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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질문 하나 (11/48)

11. 질문 하나

그의 품에 안겨 잠깐 잠이 들었다. 십 분, 이십 분 정도 잤을까,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풀벌레 소리도 없이 사방이 고요해져 있었다. 새벽이 깊었다. 새벽 공기 안에 아침 냄새가 뒤섞여 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잤나 보다.

줄리앙은 내게 팔베개를 한 채로 나를 안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다. 한참을 그의 팔을 베고 잤다면, 지금쯤 제법 저리겠다 싶어 몰래 머리를 내렸다. 그의 품 안에 안긴 채로 쏙, 아래로 내려가려고 꿈틀하자 그가 눈을 뜬다. 기다란 눈매, 깊은 눈이 거짓말처럼 열리고, 그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감은 눈 사이로 저 까만 눈동자가 열리는 것을 보는 일은 왜 이토록 감동적인 것일까.

“레아, 왜?”

“팔 아플까 봐요. 한참을 베고 잤네요.”

“괜찮아요. 내일 아침부터 팔 한쪽을 안 쓰고 살면 되죠.”

줄리앙은 태연한 얼굴로 팔을 힘겹게 이리저리 구부려 보며 그런 소리를 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농담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네요.”

“당신한테 배웠습니다.”

“왜 잘 때는 반말하더니 다시 깍듯한 존댓말로 돌아와 있나요?”

“아, 그건 습관이―.”

“아, 여자랑 잘 때는 그렇게 습관이 들었단 말이죠?”

줄리앙은 말을 하다 말고 멈추더니 방긋 웃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웃는 얼굴이 귀여워서 딱히 불쾌하지도 않다. 그의 나이도 스물이 넘은 지 한참이다. 저렇게나 미남에 한 공국의 주인이고 말이다. 레날의 영지는 수도를 둘러싸고 있다. 왕궁이 그토록 가까우니 무도회도 자주 드나들 수 있었을 것이다. 여자도 많이 만나 봤겠지. 이해한다.

여자랑 잘 때는 반말을 한다는 습관이 있다는 거야 내겐 알 필요가 없는 정보였지만, 나라고 해서 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니까 할 말이 없다. 이번 생에야 그가 나의 첫 남자지만, 난 이미 결혼도 두 번 한 몸 아닌가.

“그런 뜻이 아닌 거 알지요?”

안절부절 정도는 아니지만 은근슬쩍 내 눈치를 본다. 내가 살짝 고개를 흔들며 미소를 흘리니 그는 바로 날 껴안고 내 품 안에 코를 묻는다.

“줄리앙, 당신 개 같아요.”

“네?”

황당한 듯 고개를 들어 그가 나를 쳐다본다. 그러니까 냄새를 자꾸 맡는 게 개 같다는 말이었는데 막상 내뱉고 보니 좀 욕 같긴 하다.

“아, 그게, 그러니까, 왜 자꾸 킁킁대는 거예요?”

줄리앙은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조용한 새벽을 웃음소리가 가른다. 쉿, 하고 내가 그의 입을 막자, 그는 내 손을 날름 핥는다. 으악, 하고 내가 소리치자 그는 웃으며 말한다.

“개 같다면서 왜 그러십니까? 이렇게 하라는 거 아녔소?”

“몰라요. 냄새 맡지 마요. 씻을 거예요.”

내가 몸을 굴려 빠져나가자 그는 다시 굴러와 나를 뒤에서 꼭 안았다. 그 바람에 우리의 몸이 창문 쪽으로 향하자 커튼 틈으로 서서히 해가 뜨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동틀 녘이 되었다는 건 몇 시간 뒤면 유모나 다른 사람들이 깨어날 거라는 얘기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당신과 이렇게 잠이 들었다 깨니 행복해서요…….”

“뭐 그런 말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해요.”

“왜 내가 못 할 말 했습니까. 왜요. 더 할 겁니다. 레아, 사랑합니다. 아침에 보니 잔뜩 부은 얼굴이 더 귀엽군요.”

“부끄럽잖아요.”

내 볼을 잡아당기는 그의 얼굴은 정말이지, 나 행복해, 나 너무 좋아, 나 너 사랑해, 라고 글씨로 써 놓아도 이것보다는 덜 정확히 전달되겠다 싶을 정도다. 내게 사랑의 눈빛을 힘껏 뿜뿜 뿜어내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 응하기에는 일단 마음이 너무 급하다.

“줄리앙, 나도 당신을 사랑하는 거 같아요. 여기서 ‘같아요’는 수줍어서 그런 거예요. 근데 빨리 나가야 해요.”

