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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비밀의 방 (18/48)

18. 비밀의 방

“확실히 결혼을 하면 여자는 좀 유해지는 것 같아.”

베스 언니가 말했다.

“그런 말이 어딨어? 나는―.”

나는 앙투안이랑 결혼하자마자 화살촉처럼 예민해졌었는데, 로즈몬드와 결혼했을 때는 단단한 다이아몬드도 찔러 죽일 수 있을 듯 뾰족한 밤송이였는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속에서 다시 고르고 골라 말을 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면서 뾰족해지는 여자들도 얼마나 많은데 그런 일반론을 말하고 그래? 게다가 뭐 그럼 결혼을 안 하면 성정이 부드러워질 기회가 없다는 거야?”

“레아, 베스 언니는 아마 네가 사랑받는 결혼 생활을 하면서 얼굴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 같아. 그렇지, 언니?”

벨라 언니가 얼른 중재에 나섰다.

“그래, 뭐 그런 거지. 언니가 말재주가 없잖니.”

“그런 말이라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게.”

“하여튼. 우리 리버런 공의 제일 골칫거리 딸, 레아 리버런, 너 아직 뾰족한 거 여전하구나?”

“언제는 유해졌다더니?”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눈에 서린 독기를 풀자, 금세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베스 언니와 벨라 언니가 레날의 영지에 놀러 온 것은 내가 결혼한 지 꼭 석 달 만의 일이었다. 이제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는지, 북쪽의 오를 영지에서 온 벨라 언니는 흑담비 털로 된 숄을 두르고, 베스 언니는 커다란 털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그래, 이젠 좀 익숙해졌니? 얼굴이 정말 좋아 보인다.”

벨라 언니가 물었다.

“내 얼굴이 좋아졌어? 글쎄, 난 잘 모르겠어. 결혼 생활이 이런 거였나 싶어. 이렇게 행복한 거였나.”

“어머, 얘 좀 봐. 아주 대놓고 자랑을 하네.”

베스 언니는 눈을 흘겼다. 그래, 대놓고 자랑이 맞다. 하지만 이게 사실이었다. 줄리앙은 결혼 후에도 결혼 전과 변함없었다. 결혼하자마자 바로 얼굴을 바꾼 앙투안이나 로즈몬드와는 달랐다. 언제나 정중했고, 다정했다.

“난 리버런 섬을 사랑하긴 하지만, 리버런 공의 딸로 사는 삶보다는, 레날 공작부인으로서의 삶이 훨씬 행복한 것 같아. 언니들도 그래?”

“섬이 그립긴 한데, 다리가 놓인 이후로는 전보다 자주 갈 수 있기도 하고. 아무래도 아버지와 부딪치지 않는 게 행복하긴 하지.”

엄하고 권위적인 데다 딸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할 궁리밖에 안 하는 아버지를 둔 세 여자들이 갖는 동질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한동안 아버지에 대한 험담이 이어지다가, 베스 언니가 열띤 대화를 종결지으며 말했다.

“칙칙한 얘기는 그만하고 빨리 네가 그렇게 자랑하는 도서관이나 구경시켜 줘. 아, 나도 이렇게 수도 가까이 살고 싶다.”

집사가 언니들을 데리고 다니며 저택의 곳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먼저 도서관, 그리고 내 보석들과 수도에서 사들인 장인들의 공예품, 섬세하게 직조된 레이스, 고급 공단들을 모아 둔 드레스룸, 벨라 언니는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만 올리브 나무 화원, 우리 가족들의 이름이 걸린 넓은 객실들, 정원의 호수, 커다란 다이닝룸과 별채에 있는 온갖 방들까지 모두 구경시켜 주고 나자 언니들도 기진맥진해져 있었다.

“이걸 다 네가 한 거야? 석 달 만에?”

벨라 언니가 물었다.

“설마. 석 달 만에 어떻게 이걸 다 기획하고 준비하고 맡겨서 꾸미겠어. 이 저택은 내가 왔을 때부터 이렇게 되어 있었어.”

“그렇담 너무 천생연분이잖니? 완전 레아 네 취향이야. 모든 게 레아 리버런이라고 이름 쓰여 있는 거 같은데? ‘연노란색으로 된 벽에 푸른 유약을 칠한 타일로 장식해 두고 싶어.’ 네가 어렸을 때부터 하던 말 아니니?”

