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완벽한 결혼식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올리브 나무 사이사이로 동그란 불빛을 내는 보석같이 생긴 것들이 매달려 있었다. 꼭 반딧불이같이 은은한 불을 내는 그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그 불빛 덕에 줄리앙의 잘생긴 얼굴이 훤히 잘 보였다.
어느새 저 멀리까지 넓게도 펼쳐져 있는 라벤더 숲 사이의 작은 길에 줄리앙은 은사로 수놓은 공단을 깔아 두었다. 공단 위에는 푸르고 흰 꽃잎들이 예쁘게 꽃길을 만들고 있었다. 양옆에는 작은 나무둥치가 있었고, 둥치 위의 유리병 안에 든 촛대들이 꽃길을 환하게 비추어 주었다.
그 사이를 지나 우리가 도착할 곳에는 내가 어린 시절 일기장에 서툰 그림으로 그려 놓으며 생각했던 것과 꼭 같은 모양의 아치가 있었다. 둥그스름한 아치는 연푸른 계열의 꽃들이 수국과 라벤더를 중심으로 해서 엮여 있었다. 중간중간에 가든로즈와 수수한 들꽃들, 진한 보라색의 델피니움, 이 근처에는 나는 곳이 없을 텐데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은방울꽃과 부바르디아가 색을 더하며 아름답게 아치를 형성하고 있었다.
아치의 뒤편은 수국 밭이었다. 몇 년간 내가 정성껏 일군 수국 무리들은 마침, 제때를 맞아 초로스름한 빛을 감추고 푸르게 변해 가고 있었다. 토질에 따라, 푸른 것과 연보라색의 것, 분홍 것이 줄줄이 섞여 있는 수국 밭으로 줄리앙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내 쪽을 바라보고 손을 뻗었다.
이제 내가 걸어갈 차례였다. 마리안느가 먼저 꽃잎을 뿌리며 앞장섰다. 연푸른 드레스는 발목이 끌리지 않는 디자인이었기에, 나는 쉽사리 혼자 걸을 수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푸른색의 수국을 뽑아, 가운데에 두고, 그 주변을 은방울꽃으로 장식해 만든 부케를 가지고 줄리앙을 향해 한 발씩 걸어 나갔다. 어디선가 익숙한 노래가 들렸다. 어려서부터 흥얼거리던 노래, 아침이면 유모가 불러 주던 노래, 벨라 언니와 함께 부르던 노래였다.
‘이상하게 이 노래만 들으면 새롭게 뭔가 시작되는 느낌이 들어.’
그렇게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벨라 언니에게였나, 동생 제인에게였나, 아님 다른 누구에게였나, 아마도 모든 사람들에게였을지도 모른다. 앙투안과 결혼했을 때도, 로즈몬드와 결혼했을 때도, 외롭고 힘들던 때, 인생이 괴로울 때, 늘 이 노래를 들으면서 그래, 내일은 뭔가 달라질 거야, 하고 생각했었는데 바로 그 노래가 하프 선율에 실려 내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줄리앙은 어떻게 알았던 걸까. 아마 누군가 그에게 귀띔해 주었을 것이다.
마리안느가 뿌리는 꽃잎을 밟으며 줄리앙 앞까지 걸어가, 마침내 그의 앞에 서자, 그는 여태껏 본 적 없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드디어 내게 왔군요, 레아.”
“드디어라뇨, 이렇게 속전속결인 결혼식도 없을 텐데요, 줄리앙. 당신은 정말 참을성이 없네요.”
“그러게요. 당신이 내 앞으로 걸어오는 길까지 기다리는 게 천년만년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웃는 그의 얼굴은 오늘만큼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줄리앙의 옆에는 그가 불러왔다는 친우 에드몽과, 아마도 그의 사용인, 혹은 나이로 보건대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친구인 듯 보이는 노인 하나가 결혼식의 증인으로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고, 내 옆에는 벨라 언니와 마리안느, 유모가 섰다.
입장과 동시에 울려 퍼졌던 노래가 끝나자, 악사는 하프 줄을 고르고는 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줄리앙이 데려온 악사는 음유시인이었던 모양이다. 앙투안 같은 가짜는 아니었는지, 아름다운 입술 사이로 고대어로 된 가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창조된 모든 영혼들 가운데 나 단 하나를 선택했네.
