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교토가 너무 개판이다
* * *
「쇼군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비단 호사가들이 내뱉는 몽상이 아닌, 어쩌면 가혹할 수도 있는 현 열도에서 쇼군이라는 직위를 가진 이를 지칭하는 가장 정확한 한 마디였다.
시작은 오닌의 난이었으나 이후 쇼군들의 대응과 다이묘들의 권력욕은 열도를 수십 개의 국가로 갈라버렸고, 그 결과 쇼군 역시 천황과 비슷한 병풍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사각. 사각.
교토의 거대한 전각 안, 그 어떤 이들도 없는 드넓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던 여인이 묵묵히 먹을 갈았다.
구릿빛에 가까운 피부와 달리 몸에 박힌 기품은 그녀가 절대 낮은 신분이 아니라는 듯이 말하고 있었고, 반쯤 열어 놓은 창가에서 내리비추는 햇살에 닿은 이목구비는 그 자체로 그녀의 미를 짐작도록 했다.
사각, 사각.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움직임을 따라 울리는 규칙적인 소리는 어지럽기만 한 그녀의 마음을 편히 만드는 몇 안 되는 시간이었고, 그것을 만끽하기 위해 그녀는 무표정으로 한참 동안 먹을 갈았다.
그리고 마침내, 먹이 다 갈렸을 무렵.
굳은살이 박힌 그녀의 손이 붓을 쥐었고, 종이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려던 바로 그때.
“쇼군. 오다 가문의 가신이 교토에 입(?)했다는 전갈입니다.”
멈칫.
막 종이에 먹을 묻히려던 그녀의 움직임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멈췄고, 머잖아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 소식을 가져온 사무라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동시에 탁, 하고 붓을 내려놓은 그녀는 정갈하게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조금은 낡은, 그러나 그만큼의 기풍이 느껴지는 다다미를 딛고 앞으로 걸었으니.
“아무래도, 서예는 다음에 해야겠구나.”
그녀의 말을 들은 사무라이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으니.
“뜻대로 하소서.”
어딘가 묘한 감정이 담긴 한 마디였다.
*
뻐끔.
일영의 입에 물린 파이프에서 회색빛과 흰색이 뒤섞인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후으.”
폐부를 묵직하게 찌르는 연기를 삼키다가 이윽고 내뱉는다. 오랜만에 태워서 그런지, 아니면 겉담으로 해야 하는 파이프 담배를 자신도 모르게 중간중간 속으로 삼켰기 때문인지 묘하게 시야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조선에서 피워 보셨나요? 저도 일전에 알고 지내는 선교사에게 선물로 받은 걸 어떻게 할지 몰라서 반쯤 내버려 뒀었던 물건인데…….”
“예, 뭐.”
일영은 이코마 키츠노의 신기하다는 듯한 눈빛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기에 조선에도 담배가 들어 왔었나?’
잠시 고민하다가 머잖아 깨달았다.
임진왜란 이후에 담배가 전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어봤는데, 아니라는 말도 있고…….
“몰라. 흐암.”
“예?”
“아닙니다.”
일영은 반문하는 이코마 키츠노에게 고개를 저어주고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한창 교토로 향할 땐 마차에서 생활하다시피 한 그였으나 그것도 며칠이 지나자 좀이 쑤셔 걷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마차 내부가 담배를 태우기에 환기가 잘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파이프를 뻐끔거리며 거리를 걸었을까? 문득, 일영은 일행들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는 걸 느끼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감탄과 안타까움이 담긴 히라테 가(家) 사무라이들, 그리고 낭인들의 표정이었다.
일영이라고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생각보다 감흥이 덜해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던 것일 뿐.
“……피해를 아직 다 복구하지 못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럼에도 저 멀리에는 여전히 수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군요.”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거닐고 있는 곳은 다름이 아닌 교토의 외곽 거리였으니까 말이다.
‘확실히, 상황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데.’
곁에서 읊조리는 사무라이들의 말에 일영 역시 시선을 돌려 주변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
“……끄.”
대로는 나름 사람들이 오가며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골목 곳곳에는 빈민들이 늘어져 동태와 다를 바가 없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도시 곳곳이 무너지고 불탄 흔적이 즐비했고, 치안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 듯 사람들이 외지인인 그들을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기분 나쁘게. 뭘 저리 뿜고 다니는게야?”
“아서라. 딱 보기에도 사무라이잖아. 목 달아나고 싶어?”
“씨발. 어차피 언제 뒈질지 모르는 세상인데 뭘…….”
