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개판이라 미안하군
* * *
“이, 이이익!”
“죽여! 죽여버려!”
섬뜩한 일영의 말이 전장에 울려 퍼진 직후, 이를 악문 몇몇 사내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악에 받친 표정으로 일영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일전에 그에게 죽은 아시가루들과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그들이 검을 쥔 모양새가 제각각이 아닌 일정한 품을 띄고 있다는 점일까.
‘사무라이들인가.’
덕분에 일영은 그들이 아시가루들 사이에 소수로 섞여 있던 사무라이들이라는 걸 깨닳을 수 있었고, 찢어낸 소매로 묶은 검을 비스듬하게 틀며 내달리는 다섯 명의 사무라이를 묵묵히 응시했다.
“말 같지도 않은 허세를 부리는 구나아!”
누군가는 진정으로 일영의 말을 허세라고 생각하는 듯이 비웃음과 자신감이 담긴 목소리로 일갈했고.
“이, 이이익! 죽어! 뒈져버려!”
누군가는 오히려 겁을 잔뜩 먹은 게 분명한 얼굴로 떨리는 칼끝을 일영에게 들이밀었으며.
“…….”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채 묵묵히 일영을 향해 서늘한 칼날을 베어냈다.
제각기 다른 검격을 펼친다.
누군가는 오만했고, 누군가는 겁이 많았으며, 누군가는 신중했다.
타다다닥!
그리고 그 사무라이들의 검이 향한 일영은 단지 어떤 동요도 없이 그들을 바라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스릉.
비스듬하게 틀어진 칼날은 당장이라도 놈들을 베어내려는 듯이 살기를 풍겼으나 정작 그의 두 눈에 담긴 감정은 철저한 무심(無心)이었으니.
고요한 동공에는 그들에 대한 적의도, 분노도, 연민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일영은 이 세계에 적응한 것이다.
‘그저, 이런 세상인 거니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흉이 되지 않는다. 단지, 그것에 대한 명분이나 대가만 옳다고 여겨진다면 말이다.
저들이라고 어찌 처음 본 일영과 이코마 키츠노에게 원한이 있겠는가?
그저, 그들 역시 현대의 직장인처럼 업무를 함으로서 가치가 올라가고 돈을 받으니 할 뿐인 것이다. 다만, 그 업무라는 게 살인, 나아가 전쟁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그러니까.
“나 역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겠지.”
일영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사무라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고 할 발자국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무, 무슨!”
“큭!”
너나 할 것 없이 일영을 향해 검을 뻗던 다섯의 사무라이 중 셋의 검로가 겹쳤고, 당연히 놈들은 당황하며 서로를 바라보며 다급히 뒤로 물러서려 했다.
‘이상한 일도 아니지.’
차라리 창으로 하는 합공은 몰라도 검으로 한 명의 상대를 겨누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곁에서 함께 검을 뻗는 이의 사소한 습관이나 주된 검로까지 모두 이해하고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인 것이다.
즉, 척 보기에도 합을 맞춰보기는커녕 검을 쥔 지도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놈들이 합공을 성공할 리는 만무했다.
‘……다만.’
일영은 뒤엉키다 못해 당혹감에 공격을 시간마저 놓친 그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지만, 그가 그간 갈고닦은 검은 결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커헉!”
“끄아아악!”
일영이 무심하게 뻗어낸 칼날을 검로가 겹치지 않은 두 명은 피했지만, 이미 당혹감에 기세를 잃어버린 셋 중 둘은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흐읍!”
일전에 다른 이들과 달리 일영을 향한 경계의 시선을 놓지 않았던 사무라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막 검을 회수하는 일영에게 칼날을 들이 밀었다.
“주, 주군!”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아케치 미쓰히데가 무심결 외칠 정도로 허를 찌르는 공격. 하지만, 정작 그의 앞에 있던 일영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뺨을 틀며 나지막이 속삭이니.
“뭔가 착각하는데.”
칼날이 정확히 일영의 심장을 스친다. 하지만 베어진 비단옷 안에 보인 검은 무언가에 사무라이는 사색이 되어버리고, 바로 그 순간 일영은 회수한 검의 끝자락을 그대로 놈의 옆구리에 가져대며 속삭였다.
“설마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호랑이 굴에 얼굴을 들이밀었을까.”
“커헉!”
일영은 사무라이의 이어진 대답을 듣지 못한 채, 그의 갑주 사이의 틈에 검을 비스듬히 찔러 빼내 주었다.
혈조를 따라 주륵, 하고 핏물이 흐른다.
“으, 으으.”
순식간에 사무라이 셋이 당했다.
그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본 나머지 둘이라고 뾰족한 대책이 있을 턱이 없었고, 이미 기세를 빼앗긴 순간 그들의 미래 역시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 살려…….”
서걱. 툭.
다섯 개의 육신으로 내달렸던 사무라이들은 열 개의 살덩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고, 일영은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그저 촤락하고 검에 묻은 핏물을 털어낼 뿐이었다.
물론, 그의 얼굴에는 묘한 위화감이 떠올랐지만 그건 난처함이나 죄책감이 아니었다.
‘사무라이들조차도 수준이 낮아. 대체 뭐지?’
그건 의문이었다.
