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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두 번째 삶 (3/48)

3. 두 번째 삶

이건 꿈이 아니었다. 진짜로 두 번째 삶이 시작된 것이다. 내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마흔 살의 생일, 울다 잠들어 깼더니 다시 열일곱 살로 돌아와 있다니.

모든 것이 다 똑같았다. 벨라 언니의 훈계도, 손님맞이에 분주한 성안의 사람들도. 열일곱 살의 생일을 석 달 앞둔 유월, 예정대로 세 명의 남자가 다시 리버런 섬으로 왔다.

줄리앙 레날.

필 로즈몬드.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내 전남편 앙투안 구엘.

레날 공작은 첫 번째 인생 때처럼 내게 다정하게 복숭아를 벗겨 주더니 그 후엔 나를 생 무시했다. 여전히 잘생겼고 여전히 재수 없다.

로즈몬드 백작도 변함이 없었다. 온갖 금은보화. 에메랄드, 루비, 라피스라줄리, 흑요석, 사람 눈을 홀리는 빛나는 보석들. 그리고 흐리멍덩한 눈동자.

징글징글한 앙투안 구엘도 똑같았다. 이제 와서 보니까 예전에는 좋아 보였던 모든 것들이 다 달리 보였지만 말이다.

저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 같은 허여멀건 얼굴, 한량 같은 생김새, 쓸데없이 가늘고 긴 팔다리, 나태한 움직임, 유치한 시 구절들, 가난의 냄새, 뻔뻔한 게으름. 다정한 척해 봤자 나는 안다. 저놈의 본질을.

“내겐 당신에게 꺾어 줄 장미꽃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나 당신이 이 꽃을 받아만 준다면 평생 행복하게 해 주리다.”

“아무것도 없으면 리버런 섬으로 올 여비도 없었겠죠. 장미꽃 한 다발 준비하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고 저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요? 그냥 옆에 보이는 꽃 한 송이를 꺾어 주면서 저한테 청혼하면 제가 받아들일 것 같았나요?”

“레아, 그건…….”

“내가 왜 당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해야 하지요?”

“난, 나 앙투안 구엘은 당신을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소.”

“뭘로요? 뭘로 행복하게 해 줄 건데요?”

“그건, 음, 난 언제나 다정하게 당신을―.”

“그거 알아요, 앙투안? 다정도 돈에서 나온답니다. 나는 당신보다 돈이 많아요. 당신은 아름답지만 제가 더 아름답고요. 왜 제가 당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겠어요?”

앙투안은 당황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저런 꼬락서니는 23년을 그와 살며 수두룩하게 봤다. 매일 밤 내 창문가에 서서 읊던 시가 정말 유치하고 조잡했다고도 말해 줘야 했는데, 그런 말을 했다간 어린애처럼 그 자리에서 꺽꺽 울면서 또 나한테 사과하라고 고래고래 소리칠 수도 있으니 그만뒀다. 그런 모습은 이번 생에선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어쨌든 다시 열일곱 살로 돌아간 나는 내게 청혼하는 앙투안에게 면박을 주었다. 물론 그게 23년간 내가 그와 살며 겪은 고생을 보상해 줄 수는 없다. 그래도 내겐 꽤 큰 복수처럼 여겨졌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속이 편해졌다.

“나와 결혼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보석이 당신의 것이오. 내게 보석보다 더 빛나는 여자와 함께 살 수 있는 영광을 주겠소?”

로즈몬드 백작 역시 첫 번째 인생 때와 똑같은 대사로 내게 청혼을 했다.

핑크빛 다이아몬드가 여름 햇볕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이 오묘하고 영롱한 빛이 뜻하는 바는 무얼까?

바로 돈이다.

돈!

첫 번째 인생 땐 내가 정말 뭘 몰랐다. 그땐 앙투안의 소박한 꽃 한 송이가 더 마음에 들었더랬지. 내가 어떻게 된 걸까?

인생은 돈이 좌우한다.

돈이 행복을 만든다.

다정함도 돈에서 나온다.

“당신과 결혼하면 내게 무엇이 좋죠?”

“당신을 영원히 행복하게 해 주리다.”

“다들 행복을 장담하네요. 대체 어떻게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건데요?”

“손 하나 꼼짝 안 하고 누워만 있어도 평생 당신을 먹여 주고 입혀 줄 사람들을 고용할 만한 돈이 내게는 있소.”

“손 하나 꼼짝 안 하고 누워만 있고 싶진 않아요. 그리고 지금도 날 먹여 주고 입혀 줄 사람들은 있는걸요.”

