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저랑도 하나만 약속해요(2)
* * *
“……아케치. 일단 진정을.”
“네에……?”
일영은 곧바로 지금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꽈악.
바로 그 순간 그녀의 강한 악력이 일영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하지만, 그건 고의나 악의가 담긴 손놀림이라기보단 애착을 가진 무언가를 빼앗기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사뭇 닮아 있었다.
더욱이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원 역사에서도 오다의 사천왕이라 불리던 4인(시바타 카츠이에, 니와 나가히데, 타키가와 카즈마스, 아케치 미쓰히데)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던 그녀인 만큼 무력적인 부분에서 출중한 건 사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와 함께 사선을 돌아다니면서도 제대로 된 상처도 입지 않았다는 점이 그녀의 무력을 뒷받침해주는 부분이었다.
둘은 몰랐겠지만, 오죽하면 오다 가에 소속된 사무라이 중에서 그녀를 동경하는 이들은 그녀가 ‘일영의 호위를 맡은 덕에 전공을 세워야 할 때 크게 세우지 못했다’라며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주군……. 헤.”
그런 그녀의 눈이 돌아갔다.
술에 취해서 무슨 스위치라도 켜진 것인지, 아니면 억눌린 말을 다 내뱉은 김에 여태까지 애써 무시했던 감정을 그대로 따르려는 것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미, 상황을 회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걸 말이다.
“크읏.”
일영은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저릿하고도 야릿한 감각에 낮게 신음했고, 곧 그녀의 송곳니로 추정되는, 날카로우나 끝이 뭉툭한 감각이 힘을 더했다.
헤으웁.
입술과 일영의 목덜미의 살이 겹친 사이로 거칠고 급하게 삼킨 숨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녀는 일영의 신음에 화답하듯 그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그를 껴안았고, 곧 등에서도 느껴지는 날카로운 손톱의 감각에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큭.”
입술을 잘근 깨물어 신음을 애써 삼킨다.
목덜미와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그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끊어질 듯이 아슬아슬한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잡으며 생각했다.
‘빌어먹을. 취했나.’
지금 그녀와 관계를 한다면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그가 아니었다. 일단 노부나가와 요시나리를 볼 면이 없다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그녀를 ‘신뢰’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 않은가.
더욱이.
‘내가 여기서 하다가 걸리기라도 한다면…….’
아케치 미쓰히데의 말마따나 그 자신에 대한 소문은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아무리 팔다리가 잘린 쇼군이라도 해도 소문 정도는 들어봤을 법하다. 아니 애초에 소문을 듣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손님으로 온, 다이묘도 아닌 가신 나부랭이가 그새 떡을 치고 있으면 좋아할 집주인이 어디에 있겠냐는 말이다.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그녀가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컸기에 적어도 지금은 멈추는 게 백번 생각해봐도 백번 옳았다.
그래, 그게 이성적이고 상식적이며 현 상황에 걸맞은 대처법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일영은 그녀를 뿌리치지 못했다.
아무리 그녀가 힘이 세다고 한들, 술에 취한 상태로 남자인 일영이 진심으로 뿌리치는 걸 버틸 수 없음이 자명함에도 그는 그녀를 밀어내지 못했다.
……빌어먹을,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무심결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었다.
갑갑한 마음에 술을 한 병 원샷 때려서 제정신이 아닌 걸까? 그조차 아니라면, 그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이기 때문일까?
답이 나오지 않는 문답을 읊조리며 혼란스러운 마음은 그의 머리와 심장을 두드렸다.
바로 그때.
“……진짜. 버리면 안 돼요. 버리면 안 돼. 나, 이번에도 버려지면…….”
어느샌가 일영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그렇게 읊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본 일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하.”
입가를 비집고 낮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동시에, 그를 괴롭히던 두통과 미칠 듯이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은 원 상태로 돌아와 그를 진정시켰다.
조금이나마 깨달은 탓이었다.
어째서, 그 자신이 진심을 보인 채 울먹거리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적극적으로 밀어내지 못한 것인지를 말이다.
‘나도 모르게 공감해버렸어.’
그녀는 상처가 많았다.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소녀는 폭군이 되어 아버지와 가족들을 죽였고, 그녀는 의지할 곳조차 없이 신기루처럼 보이는 희망만을 가진 채 오와리로 향해 몸을 의탁했다. 그마저도 그 자신의 경계로 겉도는 모습이 없잖아 있었고 말이다.
그렇다면, 일영 그 자신은 어떤가.
조선에서 넘어와. 아니지. 현대에서 그저 그런 평범한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영문도 모른 채 이 세계로 떨어졌다. 채 2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몸에 그어진 흉터는 머잖아 문신을 해서 가려야 할 정도로 많았고, 어느샌가 사람을 죽여도 별 느낌이 없는 자신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면서도 안도한다.
