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벨라 언니와의 대화
“그건―.”
“레날 공작님, 레아 리버런! 여기들 있었군요!”
줄리앙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언니들 넷, 그리고 동생들이 잔뜩 몰려와 줄리앙에게 질문세례를 퍼붓는다. 이래서는 제대로 된 대화도 힘들다. 줄리앙과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만 정작 주인공인 나에겐 발언권 자체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여자 여섯 명에게 둘러싸여 있는 줄리앙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으니 줄리앙이 그 와중에도 나를 보고는 빙긋 웃어 준다.
‘괜찮아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입모양으로 줄리앙에게 말을 걸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막냇동생 마리안느가 그를 이끌고 어디론가 간다. 어제는 하루 종일 줄리앙으로 가득 찼었는데, 아무래도 나의 오늘 하루는 내내 줄리앙과 한 마디도 못 할 운명인가 보다.
소란 통에 벨라 언니가 나를 이끌고 접객실 한구석으로 가 앉았다. 이제야 겨우 숨을 돌리겠다. 벨라 언니는 연신 상글벙글하다.
“레아, 아깐 제대로 얘기도 못 했네. 나 정말 깜짝 놀랐어.”
“깜짝 놀라고 말고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래. 저렇게 다 달려드니 네가 제일 정신이 없겠다. 난 괜히 부럽기도 해. 내 결혼식 때도 생각나고.”
“아, 언니 결혼식 때 진짜 예뻤는데. 그때도 이렇게 힘들었어? 원래 리버런의 여름이 이렇게 빨리 진행되는 거야?”
“모르겠어. 난 다섯 명의 구혼자와 차근차근 만났고, 한 명 한 명 씩 모두와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는걸? 내 마음이야 이미 오래전에 제이미를 향해 있었지만, 그도 내가 마음에 드는지를 확인하는 데는 꽤 오래 걸렸지. 사실 나도 너처럼 단번에 청혼을 받았더라면 좋았을 거야.”
“왜. 석 달 동안 천천히 서로 마음도 확인하고 연애도 하고 좋지.”
“너도 알다시피 제이미는 다 좋은데 좀 소심하잖아. 석 달이 다 지나고, 청혼하기 직전 밤이 되어서야 자기 맘을 이야기하더라. 제이미가 통 제 맘을 말하지 않는 통에 나도 어찌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 몰라.”
“그럼 우리한테 보여 준 팔월 마지막 날 밤의 청혼은 그냥 퍼포먼스였던 거야?”
“그런 셈이지. 너 언니들한테 얘기도 못 들었니? 대체로 그래 왔잖아. 마지막 날 밤의 청혼이 진짜 청혼이었던 건…… 첫째 언니밖에 없을걸?”
아닌데. 난 앙투안도, 로즈몬드도 그냥, 모두의 앞에서 했던 마지막 날 밤의 청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라고 말하고 싶지만 할 수 없었다. 결국 앙투안도 로즈몬드도 나와 사랑에 빠져서 내게 구혼했던 건 아니라는 게 다시 한번 뼈아프게 다가온다.
언니들은 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던 거구나. 난 여태까지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 인생에는 어쩌면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애 과정이란 게 없었던 것 아닐까 싶다.
줄리앙 레날에게서 받은 청혼만이 진짜 청혼이었다. 단둘이 있었을 때, 진심을 다해서 한 청혼, 벨라 언니가 제이미 오를 공에게 받았던 청혼, 베스 언니가 드 라넬 백작에게 받았던 청혼 같은 것 말이다.
“난…… 몰랐어. 이게 이렇게 흐르는 건지 말이야.”
“그래도 이렇게 빨리, 6월이 가기도 전에 청혼을 한 남자는 레날 공작이 처음일 거야. 레아, 정말 복 받았구나.”
“이게 좋은 거야?”
“그럼. 요샌 남자들도 그렇게 쉽게 청혼하지는 않아. 첫눈에 반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니?”
“글쎄. 난 정말 줄리앙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는지 모르겠어.”
“얘는 무슨. 그만 좀 겸손해라.”
나는 그가 두 번씩이나 나를 무시하고 내게 구혼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은 할 수 없었기에, 말을 돌려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 궁정 무도회 때 만났던 르네 피셔는 만나자마자 청혼을 받았다고 하던데?”