억겁의 고통과 기다림 속에서도 단 한 번도 그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은 없네.
한참을 기다려 나는 그대를 다시 만나면 말할 것이라네.
이 생이 반복되어 또다시 주어진다 해도 나 영원히 그대를 선택할 것이리.
*(에밀리디킨슨의 시에서 따옴)
결혼식에 울려 퍼지는 노래치고는 좀 이상했다. 단 한 번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악사의 청아한 목소리로 듣는 고대어는 너무도 아름다웠고, 이상하게 그 난해한 가사 속에는 어떤 애절함이 베어 나왔다. 마지막 가사는 괜히 내 마음을 울렸다. 이 생이 또 반복되어 내게 주어진다면, 나는 다시 줄리앙을 선택할까. 글쎄, 결혼은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다. 여태까지의 삶 동안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다.
하지만 지금 마음 같아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죽어서, 다시 열일곱으로 돌아간다면, 난 다시 줄리앙이 준 복숭아를 냉큼 받아먹으며, 그에게 수작을 걸 것이다. 그리고 그와 이렇게 또 결혼할 것이다. 그가 나를 무시하고 피한다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다가갈 것이다.
우리 사이의 역사가 결코 긴 것도 아닌데, 여태까지의 일들이 괜히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결혼식이라는 특수한 상황 탓인지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노래가 끝나고 줄리앙 곁에 서 있던 나이 든 자가 나와 우리를 축복해 주었다.
“사랑으로 맺어진 두 사람, 어떤 괴로움 속에서도 헤어지지 않고 결국에는 행복에 가닿으리니.”
꼬장꼬장해 보이는 마른 노인네였는데 그렇게 말하고 나를 보고 웃는 얼굴은 참 따뜻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가 줄리앙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줄리앙이 그의 손을 잡고 고맙다는 듯 씩 웃더니 준비한 약조를 읊기 시작했다.
“레아 루이스 리버런, 당신의 곁에 내가 언제고 함께할 것을 약속합니다. 다시는 당신 옆에 있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그의 맹세는 굵고 짧았다.
나는 서약서를 쓰면서 한참을 망설였던 터였다. 몇 장을 썼다가 찢고 또 썼다가 찢었다. 세 번의 인생 동안 봐 온 그였지만, 다 합쳐 봤자 며칠 안 만난 사이인 것을,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정말이지 솔직한 내 심정을 썼다. 언제나 경솔하고, 경솔한 만큼 말이 많은 나였기에(사람은 말이 많으면 그만큼 경솔해진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줄리앙의 서약서보다는 조금 길었다.
“줄리앙 아르디 레날,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어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당신이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내 마음이 당신을 먼저 원했을지, 생각해 볼 틈도 주지 않고 당신은 나보다 한 발짝 빨리, 내게 성큼 다가와 주었지요. 먼 훗날 당신이 다정함을 잃고 지금의 사랑을 잃는다 해도, 그때는 내가 당신보다 길고 느리게 사랑해드릴게요. 그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약속이에요.”
그는 내게 키스했다. 베일을 걸치고 티아라를 쓴 머리를 어루만지더니, 이마에 한 번, 볼에 한 번, 입술에 한 번. 그의 입술이 내 입술로 향할 때, 이상하게 처음처럼 떨렸다. 이제 와서 말이다. 잠까지 잔 사이인데.
그의 키스는 정중하고 부드러웠다. 살짝 내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가 혀로 살그머니 어루만지고는, 내 입술 틈새로 자연스레 들어와서 살금살금 약만 올리고 가듯 부드럽게 내 혀와 치열을 어루만지고, 다시 나가 내 윗입술을 애무하던 그 혀는, 제자리를 찾더니 다시 한번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꾹, 도장 찍듯이 누르고는 내게서 멀어져 갔다.
아, 하고 아쉬움에 입이 벌어졌다. 더, 더 하고 싶은, 하지만 더없이 만족스러운, 벨라 언니의 말을 옮기자면 다른 어떤 키스보다도 결혼식에 어울렸던 키스였다.
결혼식 후에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갔다. 우리는 섬에서 육지로 난 다리를 건너 수도로 향하는 마차를 탔고, 꽤 긴 여정을 거쳐 여왕의 앞에 가서 결혼을 승인받았다. 마차 안에서 줄리앙은 날 참 열심히도 챙겨 주었다.