“나도 처음 봤을 땐 놀랐어. 줄리앙이 그러는데 내가 남국 취향인 거 같대. 어렸을 때 남쪽에서 가져온 그림책들을 꽤 봤잖아. 선대 레날 공작부인이 남국의 공예품이나 예술품을 좋아해서 저택을 그렇게 꾸며 두셨다고 하더라고.”

“흠. 그거야 일리가 있는 말이네. 줄리앙은 어떤 사람이야? 하도 빨리 결혼을 해서 제대로 친해질 시간도 없었잖니. 기껏 마법의 여름이래서 리버런 섬까지 갔더니 말이야.”

베스 언니가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사실 잘 모르겠어. 나한테 잘해 줘. 뭐든 내 맘대로 하게 해 주고. 안 그래 보이지만 아주 다정해. 말이 없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만 입을 다물고 있는 거더라고. 둘이 있을 땐 곧잘 자기 얘기를 해 줘. 어렸을 때 얘기도 해 주고, 전쟁에서 있었던 얘기도 해 주고. 늘 나를 챙겨 주고, 어디든 같이 가자고 하고.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왜 왕궁에 가는지 이런 얘길 매일매일 해 줘.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동안은 방해 안 하겠다고 하며 자기도 같이 내 옆에서 책을 읽는데 그런 모습도 참 좋다? 퍽도 다정해서 책을 읽다가도 내가 자기 얼굴을 쳐다보면 늘 같이 눈을 마주치면서 웃어. 수도에 다녀올 때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왕님이랑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까지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는데, 그 얘기를 들을 때도 좋아. 레날 영지가 운영되는 방식도 하나같이 다 나한테 얘기해 줘. 어떨 땐 같이 결정하기도 하고. 내가 가고 싶을 땐 수도에 같이 따라가기도 해. 언니들도 알다시피 우리 아버지는 안 그러셨잖아? 리버런 섬에서 여자들은 그냥 무도회에 참석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 엄마랑 아버지 사이에는 아무 대화도 없었고. 그래서 난 이게 좀 신기해.”

“아니, 그럼 뭐 줄리앙은 완벽하게 다정하기만 한 거야? 단점은 없니?”

“단점?”

“그래. 한 달이나 함께 살았는데 뭔가 불편한 점이나 마음에 안 드는 점도 발견했을 법한데 말이지. 정말 아무것도 없이 완벽한 거니? 그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우쭐대며 말했다. 레날 공작님께서 좀 잘생기시긴 하셨지? 하고 말이다. 베스 언니는 눈을 흘기면서, 완벽한 남자라니, 그런 게 정말 있는 거냐고 투덜거렸다.

“모르겠어. 사실 이렇게 많은 걸 내게 다 말해 주고, 언제나 함께 있는데도, 있잖아, 이상하게―.”

“이상하게 뭐?”

“이상하게 줄리앙은 비밀이 많은 사람 같아 보여. 가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응. 사실 여태까지 한 번도 싸워 본 적 없거든. 아, 이건 벨라 언니도 그렇겠지만 말야. 오를 공이 워낙 인품이 좋으시니 말이야.”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벨라 언니는 웃으며 답했다.

“거야, 결혼 전 얘기고, 이제는 우리도 가끔 다툰단다. 그래 봤자 하루도 못 가지만 말이야.”

“하여튼 둘 다 계속 자랑만 할 거야? 우린 하루가 멀다고 다투는데? 레아, 너도 석 달밖에 안 살아 봐서 그런 거지, 앞으로는 어떻게 싸우게 될지 몰라.”

“그러게. 아마 많이 싸우겠지? 그냥 요샌 걱정이 너무 없으니 그런 게 다 걱정되더라고. 줄리앙이 날 너무 참아만 주고 있는 건 아닌가. 참다 참다 터져서 막 싸우고 폭발하고 이러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 말이야.”

“그런 뜻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 거군? 뭐야. 단점을 물었더니 또 자랑을 들은 것 같네.”

나를 타박하는 두 언니와 그 후로도 식사와 함께 긴 담소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만난 세 자매의 수다는 끊길 줄을 몰랐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때쯤 베스 언니가 음흉한 얼굴을 하고는 내게 물었다.

“그런데 왜 네 방은 안 보여 주는 거야?”

괜히 내 얼굴이 빨개지자 언니들은 방이 있는 층도 보여 달라며 성화였다.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 저택 안의 줄리앙의 집무실, 우리의 부부 침실, 그리고 비어 있는 두 방을 보여 주었다.

“따로 방이 없어?”

“우리는 매일 같이 자.”

