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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사랑에 빠지지는 않을 거야 (20/48)

20. 사랑에 빠지지는 않을 거야

두 번째 만남 역시 곧 찾아왔다. 그다음 날 아침은, 레아 리버런과 세 남자 모두가 함께 모여 티타임을 갖기로 한 날이었다. 티타임 장소인 화원 옆 응접실은 별채에서 걸어가면 꽤 멀었다.

앙투안과 로즈몬드, 두 남자들은 뭘 그렇게 몸단장을 하는지,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도 출발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고 있었다. 줄리앙은 그들보다 먼저 길을 나섰다. 약속 시간에 늦는 건 딱 질색이었다.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약속은 꼭 지킨다, 그것이 줄리앙의 신조였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한 탓인지 그곳에는 아무도 아직 도착해 있지 않았다. 줄리앙이 도착해서 앉을 곳을 확인하고 있는데 드르륵, 문이 열리고 응접실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레아 리버런이었다. 어제 에드몽과의 대화를 필시 들었을 것이었다. 그 탓인지 레아는 살짝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는 아무 말도 없이 줄리앙을 노려만 보고 있었다. 줄리앙이야 뭐, 선대 레날 공작, 냉랭했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능이 하나 있어 괜찮았다. 그 어떤 침묵과 무언의 요구에도 버틸 수 있는 힘 말이다.

침묵은 쉬이 깨지지 않았다. 드디어 세 번째 사람이 등장했을 때야, 진공을 뚫고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사벨라 리버런이었다.

“레아, 일찍도 나왔다! 어머, 레날 공작님도 같이 계셨네요.”

“네, 이사벨라 리버런, 시간 맞춰 오셨군요.”

줄리앙은 환하게 웃었다. 정시였다. 시간 약속을 지키는 사람을 보면 나오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럼요. 라벤더 숲이 참 아름답죠? 저희 리버런의 가장 큰 자랑이에요.”

이사벨라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분위기를 유하게 만드는 힘도 있었다. 계속해서 수다를 떨어 주니, 줄리앙도 레아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네, 그렇군요.”

“공작님께서는 리버런 섬이 처음이신가요?”

“초대받지 못하면 들어올 수 없는 곳 아닙니까? 당연히 처음입니다.”

저런 식의 말투는 정말이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레아 리버런은 생각했다. 그냥 처음이라고 하면 됐지 왜 사족을 붙이면서 질문한 사람을 민망하게 만든단 말인가. 물론 성격 좋은 이사벨라야 전혀 민망해하지 않고 웃으며 응대했지만 말이다.

레아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사벨라는 두 사람만 있을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주겠다는 듯이 눈을 찡긋하고는 적당한 핑계를 대서 자리를 떴다. 레아는 정말이지, 언니 치맛단을 부여잡고 가지 말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남자와 단둘이 여기에 있어야 하다니.

“어쨌든 셋 중 제일 잘생겼고, 시간도 제일 잘 지키는 남자 아니니? 레아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약속 시간 잘 지키는 잘생긴 남자. 잘해 봐.”

이사벨라는 레아의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고는 서둘러 응접실에서 나갔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응접실을 지배했다. 레아는 처음에는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천성이 그런 분위기를 용납을 못 했다. 생각도 많고, 말도 많고, 조금 경솔하기도 하고, 성격도 급하고, 하지만 쾌활하고 뒤끝이 없는 게 레아의 성격이었다.

“어제 일은 제가 용서하겠어요.”

레아가 말했다.

“뭘 말입니까?”

줄리앙 레날 공작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무례한 말을 하신 거 말이에요.”

레아가 그렇게 말하자, 줄리앙은 다시 한번 시치미를 떼었다.

“제가 무례한 말을 했습니까?”

“그럼요. 원래는 제가 공작님께 사과를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제 막 만난 사이이고, 어제는 제가 듣는 것도 모르고 하신 말씀이실 테니, 그런 장소에서 그런 발언을 하신 경솔함을 제가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 드리죠.”

레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직도 재수 없고 기분 나쁜 남자라는 줄리앙 레날에 대한 레아의 견해는 변함없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석 달씩이나 얼굴 보며 상대할 남자 중 하나 아닌가. 괜히 사이가 어색해지면 레아 쪽에서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레아는 줄리앙과는 달리 침묵도 어색함도 잘 견디지 못하는 여자였다. 하지만 줄리앙은 레아와 생각이 다른 듯했다. 레아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으니 말이다.

“그 용서, 안 해 주셔도 되오.”

“네?”

“애초에 난 용서받을 만큼 무례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무례한 말이라고 생각하시지 않는다고요? 어제 한 말씀들이요?”

