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흔들리는 연기, 찰랑거리는 술잔(2)
* * *
멀뚱멀뚱.
“뭐해?”
“예?”
아케치 미쓰히데는 일영이 자신에게 건네 준 잔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며 조금 얼빵한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곧 그가 자신에게 술을 권하고 있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그, 그렇지만.”
“받아.”
일영의 나긋한 숨결 속에 미약한 술기운이 담겨서 코끝을 스친다. 그 때문일까. 그녀는 일영의 명령 아닌 명령에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이 잔을 조심스럽게 양 손으로 받아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머잖아 정신을 차린 그녀는 당혹스러움이 담긴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자신에게 들려준 잔이 아닌 다른 잔에 또다시 술을 따르는 일영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했기에, 대충 할 말이 예상은 된다.
‘아까 일이 마음에 걸리는 거겠지.’
애초에 원래 목적했던 시바 씨의 저택에 머무는 것이 아닌, 나름 쇼군 가(家)인 아시카가 가문의 무사들이 경계까지 서주는 마당에 그녀가 구태여 일영의 곁에 앉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갑주조차 벗지 않고 곁에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낮의 습격 때문이리라.
그녀의 마음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가던 야산도 아닌 교토 한복판에서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았으니, 아무리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호의를 보인다고 해도 마음을 편히 놓을 수는 없겠지.
‘막말로,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달리 마음을 먹는다면 여기만큼 위험한 곳이 없기도 하니까.’
물론, 그런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그녀는 현재 쇼군의 지위가 바닥으로 처박히면서 주변 다이묘, 혹은 가신들에게 그야말로 있으나마나 한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런 그녀가 그나마 쇼군으로서의 권력을 미약하게나마 되찾기 위해서 취할 방법은 정해져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 혹은 홀대하는 교토 인근 다이묘들과 어떻게든 연합을 하든가.
그게 아니라면, 교토 밖의 다이묘들을 끌어들여 새 판을 짜거나.
‘첫 번째는 불가능해.’
역사적으로도, 그가 지켜본 교토의 상황으로도 그건 불가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토를 활동권으로 여기는 다이묘와 천황들은 지난 수십 년간 쌓인 감정의 골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지 오래였으니 말이다.
다만.
‘오다 가문 하나로 될 리가 없고. 문제는 오다 가문이 아시카가 가문과 연합을 하되 만족스러운 무언가를 얻어내려면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겠지.’
오다 가문 하나로 교토의 다이묘들을 견제하기엔 무리가 있으니, 원 역사대로 다케다 가문과 호조 가문 등 적잖은 가문들이 쇼군과 물밑에서 입을 맞추고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일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머리 아프게들 산다.”
“예?”
무심결 내뱉은 혼잣말에 아케치 미쓰히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정신이 다시금 현실로 돌아온 일영은 그녀에게 살포시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아니야. 좋은 말로 할 때 먹어.”
“아, 알겠습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남들이 이야기한다면 그저 흔하디흔한 위협 정도로 느낄 정도의 말이었겠지만, 왜일까? 일영이 내뱉자 그 무게감이 다른 이유는 말이다.
아마도, 그가 정녕 좋은 말로 했을 때 잘 풀리지 않을 때 보여주는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영은 덧붙였다.
“우려하는 마음은 알지만, 취하기 전에 끝낼 거다. 내가 어지간해서 취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잖아?”
“……그건 그렇죠.”
그 부분에서 아케치 미쓰히데는 그다지 반발할 말을 내뱉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영의 주량은 그녀가 보아온 이들 중에서도 꽤 수위를 다투었으니 말이다.
결국, 일영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아케치 미쓰히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슬쩍 고개를 끄덕이곤 잔을 입가로 가져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녀의 붉은 입술이 잔에 막 닿은 바로 그떄.
“잠깐.”
“예?”
티잉.
도자기로 빚어진 잔이 맞부딪히며 청아한 울림이 울려 퍼졌다. 벙찐 얼굴을 한 그녀에게 일영은 피식 웃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같이 마시는데, 건배가 없으면 쓰나.”
능글맞은 일영의 웃음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은은하게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술의 향취 때문일까.
그녀는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잔을 기울였다.
스륵.
살짝 데워진 술이 목젖을 알싸하게 스쳤고,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하는 짧고 강렬한 울림을 내뱉었다.
“잘 마시네.”
“가, 감사합니다. 주군.”
이미 한번 술이 들어간 이상 아케치 미쓰히데도 더 거절하며 분위기를 망치지는 않았다. 덕분에, 둘은 서로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대작을 이어나갔다.