“난 리버런에서 주는 지참금엔 관심이 없소. 오로지 당신만을 얻기를 원하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내가 사 주리다. 당신에게 늘 아름다운 보석을 구해 주겠소. 언제나 당신의 아름다움을 어떤 보석보다 값지게 여기겠소. 어떤 여자는 보석보다 아름답다는 걸 난 알고 있는 사람이오.”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그의 마음은 진실해 보였다. 무엇보다, 로즈몬드 백작과 결혼한다면 그의 말대로 정말 고생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한번 인생을 살아 보니 알겠다. 돈이 전부라는 것을. 돈만 있다면 그리 불행할 일은 없을 거라는 것도 말이다. 돈이 풍족하면 마음도 평화로우니 자연스레 다정해질 수 있다.

로즈몬드 백작도 앙투안만큼 쓰레기 같은 놈일 수도 있다. 앙투안처럼 처음에는 잘해 주다 나중에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난 그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가 다정하지 않다고 해서 상처받을 일도 없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어마어마한 부가 있다. 엄청나게 아름다운 보석도 있다. 난 울어도 보석더미들 사이에서 울 것이다. 싸워도 에메랄드를 던지며 싸우고 싶고, 분을 풀어도 최고급 벨벳을 찢으며 분을 풀고 싶다.

“좋아요. 당신의 청혼을 받아들이겠어요.”

두 번째 인생, 나는 로즈몬드 백작과 결혼했다. 그리고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로즈몬드 백작은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 나를 보석처럼 여겼다. 그는 다른 여자를 우리 성에 보란 듯이 들였다. 별의별 변태 가학적 성관계와 난교파티가 성안에 난무했다. 하지만 나에겐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나는 그의 ‘최상급 보석’이었기 때문이다. 보석에 흠집을 내는 건 안 될 일이다.

그는 내가 다른 남자와 놀아날까 겁냈다. 그렇게 다른 여자들을 탐해 대고 심지어 성안까지 들여오면서도, 나는 내 방 안에 꽁꽁 가둬 놓았다. 금고에 가둬 놓은 보석처럼 말이다.

그의 약속대로 정말 그 자리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못 하게. 난 성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방 안에서 뭘 했냐고? 아무것도 못 한다. 보석을 걸쳐 보고, 옷을 입어 보고 몸을 단장하는 것밖에는 할 것이 없다. 책을 읽으려고 하면 그는 책을 빼앗았다. 일기라도 써 보려고 하면 펜을 빼앗았다.

그는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어디에서 기쁨을 느끼는지 따위는 관심 없었다. 그에게 나는 사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랑할 만한 ‘보석’이었다. 난 그냥 예쁘게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여자였다. 글자를 읽고 쓰는 건 아니 될 일이다. ‘보석’에게 생각이나 의견 따위는 사치다. 그의 돈으로 고용한 모든 사람이 나를 감시했다. 삶은 지옥 같았다.

그는 진귀한 보석을 수집하듯 나를 수집했을 뿐이다. 난 행복해 보였지만 모든 것이 연기였다. 각종 무도회, 궁전 행사, 티 파티 때마다 그의 옆에 앉아 보석처럼 빛나는 여자, 마음속은 지옥이지만, 그것을 숨기고 하하호호 웃으면서 우아하게 앉아 있는 여자.

난 처음처럼 앙투안 구엘과 결혼해야 했던 걸까? 아니, 그와의 결혼 생활은 너무 외로웠다. 사랑은 잠깐 반짝거리는 듯했다가 이내 사라졌다. 가난은 내 삶을 완전히 망쳐 놨다.

그럼 지금 로즈몬드 백작과의 결혼 생활에 만족해야 하는 걸까? 돈은 맘대로 쓸 수 있으니까?

이게 정말 두 남자의 잘못이긴 한 걸까?

난 로즈몬드 백작의 이름이 ‘필’이라는 걸 결혼식 때에야 알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랑 결혼했으니 불행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모든 건 내 문제 아닐까? 내가 선택을 잘못한 죄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이렇게 두 번씩이나 실패하는 걸까.

그럼 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앙투안? 로즈몬드?

그것도 아니면 날 거들떠보지도 않던 줄리앙 레날 공작?

마흔 살 생일, 로즈몬드 백작은 그의 내연녀 카밀라와 함께 밀월여행을 떠났다. 누구와 갔는지, 가는 곳이 어딘지까지 다 알고 있지만 난 모른 척 그를 배웅한다.

“미안하오. 그대 생일에 마침 출장이 있어서 말이지. 위험하니 집에서 나가지 말고 있으시오.”

“벨라 언니가 셋째 아이를 낳고 위독해졌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언니가 보고 싶어요. 조카들도 걱정되고요. 저도 잠깐 오를 공의 영지에 다녀오면 안 될까요?”

