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오케하자마(8)
* * *
“무슨 개소리야?”
“호.”
일영은 미처 속에 담긴 말을 속 안에 갈무리하지 못한 채 내뱉고 말았고, 그의 반문에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눈을 한번 깜빡이며 무슨 표정인지 쉽사리 가늠할 수 없는 얼굴로 나지막이 탄식했다.
그러나 그것이 일영의 말에 감정이 동요했다거나 혹은 전투를 포기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고, 찰나의 순간 일영의 진의를 가늠한 것에 가까웠다.
‘눈이 흔들리지 않는다. 목소리도 떨리지 않고…….’
난세를 살아가는 위정자라면 사람의 외양을 보고 진의를 가늠하는 자기만의 기준이 있는 법이다. 물론, 잘 영글지 않거나 그 씨부터 천한 것들은 몰라도 이마가와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그런 되다만 것들과는 다르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일영의 반응으로서 점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정말로 모르고 있었던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하고 있던가.
어찌보면 단순하다고 반박될 그 두 가지 갈래 속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전자를 점쳤다.
‘그도 그럴 것이, 저것이 연기라면 그건 그것대로 대단하지 않겠는가.’
호흡과 시선, 태도와 목소리.
딱히 흠잡을 구석도 없이, 놈이 내뱉은 그대로 ‘무슨 개소리야?’라고 말하는 듯한 외양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이 판단의 전부는 당연히 아니었다.
다만, 흥분이 가라앉자 머릿속의 의문들이 빠르게 고개를 치켜세우며 그의 판단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습격 전에 구태여 암습을 한다. 어째서?’
차라리 습격이 시작된 이후 공격을 했다면 그도 당혹감에 조금쯤은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말이 된다.
하지만 유녀는 구태여 기다리지 않았고, 기다리는 기색조차 없었다.
아무리 그가 유녀의 수상함을 눈치챘다고 한들 그건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이라는 것이 언제나 순리나 섭리 따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였으나 이미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직감.
그래, 이건 직감이다.
그의 머리는 이 일의 원흉이 다른 곳에 있다고 경종을 울렸고, 곧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츠다이라인가.”
“뭐?”
당연하게도 일영은 그의 말에 반문했으나 돌아오는 건 이마가와의 투박한 읊조림일 따름이었다.
“아니다. 쓸데없는 잡설이 길었구나. 이 정도면 피차 숨을 고른 상태이니 슬슬 다시 시작하자꾸나.”
물론, 그렇게 간단히 생각이 정리될 일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뇌리에 어지럽게 얽히고설킨 생각들은 단순히 일의 원흉 따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전후의 미래를 그리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슬슬 조일 때가 되었지.’
마츠다이라 가문을 좋게 본 게 아닌, 그 어린 너구리의 싹수를 일찍 알아보아 조금쯤은 편애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최근 헛바람이 들었거나.’
아무래도 둘 다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 자신이 마츠다이라의 어린 너구리를 길들일 자신이 있기에 거둔 것이었으니까.
‘적당한 가문 하나쯤은 정리해줘야겠지.’
손에 쥔 오오다치에 힘을 더욱 주며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말아 올렸다. 이미 해야할 일이 정해진 순간 거리낄 일은 없었고,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흐으읍!”
타다닥!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그 거구에서 나온 속도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걸음으로 진창이 된 바닥을 박찼고, 동시에 일반적인 일본도의 칼날과는 궤가 다른 서슬 퍼런 기운을 흩뿌리며 일영에게 뻗어졌다.
“큭!”
당연하게도 일영 역시 이번엔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는 곧바로 검을 비스듬하게 마주 올려 칼날을 받음과 동시에 어깨로 흘렸다.
카가가강!
빗물로 점철된 칼날의 혈조를 따라 물방울이 떨어지고, 일영은 저릿한 손목을 애써 무시하며 한 호흡 사이 몸을 일으켜 눈을 번뜩였다.
‘목? 아니면 어깨?’
조금 전 목숨을 거둔 사무라이의 그것처럼 비스듬하게 칼날을 찔러 목숨을 거둘까, 그게 아니라면 어깨 사이를 찌를까.
이미 몸에 익은 검술이 그에게 무수한 궤적을 제안했고, 일영은 찰나의 순간 몇 번의 눈을 깜빡이며 그것들이 가진 궤적과 검로를 계산하고 또 계산했다.
그러나 그 순간.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나!”
“어?”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망설임 없이 손에 쥔 오오다치를 놓았고, 동시에 허리춤으로 손을 밀어 넣고 검을 뽑아 아래에서 위로 그었다.
문제는 일영이 이미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기 위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는 점이었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발도하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이, 일영!”
“히카게 님!”
