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저무는 것과 떠오르는 것
* * *
이마가와 군세의 퇴각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마츠다이라에게 전해졌고, 그들은 갑작스럽다는 말도 모자라게 돌아가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어쩔 줄도 모른 채 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마츠다이라 가문이 과거 얼마나 융성했든 작금의 시대에는 그저 이마가와 가문의 비호 아래에 미카와를 다스리는 가신 가문일 뿐이었다. 물론, 당주인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를 비롯해 아직까지 속으로 고개를 숙이지 않은 이들이 그런 평가를 들었다면 조소를 머금었겠으나 그것이 현실임을 부정하진 못하리라.
“지, 지금 당장 군을 물려야 합니다!”
“아직 본대의 피해가 어떤지는 듣지 못했지 않소이까! 섣불리 군을 물렸다가 이마가와의 당주님께 문책을 당할지도 모르오!”
“그럼 어쩌자는 말입니까!”
“이익! 어딜 언성을 높여!”
“그럼 당신이 우리의 몫까지 대신 할복이라도 당해주겠소?!”
때문에, 친(?) 이마가와를 표방하던 이들의 내분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본디 이마가와 가문에 충성을 바쳤던 이들이든 마츠다이라의 깃발을 버리고 굴종했던 이들이든 혼란한 정국을 모두 파악하기 전까지 섣부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들의 입장은 언뜻 혼란스럽지만, 그 이면에 담긴 행동 원리는 모두 동일했다.
‘본대가 패퇴 되었다면 지금의 공세를 유지하기에 부담이 너무 크다. 하지만, 만약 그 피해가 경미하여 금방 수습한 채 돌아온다면 그 문책은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물론, 이럴 때 마츠다이라 가(家)의 당주를 면피용으로 사용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지만 문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그녀를 꽤나 아낀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자신의 스승인 다이겐 셋사이를 붙여 교육해 주었겠는가? 그들이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를 어느 정도 모욕하는 것까지는 길들이기의 일환으로 참아도 내쳐야 한다면 그녀가 아닌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가신들임은 명확했다.
‘제발, 아무나 좀 나서라!’
‘내가 미쳤다고 독박을 쓸까? 차라리 죽고 말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명령으로 마츠다이라 안에 기생하던 그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안위가 제일 중요하던 이들이었고, 그런 이들이 자칫 독주가 될지 모르는 잔을 쥘 일은 근본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후 벌어질 일은 어떤 이변도 없이 그들의 목을 옥죄었고 말이다.
콰앙!
“무, 무슨?”
“끄아아악!”
친(?) 이마가와를 표방하던 가신과 중신, 하타모토들이 모여있는 방 안으로 일련의 사무라이들과 더불어 닌자들까지 들이닥쳤다.
그것을 막아내려는 사무라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작정하고 밀려오는 군세를 한 줌 호위들로 막아서기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네놈드을!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이미 전각은 포위당했고,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게 밖에 서 있던 사무라이들은 밀려오는 압도적인 군세에 투항하거나 전사했다. 때문에, 그들은 방 안까지 밀리고 밀린 소수의 사무라이들과 함께 악을 쓰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굴릴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서, 설마?’
그러나 눈을 굴리기가 무섭게 그들은 머지않아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절망에 찬 눈을 깜빡였다.
그들도 바보는 아니다.
작금의 난세 속에서 알량한 권력이라도 유지하고 있다면 핏줄도 핏줄이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눈치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그들은 속에서 치솟는 가정과 그 결과를 애써 목 아래로 억누른 채 자신들을 포위한 사무라이들을 참담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제발. 아니어야 한다.
그들이, 자신들이 가정하는 최악의 일이 벌어진다면 단순히 목숨만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저벅.