특히, 일영을 두고 입안에서 씹어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정작 일영은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고 말이다.
“주군.”
곁에서 그 소리를 들은 아케치 미쓰히데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이며 일영에게 손을 쓸까를 물었지만, 일영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속삭이듯 화답했다.
“구태여 일을 만들 이유는 없지. 애초에 지난 100년 동안 고통받았던 그들로선 당장 목을 따겠다고 날뛰지 않는 게 다행인 거야.”
“그, 그렇습니까.”
일영의 말에 아케치 미쓰히데는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는가라고 반문하려고 했으나, 머잖아 주변에서 쏠리는 흉흉한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일영의 말을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도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쫓겨났다가 5년 만에 복귀했다고 했지.’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있었겠지만 그건 일단 뒤로 미뤄버리고, 중요한 건 교토의 민심이 일영이나 이코마 키츠노의 생각보다 더 개판이라는 점이었다.
일영은 심드렁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은 한량 따위와는 거리가 먼, 냉철한 통찰을 가지고 미래를 점치는 그것이었으니.
‘오래 있을 곳은 못 된다. 당장 잇키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겠어.’
실제로 이 시기에 교토에서 잇키가 벌어졌다는 역사는 본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많은 것이 원 역사와 달라지고 있었으니까.
“히라테 공.”
“예. 아무래도 빠르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건 일영 뿐만이 아니었기에 이코마 키츠노는 빠르게 시바 씨의 교토 저택으로 향할 것을 제안했고, 일영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코마 상단은 교토에서 상행도 겸할 것이었으나 머무르는 거처 자체는 함께하기로 했기에 매우 당연한 선택지였다.
결정은 빠르게.
행동은 더 빠르게.
“속도를 높이죠.”
이코마 키츠노의 말에 낭인들과 상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도를 올렸고, 그와 동시에 일영은 파이프에 담아둔 담뱃잎이 다 탄 걸 느끼고 입에서 파이프를 떼어냈다.
……아니, 때어내려 했다.
타다닥!
“죽어라!”
“으아아!”
그들이 골목을 돌자, 곧바로 내달려 사무라이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수십의 낭인들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뭐, 뭐야?!”
“으아악!”
그들의 수는 일행과 비교하면 그리 많지 않았으나 문제는 이코마 상단 측 낭인들의 숙련도였다. 그들은 당황하며 검을 뽑아 내리치는 검격을 막아냈으나 그것도 찰나일 뿐, 작정하고 죽이려 드는 적의 살기를 감당하지 못해 검을 놓치거나 실력에서 밀려 순식간에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니까 젊은 놈들은!”
“흐읍!”
“감히!”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새로이 상행에 합류한 낭인들에 한정된 이야기였고, 이코마 상단과 전속으로 함께하는 낭인들은 물론 히라테 가문의 사무라이들은 조금 상처를 입을지언정 그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았다.
덕분에 일영은 전장이 되어버린 대로를 바라볼 여유가 생겼고, 곧 그는 미간을 좁히며 읊조렸다.
“이상한데…….”
“뭐가요?!”
피슝!
“끄륵……!”
이코마 키츠노는 손목에 호신용으로 메고 다니는 작은 석궁으로 한 낭인의 미간을 꿰뚫어버리고 물었으나 일영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고의로 그런 게 아닌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갑작스럽게 습격한다. 낭인들의 일탈이라기엔 맥락이 없어. 그렇다면…….’
일영의 시선이 빠르고 간결하게 자신들을 습격한 이들의 면면을 살핀다. 그리고, 머잖아 나지막이 읊조렸으니.
“제기랄.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었군요.”
“예?”
스릉.
“커억!”
애병(?兵)인 오니마루 쿠니츠나를 뽑고, 일영은 달려드는 낭인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린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으니.
“아무래도, 우리 쇼군께서 입지가 많이 위태로우신가 봅니다. 생각보다 더.”
촤아악!
일영은 검에 맺힌 핏물을 털어버리며, 놀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코마 키츠노를 자신의 뒤로 숨기곤 나름 태연하게 속삭였다.
“석궁 말고 단도를 드시지요. 여차해서 구경하던 놈들도 끼어들어 난전이 된다면, 차라리 그게 나을 테니까. 그리고 이제 제 등만 보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아, 알겠어요.”
달리 의견을 교환할 시간 따위 없다는 듯한 일영의 단호한 명령에 이코마 키츠노는 무어라 반박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머잖아 그녀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으니.
‘……너, 넓어.’
너무 등이 넓으면, 앞도 잘 안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