“재산이나 가문을 보고 하는 정략결혼은 그렇게 하기도 하지. 뭐, 우리 가문에서 주는 지참금이 많기야 하지만, 리버런에 오는 정도 남자라면 지참금이 아쉬울 정도의 사람들은 아니잖아.”
“글쎄. 노리고 오는 사람도 있을걸.”
나는 앙투안을 생각하며 이를 갈듯 말한다.
“그래? 뭐 지참금이 상당하긴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안 그럴 거야. 리버런과 결혼하고 지참금을 챙기고 싶어 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단 리버런 섬에서 여름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 반, 이 기회에 제대로 된 사랑을 만나고 싶단 마음 반으로 오는 사람들이 더 많을걸. 우리 섬이 워낙 여름에 예쁘잖니. 실제로 몇몇은 아예 구혼을 하지 않고 돌아가기도 하고 말이야.”
나는 잠깐, 첫 번째 인생과 두 번째 인생 때의 줄리앙 레날 공작을 떠올려 봤다. 그도 꼭 그래 보였다. 우리 섬에서 라벤더 숲이나 거닐며 잠깐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온 사람같이 굴었었다.
“……그러게. 그런 사람들도 있겠네.”
“우리 자매들이 다들 워낙 미인이니 대체로 전원이 청혼을 하긴 하지만 말이지. 그렇긴 해도 이렇게 저렇게 재고 따지고 하다가 상대도 나와 비슷하겠다, 내가 밑지는 건 없겠다, 내 청혼을 받아들여 주겠다 싶을 때서야 겨우 청혼을 하는 게 대부분이지 않겠니? 아니, 처음부터 결혼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더라도 말이야. 아직 정식으로 청혼하는 날까지 석 달은 더 남았는데, 이렇게 빨리 청혼을 하다니 보통 용기가 아니야. 많은 구혼자 중에 단번에 자신을 고를 거라는 확신 없이는 하기 힘들지. 하긴 줄리앙 레날 공작이라면 자신 있을 만도 해. 나머지 둘은 솔직히 줄리앙에게 비교도 안 되니까 말이야.”
“그건 그래.”
“레아 너도 동의하는구나.”
“앙투안이든 로즈몬드든 쓰레기니까.”
“어머, 레아 너도 참. 그렇게까지 말하다니. 앙투안도 제법 잘생겼고, 로즈몬드도 왕궁에서 손꼽는 재산가인걸? 하지만 너의 미래의 부군과 비교하자면 그 말도 크게 지나친 건 아니지. 선대 레날 공작의 공작부인께서 여왕의 여동생이지 않니. 아무래도 여왕님께서 줄리앙을 밀어 주려 일부러 그런 사람들을 골랐나 싶어. 네겐 잘된 일이지 뭐니. 고민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질문을 하나 덧붙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되는 거니?”
“모르겠어. 일단 줄리앙을 만나고 싶은데.”
“저녁 만찬 때 보게 되겠지.”
벨라 언니는 연신 싱글벙글하였다.
불현듯 앙투안과의 첫 번째 결혼식 때 벨라 언니의 모습이 생각났다. 언니는 결혼식 전에 내게 찾아와서 정말 괜찮겠냐고 물었다. 나는 다 괜찮을 거라고 앙투안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말했었다. 언니는 그때 왜 그런 질문을 했던 걸까. 오래도록 그때를 떠올리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었다. 언니 말대로 좀 더 생각해 볼걸 하고 말이다. 경솔한 내가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간 앙투안의 단점들이 현명한 언니의 눈엔 모두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언니는 왜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왜 이번에는 괜찮냐고, 정말로 확신하냐고 묻지 않는 걸까.
나는 언니에게 묻고 싶었다. 왜 ‘이번에는’ 그렇게 걱정하지 않는 거야? 라고. 하지만 벨라 언니 앞에서 내가 벌써 세 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줄리앙에게는 신나게 털어놓았는데 제일 친한 벨라 언니에게는 말할 수 없는 데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내 삶에 대해서 말했다가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 테고, 설령 언니가 고맙게도 내 얘길 다 믿어 준다고 하더라도 벨라 언니는 분명 내게 물을 것이다.
[그럼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데?]
