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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온기의 여운 (5/48)

5. 온기의 여운

난 내 첫 번째 인생과 두 번째 인생에 대한 모든 것을 줄리앙에게 털어놓았다. 미친 여자처럼 보일 게 분명했지만 그럼 뭐 어떤가. 어차피 이 얘기를 하건 말건 오늘 이후 우리가 더 말을 섞을 일은 없을 것이다. 줄리앙은 또 날 쌩 무시할 것이다. 평생 만나지 않을 사람이 나를 미치광이로 생각해 봤자다.

내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쯤엔 우린 정원을 다섯 바퀴째 돌고 있었다.

“그랬군요.”

줄리앙은 이상하게도 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별로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얘기를 믿으세요?”

“믿으면 안 되나요?”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시진 않고요?”

“레아 리버런, 미치셨나요?”

“아뇨.”

“제 눈에도 그래 보입니다. 조금 귀엽고 특이하시긴 하지만 미친 것 같진 않군요.”

줄리앙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쳐다보고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천진난만하던지, 그가 나보다 대여섯 살은 더 많다는 걸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무려면 어떤가 하고 꺼낸 이야기지만 당신이 이렇게 스스럼없이 받아들여 주시니 기분이 이상하네요.”

줄리앙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빛이 제법 다정했다. 그는 한참 날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려 다시 물었다.

“당신이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엾다고는 생각했습니다.”

가엾다라, 그렇다.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여자. 불행 속에 허덕이며 괴로워했던 여자. 충분히 가엾다고 할 수도 있다. 나 스스로도 내가 가여워 못살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결혼을 하셨다고요.”

“네. 두 번.”

“저 말고 다른 두 분이랑 말이죠.”

“네.”

“왜 저랑은 안 하셨습니까?”

“말씀드렸듯이―.”

“내가 당신을 피하고 무시했다고요?”

내 말을 가로채서 줄리앙이 대답했다. 왠지 살짝 삐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뭐? 내가 피했나, 네가 피했지.

첫 번째 인생에서 줄리앙이 나와 조금이라도 더 평범하게 교류했고, 그가 내게 청혼했더라면 난 아마 그와 결혼했을 것이다. 앙투안이 아무리 내 창밖 아래에서 노래를 처 불러 쌌다고 해도 말이다. 로즈몬드 백작이 별의별 보석을 다 갖다 바친다고 해도 말이다.

왜냐고? 첫눈에 난 줄리앙의 얼굴에 반했었으니까. 그는 엄청나게 잘생겼으니까. 이제 와서 봐도 잘생기긴 했다. 하지만 난 이제 저 얼굴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렇다고 돈이 다인 것도 아니다. 사랑이건 약속이건 뭐든 부질없다.

그렇긴 해도 정말 잘생기긴 참 잘생긴 얼굴이다. 저 짙은 눈썹 아래의 움푹 들어간 눈가의 음영, 그윽한 눈이 찡그리면서 웃는 모습. 아, 역시 얼굴이 다인가. 내가 잘못 생각했나.

“레아?”

“아, 네. 뭐라고 하셨죠?”

“듣고 있지 않았군요. 당신이 딴청 피우시는 동안 볼 가에 꽃잎이 내려앉았습니다.”

줄리앙은 웃으면서 내 얼굴 근처로 손을 뻗는다. 섬세한 손가락들이 내 볼에 내려앉았다가 급하게 떨어진다. 잠시 내 볼을 어루만지기라도 하려는 듯 멈칫거리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떨어지는 그 손가락들이 나는 싫지 않다. 이제 와 보니 줄리앙은 제법 귀여운 데가 있는 사람이다. 피식 웃고는 나는 하던 말을 계속한다.

“고마워요. 줄리앙. 아무튼 네, 피한 것 맞아요. 네, 당신은 절 피하고 무시했어요. 청혼도 안 하셨고요.”

줄리앙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긴 듯이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그대로 정원을 걸었다. 반 바퀴는 족히 더 돌았을 때야 줄리앙은 다시 고개를 들더니 내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아직 뭐가 더 묻어 있어요?”

“네?”

“제 얼굴에 뭐가 묻은 것처럼 열심히 쳐다보셔서요.”

나는 오른쪽 옆길의 개울가에 얼굴이라도 비춰 볼 듯 허리를 굽히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그는 굳은 표정을 풀고는 웃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세상을 다 밝힐 듯한 환한 미소가 아니었다. 반쯤 올라간 입꼬리는 꼭 억지로 미소를 지으라고 해서 겨우 웃고 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줄리앙,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그는 나를 두고 혼자 생각에 잠겨 버린 것이 큰 결례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고개를 굽혀 정중히 사과하고는 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레아, 당신은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묻는 편입니까?”

