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어떤 새끼든, 뒤졌다
* * *
오와리를 둘러싼 세력도가 크게 흔들렸다.
오케하자마 전투의 결과를 전해 들은 다이묘들은 제각기 다른 시선으로 지도를 바라보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경악과 당혹감은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패했다고?’
이마가와 가문이 아닌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패배라 부르는 것이 옳다.
당연한 일이다.
이마가와 가문에는 아직 여력이 충분하다.
비록 미카와에 대한 지배력을 빠르게 잃고 있었다고 한들 그것은 결국 찰나에 불과하고, 후계에 오른 이가 빠르게 정국을 장악하고 압박을 가한다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
닌자들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장막에 스스로를 감춘 한 다이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후계자가 여력이 있다면, 말이지.”
장막 아래로 비추는 웃음은 뭐랄까.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호랑이의 그것이었다.
*
“흐음.”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밤.
히라테 히카게. 아니, 일영은 정갈하게 옷을 갖춰 입은 채 다다미에 앉아 묵묵히 서류를 넘겼다.
사락.
처음엔 그저 낯설었던 먹물 향이 그윽하게 밀려오는 종이도 이젠 그저 읽고, 분류해야 할 서류에 불과했다.
일영의 앞으로 올라오는 서류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히라테 가(家)의 후계자로서 보아야 할 가문의 일에 대한 서류들이었다.
‘오히려 이쪽은 편하지.’
히라테 가문의 권위는 히라테 마사히데라는 충신이자 권신에게서 나오지만, 그를 지지해주는 자금원인 봉토 역시 규모가 작지는 않았다.
‘어림잡아 15,000석을 좀 넘는 수준인가.’
1만 5천 석(?).
달리 말하자면 고쿠다카(?高).
절대적인 봉토로 본다면 적지는 않지만, 히라테 마사히데라는 하타모토(중신)의 봉토치고는 적은 편에 속했다.
‘200석(?)당 5명씩 징발되니까. 우리 가문에서 합법적으로 징발할 수 있는 군세는 기껏 해봐야 약 400명이지.’
물론, 어디까지나 합법이다. 합법. 난세인데 그걸 지키는 다이묘도, 하타모토도 어디에 있겠는가? 당장 일전의 전투에서 히라테 가문이 기용한 병력만 그 4배를 넘는 1,600명을 웃돌았다.
“한동안은 대규모 운용은 어렵겠어. 농사철도 겹치니…….”
어차피 자세한 계산이나 관리는 봉토에 있는 관리직들이 전부 할 테니, 일영이 할 일은 서류를 검토하고 그것을 정리해 히라테 마사히데에게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그래, 일종의 후계자 수업인 것이다.
“후. 끝.”
탁.
일영은 가볍게 첫 번째 관련된 서류들을 정리하고 두 번째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번엔 그도 조금은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흠.”
두 번째 서류들은 일영도, 히라테 가의 후계자에게도 아닌 사무라이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인 히라테 히카게의 앞으로 온 것이었다.
서류들의 수는 꽤나 많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일전의 서류들보다 배 이상은 중요한 것들이었다.
‘시급한 것은 군사들의 질적 상승.’
일영은 서류에 담긴, 현 오다 가문의 군세의 현황을 속속들이 파악한 자료들을 빠르게 읽어나가며 생각했다.
‘오다 가문은 졸전을 치뤘어.’
냉정하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근 몇 년 사이 오다 가문은 꽤 많은 전투를 치뤘으나 그중 태반은 내부적인 집안 싸움, 내지는 권력을 위한 암투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오와리라는 작은 지역이 아닌 다이묘들이 서로 치열하게 다투는 전국으로 끌려 나온 순간, 오다 가문은 그 자신들이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자학적인 것 아니냐고?
글쎄.
「사상자 2,300명…….」
동원한 군세의 3분의 1이 사상자가 된 군대가, 그것도 승기를 잡아 나름 수월하게 적들을 물리친 군세가 이 정도 피해를 입었다면 그건 좋게 말해도 졸전이고, 나쁘게 말하면 개판인 거다.
새삼, 그 자신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승리를 얻었는지를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꽁짜는 아니었지만.
“큼.”
그는 무심결 입가에 길게 난, 살짝 움푹 팬 상처를 가볍게 쓸며 생각했다.
점점 상처에서 흉터로 변하던 지난 몇 달 사이에 그가 낮밤으로 얼마나 혼이 났던가. 물론, 밤에는 일영이 대부분 이겼지만 말이다.
“끙. 여하튼.”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다시금 현실 감각을 되찾은 일영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가볍게 쓸며 읊조렸다.
“조총만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
지난 시간, 일영이 전국시대를 살아가며 느낀 점이 있다면 조총은 생각보다 완벽한 무기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장단점이 확실한 무기라고 말해야겠지.
‘생각보다 살상률이 높지 않아.’
