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줄리앙은 수줍음이 많다
“네?”
대답과 함께 딸꾹질을 하자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내 등을 두드려 주며 말한다.
“결혼식이요. 어떻습니까, 레아.”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당신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면 꼭 여기 오잖소.”
그걸 아는 건 벨라 언니밖에 없는데, 아무래도 줄리앙이 벨라 언니에게 퍽이나 호감을 산 모양이다.
“어쨌든 환영해요. 여기가 예쁘긴 하죠?”
“그래요. 결혼식을 올리기에 딱 좋겠소.”
“그건…… 보통 결혼식은 남자 쪽의 영지에서 하지 않나요?”
“당신이 선택할 일이오.”
“제가요?”
“당신이 원한다면 레날의 영지에서 해도 좋소. 하지만 라벤더 밭에서 결혼하는 게 당신 소원이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제가 그런 말을 했었어요?”
“그랬는데 첫 번째 인생 때는 못 했다고 했었죠.”
“제가 거기까지 말했었나요?”
그렇다. 첫 번째 인생 때 나는 그 구질구질한 놈의 손에 이끌려 앙투안 구엘의 영지에 있는 작은 교회에 가서 결혼식을 올렸다. 작고 소박한 우리들만의 결혼식을 하자는 말에 설득당해 그렇게 했던 것인데, 그 결혼식은 내가 상상하는 인형들의 귀여운 결혼식 같은 게 아니었다. 교회는 낡고 습하고 곰팡내가 났고, 리버런 공과 그의 아내, 그러니까 내 가족들은 다 인상을 찌푸린 채 참석했다. 아무렴, 내 언니들이 다 교회에 들어오자 교회 전체가 꽉 찰 정도로 하객석이 좁았다.
교회 안에는 흔한 꽃 장식 하나 하지 않았다. 웨딩드레스 대신 낡은 드레스를 입었고, 부케 대신 꽃밭의 들꽃을 대충 꺾어 들었다. 말이 소박한 결혼식이지 이건 뭐 거의 빈털터리 결혼식이나 다름없었다.
왕국에서는 관례로 결혼식 비용은 모두 남자가 대게 되어 있다. 여자 쪽이 재산깨나 있다면 여자가 함께 부담하는 경우도 왕왕 있고, 내 쪽에서도 막대한 지참금이 있었으니 내 드레스 정도야 내 돈으로 살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전체를 다 내가 내라고 해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앙투안 구엘의 그 알량한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결혼식에 드는 돈을 내 아버지에게 받아 혼자 몰래 다른 곳에 썼을지도 모른다. 결국 내 첫 번째 결혼식은 작고 소박한 결혼식이 아니라 돈 없는 남자가 자신의 사정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가난한 결혼식이었다.
“맞아요. 그 결혼식은 최악이었죠.”
“두 번째 결혼식은 어땠습니까?”
“온갖 보석이 가득했고, 사교계의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다 참석했었죠.”
말 그대로 보석이 천지인 결혼식이었다. 로즈몬드 백작은 영지에 있는 그레이트홀의 높은 천장부터 하객석까지 모두 온갖 보석으로 장식했다. 내가 라벤더 숲에서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그는 라벤더색의 보석으로 모든 곳을 장식해 주겠다고 했다. 천장에는 값비싼 크리스털로 만든 샹들리에가 커다랗게 달렸다. 장인에게 주문하여 라벤더와 수국, 온갖 여름꽃들의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한 샹들리에였다. 뭐, 아름답긴 했다. 천박한 아름다움이었지만 말이다.
홀의 양옆으로 자수정을 조각한 조형물이 섰다. 하객석의 곳곳에 영롱한 문스톤과 최고급 자수정을 이용해서 조각한 조명들이 달렸고, 진짜 꽃 대신 보석이 꽃이 있어야 할 모든 곳을 채우고 있었다. 그곳에서 화려한 비즈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은 나는 사방에 장식된 보석의 빛을 받고 반짝반짝 빛났다. 모든 사람들이 날 부러워했고, 나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 결혼의 결과는 더 심했다. 식장의 보석처럼 로즈몬드의 성 안 방에 갇힌 채 23년을 꽁꽁 묶여 지내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혹시 결혼식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
“헐, 어떻게 알았어요?”
“레아, ‘헐’이 뭡니까.”
줄리앙은 가볍게 웃으며 내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다 두 손으로 양 볼을 잡아당기더니 그대로 제 얼굴로 내 볼을 새끼고양이가 그러듯이 비비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뭐예요, 줄리앙.”
“귀여워서요.”
“제가 좀 귀여운 스타일이긴 한데요. 까슬까슬해요. 수염이요.”
“싫습니까?”
“음. 모르겠어요. 감촉이 좋긴 하네요.”
줄리앙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줄리앙, 어쩐지 당신은 제가 뭘 좋아하는지 다 아는 느낌이에요.”
“연륜 때문인가 보죠.”
“그래 봤자 저보다 몇 살이나 많으시다고요? 연륜은 제가 더 있는데요? 아시잖아요. 전 이래 봬도 아줌마예요.”