그 말을 하면서 얼굴이 나도 모르게 빨개지자 베스 언니와 벨라 언니가 깔깔대며 나를 놀렸다. 베스 언니는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줄리앙의 집무실 옆 작은 방의 문을 열었다. 문은 언제나 그렇듯이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여긴 뭐야?”

“아, 거긴 줄리앙이 집무실 옆에다 두고 창고처럼 쓰는 방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꽁꽁 잠가 두었다니?”

“글쎄. 나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내 말을 듣자 베스 언니는 씩 웃더니 말했다.

“여기에 있었구만. 완벽한 레날 공작님의 비밀이.”

“에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서류나 쌓아 두는 작은 방이야.”

“모르지. 너도 안 들어가 봤다면서. 안에 여자라도 숨겨 놨을지 모르는 일이지 않니? 레아, 촉이 안 와? 여자의 촉은 무서운 법이야.”

“언니!”

벨라 언니가 대신 인상을 쓰며 베스 언니에게 한 소리 했다. 큰소리 내는 법이 없는 벨라 언니가 그렇게 나오자, 베스 언니도 그 기세가 좀 사그라들어 알았어, 알았어, 얘는 농담도 못 하니, 라고 하면서 꼬리를 내렸다.

언니들은 일주일을 더 머물고 제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정신없이 일주일이 지나갔다. 언니들이 돌아가자 커다란 저택은 갑자기 적막에 휩싸였다. 줄리앙은 열흘의 일정으로 변방을 사찰하러 간 터였다. 빠르면 오늘 밤, 늦으면 내일이나 내일모레쯤 돌아올 것이었다.

이상하게 언니들이 돌아가고 나자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언니들에게 말한 그대로 줄리앙은 완벽한 남자였다. 또한 언니들에게 말한 그대로 줄리앙은 속 모를 남자이기도 했다. 내게 모든 것을 다 말해 주었지만, 그 모든 것 속에는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혼자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게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베스 언니의 말대로 이런 게 여자의 ‘촉’일지도 모른다.

줄리앙의 집무실, 그리고 집무실 옆방의 열쇠가 어디에 걸려 있는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집사가 따로 관리하지 않고 줄리앙이 직접 우리 침실, 줄리앙 자리 옆쪽 협탁에 넣어 두었으니 말이다. 줄리앙이 도착하기 전에 잠깐만 열어 보고 다시 닫아 두면 되는 일이었다.

머리만 대면 잠에 폭 들던 나였는데 그날은 그 방을 열어 보고 싶다는 유혹과 싸우느라 잠에 통 들지 못했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눈을 잠깐 붙였다가, 아침 해가 미처 다 밝기 전에 다시 눈이 자동으로 떠졌다.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곧 줄리앙이 돌아올 테고, 오늘 저 문을 열지 못한다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른다.

한번 생긴 호기심은 언젠가는 의심으로 변할 테고, 의심이 우리 사이의 균열의 씨앗이 될 수도 있었다. 별거 아닐 것이다. 그냥 한번 열어 보고, 줄리앙 모르게 다시 닫아 두면 된다.

나는 줄리앙 쪽의 협탁 서랍을 열었다. 못을 쓰지 않고 이음새를 잘 짜 맞춰 놓은 장인의 솜씨가 스르르륵, 부드럽게 서랍 여는 소리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협탁 안에는 호두나무로 만든 상자가 하나 있고, 그 상자 안에 열쇠꾸러미가 있었다. 이렇게 소중히 열쇠를 보관하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다. 저 안엔 무슨 금서라도 있는 걸까? 혹시 줄리앙은 나 몰래 야한 금서라도 혼자 읽고는 하는 걸까? 그렇다면 이 일도 우리 사이의 재밌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될 터였다.

침실이 있는 층은 어차피 사용인 하나 없이 나만 쓰고 있는데도 나는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그 방으로 향했다.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열쇠꾸러미 속에서 그 방의 열쇠를 찾아내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몇 개의 열쇠를 꽂아 넣었다가 다시 빼고 다시 맞춰 보고를 반복하면서 진땀을 빼다가 결국, 찾았다. 딸그닥, 소리가 나면서 방문에 걸려 있던 자물쇠가 열렸다.

문을 열어 봤자 서류 더미와 먼지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궁정 미스터리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도 일종의 미스터리였으니 말이다. 스릴 있었다. 열쇠를 쥔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방 안은 내 생각보다 훨씬 컸다. 집무실 바로 옆에 있던 것은 아주 작은 문이었을 뿐인데, 막상 그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집무실보다도 두 배는 더 컸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줄리앙 말대로였다. 창고 같다는 것도 그의 말이 맞았다.

