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몇 명이나 베었을까?
* * *
타다다닥!
“큿!”
채앵!
본디 사람들의 북적거림이 느껴져야 할 거리는 어느샌가 사람은커녕 쥐새끼 하나 보기 힘들 정도로 비어버렸고, 남은 건 서로를 향해 치열하게 맞붙는 사무라이들의 모습뿐이었다.
“으아아아!”
“커흑!”
내리는 빗물 사이로 핏물을 흘리며 쓰러지는 이들의 얼굴이 진창에 처박힌다.
비단 적들뿐만이 아니었다.
일영과 함께 교토로 온 이코마 가문의 낭인 중 어중이떠중이들은 대부분 쓰러진 지 오래였고,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사무라이라고 한들 밀려오는 적들에게 영원히 대적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주군!”
“총단주님!”
이츠키와 아케치 미쓰히데는 일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마찬가지로 이코마 가문의 낭인 몇몇 역시 이코마 키츠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적들이 습격한 이유는 모른다.
다만, 그들이 지금 해야할 일은 고용주이자 주군인 그와 그녀를 안전하게 도피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윽고 무언가를 깨달은 그들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나지막이 시선을 사방으로 훑었다.
‘대체 어디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문제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순간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태반이 이번에 교토의 땅을 처음 밟아보는 사람들이었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교토의 지리를 알 턱이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동자만을 굴리며 골목에서 계속해서 쏟아지는 사무라이들의 검을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익!”
“쯧.”
한편, 적들의 수가 줄기는커녕 계속해서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일영이 가만히 숨어있을 리가 만무했고, 그는 때아닌 전장의 향취를 느끼며 비단으로 정갈하고 고풍스럽게 만들어진 옷의 소매를 펄럭였다.
촤아악!
검을 한번 움직일 때마다 소매에 맺히는 붉은 꽃잎이 늘어난다.
그는 어느샌가 무표정으로 변한 채 밀려오는 사무라이들을 베어 넘기며 생각했다.
‘누굴까. 쇼군?’
일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그럴 동기도, 이유도 없으니까.
‘차라리 우리를 반기면 반겼겠지. 비록 비공식이라고 한들 내가 오다 가문의 첨병으로 교토에 온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지금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되지 못한다.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일영이 오는 것을 안달 날 정도로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도 그럴 것이 작금의 쇼군들은 인근 다이묘들에게 압박을 당하면 교토를 버리고 몇 년을 못 돌아오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 하나의 연례행사로 자리를 잡을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쇼군이 습격을 한다?
아무리 알고 있는 모든 역사적인 사실들과 그 나름의 판단을 섞어 봐도 가능성이 전무한 이야기였다.
“아, 아아아아악!”
거기까지 생각한 일영은 검을 앞으로 뻗으며 달려오는 사무라이의 내려 베기를 단번에 피하곤 그대로 어깨를 찍었다.
촤아아아악!
핏물이 부채꼴을 그리며 흩어지고, 고통에 몸서리치며 사색이 되는 사무라이를 바라보며 일영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실전 경험은 적거나 없는 것 같고…….”
“무, 무슨.”
“시끄럽다.”
서걱.
툭.
일영은 어깨를 벰과 동시에 검로를 안쪽으로 감아 그대로 놈의 목을 베었고, 검에 맺힌 핏물이 허공에 흩뿌려지는 순간 놈의 경악과 두려움이 담긴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놈의 표정을 봄으로써 일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전장에서 굴러먹던 놈들은 아니다. 이건 차라리…….’
몇몇 싹수가 보이는 놈들이 있다고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정말 소수에 불과했고, 태반은 검을 쥐는 자세가 엉성하거나 제대로 쥐었다고 한들 결정적일 때 주춤거리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애초에 그런 놈들이었기에 벌써 수십을 베었음에도 일영 측의 사상자는 기껏해야 절반 수준이 아니겠는가.
‘아시가루에게 검을 쥐어 보냈다.’
때문에, 일영은 잠정적으로 그런 결론을 내리고 이 일을 꾸몄을 놈을 되짚는 한편, 일영의 등 뒤에 서 있는 이코마 키츠노에게 물었다.
“누구의 짓인지 짐작이…….”
푸욱!
“가십니까?”
“아…….”
물론, 그사이에도 달려드는 놈의 복부에 검을 꽂아주는 걸 잊지 않았다. 입으론 태연하게 물음을 던지면서도 적에겐 자비 따위 없는 손속을 본 이코마 키츠노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녀가 일영의 제대로 된 전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처음 만났을 때가 전부였고, 그 당시에 처절하긴 했어도 그 역시 피를 흘리는 인간이라는 느낌은 충분히 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이, 이렇게 변했다고?’
이코마 키츠노는 무인이 아니었기에 자세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일영이 보여주고 있는 무력이 결코 쉬이 따라갈 수 없는 종류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코마?”
“아, 네.”
하지만 그런 혼란스러움도 잠시.
그녀는 아주 빠르게 현실로 돌아와 조금 전 일영이 그녀에게 내뱉은 물음에 대한 답을 빠르게 생각했고, 곧 미간을 살짝 일그러트린 채 일영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곤 말했다.