이제 줄리앙은 내가 어떤 얘길 해도 자지러진다. 왕국의 역사책을 읽거나 천문학 책 개관을 읽어 줘도 저렇게 웃을 것이다.
“그래요, 턱수염은 할 말이 없지만 사실 결혼식은……. 뻔한 얘기지 않습니까? 두 번이나 결혼식을 한 당신에게 있어 식 같은 것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성가신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솔직히 그래요. 당신은 처음일 텐데, 이렇게 말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요. 별로 하고 싶지는 않아요. 줄리앙, 내가 아버지를 싫어한다고 말했었나요?”
“리버런 공 말입니까?”
“난 정말 우리 아버지가 싫어요. 아버지 손을 붙잡고 입장하고 싶지도 않고, 아버지가 내 결혼식 때 참석해서 으스대며 내 딸을 너에게 준다 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싫어요. 아버지와 정치적 관계로 얽힌 온갖 귀족들이 와서 우리 결혼식을 구경하는 것도 싫고요. 아버지 옆에서 노심초사하면서 나한테 아버지 신경 거스르지 않게 행동하라고 하는 엄마도 싫어요.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면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과 결혼할 땐 정말 싫어요. 나, 이번엔 정말 잘하고 싶어요. 솔직히 말해도 돼요?”
“뭐든요. 레아.”
“내가 당신을 믿고 결혼해 보겠다고 말했잖아요. 그 말은 진짜예요. 그리고 이건 정말 진심인데, 나 당신과 자는 게 좋았어요.”
“그냥 좋았어요?”
줄리앙은 어느새 또 능글맞아져서 실실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그래요. 엄청나게 좋았어요. 그리고 당신이랑 이렇게 같이 있는 게 좋은 걸 보니 나도 당신을 아마 조금은 사랑하기 시작한 거 같아요.”
“그다음은 역접 접속사가 오겠죠, 레아?”
“네, 하지만 전 역시 당신을 믿고 내 인생 전부를 다 이 순간에 걸 수는 없어요. 미안해요. 제가 결혼을 꿈꾸던 열일곱 살 레아 리버런 이었으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내 사랑이 부족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압니다. 그래서, 레아 리버런.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결혼식은 내 뜻대로 할게요. 당신을 배제하고 혼자 다 하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같이 결정하고 준비해요.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진행하게 해 줘요.”
“물론이오.”
“두 번의 결혼 동안 내가 느낀 건, 아르디 왕국에서 여자의 인생은 너무 운에만 맡겨 있다는 거예요. 난 두 번 다 운이 안 좋았어요.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고, 내게 빠져서 지금 이렇게 잘해 주지만, 난 절대로 내 인생을 또 운에 맡기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계속해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말했다. 주로 전 결혼 생활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항상 나를 사랑해 달라고, 내게 다정하게 해 달라고, 그런 것들을 바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사람의 감정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는 나보다 더 돈이 많았으니, 앙투안 때 겪었던 가난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말한 것들은 결혼을 앞둔 신부가 작성한 리스트치고는 지나치게 꼼꼼했다.
첫째, 내가 원할 때 언제든 리버런 섬에 올 수 있게 해 줄 것.
둘째, 내 행동을 사사건건 구속하지 말 것.
셋째, 나를 향한 감정이 식더라도 함께 결혼 생활을 했던 아내로서 최소한의 존중을 해 주며 나를 비참하게 하지 말 것.
넷째, 만일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내게 말하고 나를 놔주고 그 여자와 결혼할 것, 날 사랑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내게 충실할 것.
다섯째, 사교계에 자랑할 액세서리처럼 나를 취급하지 말 것, 내가 원하지 않는 장소에 나를 데려가지 말 것.
여섯째, 내가 싫다고 하면 나를 놔주고, 자유롭게 살도록 내버려 둘 것.
일곱째, 우리가 헤어진다면 내가 결혼할 때 가져간 지참금을 돌려주고 내게 살 거처를 마련해 주며 전 공작부인으로서의 대우를 해 줄 것.
좋은 말로 할 때 꼼꼼하다는 것이지 안 좋게 보면 다소 냉철하게까지 느껴질 수 있을 나의 이 일곱 가지 조건을 줄리앙은 가만히 들어 주었다. 개중에는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도 있을 것이다. 아무렴, 한 공국의 주인인 그인데, 결혼식을 올리지 않겠다는 말이 싫을 수도 있을 것이고, 뭐든지 내가 원하는 대로 진행하겠다는 말도 싫을 수 있다. 사랑에 빠져 있는 순간에 바로 다른 여자 운운하는 얘기가 불편할 수도 있다.
그가 기분 나빠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자르거나 끼어들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속 들어 주었다. 그러고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머뭇거리며 이렇게 물었다.
“이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들 아닙니까, 레아.”
말문이 막혔다. 그랬다. 쉬운 말이었다. 모든 항목은 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를 인간으로 대우해 주고 존중해 주세요.’
