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여자는 죽이고 남자는 겁탈해라
* * *
「이마가와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의 대립이 격렬해지는 중으로 추정.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는 이름을 이에야스로 개명 후…….」
“흠.”
덜컹거리는 마차 안.
일영은 편지에 적혀있는 닌자들의 정보를 천천히 곱씹으며 입에 문 이쑤시개를 잘근 씹었다. 전장에서와 달리 정갈한 의복을 입었음에도 어딘가 한량의 기운이 느껴지는 그 모습은 흡사 망나니, 내지는 방탕한 귀족의 행차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
“이랴!”
물론, 주변에서 마차를 끌고 호위하는 이들의 시선에 그런 감정은 아주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그가 타고 있는 마차는 다름이 아닌 이코마 상단의 것이었고, 상단의 호위들과 함께 히라테 가문의 호위무사들 역시 동행 중이었으니까 말이다.
“살판 나셨습니다.”
“꼬우면 도련님 하든가.”
“……예예.”
일영은 곁에서 말을 타고 보폭을 맞추는 이츠키의 말을 웃음 섞인 농지거리로 흘려버리곤 읽고 있던 서신을 접어 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코마 상단 측 낭인들은 눈을 빛낼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이.’
‘생각보다 더 젊은데.’
가끔 적의나 의구심과 같은 의심의 눈초리가 섞이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호의나 호기심으로 가득한 시선들이었다. 사실, 이코마 상단이 교토까지 함께한다는 순간부터 정해진 수순이다.
‘결정이 빨라.’
일영은 힐끔 시선을 돌려, 상단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일행들을 이끌고 있는 이코마 키츠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코마 상단이 오다 가문의 대리인이나 다름이 없는 일영과 함께 교토로 상경한다는 것, 그것은 곧 그녀가 오다 가문에 배팅할 마음을 먹었다는 의사 표현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일전에 나눈 대화가 있긴 하다.
일영은 이마가와 가문이 침공할 것을 예견했고, 패배를 점친 그녀와 달리 오다 가문은 성공적이다 못해 일대의 판도를 바꿀 정도로 대승을 거뒀고 말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결과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미래가 있다고 해도, 가진 것이 적지 않은 시점에서 과감히 배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상인으로서 오다 가문이 아주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리라 판단한 것이리라.
“후회하진 않게 해줘야겠지.”
“예?”
“아니야.”
일영은 무심결 흘러나온 혼잣말에 대답하는 이츠키의 반문에 가볍게 고개를 저어 화답하고는 손가락으로 마차의 끝자락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곤, 조금 전 읽었던 서류의 내용을 곱씹기 시작했다.
‘마츠다이라와 이마가와 가문의 대립.’
여기까지는 역사와 같다.
사실, 오다 가문이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승리하는 순간부터 이미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오히려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일영은 당장이라도 교토행을 멈추고 모든 상황을 파악하러 오와리로 돌아갔으리라.
‘기요스 동맹에 대한 일이 흘러갔을 거고.’
이마가와 가문이 아무리 흔들린다고 해도 가문의 저력 자체는 멀쩡한 편이었고, 또 미카와 전역에 심어 놓은 기반 역시 어느 정도는 온존하리라. 더욱이 마츠다이라 측에선 부정하겠지만 이미 이마가와 가문의 입장에선 마츠다이라와 미카와는 절대 놓아줄 수 없는 텃밭과도 같은 영토였다. 상락(수도 진출)을 위해서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겠지.
‘다만, 직접 나서기엔 부담이 커.’
이마가와 가문은 무려 3개 지역을 손에 넣은 대 다이묘다. 즉,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오와리를 쳤던 군사를 다시 일으킬 정도의 여력은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정도라면 이제 막 가문의 통제력을 부활시켜 미카와를 통일하려는 마츠다이라 가문쯤은 단번에 짓밟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호조 가문과 다케다 가문. 그리고 오다 가문까지.
비록 삼국동맹으로 일시적인 평화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고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일영의 손에 목이 베인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도카이 제일의 무사((??一の??り)가 죽었다.
호조 가문과 다케다 가문이 바로 뒤에서 이마가와 가문의 영토를 바라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고, 오다 가문 역시 마츠다이라 가문과 손을 잡으며 그들이 움직이기를 기대하며 힘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면초가(四???).
이마가와 가문은 호조와 다케다, 오다 가문이 신경이 쓰여서라도 직접 움직일 수 없다.
코앞에서 마츠다이라 가문이 이마가와 요시모토에서 따온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이름을 버리고 ‘이에’야스로 바꾼 후, 이마가와 가문과 관련된 모든 연결점을 스스로 끊어내고 있는 지금도 말이다.