하루는 여정의 끝에 머문 어느 자작의 성에서 지치지도 않고 함께 정원을 거닐며 대화를 하다가 문득 그가 내게 물었다.
“레아,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뭔데요?”
“당신이 결혼식 때 했던 말 말이오. 왜 그런 말을 한 겁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줄리앙은 방긋 웃었다.
“솔직함이야말로 언제나 당신의 미덕이지요, 레아.”
“줄리앙, 당신은 늘 내게 잘해 주잖아요.”
줄리앙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제스처를 지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궁금했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은데, 당신이 내게 이렇게 잘해 줘서 사랑하는 건가, 아니면 잘해 주지 않아도 계속 사랑할 건가. 내 마음이 궁금했어요.”
“레아, 당신은 늘 당신 마음을 궁금해하시네요.”
“그쵸? 그게 제 문제예요. 줄리앙, 당신은 왜 그렇게 매사에 확신에 차 있어요? 저는 제 마음도 잘 모르겠는데 말이에요. 하긴 그런 사람이니 두 번이나 잘못 결혼을 했겠죠. 전 참 생각도 많고,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해도 내 마음 하나 모르겠는데, 또 행동이나 선택은 경솔하죠. 이번에는 그렇게 경솔하게 선택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많이 생각해 본 거예요. 당신이 저한테 잘해 준다고 해서 제가 당신을 좋아하는 거라면, 당신이 더는 내게 잘해 주지 않는다면 나의 사랑도 사그라들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내가 내린 결론은, 나중에 당신이 내게 다정해지지 않는다고 해도, 세월이 흘러 우리 사이가 너무 편해져, 당신이 제 소중함을 깜빡 잊어버린 듯 행동한다고 해도, 나는 당신이 계속 좋을 것 같다는 거였어요. 장담은 못 하겠지만요. 그때 기분은 그랬어요. 한번 시험해 볼 수 있게 나한테 그만 잘해 줘 보는 건 어때요?”
나는 농담처럼 뒤에 그렇게 덧붙였다. 그러자 줄리앙은 진지하게 내 말을 이어받아 대답했다.
“당신은 그냥 나를 사랑하는 겁니다. 레아,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굴어도요. 내가 당신을 괴롭게 해도, 상처 입혀도, 당신은 날 사랑할 겁니다. 난 압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당신을 시험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겠소. 절대로. 내가 당신에게 하는 것들을 모두 버거워하지 말고 받아 주십시오. 당신은 이보다 더 좋은 모든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말만 들어도 배가 불렀다. 설령 이 말이 거짓이라 해도 말이다. 이랬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험난한 삶 속의 큰 위안이 될 것이라는 걸 난 알았다.
우리가 정말 크게 사랑했을 때 쌓아 둔 추억들이, 그 사랑이 희미해졌을 때, 다시 앞날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된다는 것을 알 만큼은 살아 봤으니 말이다.
그의 이 커다란 사랑을 내가 매일 한 움큼씩 받고 있다는 것이 괜스레 부끄러워져 그에게 질문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당신이야말로, 왜 그런 서약을 한 거예요?”
“뭐가 말이오.”
“내 옆에 있는 걸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요.”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요.”
“다시는, 이라고도 말했고요.”
그는 지그시 나를 쳐다보더니, 소년처럼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내 볼을 잡아당겼다.
“레아 리버런, 가끔은 예리하시군요.”
“내가 맨날 눈치 없는 줄 알아요? 어디 내가 한번 맞혀 볼까요? 내가 궁정 미스터리 소설을 엄청 읽는다는 거 알죠? 저 이제 알 것 같아요.”
“뭔가요? 한번 말해 보시지요.”
“지난번이랑 지지난번에 수줍어서 나한테 복숭아 한번 줘 놓고 숨었던 게 못내 아쉬워서 그렇지요? 그래서 내가 다른 남자랑 결혼했던 게 분해서 그런 말을 한 거죠?”
줄리앙은 씩 웃으며 ‘그러게 말입니다. 그게 좀 그랬습니다.’라고 말했다. 긴 여정도 그와 함께 있으니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뒤따라온 리버런 공과 그의 부인, 그러니까 내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우리는 무사히 여왕의 결혼 승인을 받았다.
여정의 진짜 끝은 레날 영지였다. 그곳에 들어온 순간 다시 나는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