하지만 두 번의 결혼 생활에서는 전혀 지켜지지 못한 것들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자, 그는 내 팔을 슬며시 잡더니 나를 제 쪽으로 당겨 품안에 가두고는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좋습니다. 레아. 다 해 줄 겁니다. 나도 이번에는 정말 잘해 주고 싶어요.”
“정말요? 그럼 내 말대로 하는 거예요?”
“네. 무조건 당신 말대로 하겠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이 원하시면, 아니 원하지 않더라도, 서면으로 당신 요구를 남겨 계약서를 작성해 오겠습니다. 당신이 좋은 게 나도 좋아요. 다만, 나도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됩니까?”
“뭔가요?”
“내가 당신을 챙기고 걱정하는 걸 귀찮아하지 마세요. 그리고 리버런 섬에 오고 싶으면 언제든 옵시다. 하지만 늘 나와 함께 왔으면 합니다.”
“당신이 무슨 일이 있으면요?”
“레아, 그대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내 계약, 바람, 헤어짐 운운하는 말들을 저런 달콤한 말로 받으니 나도 이 정도는 승낙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벨라 언니 말대로 그는 나와 떨어지기 싫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좋아요. 다른 건 없어요, 줄리앙?”
“음. 아, 결혼식은 나도 더는 안 해도 좋습니다. 다만, 한번 생각해 봤을 뿐입니다. 라벤더 숲에서 결혼을 하고 싶었다면 여기서 한번 해 보는 건 어떨까 하고요. 여긴 당신과 오를 공작부인밖에 모르는 장소라고 했죠?”
“네. 맞아요.”
“그럼 여기서 우리 둘이 결혼식을 해도 아무도 모를 거 아닙니까. 당신 아버지 어머니조차도요.”
“음, 좋을 거 같긴 한데, 한번 생각해 봐도 돼요?”
얼마든지요, 라고 말하며 줄리앙은 웃었다. 그가 이렇게 웃을 때마다 큰 문제가 생긴다. 그 소년 같은 웃음에 홀리듯이 빠져 버려서 다음에 할 말도, 추궁할 질문도 자꾸 까먹어 버리고 만다. 나는 안 돼, 안 돼, 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금은 저 웃음에 홀려서 신나 할 때가 아니다. 아직도 내 안에는 좀 미심쩍은 구석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줄리앙, 아까 하던 말 말인데요.”
“뭡니까, 레아.”
“왜 이제야 날 사랑하게 되었냐는 말이요. 왜 처음부터 날 사랑하지 않았냐는 말이요.”
줄리앙은 고개를 숙인 채 제 발끝을 쳐다보고 살포시 웃었다. 다시 그 잘생긴 얼굴을 들어 나를 보고 답했다.
“레아,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번이 세 번째 생인 건 당신 혼자뿐인데 말입니다.”
듣고 보니 그렇다.
“그러……게요?”
“하지만 제 추측엔 말입니다. 전 아마 계속 당신을 사랑했을 겁니다. 기회를 노리다가 실패했던 걸 거예요.”
“아닌데요.”
“레아, 눈치가 좀 없는 편이란 얘기를 듣지요?”
발끈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좀 그런 말을 듣는 터라 할 말이 없었다.
“네. 왜요? 눈치가 없는 게 나쁜 건가요?”
“아뇨. 당신은 뭘 해도 귀엽습니다. 내 말은 눈치가 없어서 당신만 몰랐던 걸 거라는 겁니다.”
“어…… 아닌데…….”
그러고 보니 처음에 복숭아를 주긴 했고, 내가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시선이 느껴져서 위를 쳐다보았더니 그가 창문 밖을 바라보다가 확 커튼을 쳤던 적도 있긴 했다.
내가 그런 얘기들을 두서없이 털어놓으니 그는 또 내 말을 질리지도 않고 열심히 들어 주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다 나를 사랑해서 그랬던 거예요, 그럼?”
“앞서 말했듯이 레아, 난 그 생을 겪어 보지 못해 잘 모르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당신 같은 사람이요? 그냥 바로 나한테 고백했으면 됐을 텐데. 나를 막 피했잖아요.”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요. 제가 좀 수줍음이 많지 않습니까?”
“당신이요?”
“몰랐습니까?”
수줍음이 많아서, 라고 말하면서 줄리앙은 내게 한 발짝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손에 땀이 나는 게 부끄러워서 주먹을 쥐었더니 그의 커다란 손은 내 작은 주먹을 그대로 부드럽게 감쌌다. 그러고는 그는 제 입술을 내 턱에다 대었다. 턱 가에 아주 가볍게 살짝 입을 맞추고는 그대로 밑으로 내려가 그는 내 목선을 따라가며 살짝살짝 입을 맞추었고, 푹 파인 드레스 안의 훤히 드러나 있는 가슴께로 안착한 그 입술은 마침내, 하얗고 여린 살에 붉은 흔적을 만들어 냈다.
“이게 수줍음이 많은 거라고요?
내가 한 발짝 물러나며, 그에게 눈을 흘기자, 그는 웃으며 그래서 입에다가는 못 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지 않냐고 말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