당연하게도 그 모습은 흡사 일영의 얼굴이 세로로 그어지는 것처럼 보였기에 노부나가, 요시나리는 물론 한창 미쳐 날뛰던 이츠키를 도와 인근까지 치고 들어온 아케치 미쓰히데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그들뿐만일까.
“……무슨!”
먼발치에서 일영과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격돌을 지켜보고 있던 사무라이, 아시가루들은 모두 일영이 당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일영, 히라테 히카게라는 사내가 쌓아온 명성이 자칫하면 땅에 쳐박힐 수도 있는 광경인 탓이었다.
그러나 그때.
“쯧.”
당장이라도 일영을 벤듯한 표정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얼굴이 아쉬움으로 구겨지고, 일영의 몸이 허공을 붕 뜬 채로 진창을 몇 번이나 굴렀다.
촤아아악!
핏물과 시체로 뒤섞인 진창에 갑주를 입은 거구가 뒤로 밀려나자, 오다 노부나가는 물론 오와리 측 진영의 사무라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뻔했다.
“하. 쿨럭!”
막사 근처에서 잠시나마 소강상태에 접어든 모든 시선들은 일제히 일영에게로 향했고, 그들은 이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빗물로 얼굴을 닦아내는 일영의 모습에 제각기 안도와 아쉬움을 머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아쉬운 얼굴에 속했고, 곧 그는 입술을 이죽거리며 말했다.
“호. 꽤 반반하구나. 역시 오다 애송이의 애첩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던가.”
그의 말에 일영은 손을 들어 진창에 처박힌 얼굴을 닦아내다가 문득 하관에 걸리는 것이 없음을, 그리고 유달리 입술과 뺨이 뜨거움을 느끼고 손을 가져댔다.
“허.”
그리고 곧 알 수 있었다.
야차를 본뜬 멘구(가면)은 박살 났고, 검에 베인 건지 가면이 갈라지며 상처를 낸 것인지 모를 긴 상처가 입술을 기점으로 턱과 뺨에 나 있음을 말이다.
“퉤.”
비릿한 핏물과 진창의 역겨운 흙내음이 가득한 침을 바닥에 뱉어냈고, 일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제야 일영의 상처를 본 이들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었음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솨아아아.
하늘은 여전히 회색빛으로 물들었고,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물줄기를 흩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일영은 잠시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난 상처를 쓸다가 이윽고 중얼거리니.
“하, 씨발.”
“뭐라?”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뭐라? 이 지랄 하고 있네. 씨발 새끼가.”
그도 그럴 것이, 일영이 내뱉는 말은 다름이 아닌, 현대 한국어였으니까 말이다.
*
얼굴이 베였다.
그건 물론 현대인의 입장에서 두렵고도 쉽사리 볼 수 없는 강력 범죄의 영역이었으나 일영에게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여태까지 몸의 흉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막상 코앞까지 죽음을 실감하자 그도 사람인 이상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굴에 먹다 만 밀가루 처바른 새끼가 어딜 뻐겨?”
일영은 인상을 일그러트린 채 그렇게 말했지만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물론 다른 이들도 전부를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는 게냐. 꼴에 조선놈이라고 조선어로 욕을 하는 것인가?”
물론, 그게 조선말과 비슷한 욕이라는 건 얼추 눈치로 알아챌 수는 있어도 말이다.
하지만 정작 일영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그나마 깨끗한 물웅덩이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곤 혀를 찼다.
“……허, 감염되는 건 한순간이겠네.”
핏물과 진창에 뒹군 덕에 머리나 뺨에 묻은 흙탕물이 상처에 스며들지도 몰랐다. 때문에, 그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무어라 말하던 신경조차 쓰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솨아아아.
그나마 다행인 점은 비가 내린다는 거다.
이 시대엔 공해가 적어 빗물도 받아 마실 정도이니, 더러운 흙탕물에 계속 상처를 방치하는 것보단 나으리라.
일영은 태연하게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건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까닥.
때문에, 그는 곁에서 주춤거리던 사무라이에게 눈짓했다. 당연히 그것이 나타내는 뜻은 명확했기에 사무라이는 망설임 없이 일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흐읍!”
대놓고 하늘을 보며 얼굴을 닦고 있는 적을 베는 것만큼 쉬운 일이 있을까?
그건 모든 사무라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히라테님!”
때문에, 오다 가문의 사무라이들이 다급히 일영을 부르는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쯧.”
“커헉!”
일영은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놈의 검을 피한 직후, 품 안에 숨기고 있던 단검으로 단번에 놈의 갑주 사이를 찔렀다.
푸욱, 하는 소리와 더불어 사무라이는 끅하는 단말마의 읊조림을 끝으로 무너졌고, 일영은 손에 튄 핏물을 가볍게 털고는 정확히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성격 급하네. 뒈지려고.”
그리고 이번에 그가 내뱉은 말은 정확한 일본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