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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정도 돈에서 온다 (2/48)

2. 다정도 돈에서 온다

그해 9월이 가기 전에,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리버런 섬의 라벤더 숲에서 결혼하는 것이 어려서부터의 내 꿈이었다. 하지만 앙투안은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호화 결혼식 대신 우리만의 소박한 결혼식을 하자며 자신의 영지로 나를 데려갔다.

9월 말, 구엘 백작가의 영지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나는 언니들처럼 화려한 부케를 드는 대신 앙투안이 꺾어 준 작은 들꽃들로 부케를 만들어 들었고, 원래 가지고 있던 밋밋하지만, 소녀다운 하얀 모슬린 드레스를 입었다. 우린 꼭 꼬마 신랑과 꼬마 신부 같았다.

“괜찮겠어, 레아?”

이사벨라 언니가 결혼식 날 내게 물었다.

“괜찮지 않을 건 또 뭐야?”

내가 대답했다.

“구엘가의 차남과 결혼한다는 건 레아 너에겐 많은 것을 포기하는 일이 될 거야.”

“돈 얘기를 하는 거야?”

이사벨라 리버런, 아니 이제 이사벨라 오를 공작부인. 벨라 언니는 부와 명예가 넘치는 공작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분명 나는 벨라 언니처럼 풍족하게 살진 못할 것이다.

“돈? 레아, 우리 둘 다 돈이 궁한 생활을 해 본 적은 없으니 이렇게 말하는 게 철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뭇 사람들이 말하듯 결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돈은 아니란다.”

“내가 앙투안이랑 결혼해서 궁한 생활을 할까 봐 걱정돼서 이러는 것 아니었어?”

“네가 가져가는 지참금이 있으니 그렇게까지 가난하게 살 린 없을 거야. 실제로 베스 언니도 가난한 자작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지만, 두 사람을 봐, 사랑이 넘치잖니? 누구보다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

“그럼 언닌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 거야?”

“널 행복하게 해 줄 만큼 좋은 사람이니? 앙투안은?”

“응. 딱 그렇게 말하더라. 날 행복하게 해 준다고.”

“그 약속을 믿을 수 있어? 남자의 진심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난다고들 하지. 앙투안이 네게 보여 준 행동들이 다 진짜였다는 걸 믿을 수 있어? 그가 진심으로 널 사랑하는 거 같니?”

“언니, 난 지금 행복해. 앙투안이 날 행복하게 해 줬어. 그는 내게 모든 걸 다 맞춰 줘.”

“레아, 너는? 너도 그를 사랑해?”

사랑? 글쎄, 내가 그때 정말 사랑이란 걸 알았던 걸까. 난 앙투안이 나를 바라보는 그 빛나는 눈동자가 좋았고, 내게 건네는 다정한 말들이 좋았다, 내 모든 말들을 경청해 주는 것이 좋았고, 그 모든 것들 때문에 그가 내 곁에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나 내게 잘해 주는데 당연히 나를 사랑하는 것 아닌가? 언제나 날 다정하게 안아 준다는 그의 말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면 나도 사랑에 빠진 것 아닌가?

나는 한번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 앙투안은 나를 사랑해. 그리고 나는…… 나는 앙투안이 내게 해 주는 모든 것들이 너무 좋아. 그와 함께하는 시간들이 좋아. 그럼 된 것 아니야?”

“앞으로도 행복할 거라고 약속해 줘. 레아.”

“앙투안은 다정한 사람이야. 난 그와 평생 행복할 거야. 언니, 걱정하지 마. 내가 약속할게.”

내가 이 자리에서 단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뭘 안다고 열일곱 살 주제에 그렇게 호기롭게 약속을 했던가. 미리 장미꽃 한 다발 준비도 못 하고 즉석에서 꽃 한 송이 꺾어 주는 그놈의 성의를 봤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말이다.

구엘가는 애초에 그렇게 많은 부를 축적한 가문이 아니었다. 딸랑 하나, 서쪽 끝에 있는 작은 영지는 한정상속으로 장남에게 모두 귀속되어 있었다. 유산이라고 받은 것은 영토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집과 과수원 밭뿐이었다.

