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레아의 마음
줄리앙은 사뭇 진지해 보였다. 밤바람이 산들산들 불었다. 검은 눈이 거울처럼 여름밤 풍경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하얀 달과 내 푸른 드레스를 함께 담느라 검푸르게 빛났다.
“리버런 공께서는 저를 맘에 들어 하실 거라고 했잖습니까.”
“네. 당신은 딱 우리 아버지가 원하는 사윗감이죠.”
“레아, 그대는 어떠신가요. 제가 마음에 드십니까?”
“제 마음이 중요한가요?”
“네, 중요합니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 받을 줄 몰랐기 때문에 대답도 생각해 두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사실.”
줄리앙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 넓은 영지나 돈, 지위는 탐이 안 납니까?”
“그게 당신 거지 뭐 제 건가요. 돈을 탐내 본 적도 있어요.”
“로즈몬드와 결혼했을 때 말입니까?”
“네. 어리석었죠. 아주. 덕분에 돈이 다가 아니라는 걸 배웠지요. 운 좋게 새로운 인생으로 돌아와 배운 걸 적용할 기회도 얻었고요.”
“제 돈으로는 당신을 유혹하지 못하겠군요. 그럼 제가 맘에 안 드십니까?”
“당신을 처음 봤을 때는―.”
“어제 말입니까? 아니면 첫 번째 생에서요?”
“네. 그때요. 그때 당신을 처음 봤을 때는요, 너무 잘생기셔서 첫눈에 반했어요.”
“부끄러워하시지도 않고 그런 말씀을 잘도 하십니다.”
그야말로 낯빛 하나 붉히지 않고 태연히 내 말을 받았다. 하긴, 정말 잘생겼으니까. 나 같은 반응을 보이는 여자들이 여태껏 수두룩했을 거다.
“솔직히 정말 잘생기셨잖아요. 저 같은 열일곱 소녀야 당신같이 잘생긴 사람을 처음 보면 당연히 반하고 말죠.”
줄리앙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말을 계속 이었다.
“제가 진짜 열일곱이면 수줍어서 이런 말도 못 하겠지만, 아시잖아요. 전 사실 열일곱만 벌써 세 번째예요. 잘생긴 사람을 보고 잘생겼다고 말할 수 있는 관록 정도야 저도 이제 가지고 있죠.”
“레아, 당신은 아마 첫 번째 생애도 이러셨을 겁니다.”
“아니에요. 정말 너무 잘생기셔서 수줍어서 제대로 말도 못 붙였는걸요.”
“믿어지지 않습니다.”
“진짜예요. 처음엔 그랬어요. 근데 알고 보니 좀 사람이 냉정한 데가 있더라고요.”
“네?”
“차가웠어요. 어찌나 쌀쌀맞으시던지. 저가 뭔데 나를 피해. 내가 똥이야? 거지야? 이럴 거면 왜 구혼자랍시고 여긴 왔어? 뭐야, 리버런이 자기 휴가지야? 정말 짜증 나는 사람이네. 여태까지 내내 그렇게 생각했어요.”
줄리앙은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레아 당신은 정말이지…….”
“정말이지 뭐요? 돌았다고요?”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 날 많이 웃기는 여자요. 언제나.”
언제나라니. 나랑 몇 번을 봤다고 그러나 싶었지만, 뭐 그를 그렇게 크게 웃게 만들었다는 건 왠지 뿌듯했다.
“그런데 저요. 지금은 공작님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냉혈한이라고요?”
“네. 차갑지 않아요. 좋은 분이시네요. 줄리앙 당신은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제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요.”
“그냥 알아요.”
“잘생긴 사람한테 지나치게 빨리 경계를 푸는 경향이 있으시죠?”
“그럴 수도 있어요. 두 번의 인생을 거쳤는데도 여전히 좀 경솔하죠, 제가. 아, 그런데 아까 뭐라고 하신 거예요?”
“아까요?”
“아까 입 모양으로 뭐라고 하셨잖아요.”
“글쎄, 기억이 안 납니다.”
줄리앙이 딴청을 피우며 걷는 사이 내 방이 있는 저택의 동관으로 금세 도착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와 함께하고 있으니 정말 즐거웠다. 단순히 그가 미남이라서가 아니다. 물론 가만히 쳐다만 봐도 막 웃음이 나올 정도로 잘생기긴 했지만 말이다. 그냥 그와 스스럼없이 나누는 대화들이 참 즐거웠다. 두 번의 삶 동안 잔뜩 움츠러든 내 마음이 조금 풀린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앞에선 왠지 모르겠지만 내가 좀 더 나다워질 수 있었다. 눈치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얼른 들어가 보십시오. 춥다고 하셨잖습니까.”