아시가루들이 수준이 낮은 것 정도는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아니, 애초에 당연한 일이다.
아시가루란 잡졸과 구분도 애매한, 흔히 농민들에게 창이나 칼 쥐여 주면 그게 그거 아니던가. 그런데 분명 사무라이들은 달라야 할 텐데. 일영에게 검을 닿게 한 사무라이가 고작 다섯 중 하나라는 점은 의문이 아닐 수가 없었다.
교토의 사무라이들이 경험이 적지는 않을 테고, 단순히 질 낮은 놈들을 보내 경고했다고 해도 말이 되질 않는다.
“대체 무슨…….”
그렇게 일영이 새삼 예상보다 훨씬 약한 그들의 모습에 의문 섞인 중얼거림을 내뱉으며 미간을 좁힌 한편.
“어, 어떻게 합니까?”
“괴, 괴물입니다.”
그를 포위하고 있던 수십의 아시가루들은 그들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있던 사무라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사무라이 다섯이 당했다.
그뿐인가?
이미 수십의 아시가루가 일전의 교전에서 죽어간 데에 비해, 적들은 부상자들은 꽤 있어도 사망한 이들은 그들보다 압도적으로 적었다.
당연히 푼돈 혹은 그저 반강제로 무기를 쥐게 된 아시가루들이 의지할 곳이라곤 그나마 검을 배웠다고 거들먹거리던 사무라이들 밖에 없었다.
“…….”
“……크, 크흠.”
물론 사무라이들이라고 답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들이라고 해 봐야 하급 사무라이들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일영에게 더욱 겁을 먹은 건 사무라이들이었다.
‘저, 저게 말이 돼?’
‘우리가 상대할 수준이 아니잖아……. 제기랄!’
일영은 모르고 있던 사실이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무라이 중 전쟁다운 전쟁을 제대로 해본 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이들이라면 이미 국지전에 투입되어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지, 왜 이런 같잖은 소요에 동원이 되겠는가?
쓰고 버리는 소모품 정도.
딱 그 정도가 그들의 주군이 그들에게 부여한 역할이라는 걸, 하급 사무라이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일단 살아야지.’
때문에, 채 열 명도 남지 않은 사무라이들은 저들끼리 눈을 마주친 후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검을 뽑아 들고 가까운 아시가루들을 향해 휘둘렀다.
“끄아아악!”
“아아악!”
몇몇은 그래도 손속에 사정을 두고 위협적으로 휘둘렀지만, 눈에 독기를 품은 몇몇은 아예 목을 베어버리곤 외쳤으니.
“물러서면 죽여 버린다!”
“당장 놈을 잡아서 무릎을 꿇려! 어차피 이대로 돌아가면 우리가 죽는다고!”
“빌어먹을 새끼들! 정말로 죽였어!”
그들이 택할 선택지는 애초에 하나뿐이었다. 아시가루들은 마음을 독하게 먹은 사무라이들의 모습에 기함을 토하며 앞으로 밀려났고, 그 광경을 보던 일영은 미간을 좁힌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미친놈들.”
아무리 제정신인 사람을 찾기가 힘든 세상이라고 하지만, 아군까지 베어버리다니. 일영은 진짜로 아군을 벤 놈의 얼굴을 두 눈에 담으며 천으로 묶은 검을 천천히 세우며 앞으로 걸었다.
“오, 온다!”
“으, 으아아아악!”
아시가루들은 선택해야 했다.
앞으로 걸어가 일영 단 한 명을 죽이든, 뒤로 도망쳐 아군의 손에 죽든.
“하, 한놈만 베면 돼!”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당연하게도 선택지는 전자였다.
놈도 사람인 이상, 수십 명이 덤벼들면 죽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으아아아아!”
“뭐해요! 당장!”
일영은 달려오는 수십의 아시가루를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이코마 키츠노가 그들에게 구원을 명령하려던 바로 그때.
“일대 백이라. 이거 참 보기 힘든 전투를 볼 뻔 했어.”
전장의 광기와 열기가 가득 찬 교토의 대로에 나긋한, 그러나 어쩐지 묘하게 쇳소리가 섞인 투박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막 고개를 돌리려던 바로 그 순간.
타다다다닥!
스릉!
일영 일행을 습격한 이들과 달리, 마치 전장에서 입을 법한 갑주를 갖춰 입은 열 명의 사무라이들이 일영의 앞을 빠르게 가로막았고.
“헌데, 나를 만나기도 전에 죽어버리면 곤란하니 손을 조금 빌려주도록 하지.”
동시에 한 여자가 걸어 나오니.
“당신은…….”
“당신은이라. 자주 듣는 칭호야. 선조께서 개판만 안 쳤으면 들을 일도 없었겠지만.”
구릿빛의 피부.
어깨까지 내려오는 연갈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어딘가 투박한 듯 하지만 왜인지 기풍이 품겨 넘치는 말투까지.
“설마?”
그녀를 본 일영은 단번에 정체를 깨닫고 놀란 듯이 눈동자를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말로 짐작 컨대.
“반갑다. 히라테. 아니, 오와리의 야차(??の??)라고 불러줘야 하나?”
다름이 아닌.
“그래. 그 설마다. 교토에 온 걸 환영한다. 집주인으로서 개판인 건 미안하다만.”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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