“조금 전, 아주 조금 전에 들어온 닌자의 서신이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정은 머지않아 확신이 되었고, 친 이마가와 파벌의 가신들은 허망함과 절망, 나아가 탈력감을 느낀 채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사무라이들을 헤집고 걸어 나오는 소녀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내용은 간결해요.”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이 달가운 것일까.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베었답니다. 오다의 야차가요. 그뿐만이 아니라 본대의 태반은 죽거나 투항…….”
그녀는 옅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고, 곧 특유의 너구리와 같이 서글서글한 눈매로 호선을 그리며 읊조렸다.
“자, 그럼 여기서 이 자리에 모인 충실한 가신들에게 여쭤보죠.”
하지만.
“내게 할 말이 있나요?”
그들은 보고야 말았다.
그녀,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웃음 아래에 깔린, 긴 시간을 억누르고 참아온 처절한 복수심과 소름끼칠 정도로 싸늘한 독기를 말이다.
때문에, 이 자리의 모두는 직감했다.
이마가와 가(家)는 다시금 미카와를 범할 수 없을 것이고, 그 자신들 역시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리라고 말이다.
*
오다 가문은 기세를 얻자마자 남아있는 여력을 총동원하여 이마가와 가문의 잔당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구심점을 잃은 그들은 동쪽으로 패주하는 동시에 뿔뿔이 흩어졌다.
“이놈! 죽어라!”
“자, 잠깐만! 커억!”
패주한 이들 중 사무라이들은 차라리 나았다. 그들 중 태반은 나름 사무라이임을 자신할 정도로 무력이 있거나 신분이 낮지 않았기에 싸우다 죽거나 하다못해 포로로라도 잡힐 수 있었으나 아시가루들은 처지가 달랐던 것이다.
“여, 여기가 어디야?”
“배고파……. 배고프다고……. 으으.”
애초에 잡졸과 거의 동일시되는, 밭 갈고 씨 뿌리던 농민들에게 무슨 대단한 전투력이나 군율을 기대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은 패주하는 과정에서 반절이 넘게 산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무기조차 들고 있는 이들이 적은 와중에 무슨 식량이 있을 턱이 없었다.
“네놈 뭐야!”
“사, 살려 주십쇼! 뭐든지 하겠습니다!”
“뭐든지 하겠다고? 오늘부터 네 이름은 다나카여!”
“예? 하, 하지만 제 이름은!”
“닥쳐!”
때문에, 그들 중 태반은 산을 헤매다가 아사(?死)하거나 밥 짓는 냄새에 이끌려 마을로 걸어갔고, 척 보기에도 오와리를 침공한 패잔병을 맞이한 농민들이 분노하며 들이민 농기구의 앞에 순식간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든 아시가루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모조리 죽여버려!”
“끄아아악!”
“사, 살려주세요! 아이가! 아이가아!”
“이리 와! 이년아!”
일부 집단을 이룬 채, 무기를 가지고 본대에서 떨어진 아시가루와 사무라이들은 인근 촌락과 마을을 약탈하며 살인과 겁간을 일삼았고, 그들의 준동은 자연히 마을들의 불안함을 더해갔다.
“모조리 쓸어버린다!”
“와아아아아아!”
하지만 결과적으로 약탈을 이어나가던 놈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으니.
우두머리를 잃어 패주하는 그들과 달리 오다 가문의 군세는 그 어느 때보다 사기가 높았고, 병력 역시 온존한 편이었다.
“살아갈 가치도 없는 버러지들이다! 모조리 죽여버려!”
“끄아아아악!”
“도망쳐! 도망치라고!”
평원을 뚫고 돌진하는 오다 가문의 기병들에 의해 황급히 겁간을 멈추고 도망치려던 사무라이의 심장이 창에 꿰뚫렸고, 변변찮은 재물에 홀려 사람을 죽였던 아시가루는 눈조차 감지 못한 채 목 절반이 베여 피를 뿜다가 쓰러졌다.
“사, 살려!”
“히닌(천민) 만도 못 한 것들이!”
이미 눈이 돌아간 오다 가문의 사무라이, 아시가루들에게 자비란 없었다.
