼른 하시오.”

레아는 그만 크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어제는 아주 무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좀 생각이 바뀌었다. 무례하긴 무례하다. 근데 좀 순수하고, 지나치게 선이 없는 데다가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는 남자였다. 그런 면이 무례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재밌기도 했다. 절대로 따분한 사람은 아니었다.

“제가 선대 레날 공작님에 대해 뭘 안다고 막말을 하겠어요. 그리고 당신 얼굴은 험담할 게 없네요. 잘생기셨으니까요.”

줄리앙은 그것도 칭찬이라고 좋다고 싱글벙글 웃었다.

“그럼 내 첫인상은 아주 나쁘진 않았던 거요?”

“네. 뭐, 얼굴만 봤을 때는요. 두 번째 인상이 확 깨긴 했지만요.”

“그럼 조건이 뭐요?”

“자꾸 저한테 말투를 낮추시고 레아라고 막 불러 재끼시는데 친구로 생각해서 그러신 거 같아서요. 그럼 저도 같이 친구처럼 말해도 되나요?”

“물론이오! 레아!”

“그래, 알았어. 야, 줄리앙, 내일 보자.”

레아는 방긋 웃으면서 줄리앙의 어깨를 턱턱 치고 몸을 휙 돌려 갔다. 줄리앙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이라고 했지만, ‘야, 줄리앙!’이라니, 몇 년을 제 옆에서 함께한 에드몽도 그렇게 부른 적은 없었다. 역시 재밌는 여자였다. 다음에 만나면 자신도 같이, ‘야, 레아!’ 하고 툭툭 칠까 하고 생각하다 줄리앙은 생각을 고쳐먹고 정중하게 레아를 불러 세웠다.

“혹시 내 말투가 처음부터 불편했습니까?”

줄리앙은 말을 낮추는 대신, 그냥 더 예의를 갖추어 물었다.

“응. 그런데 다들 그러시잖아. 젊은 여자에게 말할 때는. 뭐, 피차 같이 그러면 어떨까 싶었어.”

레아는 어색해하지도 않고 줄리앙에게 정말 친한 친구에게 하듯 말을 걸었다.

“난 상관없소만 그럼 내가, 아니 제가 더 정중하게 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왜요?”

“앞으로 우린 자주 싸울 텐데 서로 야, 야, 하다가는 큰 싸움이 나지 않겠습니까?”

줄리앙의 농담에 레아는 풉, 하고 그만 웃어 버렸다. 앞으로도 자주 싸울 거라니, 맞는 말이긴 했다. 레아도, 줄리앙도 하고 싶은 말을 참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았으니 말이다. 레아는 씩 웃고 줄리앙을 향해 마뜩잖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줄리앙은 동화 속 왕자님처럼 정중하게 레아의 손등에 키스하더니, 레아를 에스코트하고 자리를 떠났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줄리앙의 머릿속에는 계속 레아 리버런의 생각만 떠올랐다.

‘지금 공작님 하나를 통째로 삶아서 이 자리에서 다 먹어 치울 수도 있어요!’

어제 그렇게 소리친 걸 생각하니 아직도 웃겼다. 한 줌도 안 되는 가느다란 허리에, 마른 몸을 하고는 날 통째로 삶아서 먹을 수도 있다고? 그러고 보니 오늘 조찬 모임 때도 열심히 이것저것 아침부터 많이도 먹는다 싶기는 했다.

‘먹을 걸 선물할까?’

줄리앙은 괜스레 레아에게 뭔가를 주고 싶었다. 자신의 사과를 받아 주긴 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레아에게 어제 그렇게 상처 주고 막말을 한 것이 미안했다. 무언가 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손님의 자격으로 온 섬이기에 형식상이라도 무언가를 가져와야 했기에 레날의 영지에서 나는 과일들을 잔뜩 가져오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제 리버런 공의 손으로 다 들어갔다. 정작 레아 리버런에게 구혼하기 위해 가져온 선물은 없었다. 구혼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즈몬드 백작은 레아를 위해 갖가지 보석들을 많이도 준비해 온 것 같았다. 앙투안이라는 놈은 어제 리버런 공 앞에서도 빈손이었던 걸 보니 번지르르한 말만 잔뜩 준비해 온 듯싶었다.

꽃이라도 꺾어 줄까 싶었지만, 아니 지천에 널린 게 꽃인 이 섬에서 꽃 선물이란 게 가당키나 한가 싶었다. 줄리앙은 별채 앞의 라벤더 숲을 돌며 한참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그러느라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뒤늦게야 눈치채고 말았다.

“공작님!”

이사벨라 리버런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벨라 리버런.”

“또 뵙네요. 어찌하여 여기서 혼자 걸어 다니고 계시나요?”

방긋 웃는 그 미소는 레아와도 조금은 닮은 듯했다. 줄리앙은 그 얼굴을 보다 묘한 수가 생각났다. 그렇다. 레아 리버런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면 그 언니인 이사벨라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었다.

“선물이요? 글쎄, 레아가 좋아하는 게 뭐가 있지. 고기? 단것? 아, 레날 공작님, 혹시 책을 가지고 오셨나요?”

“네? 책이라면 이 여름 동안 읽을 역사서 몇 권과 집히는 대로 소설책 몇 권을 가져오긴 했습니다.”

“미스터리 소설 같은 건 없나요?”

“미스터리 소설이요?”

“궁정 미스터리 소설이요. 레아가 요즘 거기에 푹 빠져 있거든요.”

줄리앙은 방으로 돌아와 자신의 짐을 이 잡듯 뒤졌다. 궁정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전쟁 미스터리 소설이 한 권, 수도원에서 벌어진 밀실 살인을 다룬 탐정소설이 한 권 있었다.

두 권으로는 왠지 모자란 생각이 들어 그는 별채 옆의 도서관으로 갔다. 리버런의 도서관이지만 리버런 공과 승인된 별채의 객들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는 곳이었다. 줄리앙은 다시 한번 리버런 공이 참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멋진 도서관을 만들어 두고, 일곱 딸을 여기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다니 이 무슨 낭비란 말인가. 그곳에서 줄리앙은 궁정 미스터리 소설을 몇 권 빌렸다. 이것은 줄리앙이 먼저 읽고, 재밌으면 레아에게도 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는 방에 돌아와 편지를 썼다. 악필이었지만, 정성껏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정중함을 담아 썼다.

[내 무례를 용서해 준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새로이 친구가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책을 선물합니다.

―줄리앙 아르디 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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