조금이라도 직접 손을 쓰려는 정황이 각 가문의 닌자들의 눈에 포착되는 순간, 이마가와 가문이 사방에서 밀려오는 깃발 앞에 짓밟히리라는 건 세 살배기 바보조차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일영은 슬슬 산 너머로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살짝 홈이 생긴 것 같아 자꾸만 긁게 되는 턱의 흉터를 손가락으로 긁으며 중얼거렸다.
“……담배나 구해볼까.”
처음 이 세계로 떨어졌을 땐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에 바빴는데, 이제 좀 살만해지니 흡연자였던 정신이 자꾸만 니코틴의 도움을 갈구했다. 일영은 교토로 올라가면 한번 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곱씹으며 조금 전 끊긴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이마가와 가문이 내놓을 수 있는 수는 하나 뿐.’
그가 나열한 대로 현재 이마가와 가문의 상황은 그야말로 개판이다. 그렇다면 놈들이 내놓을 수 있는 수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바로, 자신들에게 우호적이며 상대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세력을 뒤에서 움직여 이득을 보는 방법이다. 그리고 때마침 미카와에 이마가와 가문의 구미에 썩 맞는 세력이 있지 않은가.
‘일향종(一??).’
일본 불교의 한 종파로서 이마가와 가문이 미카와를 실질적 지배할 당시 세금 면제와 더불어 자치권을 보장받은 수혜 세력이었으나…….
‘군비가 급한 마츠다이라가 퍽이나 사정을 봐줄 리가.’
더욱이 이마가와 가문과 친했던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을 테니 당연히 미뤄두었던 세금 역시 붙일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일향종의 승려와 신도들은 반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마가와 가문이 살짝 등을 떠밀기라도 한다면?
‘잇키(いっき)는 한순간이지.’
잇키그러니까 민중 봉기까지 이어지는 건 한순간이다. 당연하게 한창 세력권을 안정시키는 중인 마츠다이라 쪽에선 달갑지 않은 것을 넘어서 악몽에 가까운 일이 되리라. 너무 비약이 아닌가라고 되묻기에는 원 역사에서도 그대로 일어난 일이다.
‘그 일로 미카와는 자멸 직전까지 가고.’
물론, 이에야스는 꽤나 힘겹지만 나름 잘 수습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한동안 미카와 내외부가 혼란스러우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너무 개판만 안쳤으면 좋겠는데. 끄응…….”
일영은 슬슬 멈추는 마차와 어느새 남색에 가깝게 변해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차에서 몸을 내렸다.
마음 같아선 교토에 다녀온 사이에 미카와 측에서 잘 수습해서 오다 가문이 곧바로 미노로 진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마 한두 달 정도로는 수습이 쉽지 않을 테니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되리라. 때문에, 잠깐아주 잠깐 지금이라도 마츠다이라 측에 잇키에 대한 가능성을 전해줄까 고민하기도 했으나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슬슬 길을 한번 들여야지.’
이미 오케하자마에서 그새 잔머리를 굴린 이에야스가 당황하는 모습은 한번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쉽사리 그녀의 앞날에 대해 도움을 주었다가 원 역사의 충성스러운 도쿠가와 가문이 달라지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결국, 방관하되 대비하는 것이 최선이리라.
‘그럼 결국 남은 건 하나인데…….’
저벅.
“이건 어디다 놓을까요?”
“구석에 잠깐 놓고, 장작부터 좀 구해오세요.”
“예. 총단주님.”
일영은 마차에서 내려 빠르게 야영을 준비하는 이코마 키츠노와 이코마 상단의 상인들을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만, 여러 가지 생각이 얽히고설켜 쉽사리 정리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 짜증이 나긴 했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크, 큰일났습! 커헉!”
공터 주변의 숲으로 장작을 주우러 들어갔던 낭인이 다급히 숲에서 빠져나오며 비명을 질렀고, 곧 모두의 시선이 돌아가기 무섭게 바로 뒤에서 날아온 조악한 화살이 낭인의 어깨에 박힌 것이다.
“끄윽!”
다행히 치명상은 아닌 듯 낭인은 비명을 삼키며 바닥을 굴렀고, 이코마 키츠노와 일영은 거의 동시에 일갈했다.
“전투를 준비하세요!”
“전투태세!”
채앵!
차아앙!
상단의 낭인들, 히라테 가문의 사무라이들 구분할 것 없이 대략 30명 정도 되는 사무라이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고, 이코마 키츠노와 상인들은 카타나 대신 제각기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는 단검이나 석궁을 꺼내 숲을 응시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여자는 죽이고 남자는 겁탈해라!”
“이런 미친…….”
귓가로 스며들어오는 어딘가 비틀어진 외침에 일영은 허리춤에 멘 오니마루 쿠니츠나를 뽑으며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