“네? 그거 거짓말이었어요. 지루해서요.”
“압니다. 그래도 리버런 공이 의아해하실 테니 뭐라고 걸치고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맞다!”
내가 촐싹맞게 뛰어 들어가자 뒤에서 다시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유모가 내어 주는 숄을 어깨에 감고 나오니 줄리앙은 내게 말했다.
“잠깐 벗어 주실 수 있습니까?”
“네?”
“겉옷이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겉옷을 벗으며 줄리앙에게 물었다.
“왜요? 추우신가요?”
줄리앙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뇨. 그냥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뭐가요?”
“연푸른 드레스를 입은 레아, 당신의 모습을요.”
“원하신다면 내일도 입을 수 있어요.
줄리앙은 내 말에 따뜻한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한참을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면 기억 속에 영원히 각인시키기라도 할 수 있다는 듯이.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예뻐서요.”
“줄리앙, 당신이야말로 눈 하나 깜짝 안 하시고 그런 말을 하시네요.”
“사실이니까요.”
“왜 푸른 드레스를 입고 오라고 하셨죠?”
“잘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제가 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신 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봤습니다.”
공작은 깊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여전히 아름답고요.”
“아까 그렇게 말씀하신 거죠?”
“네?”
“입 모양이요. 여전히 아름답다고요. 똑같은 입 모양이네요.”
“여전히 영민하시군요.”
“줄리앙, 당신은 아까부터 꼭 절 잘 아는 사람처럼 말씀하세요. 혹시나 혹시나 했는데, 당신―.”
줄리앙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벨라 언니와 제이미 오를 공작님의 결혼식 때 참석하셨나요? 그때 절 보신 거죠? 제가 당시 이 옷을 입고 제가 직접 지은 축시도 읊었는데. 그걸 보신 거죠? 아, 혹시 오를 공작님과 친분이 있으신가요? 오를 공작님이 제 얘기 했죠?”
줄리앙은 대답 없이 가만히 웃기만 했다.
“전 당신을 못 봤는데……. 워낙 큰 결혼식이었으니까요. 거기서 절 보신 거 맞죠? 아니에요? 맞으면 맞다고 해 줘요.”
“……네. 맞습니다, 레아.”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대답했다. 내게 들킬 줄은 몰랐겠지! 궁정 미스터리 소설을 열심히 읽어 뒀더니 나한테도 추리력이라는 게 생겼나 보다.
그래. 오를 공도 궁정 출입이 잦으니, 레날 공작을 결혼식에 초대할 만도 하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나는 신나서 한 바퀴를 뱅글 돌며 쾌재를 부르곤 제자리로 돌아왔다.
“줄리앙. 어?”
내 앞에 우뚝 선 나무처럼 커다랗게 서 있던 줄리앙이 없어졌다.
“레아.”
그는 바로 밑에서, 내 앞에 오른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반지가 든 작은 상자였다. 그가 그 상자를 열어 보이자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전 생애에도, 전전 생애에도 본 적 없는 커다랗고 영롱한 다이아몬드 보석이었다. 내 손에 끼운다면 손가락 전체를 다 덮을 만큼 커다란 보석. 물방울무늬로 페어 커팅되어 있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는 빛의 각도에 따라 은백색을 띠다 푸른색으로 빛나다 다시 투명하게도 보였다.
다이아몬드의 빛깔을 보면 누구든 그것이 왕가의 보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르디 왕조에 전해 내려오는 보석, 호프 다이아몬드였다.
“줄리앙,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냥 다시 한번 당신이 연푸른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한 번만 더 그 모습을 보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라벤더 숲에서 달빛을 받아 빛나는 당신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을 단념하기가 힘듭니다.”
“뭘 단념하는데요?”
“당신을 갖고 싶다는 생각.”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같이 수다스러운 여자애가 할 말을 잃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은데 말이다. 저렇게 그림같이 잘생긴 남자가 내 앞에서 괴로워하면서 내가 너무 아름다워 나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단념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레아,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대의 독특한 품성, 자유로운 영혼, 강한 고집, 모든 것은 다 세상 유일한 것이지요.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배우자를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런 사람은 못 됩니다. 그러나 맹세합니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영원히 그대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내 몸도 마음도 이번 생이든 다음 생이든 언제나 그대 것입니다. 부디 나와 결혼해 주세요.”
나는 너무 당황해서 입만 벙긋거렸다. 줄리앙은 그렇게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앉은 채로 까만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