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었다-148화 (148/171)

〈 148화 〉 집안 정리(2)

* * *

일영이 합류하고 나자 쌓여있는 죽간은 빠르게 줄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절대로 보고 검토해야 하는 양이 적다는 등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오와리에 밀린 행정 업무가 얼마나 되는지는 셋의 바로 아래층에서 함께 갈려 나가고 있는 문관들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차라리, 죽여.”

“사, 삼 일째 집에 못 갔어.”

오죽 인력이 없으면 글을 배운 사무라이들까지 합류해서 잡무를 돕고 있겠는가. 그만큼 오와리의 행정은 마비 직전이었고, 그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노부나가였기에 내심 눈앞의 두 남녀의 모습에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속도가.’

글이 적힌 죽간을 들고 빠르게 훑고, 탁자 위에 놓인 종이에 서명하고, 때때로 잘못 올라온 것들을 분류한다.

탁.

“니와 공. 이 부분은…….”

“확실히 의문스럽네요. 내일 곧바로 사람을 보내 확인해봐야겠어요.”

그뿐만이 아니다.

과거에 올라온 것들과 비교한 후 어색한 부분을 확인하고, 때때로 비리의 증거를 잡아 살생부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군더더기 없는 일 처리를 멍하니 지켜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다 노부나가도 절대 일을 게을리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라고 이 일이 꼭 필요해 도망칠 수 없음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다만, 현실은 때때로 잔인했다.

‘차라리 적들을 죽이고 말지.’

목을 베는 건 쉬워도 먹물로 점철된 죽간과 종이를 오가며 머리가 아픈 건 그녀의 적성과는 맞닿아 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행정이란 단지 글을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그림을 볼 줄 알고 셈법에 능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일영을 불렀다. 물론 대단한 기대를 했다기보다는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감정 반, 보고 싶다는 감정 반의 행동이었지만 말이다.

그래, 분명히 그랬을 텐데.

‘……무인이라고 하지 않았나?’

노부나가는 눈을 비볐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비고 깜빡여봐도 둘은 여전히 어떤 거리낌도 없이 서류를 빠르게 처리하고 있었다.

어떻게? 라는 의문이 가득찬다.

둘이 보고 있는 행정 업무는 지금도 아래층에서 갈려 나가고 있는 이들이 검토 후 당주의 허가 내지는 판단이 필요한 의제만 간추려 올린 것들이다. 즉, 단순 서명으로는 답이 없고 머리를 써야 하는 일들이라는 뜻이다.

‘설마 대충하진 않았을 텐데.’

둘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녀였기에 가능한 확신이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다 읽고 검토를 하고 있다는 말인데…….

‘가능한가?’

니와 나가히데는 그럴 수 있다.

비록 그녀도 일신의 무력을 갈고 닦기는 했지만, 오케하자마 같은 명운을 건 전투가 아니면 전장에 서지도 않을 만큼 문관으로서의 면모가 강하니까 말이다.

헌데, 일영은 아니지 않은가.

“그.”

때문에, 그녀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어 물으려 했다.

탁!

때마침, 일영이 다다미 위로 내려놓는 죽간의 찰진 소리에 끊기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얼떨결에 말을 멈추게 되어버린 그녀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이윽고 니와 나가히데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입을 뻐끔거렸지만.

“니…….”

탁!

마찬가지로 죽간을 내려놓는 그녀를 바라보며 노부나가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녀도 바보가 아니다.

‘그래, 닥칠게. 이년 놈들아.’

마음 같아선 당장 탁자를 엎고 싶었지만, 둘의 업무가 빨리 끝나야 자신도 자유라는 걸 깨달은 그녀는 조심히 쥐고 있던 붓을 내려놓곤 한쪽 구석에 밀어놨던 술병을 쥐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

일영은 그녀의 손에 붓 대신 쥐어진 술병을 바라보며 눈을 게슴츠레 떴고, 노부나가는 생각했다.

……아, 진짜 한 잔만 마신다고.

*

“후.”

“이 정도면 끝난 것 같네요.”

일영이 마지막으로 죽간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자 마찬가지로 지친 표정을 하고 있던 니와 나가히데가 말했다.

점심이 조금 안 되어 시작된 서류 작업은 자정이 다 되어 끝이 났고, 둘은 찌뿌드드한 몸을 가볍게 풀며 고개를 저었다.

“개판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일영의 말에 니와 나가히데는 쓰게 웃었다.

직접 서류를 검토한 둘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간 오와리의 많은 부분이 썩어있었고 결정적으로 세수 확보가 엉망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태반은 이번 이마가와의 침공을 틈타 잘라낸 구태들의 영토였다. 그들이 죽고 나서야 문제점들이 이곳까지 올라올 수 있던 것이다.

“쩝.”

그러나 그들이 탓할 것은 노부나가가 아니었다. 이제 당주에 오른지 몇 년이나 되었다고 그녀의 탓이겠는가.