문제는 그 질문에 내가 답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언니는 지금 배고 있는 나의 첫 번째 조카를 사산할 거야. 둘째 아이는 무사히 출산하지만 다섯 살 때 열병으로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될 거야. 셋째 아이를 낳다 언니는 위독해질 거야.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밖에 없어. 두 번의 결혼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언니를 만나지 못했거든. 언니. 미안해. 이건 사고도 아니었고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었어. 다만 운명이었을 뿐야.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레아 리버런. 우리 새 신부님,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눈이 슬퍼졌잖아.”
“응? 아, 미안.”
“이런, 이런. 왜 눈물을 글썽이니. 어렸을 때부터 너는 참 성격은 급하고 마음이 여렸지. 혹시 급하게 청혼을 승낙하고 나니까 이제야 리버런 섬을 떠나는 게 두렵기라도 한 거야?”
“응. 아마 그런가 봐.”
나는 얼른 빨개진 눈을 수습하면서 그렇게 얼버무렸다.
“괜찮아, 레아. 나처럼 이렇게 가끔 오면 되잖아. 줄리앙은 네가 여기 온다고 해서 싫어할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걸? 너랑 오래 떨어져 있는 걸 못 견디고 따라오려고 하긴 하겠지만. 레아.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응? 무슨 말이니?”
“언니는……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내가 앙투안이나 로즈몬드랑 결혼한다고 했더라면 되게 걱정했을 것 같거든. 줄리앙이 괜찮은 사람인 걸 알아서 걱정 안 하는 거야?”
“한두 번 티타임 때 얼굴 본 것이 다인데 내가 어떻게 알겠니. 줄리앙이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말이야. 잘생겼다는 거야 한눈에 알았지만.”
“그렇지?”
내가 씩 웃자 언니도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렇게 좋니?”
“잘생기긴 잘생겼잖아. 아, 근데 티타임 때뿐만이 아니라 언니 결혼식 때도 봤을 거 아냐. 줄리앙이 언니 결혼식 때 나를 처음 봤다고 하던데.”
“우리 결혼식 때 왔다고? 그럴 리가. 그때 우리 결혼식 초대장엔 인장을 박는 대신 서명을 하고 싶어서 나와 제이미가 하나하나 손수 이름을 확인하고 썼는걸?”
“왔다고 하던데, 분명.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언니가 잊고 있는 건 아니야?”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결혼식 땐 워낙 정신이 없었으니 말이야. 레아, 그럼 설마 줄리앙 레날 공작은 그때 널 보고 첫눈에 반해서 여기까지 쫓아온 거니?”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쩜!”
“동생들한테는 말하지 마. 또 다들 시끄럽게 난리 법석을 떨 테니 말이야.”
“레아, 기분 좋으면 기분 좋은 티 팍팍 내도 돼. 그게 신부의 권리이니까 말이야. 마음껏 행복해하렴. 미소를 숨기려 들지 않아도 돼. 지금도 충분히 예쁘게 웃고 있지만 말이야. 언니가 걱정 안 하는 건 줄리앙이 괜찮은 사람인 걸 알아서라기보다 지금 네 얼굴 때문이야.”
“내 얼굴?”
“그래. 아까 레날 공작님을 보고 웃던 네 얼굴. 그리고 널 바라보던 그의 얼굴 말이야. 내가 다 설레더라. 뭐 그렇게 쳐다본다니, 사람을.”
“줄리앙이 날? 어떻게 쳐다봤는데?”
“눈을 떼기라도 하면 사라져 버릴 사람 보듯이 계속 쳐다보잖아. 뭐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다 좀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괜히 내가 다 짠해지더라.”
“짠해?”
“그래. 사랑이 너무 가득 차 있으니 행복해 보이다 못해 애처로워 보이더라고. 레아 네 얼굴도 똑같긴 했지만, 넌 짠하다기보단 좀…… 들떠 보였구. 내가 너무 네 신랑을 칭찬해서 부끄럽긴 한데, 얘, 레날 공작님은 눈이 참, 진실해 보이더라.”