앙투안 구엘은 제법 잘생기긴 했지만, 수완 없는 놈이었다. 수완만 없나, 돈도 없고, 힘도, 인덕도 없었다. 장남인 형과는 인연을 끊은 지 오래인 그가 할 줄 아는 건 저잣거리를 다니며 노름에 돈을 거는 것과 시를 외고 노래를 부르는 일뿐이었다.

내가 가져간 어마어마한 지참금은 결혼 1년 만에 모두 노름에 날려 버렸다. 과수원 밭에서 일할 인부를 고용할 돈조차도 곧 떨어져 버렸다. 그 후엔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공작 가문에서 데려왔으면 돈이라도 좀 더 받아 와 봐.”

그러나 우리 아버지, 리버런 공이 지참금 이상의 돈을 내게 더 줄 리는 없었다. 처음에는 언니들에게 조금씩 빌려 오곤 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이제는 더는 구걸을 하고 다닐 면목도 없었다.

다정도 돈에서 온다고 했던가. 돈이 없으니 내가 처음에 반했던 그의 다정함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내게 무정하게 굴었다. 내가 하는 말은 건성으로 들어 넘기고, ‘네까짓 게’라면서 늘 나를 무시했다.

“돈도 못 얻어 오는 년이 뭘 안다고 참견이야?”

“우리 남아 있는 영지를 팔고 리버런 섬으로 가는 건 어때요? 거기 가서 새로 시작해요. 당신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우리 아버지도 조금 도와주실지도 몰라요.”

“꼴에 공작 가문에서 왔다고 유세냐? 내가 그래서 또 거기까지 찾아가서 네 아버지에게 빌라고?”

그는 온갖 욕설을 늘어놓으며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고는 온 집안의 가구들을 집어 던졌다. 멀쩡한 가구도 몇 안 되는데 말이다. 더는 집어 던질 물건이 남아 있질 않자 그는 꺽꺽거리며 울며 자기 자존심을 짓밟은 내가 사과해야 한다고 우겼다.

상황이 그렇게 흐르면 엉망이 된 방 한가운데에 앉아 부러진 가구들 틈새에서 나는 어떻게든 이 싸움을 끝내고 싶어 결국엔 먼저 사과하고 만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 그럼 네가 혼자 리버런 섬으로 가서 돈이나 더 얻어 와.”

그는 나중에라도 사과하는 법이 없었다. 이런 싸움이 반복되니 나중에는 정말 다 내가 잘못한 것만 같았다.

끔찍했다. 이곳은 지옥이었다.

서른이 되기도 전에 그는 큰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으며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저택이라 말하기에도 우스운 작은 집이라 하인 하나면 충분할 텐데 그는 내가 있는데 왜 하인이 필요하냐고 말했다. 그의 병시중도, 집안일도 모두 내 몫이었다. 난 그를 기분 나쁘게 하고 돈도 못 가져오는 쓸모없는 아내였다. 꼴에 공작 가문의 여식이라고 되바라진 잿빛 눈동자의 여인이었다.

“집안일이라도 해야지. 그래야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사는 이유가 있지. 그것도 안 하면 네 존재 가치가 뭐야?”

그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병상에서 일어난 후에도 앙투안은 타고난 한량 기질로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를 부려 먹었다. 삶은 점점 고되어지기만 했다.

엉망진창이 된 집에서 울고 있을 때 레날 공작 가문에서 우리 가문의 복숭아 과수원을 인수하겠다며 거액의 돈을 주었다. 남쪽 끝에 있는 드넓은 영토에 오천 평이 넘는 복숭아 과수원을 가지고 있는 레날 가문이 왜 굳이 이 멀리 떨어진 구엘가의 과수원을 사 가려 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튼 그 돈으로 다시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안정되면 하인도 하나 고용하고, 생활의 시름을 조금이라도 덜어 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큰 꿈이었다. 그 돈은 반년이 채 가질 않았다. 앙투안은 야금야금 돈을 빼 가 노름판에 모두 날렸다. 하인은커녕, 이제 내가 남의 집 일이라도 다녀야 할 판이었다.

“왜? 네까짓 게 아직도 자존심이라도 남아 있는 거야? 공작 가문의 영애였다고? 돈이 없으면 네가 벌어 오면 되잖아. 어쭙잖은 네 집안에서 얻어 오든가.”

그 많은 돈을 없애 놓고도 앙투안은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그 태연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를 죽이고 나도 죽고 싶었다.