“쇼군은 아닐 가능성이 커요. 그렇다면 남은 건 인근 다이묘 중 오다 가문이 교토에 선을 대는 걸 탐탁지 않아 하는 가문일 텐데…….”
거기까지는 일영이 추측한 가설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에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들은 일영은 생각보다 이번 일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교토 인근에 세력권을 가진 다이묘 중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한가지에요. 일종의 영역 표시이자 경고, 그리고 과시.”
“과시라면?”
“간단하잖아요? 나는 교토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다. 그러니 목숨이 아까우면 돌아가라……. 뭐, 그런 거겠죠.”
일영은 그녀의 말을 머릿속으로 되짚으며 쓰게 웃었다. 즉, 그녀의 말을 요약하자면 다된 밥에 재를 뿌리는 놈들이 나타났으니 사전에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것인가.
‘다이묘를 치자니 체급이 너무 크고. 나는 잘라내도 티도 안 난다는 거겠지.’
그제야 비로소 눈이 개이는 느낌이었다.
눈앞의 적들은 단순히 무리의 첨병에 불과하고, 교토에 온 순간부터 일영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이런 적들과 수없이 마주해야 하리라는 점을 깨달은 순간인 것이다.
“아케치 미쓰히데. 이츠키.”
“끄응! 예. 주군.”
“……하아, 하아. 예. 주군.”
일영의 부름에 선두에서 가장 많이 적을 베어 넘기던 둘이 곧바로 화답했고, 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사무라이들을 추슬러라.”
“예! 흐읍!”
전투 중 전열을 정비하라는 명령은 자칫 잘못하는 순간 아군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말이었으나 이츠키와 아케치 미쓰히데는 반문하는 대신 행동으로써 그의 명령에 응했다.
“꺼져!”
“으아아악!”
이츠키는 손에 쥔 검을 크게 휘둘러 공간을 만드는 것도 모자라 선두에서 주춤거리던 놈의 명치를 정확하게 발로 차서 뒤로 넘어트렸고.
“애송이들이!”
아케치 미쓰히데는 언제 일영에게 쩔쩔 맸냐는 듯이 살벌한 눈으로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핏물을 흩뿌렸다.
그리고, 이코마 상단의 사무라이들 역시 일영의 명령을 듣고 본능적으로 뭉침으로써 갑작스러운 습격에 어지럽게 흔들려 있던 전열이 다시금 가다듬어지게 되었다.
“이제 좀 한결 낫군요.”
솔직히 방심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난세라도 한들 나름 천황과 쇼군이 거처하는 교토의 대낮에 이렇게 습격을 받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때문에, 호위가 있다고 한들 대상인 이코마 키츠노와 일영이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벌렸던 점이 난전의 주된 원인이었다.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놈들의 수가 생각보다 많아 대처하는 동선이 꼬인 것이다.
‘덕분에 이코마 키츠노를 지키느라 적극적으로 싸우질 못했어.’
하지만 전열을 가다듬은 이젠, 일영은 이코마 키츠노의 안위를 그들에게 맡길 수 있게 되었다.
“총단주를 지켜라.”
일영은 간략한 그 명령을 히라테 가의 사무라이뿐만 아닌, 이코마 상단의 낭인들에게도 내뱉으며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스윽.
머리를 자른 직후, 다듬지 않은 탓에 슬슬 다시 눈을 가리려는 머리카락을 손에 묻은 적들의 피로 쓸어 넘긴다.
이마에 핏물이 묻고, 얼굴의 굴곡에 따라 흘러내려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무, 무슨.”
“왜 혼자서 기어 나오는 거야?”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런 일영의 모습은 그 자체로 적들에게 묘한 위화감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비단 덩치만 큰 것이라면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실력과 사방에 시체가 즐비함에도 일말의 동요조차 없는 눈, 입가에 길게 난 상처는 그가 매우 숙달된 사무라이라는 걸 보여주지 않는가.
꿀꺽.
“조, 조심해. 벌써 저 새끼 손에 죽은 놈들이 열 명을 넘는다고.”
“끄응.”
먼저 접근하는 놈들은 죽는다.
그렇다고 이대로 서 있을 수도 없다.
그런 자가당착적인 고민에 놈들이 주춤거리는 바로 그때였다.
찌지직!
일영은 조금 전까지 적들의 핏물로 붉은 꽃이 수놓고 있던 소매를 망설임 없이 찢었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검을 쥔 오른손과 검의 손잡이를 천천히 매듭짓기 시작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칭칭 감아진 매듭은 푸는 것보다 차라리 손목을 자르는 편이 더욱 나으리라 생각될 정도였고, 그 괴이한 모습에 백 명에 달하는 적들이 그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때.
“내가 벤 사무라이가 거진 백 명이 넘을 테지.”
낮게 가라앉은 눈.
무표정한 입매.
마지막으로, 핏물로 흐트러진 비단 옷.
마치 전설 속의 귀신이 내려온 듯한 그 광경 속에서 일영은 그들에게 속삭였다.
“그럼, 아시가루는 몇 명이나 베었을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