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하치스카 당(4)
* * *
“잠깐, 고로쿠라면.”
하치스카 고로쿠.
그녀의 이름을 들은 이코마 키츠노는 뒤늦게 무언가 생각이 난 것인지, 살짝 미간을 좁힌 채로 기억을 되짚다가 머지않아 아하는 표정으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하치스카, 하치스카……. 설마?”
당혹스러움과 충격이 뒤섞인 이코마 키츠노의 시선이 하치스카 고로쿠에게 닿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오랜만이네요. 키츠노.”
“무슨 관계입니까?”
이코마 키츠노와 하치스카 고로쿠.
접점 따위 없어 보이는 두 여인이 서로를 알아보는 듯한 묘한 기류가 흐르자 일영이 물었고, 그녀의 말에 대답한 것은 이코마 키츠노가 아닌 하치스카 고로쿠였다.
“특별한 건 아니에요. 그저 적당히 먼 친척 관계일 뿐.”
“그럼, 설마 우리를 해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아니요.”
하치스카 고로쿠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손속에 자비를 두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원칙이었어요. 괜한 오해는 하지 마시길.”
스윽.
일영은 고개를 돌려 이코마 키츠노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옳은 것인지를 확인했고, 그런 일영의 시선을 확인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코마 상단이 수집한 정보와 비교해도 크게 틀린 말이 없다는 뜻이리라.
다만, 그 안에 하치스카 당이 과거 교류했던 친척의 성이라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처음 듣는 순간부터 왜인지 입안에 맴도는 이름이기는 했지만, 설마 그 하치스카 가문이었다니. 대체 왜…….”
미묘한 분위기가 공터를 감싼다.
이코마 상단의 상인과 낭인들은 물론이고, 히라테 가문의 사무라이들 역시 갑작스럽게 꼬여버린 작금의 상황을 쉽사리 판단하지 못하고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
한편, 일영은 반쯤 우연히 인질로 잡아버린 하치스카 이토히메를 힐끔 내려보다가 계속 설명해보라는 듯이 어깨를 끄덕였다.
이코마 키츠노는 말했다.
“대단한 교류가 오갔던 집안은 아니에요. 특히 저는 한 번도 왕래한 적이 없기도 하고…….”
“윗세대부터 천천히 끊어지고 있던 교류였죠. 두 가문 모두 세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으니까요.”
덧붙이는 히치스카 고로쿠의 말에 이코마 키츠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사의 표명이리라.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둘이 친척 관계라는 것이 밝혀진 순간, 말은 하지 않았으나 내심 이코마 상단 측까지도 경계하던 이츠키와 아케치 미쓰히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난세가 시작되고 교류만 끊기면 그래도 나름 화목한 집안이다. 서로 가진 것을 빼앗기 위해 친척은 물론 부모자식 사이에서도 죽이는 게 작금의 현실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이 상황을 되돌릴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일영은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친척이 그쪽을 뒤늦게라도 알아봤으니 웃으면서 헤어지자는 건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
웃음과 함께 내뱉어진 한 마디였으나 분명 그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거기에 그가 내뿜고 있는 위압감 역시 분위기를 가라앉혔으니.
꿀꺽.
‘무, 무슨 분위기가.’
분명히 그의 옷에는 핏방울 하나 묻지 않았고, 입꼬리는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는 능글맞은 한량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가 풍기는 기도와 잠깐이나마 보였던 실력은 일영이 내뱉는 말의 무게를 가늠토록 만들었다.
“비살상을 견지했다고 하더라도 그쪽이 우리의 앞길을 막은 건 부정할 수 없지. 더욱이 내가 누군지 알아봤다면…….”
일영은 천천히 뽑은 검을 아래로 내렸고, 곧 이토히메의 목 바로 앞에 가볍게 놓으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하치스카 고로쿠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귀족으로 편히 살았네, 남들 고혈을 빨았네 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편히 살지는 않았다는 걸 알고는 있을 텐데 말입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뱉어지는 존대.
꿀꺽.
얼핏 보면 상대를 존중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그의 태도 변화에 이츠키와 아케치 미쓰히데를 비롯한 히라테 가문의 사무라이들은 침을 삼켰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존대를 하면서 검을 쥐고 있는 일영은 무언가 달라진다는 걸 말이다.
“하치스카 당. 오와리와 미노의 접경 지역을 지날 때를 노리는 걸 보면 아마 사이에 거처를 마련해 활동하는 듯싶고…….”
일영의 시선이 천천히 여 산적들을 훑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인 조각과 지금까지 적들이 알게 모르게 은연중 흘렸던 정보들을 조합하고 재조립하여 읊조린다.