“궁금한 것이요?”

“네. 그러니까 궁금하지만, 정작 대답이 어떻게 나올지가 조금 두려운 종류의 질문이라면 말입니다.”

무슨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나는 그냥 농담으로 그 말을 받기로 했다.

“지금 제가 어쩌다 이렇게 미쳤나 궁금하신 거죠?”

가벼운 웃음이 다시 공기 중을 떠돈다. 내 농담에 그가 이렇게 웃는 것이 좋다. 이상하다. 그의 유쾌한 웃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삶이 갑자기 꽤 살아 볼 만한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와 마주 보고 같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줄리앙, 뭐가 그렇게 궁금하신지 모르겠지만 뭐든 물어보세요. 아, 그리고 대답하지 않아도 이미 아셨겠지만, 네, 저는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물어봐요. 보세요. 지금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있잖아요.”

줄리앙이 웃으며 물었다.

“맞아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지요. 전 생애에서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행복하게 사셨나요?”

우습게도 정답은 ‘아뇨.’였다. 나다운 구석이 하나도 없었던 두 삶을 거쳐 겨우 다시 돌아왔는데 전 생애 따위 이젠 더 이상 돌이켜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어깨만 한번 으쓱하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음 질문이요.”

그는 다시 한 차례 웃음을 터뜨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질문이라도 하듯 건성으로 물었다.

“그래요. 그럼 또 하나 궁금한 것이―.”

하지만 가벼운 말투를 가장한 그의 입가는 살며시 떨리고 있었고, 발걸음은 어느새 느려지고 있었으며 커다란 손은 주먹을 꾹 그러쥐고 있었다. 어린애라도 그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대체 뭘 물어보려고 이렇게 긴장한 것일까 궁금하던 찰나, 그가 내게 던진 말은 너무도 의외였다.

“죽었습니까?”

“네?”

“음, 그러니까 레아, 지난번 생에서 죽었나요? 죽어서 돌아왔나요?”

“참 이상한 질문을 하시네요.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돌았냐, 미쳤냐, 장난하냐 뭐 이런 질문을 하실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레아, 죽었습니까?”

내 농담에도 웃어 주지 않은 채 줄리앙은 다시 한번 진지한 말투로 내게 같은 질문을 했다. 사후세계에 대해서라도 물어볼 참인 걸까. 그렇다면 유감이다. 거기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뇨. 그냥 자연스럽게 다시 돌아왔어요.”

“어떻게 말입니까?”

“두 번 다 내 마흔 살 생일 때였어요. 이런 소리 하면 우습게 들리겠지만, 두 번 다 라벤더 꽃을 바라보고 있었죠. 지금처럼요.”

나는 화원 저편의 라벤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라벤더 꽃을 바라보며 한 번만 다시 기회를 달라고 빌었죠. 울면서 눈을 감았다 떴어요. 그랬더니―.”

“눈을 감았다 뜨니 다시 열일곱 살이었다?”

“네.”

줄리앙은 내 대답을 듣고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사후세계에 관해 물어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워서 짓는 한숨이라고 하기에는 좀 느낌이 이상했다. 안타까움이라기보다 뭔가 커다란 짐 하나를 내려놓은 사람의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졌으니 말이다.

“이번이 세 번째 생이라니, 당신도 오래 사셨군요.”

“공작님보다 제가 훨씬 나이가 많은 셈이죠.”

“당신 뺨은 이렇게 앳되어 보이는데요?”

줄리앙은 내 농담을 칭찬으로 받아쳤다. 그의 손은 이번에는 정말 내 뺨을 만지기라도 할 듯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다시 황급히 내려간다. 얼른 내 볼을 저 손에다가 대어 주고 싶은 심정이다. 저 사람은 대체 뭐가 그렇게 조심스러운 걸까.

“당신 눈엔 충분히 앳돼 보이시겠지만 보세요. 볼 말고 눈을요. 제 눈이 좀 깊어 보이지 않나요? 열일곱 살답지 않게 말예요.”

나는 줄리앙 가까이에다가 내 얼굴을 들이대고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물었다. 줄리앙은 짧게 웃음소리를 내고는 내 말에 응답했다.

“눈동자가 아름답다는 건 알겠습니다.”

“전 여기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거울로 제 얼굴을 확인했어요. 다시 어려졌다는 것보다는 지쳐 있던 제 얼굴에 생기가 돈다는 것이 기쁘더군요. ‘그래, 어렸을 때는 내가 이렇게 귀여웠지.’ 하고요. 예전 그대로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눈동자더라고요. 하지만 어쩐지, 제 잿빛 눈동자가 갑자기 좀 깊어 보이는 거예요. 사실 깊어진 것쯤이야 뭐 싫은 건 아니에요. 줄리앙 당신은 모르겠지만 여기서 20년쯤 더 살면요, 그것도 저처럼 힘들게 산다면 눈빛은 깊어지는 게 아니라 슬픔으로 가득 차서 탁한 빛을 낸답니다. 아니 그건 빛도 아니지요. 제 전남편은 그랬지요. 제 잿빛 눈동자만 보면 기분이 나쁘다고요.”

