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하치스카 당(3)
* * *
한편, 시간을 조금 더 뒤로 돌려서.
“……세상에.”
히치스카 당이라는 이름 아래에 모여 있는 여 산적들은 눈앞의 광경에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과 몽환적인 감정이 뒤섞인다.
차아앙!
퍼억!
달빛이 공터를 은은하게 비춰 내리고, 그곳을 무대 삼아 비단 옷을 입은 일영이 춤춘다.
도깨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가진 그의 입가에 난 비스듬한 흉터,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그의 눈과 대비되는 정확한 손속과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아군들까지.
“아, 아아…….”
몇몇은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탄식을 내뱉으며 일영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참지 못한 이토히메는 마치 허락을 구하듯이 검보라색의 머리카락, 눈동자를 가진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니……!”
그녀의 부름에 그녀는 미간을 좁힌다.
그러나 고민은 찰나일 뿐.
일영에 대한 경계심이 절대 적지 않았던 그녀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고, 이토히메는 곧바로 숨을 한번 깊게 삼키곤 외쳤다.
“이익! 물러서! 이 이토히메가 상대하겠어!”
“아, 알겠습니다!”
그녀의 일갈에 일영을 둘러싸듯 상대하던 여 산적들은 언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냐는 듯이 빠르게 뒤로 물러선다.
“호.”
그 일사불란한 모습에 지켜보던 일영조차 나지막이 감탄할 정도로 말이다. 뭐랄까. 히치스카 당이라는 곳에서 그녀들이 가지는 권위가 어떤 것인지 살짝 엿본 느낌이라고나 할까.
“…….”
“……큼.”
당연하게도 여 산적들은 그들에게서 한발 물러나면서도 포위를 쉽사리 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딱 도망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을 포위하는 한편, 전투를 위한 공간 정도는 마련해두었다고 말하는 게 편할까.
“주군.”
“그래.”
때문에, 일영과 사무라이들 역시 자연스럽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채로 서서히 앞으로 걸어 나오는 여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일영의 갈색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가 여자를 눈에 담는다.
이 여자, 아니 이토히메는 알까.
조금 전 읊조린 이름으로 그가 다른 이의 정체 역시 깨달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흥!”
검보라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이토히메는 자신을 응시하는 그를 마주 노려보다가 이윽고 입술을 살짝 깨물며 손에 쥔 창을 한 바퀴 돌렸다.
부우웅!
날카롭고 서슬 퍼런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빙 돌린 창대와 날에서 일렁거린 바람이 당장이라도 일영의 뺨을 베어버릴 듯이 뻗어지는 동시에, 일영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이죽거렸다.
“심심하면 백성들 썰고 다니는 귀족 나으리들 아니랄까봐. 칼 쓰는 솜씨가 대단하신걸. 그런데 왜 우리는 베지 않으실까? 아, 고된 여정에 쓸 노리개가 필요하셔서? 뒤에 있는 계집들로는 성에 안 차는 모양이지?”
“허.”
그녀의 날이 선 비난과 이죽거림에 일영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미처 숨길 수조차……아니,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일 정도로 농도 짙은 귀족에 대한 혐오가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렇다고 일영이 무슨 대단한 동정심이나 관용을 가질 성격은 아닌지라.
“왜 나한테 지랄이실까.”
“뭐, 뭐라고?”
무심결 이런 말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 곱게 안 살았는데 말이지.”
원래 살던 세계에서도 그렇고,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더 그런데 말이지. 적어도 일영이 걸어온 길을 아는 사람이라면 쉽사리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을 테니, 아마 그들은 일영에 대해선 무지하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이 새끼가…….”
물론, 대충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녀의 말이 백성들의 입장에선 꽤 타당하게 들린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고 말이다.
다만, 거슬리는 말은 한 가지.
“자존감이 너무 높아. 미안한데, 그쪽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일영은 이젠 습관이 되어버린, 흉터가 생긴 홈을 살짝 손가락으로 긁으며 붉게 달아오른 이토히메를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보다 더 예쁜 아내와 애인이 있어서.”
물론, 이토히메 역시 어디가서 못나다는 말은커녕 미녀 소리를 들을 여자이긴 했으나 일영은 진심이었다.
‘노부나가와 요시나리에 비한다면, 뭐.’
다만, 딱히 좋은 선택지는 아닌 듯싶었다.
“더러운 쓰레기 주제에…….”
일영으로선 받은 말을 되돌려 준 것에 불과했으나 이미 그를 귀축 언저리로 인식한 이토히메의 입장에선 그저 쓰레기의 도발처럼 느껴질 뿐이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일영으로선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그가 애인을 읊조린 순간 아케치 미쓰히데와 이코마 키츠노의 묘한 시선이 문득 그의 뒤통수에 닿았다는 점도 그녀의 오해에 확신을 더했다.
“언니 때문에 죽이진 못해도, 적어도 팔 한쪽은 받아내 주마.”
“죽이진 못하고 팔 한쪽이라.”