‘노부히데 탓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그녀의 아버지이자 전대 당주인 오다 노부히데의 탓이었다. 그가 이룬 치적은 분명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었으나 그가 말미에 애첩에 빠져 내정을 소홀히 했다는 건 그리 큰 비밀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한들 노부나가의 정통성을 지탱하는 한 축이었기에 둘이 구태여 입에 담지 않는 것이었다.

때문에, 일영은 니와 나가히데의 쓴웃음에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새 냉차가 되어버린 찻물을 한 모금 머금고는 노부나가를 부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음냐.”

“응?”

어느새 술에 취해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탁자 위에 턱을 괴고 늘어져 자고있는 그녀의 모습을 말이다.

“후훗.”

일영보다 한발 늦게 그 모습을 본 니와 나가히데는 옅게 웃음을 흘렸고, 일영도 내심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둘이라고 그녀가 이런 일하고 연이 없다는 걸 모르겠는가? 그들로선 조용히 해달라고 혼자 술을 홀짝이며 쭈글거린 그녀가 내심 귀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도망치려고 하니까 총을 쏴서 막을 땐 언제고, 일영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고 일어나며 말했다.

“조금 주무시게 두지요.”

“그래야겠어요. 후후.”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한쪽 구석에 쌓인 죽간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물론, 이미 누가 업어가더라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이 들어있는 노부나가였으나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머리 위와 옆방에 닌자들이 그득할 텐데 무슨 걱정이란 말인가.

때문에, 그들은 죽간을 아래에서 갈려 나가고 있던 문관들에게 전달하고는 곧바로 천수각을 나섰다.

딱히 의미가 있어서 그랬다기보다는 둘 다 내심 갑갑함을 참지 못했기에 뜻이 맞은 것이었다. 둘은 사무라이와 문관들의 인사를 받아넘기며 조금 인적이 드문 곳으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끙.”

“하아.”

거의 동시에 울린 목소리에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고,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결린 어깨와 목을 풀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이윽고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니와 나가히데가 말했다.

“교토로 가신다면서요?”

“아. 예.”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와리의 내부 분쟁이 끝났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적임자가 일영인 것 역시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히라테 공(?)께서는 교토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분이니까요. 그분의 양자라면 교토의 콧대 높은 얼간이들도 함부로 하지는 못하겠지요.”

일영이 다름이 아닌 히라테 마사히데의 양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교토의 귀족들을 콧대 높은 얼간이라고 읊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글쎄요.”

일영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내심 불안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조선인이라서 무시당하지 않을까. 그건 조금 걱정입니다만.”

“무시는 당할거에요.”

“예?”

허나 니와 나가히데는 일영의 걱정이 담긴 말을 부정하지 않았고,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일영은 조금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얼굴이 눈에 담긴다.

특유의 남색 빛을 띄는 장발과 눈동자.

가녀려 보이는 흰 피부와 이목구비.

거기에 살짝 내려간 눈매까지.

좋게 말하면 묘한 인상의 미녀였고, 나쁘게 말하면 속을 알 수 없는 능구렁이 같은 모습이었다.

“으음.”

한편, 그녀는 일영이 고개를 돌리자 턱과 뺨에 그어진 상처를 잠시 응시하다가 곧 입을 열었다.

“하지만, 교토의 귀족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약해요. 그건 명성이 될 수도, 특이한 출신이 될 수도 있겠지만…….”

찰나의 순간 동요가 스쳤던 그녀의 남색 눈동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의 능글맞은 기색을 띠었고.

스윽.

곧 그녀는 일영의 턱 아래에 살짝 묻어있는 먹물을 살짝 닦아내며 속삭였다.

“빼어난 미모가 될 수도 있겠죠?”

한없이 흘리는 듯한 말이었으나 일영은 그 이면에 담긴 그녀의 의도를 깨닫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경고입니까?”

“노파심이죠.”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그에게 다가가 속삭인다.

“교토의 귀족들은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우며, 우둔해요. 그들에게 당신은 꽤나 매력적인 수집품일거에요. 잡아다가 보석함에 넣고 싶을 만큼.”

그리고 그건, 쇼군 역시 다르지 않겠죠.

그녀는 뒷말을 삼켰지만, 일영이 그것을 알아듣지 못할 리는 없었다. 때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참고하죠.”

“감사해요.”

그녀는 웃었다.

내심, 일영이 자신의 충고를 새겨주어서 고맙다는 듯이 말이다.

“흠.”

그때였다.

그녀의 시선이 천수각의 상층에서 일렁거리는 무언가를 바라보았고, 곧 그녀는 일영에게 다가갔던 걸음을 살포시 뒤로 물리며 덧붙이니.

“올라가서 해명을 좀 해야 할거에요. 누군가 보시기에 오해할만한 행동이었을지도?”

“……이런.”

일영은 너털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용서를 받기 위해선 밤새 힘을 좀 써야 할 듯싶었기에.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