“그냥 집에 있으라고 하지 않았소.”

그의 눈빛이 무섭게 변한다. 어차피 못 갈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수행원이며 고용인들이 나를 이 성안에서 꼼짝도 못 하게 막을 것이다.

그는 가볍게 날 포옹해 준다. 고압적인 미소를 띠며 내게 강제로 입을 맞춘다. 내 몸에 들러붙은 그의 몸 냄새가 역겹다. 지난 생에 내가 그토록 바란 것이 따뜻한 포옹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사람은 참 신기한 동물이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데도 한없이 먼 사람처럼 느껴진다. 미친 듯이 행복해 보이는데도 내면은 죽어 있다.

그가 꾸며 준 보석의 방에 들어가 다 합치면 백만 루블은 가뿐히 넘어갈 보석들을 바라본다. 제국 최고의 장식가를 불러, 성을 다시 장식할 샹들리에와 촛대,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가구들을 주문한다. 레이스 제작자가 내 드레스를 수도에서 들여온 크리스털 비즈와 고급 케미컬 레이스를 이용해 최신 유행 식으로 꾸며 주겠다고 말한다. 행복한 마흔 살 생일이다. 그런데 난 행복하지 않다.

새로 주문한 드레스를 입어 보았다. 타이트하게 허리를 감싸고 허리 아래로 팡 퍼지는 벨라인의 보랏빛 드레스는 내 눈동자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이 영지에서는 나지 않는, 그러니까 비싼 값을 주고 가져온 라벤더가 곳곳에 꽂혀 있다. 벨라 언니 말대로 라벤더를 가득 담은 내 눈은 조금은 연보랏빛으로 빛나는 듯도 하다. 꿈같은 풍경이다. 아름답지만 슬픈 눈. 물결치는 풍성한 내 머리칼은 가난에 찌들었던 첫 번째 인생 때와는 달리 이렇게 윤기 나고 탐스러울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다정하게 안아 줄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다정함이 꼭 필요하긴 한 걸까?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다시 살아 보고 싶었다. 난 경솔한 선택으로 천금 같은 기회를 두 번이나 날려 버렸다. 내 손으로 내 인생을 망쳐 버린 셈이다.

다시 열일곱 살 때로 돌아간다면 절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그땐 너무 어려서 몰랐다. 그땐 결혼을 안 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마법의 여름에 한 남자를 선택해서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고,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만 배웠으니까 말이다.

이제 보니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나만 몰랐을 뿐이다. 아버지 말을 거역하고 반항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딸인 나를 죽이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내 마음이 아무도 원치 않는다면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아도 되었다. 제발, 제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누가 봐도 탄성을 터뜨릴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채로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그렇게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거울 옆에는 남국에서 주문한 연푸른빛 값비싼 화병이 놓여 있다.

가지런히 꽂힌 라벤더는 죽은 지 오래다. 이곳의 날씨에서 라벤더는 오래 못 간다며 하녀들은 처음부터 이 꽃을 바싹 말려 꽂아 두었다. 로즈몬드가 나를 그렇게 해 두었듯이 말이다. 마른 라벤더일지언정 향은 강렬하다. 그 내음이 또다시 내 머리를 어지럽힌다.

“네가 날 살려 주었는데, 내 소원을 들어주었는데, 어째서 나는 또 이렇게 멍청하게 굴었을까?”

언제나 그렇듯 꽃은 대답이 없다. 침묵으로 나를 위로하는 그 향을 맡으며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다.

누군가 내 눈앞에 있다. 이곳은 보석의 방이 아니다.

“레아, 뭐 하는 거야. 서서 자니?”

싱그러운 라벤더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리버런 섬이다. 라벤더 숲의 한가운데이다.

그대로 주저앉아 울었다. 벨라 언니가 당황해한다.

“무슨 일이야. 레아. 무슨 일 있었어?”

“언니.”

“왜 그러니, 레아.”

“언니, 내가 너무 경솔했어.”

“울지 마. 레아. 무슨 생각에 또 빠져든 거야, 혼자. 자, 봐, 언니한테 얘기해 봐.”

언니가 나를 안아 주었다. 가느다란 팔로 나를 안더니 토닥토닥 내 등을 두드려 준다. 그렇다. 남자가 아니어도 나를 안아 줄 사람은 많다. 엄마, 아빠, 사랑하는 이사벨라 언니.

세 번째 인생이 시작되었다. 나는 다짐했다.

“이제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거야. 난 평생 리버런 섬에서 언니들과 살 거야.”

난 절대 결혼으로 내 인생을 망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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