그래, 징병당해 전장에 선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른다.
전쟁을 결정하는 것도, 그들에게 무기를 쥐여준 것도 결국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필두로 한 이마가와 가문의 허물이니까 말이다.
“으아아아아아!”
“허나.”
추격대의 장(?)을 맡은 시바타 가쓰이에는 미간을 좁힌 채, 자신에게 검을 들이미는 사무라이를 바라보며 가면 아래로 나지막이 중얼거렸으니.
“약탈은 결국, 인간이길 포기한 네놈들의 과업이겠지.”
“개소리를 하는구나! 계집!”
사무라이의 검이 단번에 그녀의 목을 벨 듯이 사선을 그리며 찍어 내려지는 와중에도 시바타 가쓰이에는 어떤 동요도 없이 금색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부질없는 짓을.”
콰직!
“커헉!”
그녀는 구태여 놈의 검을 피하지 않았다.
단지, 안으로 파고듦과 동시에 놈의 갑주 사이를 찔러 절명(?)시켰을 뿐.
“어, 어떻……. 끄르륵!”
말이 쉽지, 그녀는 찰나의 순간 갑주 사이의 빈틈을 정확하게 노리고 검을 찔러 넣었다는 말이다.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시바타 가쓰이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잠시 응시하다가 이윽고 촤악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을 털어내며 읊조렸으니.
“……약하다.”
그건 갈증이었다.
동시에, 그녀는 불과 며칠 전 비가 내리던 진창 속에서 펼쳐지던 일영과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전투를 복기하며 눈을 감으니.
“생사결(?死?).”
아무래도, 그날의 기억은 꽤나 오래 갈 듯싶었다.
*
“군율을 갖추어 퇴각한다! 조급해하지 마라!”
한편, 오다 가문이 오와리 내부를 수습하는 사이 마츠다이라의 군세는 그들과 어떤 충돌도 없이 무사히 미카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미 이마가와 가문 내부에도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기에, 그들의 행동을 전해 들은 누구라도 머지않아 마츠다이라 모토야스가 저지르려는 일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문을 열어라!”
“적법한 당주께서 돌아오셨다!”
“여, 열겠습니다!”
군권조차 장악한 그녀가 돌아오는 것에 대항할 수 있는 이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는 곧바로 가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살생부에 적힌 이들은 반항다운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라고 무작정 일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충성을 한다면, 살려드리죠.”
“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대신 봉토를 조금 내놓으셔야겠어요. 절반 즈음?”
“저, 절반!”
마츠다이라의 깃발 아래에서 가문을 존속했음에도 이마가와에게 가문을 팔아버린 족속들은 여지없이 삼대를 멸했지만, 시대의 흐름, 다른 가문의 압박, 말하자면 생존을 위해 깃발을 바꾼 이들에겐 관대한 처분이 떨어졌다.
‘마음 같아선 다 죽이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大) 다이묘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죽음과 더불어 오다 가문의 망나니라 불리던 노부나가의 예상 못 한 선방에 당혹했겠지만, 그녀는 초인이 아니기에 홀로 영지를 이끌 순 없다.
때문에, 지금은 최대한 힘을 키우며 한배를 탄 이들을 늘일 때라는 말이다.
그런 그녀의 계획은 영민한 머리와 이미 한배를 타버린 도리이 다다요시의 행동력으로 꽤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한창 그녀가 미카와를 장악하고 있을 시기, 오다 가문의 오와리 정리가 끝났다는 한조의 첩보와 함께 한 통의 서신이 그녀에게 닿았으니.
「당주님의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추후 뵙게 될 때는 꼭 그에 대한 보답을 들고 가겠습니다. 히라테 히카게」
“……야차의 보답이라. 기대되네요. 훗.”
머지않아 도쿠가와 씨(?)를 개창 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저 웃음을 지은 채, 왜인지 모르게 정색을 품고 꾹꾹 눌러 쓴 듯한 일영의 필체를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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