“내가 말한 건 다 사실 아니었소? 당신 아버지는 당신과 나머지 딸들을 데리고 장사를 하고 있지.”

줄리앙도 사실 조금은 미안했다. 그런 얘기를 당사자가 듣게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뭐 자신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이 여자에게 밉보이면, 구혼 과정에서의 탈락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여자가 다른 남자를 택했다고 하는데, 여왕님께서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는가. 한번 탈락한 이상 다시 리버런에 돌아올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더 결혼을 미룰 수도 있다. 그는 일부러 더 세게 말했다.

“장사 아닙니까? 자기 잇속을 챙기기 위해 섬의 풍경을 앞에 내세워서 여름휴가네 뭐네 하고 말을 만든 후 딸들을 결혼 시장에 내놓은 장사.”

“그래서 공작님은요? 그 장사판에 끼어든 셈 아닌가요? 저희 아버지를 비난할 자격이 있나요? 제가 보기에는 리버런 공이나 레날 공작님이나 똑같으신데요?”

맞는 말이었다. 저 여자의 시선으로 보면 줄리앙도 똑같았다. 딸을 파는 남자와, 그 딸을 사겠다고 나선 남자일 뿐이다. 하지만 줄리앙은 여기서 선뜻 항복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아니랬소. 날 맘껏 비난하시오. 내게도 사정이야 있지만 그래, 이 천박한 장사판에 끼어든 거야 맞는 말이지. 비난을 받아도 싸지. 하지만 내가 비난받을 당사자라고 해서, 내게 당신 아버지를 비난할 권리가 없는 거요? 판에 끼어든 자는 판을 벌인 자를 비난할 수 없다는 거요? 당신 아버지가 그런 사람인 걸 당신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눈치인데? 레이디 리버런.”

줄리앙은 쓸데없이 정중하게 말끝에는 레이디 리버런이라고 하며 신사다운 인사를 했다. 그래서 더 분통이 터졌다. 레아는 바로 다시 맞받아쳤다.

“네, 레날 공작님. 저도 알지요. 저는 알고 있고, 저는 비난할 수 있습니다. 딸인 제가 아버지를 비난하는 건 가능합니다. 하지만 공작님은 제 뒤에서 제 아버지에 대한 험담을 하다가 그분의 딸인 저에게 걸리셨어요. 그럼 거기에 대한 사과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신 아버지를 비난해서 당신 기분을 나쁘게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요.”

줄리앙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당신도 나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사과를 해야 하오? 불쾌했소? 진짜 불쾌하기는 했소? 그렇다면 내 사과하리다.”

“세상에 그런 사과는 없어요. 불쾌했다면 사과할게, 라는 말은 사과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리고 또 뭡니까?”

“제 외모를 함부로 평가하셨죠. 너무 말랐다느니, 눈이 어떻다느니 말이에요.”

가까이서 보니 더 오묘하고 예쁜 눈이었다. 줄리앙은 꼭 레아에게 그 얘기를 해 주고 싶었다. 언젠가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더 저 여자를 놀리고 싶었다.

“지금 입은 드레스도 허리를 너무 꽉 졸라매었군. 그렇게 작은 드레스를 입으려고 어제저녁도 제대로 먹지 않았겠지. 내 말이 틀리오? 그러니 귀부인들이 늘 픽픽 쓰러지지.”

“아뇨. 전 엄청나게 잘 먹어요. 지금 공작님 하나를 통째로 삶아서 이 자리에서 다 먹어 치울 수도 있어요. 제 허리는 그냥 원래 가늘고요. 잘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형이에요. 아니 그리고 제가 안 먹어서 말랐든, 많이 먹어서 뚱뚱하든 간에 공작님께서 남의 몸이나 얼굴을 함부로 훑어보고 평가할 권리는 없어요! 제가 공작님 눈을 보고 시커먼 게 속을 알 수 없는 연못 같아서 기분 나쁘다고 말하면 공작님은 기분이 어떠시겠느냐고요!”

“뭐, 사실이긴 하지. 내 눈이 좀 검긴 하오.”

“공작님은 진짜 최악이에요!”

“레이디 리버런, 소리를 빽빽 지르는 당신의 모습도 그렇게 좋지는 않소.”

“당신과 내가 결혼할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드디어 줄리앙이 기다리던 말이 나왔다. 줄리앙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것 참 반가운 소리군. 부디, 내가 외압에 못 이겨 당신에게 구혼할 일이 생겨도 거절해 준다면 감사하겠소. 난 절대 당신 같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두 번째 만남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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