마흔 살이 되던 해 생일이었다. 내 초라한 집 앞, 채 가꾸지도 못한 정원에는 무성한 장미 꽃밭이 있었다. 열일곱 살의 내게,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네며 언제나 날 다정하게 안아 주겠다고 하던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장미꽃 내음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6월이면 내 방문 앞을 수놓던 리버런의 덩굴나무며, 그 옆의 장미 꽃밭이며, 바람에 흔들리면 우수수 소리를 내던 옥수수 밭이며, 그 옆에서 본 저로 가는 길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던 라벤더 밭이 생각났다.

눈을 감으니 그해 여름, 은은하게 퍼져 있던 라벤더 향이 내 코끝을 다시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을 다잡고 길을 나섰다. 집에서 숲으로 난 오솔길을 한참 걸어 반 시간 정도를 헤매고 나면 이곳에도 라벤더가 있었다. 밭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드문드문 난 몇 송이였지만, 초록빛 풀숲 사이로 길쭉하게 고개를 내민, 연보랏빛 꽃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평소에야 이렇게 멀리까지 라벤더 하나를 보러 올 만한 여유는 없었지만,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축하해 줄 사람도, 멋들어진 저녁 식사도 없을 터였지만 그래도 내 곁에는 내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6월마다 때맞춰 피는 꽃이 있었다. 그것이 위안이 되었다.

한참을 라벤더를 바라보고 있다가 해 질 무렵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몇 송이 꺾어 오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그곳의 라벤더는 너무 소중했다. 이렇게 쉽게 꺾어 온다면 곧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꺾어 와 봤자 무얼 한단 말인가. 곧 시들어 버릴 텐데 말이다.

앙투안은 어딜 갔다 왔냐고 묻지도 않았다. 아마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것도 모를 것이다. 알아도 상관하지 않을 테고 말이다.

방으로 들어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생활의 곤란과 마음의 고난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시든 내 얼굴. 슬픔에 탁해진 눈. 그 누가 날 리버런의 아름다운 일곱 자매 중 하나라고 생각할까.

하지만 난 앙투안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를 선택한 것은 나였으니까.

그래도 아직 남은 정이 있어서인지, 그저 옆에 있는 사람이 그뿐이라 그런지, 나는 앙투안 때문에 힘들었으면서도 앙투안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이 모든 게 다 꿈이고, 다시 일어나면 앙투안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내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는 않을까? 그럼 다시 시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직도 이런 희망을 품고 있는 내가 싫었다. 이런 놈팡이라도 가끔은 앙투안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나 자신이 싫었다.

“앙투안, 오늘 나 라벤더를 보러 갔었는데.”

앙투안은 벽 쪽으로 누워 날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보니까 참 좋더라고. 몇 개 안 되어서 차마 꺾어 오지는 못했어. 그렇다고 매일 보러 가기는 너무 멀고. 언제 시간 될 때 나랑 같이 모종 몇 개만 우리 집 앞 정원에 옮겨 올 수 있을까?”

“싫어.”

‘언제 시간 될 때’라니. 집에서 놀고먹는 앙투안에게 시간이 없을 때가 있기는 하단 말인가. 이렇게 구걸하듯 굽신거려 보는데도 앙투안은 쉽게 내게 ‘싫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나는 지치지도 않고 다시 앙투안에게 말을 건넨다.

“앙투안, 나 좀 안아 주면 안 돼?”

나에게 상처 준 이는 앙투안이지만, 내가 위로받을 곳도 앙투안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날 예전처럼 다정하게 안아만 준다면, 그래도 우리 사이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것 아닐까?

“싫어.”

희망은 없었다. 그는 쐐기를 박았다. 그의 입에선 ‘싫어.’라는 말밖에 나오질 않는다.

“그냥 좀 안아 줘. 오늘은 누가 꽉 안아 줬으면 좋겠어. 그냥.”

“아, 또 왜! 귀찮아.”

앙투안이 대답했다. 그리고 돌아누웠다.

“앙투안.”

그는 대답이 없었다.

“오늘이 내 생일인 거 알아?”

“불 좀 끄고 나가.”

등을 돌린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바라보다가 불을 끄고 방을 나섰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홀로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냈다.