“당을 이루는 여자들은 대부분 전쟁 중에 남편이나 가족을 잃은 여자들. 다만 비살상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데…….”
“그, 그걸 어떻게.”
어느새 공터는 정적에 흘렀다.
그가 말한 사실들을 어느 정도 단편으로 짐작한 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일영은마치 모든 정보를 듣고 요점만 정리라고 한 것처럼 빠르게 맥락만을 짚어 나열하고 있었다.
정보의 격차가 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그건,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모두 알게 모르게 인정하고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일영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전쟁이나 일삼으며 권력과 영토에 혈안이 되어 있는 위정자들과 자신을 선 긋기 위한 건지, 아니면 어디까지나 살아남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는 걸 강조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참 편하게들 사십니다. 그런다고 본질이 달라집니까?”
명백한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다.
위선을 꾸짖는 한편, 결국 너희도 무기를 쥔 순간부터 그리 다를 바가 없다는 신랄한 피판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여 산적들의 얼굴은 삽시간에 굳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뭘 안다고……!”
“이익!”
몇몇은 분을 참지 못하고 내뱉었고, 몇몇은 아예 당장이라도 그에게 뛰쳐나가기라도 하려는 듯이 다리를 떨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맞아요. 위선입니다.”
그녀들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하치스카 고로쿠는 그렇게 화답하곤 쓴웃음과 함께 덧붙였다.
“그러나 위선이라도 지키려고 노력하는 우리들이 그들보다 못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영토나 우습지도 않은 권력 떄문에 그 땅에서 잘 살고있는 농민들의 목을 잘라 효수하지도, 남편과 아들을 데려가 총알받이로 만들지도, 어미와 딸을 데려가 강간하고 유곽에 팔아넘기진 않았으니까요.”
말을 내뱉고 곱씹는다.
“거창하게 세상을 바꿀 생각도, 그렇다고 복수에 미쳐 길길이 날뛰다가 죽고 죽일 생각도 없어요.”
마치 흑요석과 같은 검 보라색을 띤 그녀의 동공에 맺힌 것은 거창한 신념이나 대의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뭉쳤고, 이 미친 현실에서도 사람으로 남아 있고 싶기에 이 자리에 서서 당신이 비웃은 위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뿐이니까요.”
“그렇습니까.”
그녀의 말이 끝난 직후, 일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담겨 있는 감정이 비웃음인지, 긍정인지, 그조차 아닌 허탈함인지는 그 누구도 쉬이 가늠할 수 없었다.
“…….”
“…….”
그렇게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하치스카 가문은 어떤 곳입니까?”
곧 일영이 물었다.
하지만, 그의 물음이 향한 곳은 다름이 아닌 이코마 키츠노였다.
“어……. 잘은 몰라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아버지의 세대에도 점차 교류가 끊어져가던 집안인지라. 다만, 기억이 나는 건 본디 오와리와 미노 사이를 오가며 저희와 마찬가지로 무역을 했다고 들었어요. 덕분에 초기 미노와 무역을 틀 때에도 적잖이 도움을 받았었다고…….”
더 이상 아는 것은 없었다.
때문에, 일영은 어디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하치스카 고로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는 인질로 잡혀 있는 하치스카 이토히메를 잠시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대답하지 않으면요?”
“글쎄요.”
스릉.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일영의 애병인 오니마루 쿠니츠나를 스치고 날카로운 울림을 터트렸다.
“하아.”
분명히 수적으로 우세다.
하지만, 질적으로도 밀리는 데다가 상대가 생각보다 거물이다. 거기에 동생까지 인질로 잡혀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 않았다.
“일단, 그 검부터 거둬주시죠.”
“그러면?”
“걱정 마세요.”
일영의 반문에 하치스카 고로쿠는 그녀를 보호하듯이 감싼 산적들의 어깨를 천천히 밀어냈고, 달빛이 닿지 않던 숲속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제가 대신 인질이 되어 대화를 나눌 테니까요.”
“직접 인질이 되시겠다……. 그 말을 들으면 저희가 먼저 습격한 줄 알겠습니다.”
“…….”
태연하게 말을 흘린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일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는, 이토히메의 목에 닿아 있던 검을 천천히 거두는 한편 자신을 흉흉한 눈으로 바라보는 주변의 여 산적들을 눈짓으로 가리켰지만, 하치스카 고로쿠는 고개를 저으며 화답하니.
“저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어야죠. 안 그러나요? 히라테 가문의 조선 도련님.”
“하, 하하…….”
그녀가 한 성깔을 한다는 걸 깨달은 일영은 피식 웃으며, 이토히메를 데리고 있던 이츠키와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