커다란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별다른 가구 하나 없다는 그의 말대로 폐허 같은 그 방에는 그러나 별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벽이다.

창문 하나 없는 그 방에는 커다란 흑판 하나가 벽 전체를 장식하고 있었고, 그 흑판에는 하얀색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하나 읽어 보았다.

1. 고열로 인한 사망(20세)

2. 호두나무 아래에서 번개를 맞아 즉사(21세)

3. 콰이건 다리에서 강 아래로 마차 전복, 사고사(19세)

4. 저택 안의 호수에서 익사(24세)

5. 저택 동쪽 탑에서 실족사(18세)

6. 북서로를 지나다 괴한의 습격으로 피살당함(19세)

7. 리버런 호에서 유영하다 실종, 1년 후 시체로 발견(23세)

…….

번호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 몇 살에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얼핏 보면 일련의 사건에 대해 적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소설 속 이야기인 듯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죽은 이유에 대한 설명과, 장소, 지명에 대한 언급이 너무 상세했다.

밑에는 깨알같이 다른 것들도 쓰여 있었다. 한번 쓰고 나서 글씨 위에 쭉 밑줄을 그어 놓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무슨 내용인지 다 읽을 수 있었다.

1. 고열로 인한 사망(20세) ―더운 침구와 커튼을 주문할 것.

2. 호두나무 아래에서 번개를 맞아 즉사(21세) ―호두나무를 없앤다. 아니 호두나무는 없앨 수 없음.

3. 콰이건 다리에서 강 아래로 마차 전복, 사고사(19세) ―콰이건 다리 재조사. 마차 전복 시 살아난 사람들을 조사하고 다리의 책임자를 만난다.

4. 저택 안의 호수에서 익사(24세) ―호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5. 저택 동쪽 탑에서 실족사(18세) ―동쪽 첨탑 높이 조사. 사람이 떨어져도 죽지 않을 높이는?

6. 북서로를 지나다 괴한의 습격으로 피살당함(19세) ―괴한의 인상착의를 기억해 봐. 누가 꾸민 일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 알아내지 못한다면 북서로 근처의 무리 조사.

일련의 번호들은 그 아래로도 죽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죽었다. 그것도 젊은 나이에 말이다. 그 옆의 밑줄로 그어진 것은 갖가지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한 교묘한 술책임이 틀림없었다.

콰이건 다리를 조사해서 마차 전복 사건이 일어나게 만들기도 했고, 호수 안에 사람이 빠져 죽게 만든 후, 그 호수를 처리하기도 했다. 사람이 떨어져도 죽지 않을 높이를 계산한 후 역으로 가장 높은 동쪽 탑으로 데려가 실족사시키기도 했고 북서로 근처의 괴한들을 조사한 후 괴한의 습격으로 피살당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것들을 계속해서 읽다가 나는 곧 깨닫고 말았다. 내 남편은 살인자일지도 모른다. 줄리앙 레날 공작은 살해범이다. 연쇄살인마인 것이다. 그래, 언니들의 말대로 완벽하게 다정한 내 남편에게는 커다란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몸이 떨렸다. 그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같이 쑤어 보고 왜 그런 짓을 하려고 했는지 알아보려 하던 나였다. 그 눈으로 살인을 계획했다니, 그 커다란 손으로 목이라도 졸랐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흑판 옆으로 그림 하나가 보였다.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금색의 찰랑이는 긴 머리를 하고, 녹색 벨벳 천을 댄 의자에 앉아 포즈를 잡고 있는 잿빛 눈의 여인의 그림이었다. 그건 바로 나였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눈빛부터, 발그레한 뺨까지 모든 것이 나와 똑 닮았으니 말이다.

나는 다시 한번 칠판을 노려보았다. 이제 와 보니 글씨가 낯익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앞의 몇몇 부분은 분명 내 글씨였다. 삐뚤빼뚤하면서도 귀엽게 쓰려고 노력한 내 필기체, 점 대신 동그라미를 그리는 버릇, 저 글씨들은 내 글씨를 따라 쓴 흔적들이었다.

아니, 한 사람의 필체를 저렇게까지 똑같이 따라 쓸 수가 있단 말인가? 저 글씨는 그냥 내 글씨였다. 저것은 내가 쓴 것이었다. 대체 언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레아, 내가 여기엔 들어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줄리앙 레날, 나의 남편, 나의 사랑, 바로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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