“레아, 당신의 화법은 평생 들어도 적응 못 할 것 같군요. 왜 당근과 채찍을 함께 줍니까?”

“미안해요. 근데 아침까지 같이 잘 순 없어요.”

“음, 그러니까 잠은 잤고, 날 사랑은 하는 거 같은데, 방에서는 내쫓겠다는 소리요?”

“뭐 말하고 보니 그렇게 되네요. 몇 시간만 있으면 사람들이 다 깰 거예요. 어쩔 수 없잖아요. 어차피 결혼할 거잖아요. 나중에 같이 잠들어요. 빨리 나가요.”

“어차피 결혼할 건데, 그냥 같이 자면 안 됩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순순히 바지를 꿰차고, 열심히 나갈 태세를 하고 있었다.

“알잖아요. 뭐 사람들이 봐서 안 될 건 없지만 나랑 당신이랑 잤다고 광고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더니 내게 물었다.

“그럼 나랑 당신이랑 결혼하겠다고 광고하는 건 괜찮습니까?”

“그거야 빨리 알릴수록 좋겠죠. 이래저래 처리할 일이 많아졌네요. 아버지에게도 얘기해야 하고, 두 구혼자들도 내쫓아야 하고……. 어머, 줄리앙. 벌써 다 입었어요? 왜 이렇게 빨라요?”

“잠자리에서 왜 이렇게 빠르냐는 소리를 듣다니, 좋은 표시는 아니군요.”

1초 정도 있다가 그가 야한 농담을 했다는 걸 깨닫고 내가 짧은 웃음을 흘리자, 어느새 셔츠까지 다 입고 신발 끈까지 묶은 그는 내 이마에 키스를 하며 말을 이었다.

“레아, 생각이 많은 레아. 걱정도 많은 레아. 온갖 절차나 처리할 일들은 머리에서 지워 버리고 오늘은 그냥 쉬어요. 알았죠?”

“알았어요.”

“아침 산책은…… 힘들 것 같고, 이따 티타임 때나 볼 수 있을까요?”

그는 어젯밤 분발해서 괴롭혔던 내 몸을 장난스럽게 쓰다듬으며 그렇게 물었다.

“좋아요. 난 좀 더 잘게요. 당신도 거처로 돌아가서 자요. 점심때 복숭아를 먹었던 그 응접실에서 봐요. 얼른 가요.”

사실은 더 있었으면 했지만 이렇게 계속 둘이 농담 따먹기 하다간 끝없이 투닥거리며 시간을 끌 것이 분명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시간의 흐름이 달라졌다. 갑자기 빨라졌다가 또 느려지는 것 같았다.

창문 밖을 바라보니, 그가 입구에서 나와 걸어가다 말고 내 방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잠시 멈추어 제 손가락 두 개를 입으로 향해, 손에 입을 맞추고는 내게 키스를 날린다. 소년 같은 미소를 보고 있자니 왜인지 마음이 다 저릿해 온다.

어쩌자고 저렇게 달콤한 것일까.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는 모두 다 이런 거겠지. 책으로 보고 말로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세 번의 인생 만에 처음, 내게 푹 빠져서 사랑만을 주는 남자를 만나 보니 아, 이런 건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다. 저런 행동, 언니들이 성 밖에 몰래 나갔다 사 온 궁중 연애소설에서나 보는 건 줄 알았는데 말이다.

소설에서 봤을 땐 그렇게 느끼할 수가 없었는데 줄리앙같이 생긴 남자가 하니까, 왜 소설 속 여자들이 키스를 날리는 바람둥이한테 그토록 빠져들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바람둥이도 줄리앙처럼 생겼었겠지.

그런데 막 사랑에 빠졌을 때의 이 행복은 대체 언제까지나 갈까. 엉겁결에 사랑한다는 말까지 해 버리고 말았다. 첫 번째 생에서도, 두 번째 생에서도 날 그렇게 피하던 이에게 말이다. 지난 46년간, 그를 미워했는데, 이게 맞는 걸까. 그 역시도 결혼하면 바로 변하는 건 아닐까? 내가 또 경솔한 선택을 하고 있는 건가? 모르겠다. 어쨌든 어젯밤은 환상적이었다. 그 정도면 내 모든 경솔한 행동들에도 면죄부가 주어진다.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게 만든 게 내 경솔한 입놀림이었으니 말이다.

또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사이에 나는 어느새 다시 잠이 들었다. 꿈에서도 줄리앙이 나왔던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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