점점 그들이 일반적인 산적은 아니라는 확신을 얻게 될 때마다 그녀들에 대한 흥미가 점차 늘어가는 걸 느끼는 일영이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아마, 두령인지 당주인지 하는 저 여자는 ‘그녀’이리라.
“하치스카 당이라. 일반적인 산적들은 아닌 것 같은데?”
“눈깔 없어? 넌 우리가 일반적인 산적으로 보이냐?”
가볍게 떠본 말에 역시나 돌아오는 건 걸쭉한 한 마디. 바로 그때, 일영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곁에 선 이츠키가 중얼거렸다.
“이야. 도련님 앞에서 저렇게 이야기하는 하는 놈들 오랜만에 보네.”
“그러게 말입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대체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듣고 있던 아케치 미쓰히데가 첨언하자 그들의 뒤에 서 있던 사무라이들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때문에, 정작 일영은 가만히 있었거늘 인내심이 한계까지 치달은 그녀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고.
“귀족의 등에 숨어서 백성의 고혈이나 빨아먹는 버러지 같은 놈들이……!”
문답무용(??無?)!
그렇게 외치는 것만 같은 환청과 함께 그녀는 몸을 앞으로 내던지며 일영을 향해 긴 창을 내뻗는다.
그와 동시에, 이츠키와 아케치 미쓰히데 역시 반응하려 했으나 그들보다 일영이 더욱 빨랐다.
스릉.
이제까지 검집 안에 넣어져 있건 오니마루 쿠니츠나를 뽑는다. 그의 어깨를 노리고 뻗어진 창의 날카로운 날을 발도(??)하는 순간 쳐내버리곤 단번에 그녀의 목을 향해 검을 뻗는다.
“크윽!”
일영의 실력이 상상 그 이상이었던 탓일까.
이토히메는 찰나의 순간 당혹감과 두려움이 담긴 목소리를 흘리며 뒤로 물러섰고, 그 순간 뒤에 서 있던 그녀의 언니하치스카 당의 두령이 외쳤다.
“이토히메!”
“아직은 괜찮아……!”
이미 접근을 허락한 순간 창은 불리하다.
그것을 인지했는지 이토히메는 망설임 없이 창을 쥔 손을 놓았고, 곧바로 허리에서 검을 뽑아 일영의 어깨를 향해 찔렀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흠.”
일영은 곧바로 손에 쥔 검을 놓았다.
그러곤, 그는 검을 뻗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속삭였다.
“검술을 배운 적이 없나. 너무 어설픈데.”
“뭐, 뭐라고?”
대답은 주먹으로 대신한다.
퍼어억!
“끄윽!”
턱 아래를 치고 올려 혀를 씹기라도 한 것일까? 일반적인 고통보다 더 깊은 곳에서 신음이 울려 퍼졌으나 그녀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이 해끼까(이 새끼가)!”
오히려 품 안에 파고든 일영의 목을 끌어안고, 곧바로 무릎을 치켜 올려 그의 복부를 강타한다.
퍼억!
낡은 갑주를 입기라도 한 그녀와 달리, 일영의 복부에는 갑주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이 있을 뿐이다. 반면, 그녀는 무릎에도 단단한 각반이 묶여 있었다.
‘멀쩡할 리가!’
턱이 얼얼하긴 했으나, 이걸 버틸 리가 없으니 어찌 되었든 제압에는 성공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토히메가 쾌거에 찬 웃음을 흘린 바로 그때였다.
“그거 아시나. 산적 아가씨.”
“무, 무슨?”
“배에 칼 찔려보면, 이 정도는 참을 만 하더라고.”
분명히 쓰러졌어야 할 일영이 너무나 태연한 얼굴로 그녀에게 그렇게 속삭이고, 미처 반응하려던 찰나.
“컥!”
명치에 주먹을 박아 넣어, 그녀는 입에서 고통 섞인 신음과 함께 추욱 늘어졌다.
당연하게도, 내심 그녀가 쉽게 밀리지 않으리란 생각을 하고 있던 하치스카 당의 일원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고.
스륵.
힘을 잃고 기절한 이토히메를 이츠키와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넘긴 일영은 시선을 돌려, 초조한 듯이 입술을 잘근 깨물고 있는 검보라색의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으니.
“그래서, 이토히메는 딸입니까? 여동생입니까?”
그의 얼굴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듯한 호기심과 더불어 묘한 흥분이 스쳤다.
“하치스카 고로쿠.”
당연한 일이다.
왜냐면, 그녀는 다름이 아니라.
‘본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어야할, 쓸만한 보좌관 중 한 명.’
어떻게든 잡아야 할 인재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일영의 물음에 일순간 정적이 흐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동생입니다. 이토히메는.”
하치스카 고로쿠는 그렇게 답하는 한편, 자신을 알아본 일영에게 마주 답했으니.
“이제야 확신할 수 있겠네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와리의 야차(??の??). 히라테 히카게.”
그녀의 목소리엔 잘못 걸렸다는 듯한 감정이 아주 가득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