한 병.
두 병.
세 병.
중간에 시종을 불러 또 다시 한 병…….
그렇게 얼마나 술잔을 비웠을까.
찌르르.
슬슬 다시금 고개를 치켜든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고, 둘은 어느새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이전보다 조금은 느리게 술을 삼켰다.
“예쁘네요.”
“그러게.”
일영의 눈동자.
아케치 미쓰히데의 눈동자.
두 남녀의 동공에 교토의 밤거리가 담겼다.
아시카가 가문의 거처가 꽤나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지, 교토의 밤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검은 하늘에 회색빛 구름이 흐른다.
달빛은 은은하게 대지를 비추었고, 흉흉한 분위기였던 낮과 달리 밤은 고요했으며 때때로 늦은 저녁을 먹는 연기만이 하늘로 올라와 밤하늘의 구름과 합쳐질 뿐이었다.
그때였다.
“후으…….”
톡톡검을 쥔다기에는 다소 얇은 손가락으로 잔을 긁는다. 고개를 떨구고 술기운이 담긴 심호흡을 내뱉던 아케치 미쓰히데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일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있잖아요.”
“응?”
척 보기에도 취기가 썩 많이 올라왔는지 살짝 달아오른 뺨이 눈에 밟힌다. 일영은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조선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말투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일전엔 평상시에도 적잖은 긴장감이 역력했다면, 존대이긴 하지만 이제는 확연히 풀어진 목소리가 아닌가.
이게까진 본 적이 없는 모습이다.
때문에, 일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새로운 모습에 묘한 감흥을 느끼며 되물었다.
“그건 왜?”
“으음, 그게 아무래도 들리는 소문이…….”
멈칫.
그때 귓가를 스친 ‘소문’이라는 단어에 막 술잔을 기울이던 일영의 손이 멈칫거렸고,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
“소문?”
“아?”
순간적으로 아케치 미쓰히데가 굳었다.
덕분에, 일영은 구태여 더 캐묻지 않아도 그녀가 지금 취기에 말실수 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소문이라니?”
“그, 그게.”
때문에 아케치 미쓰히데는 눈동자를 굴리며 뒤늦게 내뱉은 말을 주워담으려고 했으나 이미 일영이 들어버린 이상, 말을 되돌리기에도 한참 늦어버렸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대답.”
일영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담긴다.
하지만, 그것이 정녕 기분 좋아서 지은 미소가 아닌 전투에 임하기 직전 짓는 그것이라는 걸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따, 딸꾹!
“야.”
딸꾹질하는 그녀의 모습에 일영의 표정은 마치 얼음이 녹듯이, 아주 천천히 싸늘하게 변해간다. 그리고 그런 일영의 모습을 본 아케치 미쓰히데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느끼곤 몸을 떨었다.
‘아, 아랫배가 뜨거워……. 왜?’
달아오른 열기가 척추를 따라 흐른다.
식은땀이 흘러 내리고, 아랫배가 달아올라 뜨겁게 무언가 찌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마치 홀린 듯이 일영의 물음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게…….”
.
.
.
“여, 여기까지입니다.”
“이런 미친…….”
그리고 머잖아 그녀의 말을 모두 들은 일영은 자신도 모르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문이라는 것이 하나 같이 괴랄한 것들밖에 없지 않은가!
‘대체 무슨 지랄들을 하고 다닌거야?’
모함도 적당히 해야 받아주지, 이건 그냥 악의적으로 색마를 만들어놓은 수준이 아닌가.
일영은 눈앞에 놓인 술병을 들어 한번에 입에 털어 넣어버리곤,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이걸 믿는다고? 왜? 정말?”
“아, 아니 였습니까?”
“설마 믿은 거 아니지?”
“…….”
침묵이 묘해서 고개를 돌리자, 아케치 미쓰히데는 고개를 숙인 채 목선을 따라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말았다.
식은땀까지 흘린다.
‘……믿었네. 믿었어.’
일영은 미처 화를 낼 생각도 못 한 채 나지막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예 생판 남이 와서 출세하니까 음해 정도는 납득한다고 쳐도, 치정극이 뭐냐고……. 제기랄. 할 거면 차라리 낙동강 회군 이런 반역이면 얼마나 좋아.”
그런 일영의 중얼거림을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취기에 이미 할 말 못 할 말 모두 내뱉었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럼, 생판 남인데 나한테는 왜 그랬담…….”
“뭐라고?”
“아?”
물론, 그걸 감당해야하는 것도 본인이었지만 말이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채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일영을 마주 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