줄리앙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한참 쳐다보다 보면 지난 생의 슬픈 눈빛까지 가닿을 수 있을 거라 생각이라도 하는 듯이 열심히 말이다.

“당신 눈은 잿빛이라기보다는 회푸른색이지요. 아주 예쁜.”

“자꾸 제 말을 칭찬으로 받아치시니 어쩔 줄을 모르겠네요. 당신은 제게 죽었냐고 물었고 저는 죽지는 않았다고 대답했죠. 하지만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고는 몇 번이나 생각했어요. 매일 매일 죽고 싶었어요. 이전 생의 슬픔도 탁함도 다 버리고 다시 여기로 돌아왔지만, 그렇게 죽고 싶단 생각만 하며 산 대가로 무슨 훈장처럼 눈빛만 깊어져 버렸답니다.”

“깊고 아름답습니다.”

“참, 또 그러시네요. 그런데 레날 공작님, 당신 눈도 제법 깊어 보여요. 당신이 저처럼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하실 정도로 경솔해 보이지도, 죽고 싶게 힘들었던 경험이 있으실 정도로 나이가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줄리앙은 그 깊은 눈으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끝 모르게 깊은 호수 바닥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새카만 눈동자는 그렇게 계속 바라보면 내 속을 다 꿰뚫을 수 있다는 듯이 열심히 나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렇게 한참을 나를 응시하는데도 그것이 부담스럽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애달프고 다정한 눈빛. 이래서 미남은 안 된다. 그냥 무심히 쳐다만 보아도 나를 오래 좋아하고 그리워했던 사람인 듯 착각하게 되니 말이다. 더 쳐다보다가는 막 바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할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먼저 눈을 피하고 말을 돌렸다.

“어쨌든 당신은 제가 말한 허무맹랑한 얘기들을 다 믿어 주시는 거네요.”

“당연히요.”

“좀 기뻐요. 이런 얘기 아무한테도 말 못 할 줄 알았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철이 든 것 같진 않아요. 여전히 예전만큼 경솔하죠. 오래 산다고 성품이 고매해지는 건 잘 모르겠어요. 시간이 인성을 저절로 길러 주지는 않으니까요.”

“마지막 말씀엔 동의합니다.”

“당장 우리 아버지만 봐도 그래요.”

“리버런 공이요?”

“오래 살았다고 해서 관대하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의 산증인이시죠.”

“아버지를 싫어합니까?”

줄리앙은 웃고 있었다.

“왜 웃으시는 거죠?

“저도 아버지를 싫어하니까요.”

공통점이 있었군. 너무 내 얘기만 한 것 같다. 나는 이번엔 줄리앙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공작님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죠?”

“줄리앙이요.”

“네?”

“줄리앙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줄리앙.”

줄리앙은 만족한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제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 줄리앙은 십대 때부터 이미 줄리앙 레날 공작이었다. 결혼하지 않았음에도 공작가의 가주가 되었다는 것은 당연히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라는 의미이다. 뭘 또 아버지는 어떤 분이냐고 물었을까.

“좋은 분이 아니셨나요?”

“저와 어머니를 두고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 외에는 흠잡을 데가 없는 분이셨죠.”

“아버지와의 추억을 하나 말해 주실 수 있나요? 저는 사실 그런 게 없어요. 저희 아버지, 리버런 공은 그리 가정적인 분이 아니었거든요.”

나는 더 말해 달라는 듯이 줄리앙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줄리앙은 내 눈을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왕궁에 계실 때가 많아 정사에 매우 바쁘셨고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이렇다 할 추억은 없습니다.”

“저도 그래요. 저희 아버지도 바쁘시고, 애초에 그리 다정한 분은 아니시거든요. 그래도 한 가지 기억나는 게 있어요. 한번은 제가 아팠을 때 오셔서요…….”

“당신 머리라도 짚어 주셨나요?”

줄리앙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정말이었다. 어린 시절 폐렴에 걸려 끙끙 앓고 있었을 때 우리 아버지, 리버런 공은 내 방에 찾아오셔서 손수 내 머리를 짚어 주었다. 너무도 아버지답지 않은 행동이라 아직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열이 났을 때 짚어 주는 차가운 손을 잊기는 어려운 법이지요.”

“당신도 비슷한 기억이 있나요?”