그녀가 느끼는 상실감, 우울감, 괴리감, 불안감, 외로움, 공허함까지.
조금만 색깔을 바꾸면, 모두 일영 그 자신에게 닿아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니던가.
“비슷한 사람끼리 끌린다더니.”
망가진 인간들끼리도 끌리는 거였나.
일영은 자신도 모르게 자조했다. 더욱이, 그와 함께 책임감과 죄책감 역시 그의 뇌리를 사로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를 편견에 사로잡혀 대하던 것이 다름이 아닌 그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눈을 감는다.
그리고, 모든 이성적인 생각을 뒤로 한 채 그녀라는 사람에 대해 곱씹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일영의 살 내음을 삼키던 그녀의 두근거리는 심장도, 그의 등을 거칠게 잡아당기던 흥분감도 조금은 정제되어 낮게 가라앉은 그 순간.
하아.
읊조리듯 조금은 긁히는 갈라진 목소리.
일영은 무어라 말을 내뱉기 전, 그저 입술을 몇 번 들썩거리다가 천천히 그녀의 뒷덜미를 부드럽게 쓸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약속할게. 널 배신하지 않아. 네가 날 배신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오늘 밤은, 우리 둘이 한 약속의 증명이겠지.”
두 남녀의 눈이 허공에서 맞닿는다.
숨을 내쉴 때마다 서로의 숨결 사이로 잔잔하게 스치는 술 내음의 잔향이 야릇함을 더한다.
심장이 미칠 듯이 두근거린다.
그건 일영의 그것도, 아케치 미쓰히데의 그것도 아닌 둘 모두의 감흥이리라.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
찌르르하고 우는 풀벌레의 울음.
서로의 마음을 가늠하는 남자와 여자.
더 이상의 대화도 필요 없었고, 더 이상의 전희도 필요가 없어진다.
“미쓰히데.”
“네, 네에…….”
짐승이 낮게 그르렁거리는 듯한 중저음에 그녀의 눈이 몽롱하게 번들거린다. 일영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가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치워냈고.
“입 벌려.”
그의 읊조림에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가지런한 치열을 가르고 선홍빛의 혀가 미끄러지듯, 흘러넘치는 타액과 함께 무언가를 갈구하듯 살짝 떨렸고.
후읍.
바로 그 순간, 일영은 그녀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곧바로 입을 맞췄다.
혀와 혀가 얽힌다.
서로의 타액이 식도를 따라 흘러내렸고, 맞닿은 뺨에서 미끄러지는 숨결은 서로의 백탁액을 흐르게 할 정도로 야릇하고도 문란한 음악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아, 하아. 우읍!”
때때로 숨이 막혀 일영의 등에 날카로운 손톱을 박아 넣는다. 주군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이 얼마나 크나 큰 죄가 되는지를 알고 있음에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단지, 꿈과도 같은 이 순간.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숨결과 흐름에 몸을 맡길 뿐인 것이다.
하아, 하아.
서로의 입술이 멀어진다.
갈라진 둘 사이에서 길게 이어진 실은 달빛에 부딪혀 이윽고 끊어졌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거칠게 끌어 안았다.
“주군, 쥬군, 쥬구운…….”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세는 발음.
술 기운이 깨어지며, 도리어 그에게 취한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어느샌가 눈물마저 흘리며 일영의 품속으로 더욱 집요하게 끌어안겼고, 그런 그녀의 거칠어진 숨소리를 잠시 듣고 있던 일영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쯤 작은 그녀를 거칠게 끌어 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이니.
“……여기서 들키면, 우리 둘 모두 목숨을 부지하긴 힘들 거다. 그렇게 되면 너는 네 주군을 죽음으로 몰게 된 거겠지.”
스륵.
그녀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쓴다.
동시에, 살짝 흔들린 그녀의 눈동자에 조금은 이성이 돌아오려는 찰나.
“그러니, 참아.”
일영은 자신도 모르게 씨익 입꼬리를 올린 채, 그녀의 경갑에 연결된 끈을 풀어 갑주를 벗기며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며 덧붙였다.
“……나는 안 참을 거니까.”
“……흐, 흐읍!”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유달리 낮게도 갈라진 악동의 그것과도 같았다.
*
한편, 그 시각.
“아, 여기는 어떻게…….”
일영이 묵는 처소의 앞, 어둠을 뚫고 걸어오는 한 여자를 본 사무라이는 이미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는지 그렇게 되물었다.
“아. 별건 아니에요.”
그리고, 그런 사무라이의 물음에 머잖아 화톳불 앞까지 다다른 그녀의 얼굴이 불빛에 비추어 드러나니.
“그……. 히라테 히카게라는 분과 조금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요. 쇼군께도 허락을 받았답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괜찮겠죠? 자매님?”
루이스 프로이스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