내 인생 왜 이렇게 된 거지. 왜 나를 안아 주는 따뜻한 팔 하나 없이, 이렇게 외롭고 처량한 삶을 보내게 된 거지? 내가 왜 저 비렁뱅이와 결혼한 거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돌아간다면 절대 이런 결혼을 선택하진 않았을 텐데.’

다시 라벤더 숲으로 향했다. 어차피 잠을 자기엔 글렀다. 새벽이슬을 맞으며 걸어간 연초록빛 숲에서 라벤더는 낮처럼 아름답게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만 다시 돌아가고 싶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라벤더는 말이 없었다. 꽃이 말을 할 리가 없다. 게다가 라벤더의 꽃말은 ‘침묵’ 아니던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자 웃음이 다 나왔다. 애초에 입이 없는 꽃, 그중에서도 가장 말이 없는 꽃, 라벤더 앞에서만 나는 내 마음을 다 내려놓고 울 수 있다.

이슬이 밴 풀숲에 무릎을 꿇고 앉으니 흰 리넨 드레스에 풀색 물이 들었다. 그러건 말건 상관없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흐릿한 새벽달이 라벤더를 비추었다.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난 라벤더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소리 내어 말했다. 말이라기보다 애원에 가까웠다.

“정말 힘들었어. 나 정말 열심히 했어. 노력했어. 그런데 안 됐어. 제발, 제발 다 없던 걸로 해 줘.”

그때였다. 아찔할 정도로 강한 라벤더 향이 내 코끝을 찔렀다. 고작 몇 송이 핀 것으로 이렇게 강한 향이 날 리가 없는데 말이다.

눈물을 훔치고 다시 눈을 뜨니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내 눈앞에는 리버런 섬에서만 보던 끝없이 펼쳐진 라벤더 밭이 있었다.

“레아, 거기 주저앉아 있다가 드레스 다 망가지겠다.”

이사벨라 언니의 목소리였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가 현기증에 다시 주저앉았다.

“저런, 그렇게 일어나지 말라고 언니가 그랬지.”

“언니?”

“왜, 레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한 거니? 한참을 멍해 있더구나.”

“언니 맞아?”

“왜 그래, 레아.”

“언니, 어 왜, 나, 여기는―.”

“응? 뭐라고? 레아, 한 번에 하나씩 말해 봐.”

언니가 깔깔 웃었다. 그런데 웃는 언니의 얼굴은 꼭 스무 살 때처럼 젊어 보였다. 아니 젊어 보이는 게 아니라 젊다. 언니가 예쁘긴 해도 이제 언니도 쉰이 다 되어 간다. 주름살 하나 없는 얼굴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된다. 지금 벨라 언니의 얼굴은 정말 꼭 스무 살 때 같다.

“언니.”

“응? 왜 그래?”

“언니 지금 몇 살이지?”

“너 언니 나이도 잊은 거야? 너랑 세 살 차이 나잖아.”

“그래서 몇 살인데?”

“스무 살이잖아. 레아. 네가 열일곱이니까 거기에 3을 더해 보렴. 네가 수학을 싫어하긴 했지만, 기초 산수마저도 잊은 건 아니겠지?”

이사벨라 언니의 말을 뒤로하고 나는 동쪽 탑의 내 방으로 달려갔다. 달려 나가는 발걸음이 이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다.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거울 앞에 섰다. 내 얼굴엔 이제 생활의 곤란도 마음의 고난도 보이지 않는다. 진줏빛 살결, 붉은 입술, 주름 하나 없이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 회색빛 눈동자는 햇살을 받아 창밖 라벤더처럼 푸른 보랏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숨을 크게 내쉴 때마다 드레스 밑으로 뽀얀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어깨도 꼿꼿하고, 손바닥엔 굳은살 하나 없다. 몸이 가볍다.

“언니, 나 열일곱 살이야?”

“응? 곧 열일곱 살이 되지.”

“언니, 나 열일곱 살이야!”

“레아, 그렇게 좋아? 들어 봐. 여자 인생에는 두 번, 남자들이 몰리는 시기가 있다고 하는데…….”

라벤더가 정말 내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라벤더 숲에서 잠깐 졸다 꾼 꿈이었던 걸까?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돌아왔다. 마흔 살의 생일에서 다시 열일곱의 여름으로. 다시 한번, 열일곱의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바야흐로 마법의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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