“글쎄요. 저는 자주 앓는 아이는 아니었죠. 그래도 하나 추억이 있긴 합니다. 아버지는 영지에 계실 땐 늘 해가 질락 말락 하는 지금 같은 때에 저와 어머니와 밤 산책을 하셨죠.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신 날이든, 비가 오고 구름이 낀 궂은 날이든 말입니다. 어머니가 밤 산책을 좋아하셨거든요. 레날의 영지는 이맘때쯤엔 리버런 섬보다 훨씬 덥지만 그래도 왕국의 수도에 비하면 서늘한 편입니다. 가을 겨울이 와도 제법 따뜻하고요. 호두나무가 자라기 좋은 곳이죠. 호두나무를 보셨나요, 레아?”

“아뇨.”

“아직 덜 익은 호두 열매는 연두색으로 반짝반짝 빛납니다. 키는 아주 크고요. 아버지랑 같이 저녁 무렵 호두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성 앞 정원을 걷는 것이 어머니의 유일한 취미였습니다. 제가 좀 자라고 나서부터는 어머니랑 아버지 손을 양쪽으로 잡고 저도 같이 걸었죠. 산책의 끝 무렵, 키가 큰 아버지는 언제나 허리를 굽혀 어머니의 등에 손을 대고 안아 주셨습니다. 아직 어린 제가 안아 달라고 하면 아버지는 늘 저를 한쪽 팔로 번쩍 안아서 다른 팔로 감싸고는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셨고요.”

“이렇게요.”

하고 나는 아가를 안아서 등을 토닥이는 시늉을 했다. 줄리앙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네, 그렇게요.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토닥여 주지를 말지 하고 가끔 생각합니다. 그런 온기도 여운이 오래 남거든요.”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그의 등에 가져다 댈 뻔했다. 정작 당사자인 그는 웃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괜스레 쓸쓸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시는군요.”

줄리앙이 뭔가 더 말하려고 입을 여는데, 저기 멀리서 ‘레아 아가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모다. 정원을 예닐곱 바퀴 걸으며 우리가 담소를 나누는 사이에 한낮같이 환하던 여름 해가 벌써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주홍색으로 하늘이 물들다 이내 캄캄해질 것이다.

“저녁 드실 시간이에요. 준비하셔야죠.”

유모가 나를 불렀다. 레날 공작가의 하인도 함께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비 잎사귀로 뒤덮인 정원 입구의 아치 아래 서서 유모와 하인을 기다리게 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재밌는 이야기 해 주셔서.”

“저야말로요.”

“그럼 저녁 만찬도 함께하시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리고―.”

줄리앙은 숨을 가다듬듯이, 잠깐 생각하듯이 호흡을 멈추고 몇 초 있다가 다시 말했다.

“내일 아침 산책 때도 함께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 생에는 저를 피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는 다시 웃었다.

“레아, 당신만 허락하신다면요.”

“기꺼이 함께하겠어요.”

“그대와 오랜만에 이렇게 이야기하니 즐겁군요.”

“오랜만에요? 처음 아닌가요?”

“레아, 당신으로서는 23년 만 아닙니까.”

그의 말에 나는 자존심 상하게도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네요. 제 처지에서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공작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부탁이요?”

“혹시 가지고 계신 옷 중에 연푸른색이 있습니까?”

“어?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드레스예요.”

벨라 언니의 결혼식 때 참석하려 맞췄던 연하늘색 실크로 만들어진 프린세스 라인의 드레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 중 하나였다.

그는 몹시 정중한 태도로 내게 내일 아침 산책 때 그 옷을 입고 나와 줄 수 있냐 물었다. 재미있는 부탁이라는 생각에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너무도 눈부신 미소를 내게 돌려주었다. 그 얼굴은 두 번이 아니라 백 번의 비참한 인생을 보내고 나서라도 목숨을 걸고 다시 결혼하고 싶어질 정도로 근사했다.

웃음을 멈추고는 그는 신사다운 태도로 무릎을 꿇고 내 손끝을 가볍게 쥐고 손등에 키스했다.

“그럼 들어주실 거라 믿고 물러가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내게 아버지와의 추억을 얘기하던 여린 소년은 금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 큰 남자의 뒷모습이 저만치 가고 있다.

그의 뒷모습을 넋 놓고 쳐다보는 새에 유모가 저만치서 빨리 좀 들어오라며 성화다. 저녁 만찬에 맞춰 몸단장하려면 시간이 좀 촉박하긴 하다.

해가 지고 있다. 곧 밤이 찾아올 것이다. 줄리앙이 아직도 기억한다는 그의 아버지의 토닥임처럼, 그가 살짝 쥐었다 뗀 내 손끝에도 묘한 온기가 온밤 내내 남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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