그거야 줄리앙이 잘생겼으니까 그래 보이는 거지, 하고 나는 얼버무리듯이 말해 버리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줄리앙 말대로 나는 그를 벌써 사랑하게 된 걸까? 사랑한다고 말해 버렸다. 사실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반해 있었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그는 대체 왜 이제 와서 내가 청혼한 걸까. 나는 또 무슨 마음으로 이렇게 덜컥 승낙하고 기분 좋아하는 걸까.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사실 내 진짜 마음은 다시는 ‘불행한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혼이라는 걸 ‘꼭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셋 중 하나를 억지로 선택하지는 않겠다는 말이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쨌든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는 미처 몰랐다. 줄리앙 레날이 이렇게 내게 다가와 내 마음을 홀랑 빼앗아 버릴 줄은 말이다. 정말이지 귀신에게 홀린 듯한 기분이다.
이렇게 화르르 빠져드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일까? 이런 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은 몰랐다. 또 한 번 결혼이란 제도 안에 한 발을 담가 버리고 말았지만 자꾸 이번은 조금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나를 설득했을 때 말한 대로, 결혼하지 않고 리버런 섬에서 산다고 해도 아버지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와 결혼한다면, 그가 약속한 대로 날 자유롭게 존중해 준다면 그쪽이 더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이성적인 사고보다는 사랑에 빠져 마음을 따라 내린 결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 안에서는 수많은 합리화가 일어나고 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일단 그를 만나 더 얘기하고 싶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다 줄리앙이 쓴 술수인 것이다. 이렇게 일이 빨리 진행되니, 생각할 틈도 없다.
잠시 마음을 고르고 생각을 정돈하려 나는 동쪽 탑 아래쪽 올리브 화원으로 갔다. 여기 있다가 소란이 좀 잠재워지면 줄리앙이 있을 별채 근처에 가 봐야겠다.
햇빛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는 올리브 나무가 무성하게 심어져 있는 화원은 예전에는 수국이며 붓꽃, 맨드라미, 샐비어가 철마다 아름답게 꽃밭을 수놓는 성안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동쪽 탑이 세워진 이래로 나의 아버지 리버런 공은 이곳을 완전히 폐쇄해 버렸고, 아무도 이곳에 오지 않는다. 어렸을 때 언니들과 이곳에서 뛰놀던 추억을 잊지 못하던 나는 동관으로 내 방을 옮긴 후에 몰래 이곳에 들어와 봤고, 그때 이후로 때때로 몰래 이곳에 들어와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내 방에 있는 동관은 지대가 높아, 지하로 내려가서 뒷문으로 나가면 바로 지상의 이 화원으로 연결되는 작은 통로가 있다.
통로를 지나자마자 금빛, 은빛으로 눈이 부시다.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는 들판에 올리브 나무가 수백 그루 심어져 있는 드넓은 화원이 나온다. 아무도 그 통로로는 지나다니지 않으니 정말로 나만 아는 정원인 셈이다.
몇 년 전 이곳을 발견한 이래로, 몰래몰래 오가며 올리브 나무 반대쪽 황무지 같은 공간에다 벨라 언니와 함께 수국과 라벤더, 칼리 안드라를 심어 길러 보았다. 언니가 결혼하고 이곳을 떠나고 나서야 꽃들이 피어서 유감이다.
습기 없고 서늘한 리버런 섬에서는 수국이 제법 잘 자란다. 수국은 바싹 시들다가도 물만 듬뿍 주면 바로 싱싱해지는 신기한 꽃이니, 비가 잘 오지 않는 계절이면 매번 이곳으로 몰래 물을 길어 와 대느라 힘들었지만, 공들인 보람 있게 나만의 비밀의 화원은 이제 제법 아름다운 곳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제법 푸르러지는 수국, 요즘이 한창인 라벤더, 요정의 먼지떨이같이 부스스한 칼리 안드라가 어우러진 드넓은 꽃밭 한가운데, 올리브 나무처럼 커다란 누군가가 있었다. 뒷모습만 보고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줄리앙이다.
깜짝 놀란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딸꾹질을 하기 시작하자,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본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물어보려고 하는데, 나를 쳐다보자마자 그가 짓는 환한 미소에 가슴이 벅차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분수대처럼 내뱉던 내가 말문이 막히다니, 무슨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닌가 싶다. 그는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열고 근사한 입매로 미소를 짓다 이렇게 말했다.
“결혼식은 여기서 하는 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