3열로 총탄을 쏜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이미 효용이 있었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된 갑주를 입고 내달려 오는 사무라이들에게 통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애초에 화약의 질과 총탄의 질 역시 현대의 그것과는 비교가 불가능하기에 갑주를 관통할 수도 없었고 말이다.
다만, 맞출 수만 있다면 저지력은 물론 납탄이 육신을 파고들며 장기적으로 전투력을 저하시키는 역할은 톡톡히 해주지만 말이다.
‘거기에 비까지 오면…….’
톡, 토독.
일영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심했다. 불을 붙여서 쏴야 하는 원시적 총기로는 비가 올 때 조총수들이 무력화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총수들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
“답은 개량인가.”
조총을 들여와서 뜯어고치든, 아니면 아예 작은 조병창을 만들어 찍어내든 추후 총병의 양산은 불가피한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보완할 것은 3개다.
‘중앙집권은 지금으로선 불가능하고, 노부나가에게 충성을 바치는 하타모토들 휘하 군세를 질적으로 향상시킨다. 일단 아시가루들을 준 사무라이화 시키는 것부터 시작하고…….’
일전 노부나가가 걸었던 길을 복기하는 한편, 그 나름의 지식을 곁들여 일영은 종이에 빠르게 해답을 적어 내려갔다.
때때로 생각한 것보다 좋은 방법이 나타나 지우기도 하고, 아예 찢어버리기도 하는 등의 고된 시간을 거친다.
“저, 도련님. 아가씨께서…….”
“앞에 두고 가.”
“예. 알겠습니다.”
그가 업무에 시달린다는 걸 안 우에몬이 시종을 시켜 야참을 전해 주었지만, 일영은 단지 앞에 두라는 말만을 되돌려주며 묵묵히 글을 쓸 뿐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하늘 높이 떠올랐던 달이 다시금 저물고, 어느새 다시 해가 떠오를 때까지 일영은 묵묵히 글씨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신(?) 오다군 개편안」
타악.
“하아. 드디어 끝났네.”
일영은 지끈거리는 머리와 침침한 눈, 찢어질 듯 아려오는 허리의 통증에 몸서리를 치며 붓을 내려놓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때.
“밤을 꼬박 세셨네요. 오라버니.”
“응?”
일영은 그제야 문 바로 앞에, 정갈하게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히라테 우에몬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어?”
“별로 안 됐어요.”
특유의 검은 똑 단발에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말대로 한치의 허술함도 없었기에 일영은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두 시진 즈음.”
“두, 두 시진?”
그래. 그녀가 내뱉은 두 시진이라는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두 시진은 곧 4시간이라는 뜻이니까, 우에몬은 새벽부터 밥도 거른 채 서류를 적어대는 일영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다.
때문에, 일영은 지끈거리는 허리를 펼치며 당황스러운 눈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구태여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의문은 곧 열린 우에몬의 답이 해소해주었다.
“농담이에요. 조금 전 붓을 놓을 때 들어왔어요.”
“아. 그래?”
그럼 그렇지.
아무리 일에 몰두했다고 한들, 눈앞에 사람을 두고 4시간 동안이나 알아보지 못하는 건 착각이나 둔한게 아니라 그냥 멍청한 거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잠깐이나마 속았던 건, 우에몬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정갈함과 어른스러움에 일영이 넘어간 탓이리라.
“끄응, 그래서 왜 왔니?”
일영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허리를 뒤틀었다. 뿌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굳어있던 뼈와 근육이 시원하게 풀리고, 일영은 여전히 앉아 자신을 올려보는 의붓여동생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고보니.’
다만, 오랜만에 집에 앉아 급한 걸 모두 끝낸 일영의 시선에 담긴 히라테 우에몬의 외양은 그가 기억하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컸네?”
“네?”
“어, 아니야.”
무심결 입으로 내뱉을 정도로 히라테 우에몬의 외양은 꽤나 많이 자라 있었다. 일영이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에는 정말 풋풋한 소녀에 가까웠다면 이젠 청소년이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느낌이 달라진 것이었다.
때문에, 무심결 가슴이 뭉클했다.
‘이래서 딸 키우나?’
의붓여동생이라지만 여동생이 쑥쑥 크는 모습은 오빠로서 꽤 기꺼운 것이었다. 그런 일영의 시선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는 우에몬의 얼굴을 본 일영은 새삼 다짐했다.
‘어떤 새끼든 눈물만 흘리게 해 봐라. 그 순간 오다 가문의 이름으로 찢어 죽인다.’
매부(??)로 올 놈이 어떤 새끼든, 일단 뒤졌다고 말이다.
“……저.”
“응?”
하지만 그런 팔불출 같은 망상도 잠시.
우에몬의 부름에 일영은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고, 우에몬 역시 무심결 일영의 뺨과 입술 사이에 그어진 흉터를 바라보다가 곧 입을 열어 본론을 꺼냈으니.
“아버지가 찾으세요. 오라버니.”
그게 바로, 그녀가 아침부터 일영을 찾아온 이유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