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오케하자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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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오와리의 하늘이 회색빛으로 물들고 비가 추적추적 떨어지기 시작하자 모든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철포, 즉 조총이 무용해진다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활의 위력도 줄어들고, 무엇보다 시야 확보의 어려움이나 말이 진창에 빠지는 등의 현실적인 어려움도 많았다.
……거기에 전염병까지 도는 순간 그야말로 지옥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아무래도 비가 올 때는 지휘관들 역시 병력 운용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시적으로 전선이 멈추자 각 세력은 지금까지 전투에 대한 성적표를 받아들을 수밖에 없었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랐다.
“……빌어먹을. 이렇게 수준 차이가.”
“그나마 지원군이 와서 다행입니다.”
“그러면 뭐하는가? 당주님께서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이거늘.”
한쪽은 암담한 상황 속 어떻게든 답을 갈구해야 했고.
“하하하!”
“이거, 아무래도 천운이 당주님을 맴도는 모양입니다!”
“저 앞에 교토가 보이지 않습니까!”
다른 한쪽은 준수한 걸 넘어 매우 만족스러운 성과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찬란한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이마가와의 가몬이 오와리를 덮을 듯이 휘날리니 이야말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일본 태양 여신)의 보살핌 아니겠습니까!”
비록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차고 슬슬 빗물이 대지를 적셨으나 기본적으로 언덕 지형인 오케하자마에는 큰 상관이 없었다.
비가 내린다고 한들 어떤가?
이미 이마가와 가문은 승기를 잡았다.
채 1만은커녕 5천이나 넘을까 말까 하는 병력과 거진 3만이 넘어가는 병력의 차이는 둘째로 치더라도 그들은 벌써 거진 10채에 달하는 성과 요새들을 손에 넣은 후였으니까 말이다.
남은 것은 오다 가문의 어린 당주 계집을 잡아다가 머리를 진창에 박아 넣는 것뿐이리라.
“내일 저녁은 기요스에서 먹는겁니까?”
“어딜, 미노에서 먹어야지!”
낙관이 이미 전장의 아시가루는 물론 후방의 지휘관들에게까지 옮았다.
물론, 일이 잘 풀리는 만큼 후방의 지휘관들은 긴장감을 더욱 조이는 게 정석이었으나 예상보다 더 우세한 상황은 그런 일말의 경계심조차 내려놓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술이 마시고 싶구나.”
그렇기에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선뜻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었고, 그 어떤 가신도 그의 말을 감히 부정하지 않았다.
“술상을 차려라!”
“비가 새지 않게 막사를 펼쳐!”
본디 당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더욱이, 일신의 영단으로 가문을 승리로 이끌고 있는 그에게 섣불리 ‘혹시 모를 야습이 있을 수 있으니 음주는 위험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혹시 모르지. 스승인 다이겐 셋사이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렇게 말씀하실지.’
적진 한복판에서의 술판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조차 속으로 그런 불평을 삼킬 따름이었다.
술상은 빠르게 차려졌다.
인근 마을에서 급하게 데려온 유녀와 유남들이 각 하타모토와 가신들의 곁에 앉아 술잔을 채웠고,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진창이었던 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리고 천막이 지어진 채 음주 가무를 위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하하하하!”
“옳지, 더 따라 보거라!”
비록 전장이기에 사무라이들은 갑주를 벗진 않았으나 그럼에도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는 술잔과 음식들은 일말의 경계심을 남기고 있던 이들까지 풀어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술잔을 주시지요.”
“크, 크흠. 귀엽구나.”
난세 속 우악스럽게 살아온 여자 사무라이들은 제각기 곁에 붙은 미소년들의 수발에 볼을 붉히거나 밤을 기대하며 술을 삼켰고, 그건 남자 사무라이라고 한들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시 시대의 맹장들이 모인 곳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좋으네요. 후훗.”
그리고 그때,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곁에 앉아있던 유녀가 조신한 손동작으로 입가를 부드럽게 가리며 말했다.
“시대의 맹장이라.”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그녀가 입안에서 굴린 아첨을 받아 삼켰고, 곧 비어있는 술잔을 쥐고 따르라는 듯이 까닥거렸다.
“훗.”
조르륵.
당주의 곁에 붙은 만큼 그녀의 행동 행동은 그 자체로 교토에 있는 기생과 견주어도 하등 모자람이 없었고, 딱 적당할 정도로 한 분칠에서 흐르는 분 내음은 그 자체로 뭇 사내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때문에, 이마가와 요시모토 역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가득 따라진 술을 단번에 삼켰고, 곧 그녀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감싸며 말했다.
“그래, 그럼 오와리에서 제일가는 맹장은 누구더냐?”
“오와리에서, 말씀이세요?”
그녀는 오와리의 맹장이 누구냐는 물음을 들을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말을 해도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후보군을 나열했다.
“음, 아무래도 시바타 가쓰이에님이나 사쿠마 노부모리님…….”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며 작금의 오와리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이들의 이름을 천천히 나열했다.
“되었고, 그 히라테 히카게라는 놈은 어떻지? 듣기론 새로이 나타난 맹장이라 야차라고 불린다던데.”
그러나 그때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그녀의 말을 멈추고 물었고, 그의 말을 들은 그녀는 잠시 눈을 몇 번 깜박거리다가 이내 입을 가리고 웃음을 흘렸다.
“에이, 그래봐야 조선인이잖아요. 듣기론 얼굴이 반반해서 오다 가의 당주가 데리고 다니는 시동이나 다름이 없다던데요?”
“허헛.”
오다 노부나가가 데리고 다니는 시동이라.
그 말을 들은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흘리며 다시금 채워진 술잔을 단번에 삼켰고, 곧 그녀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가득 넣었다.
“큭?”
우악스러운 손길이 어깨를 분지를 듯이 강하게 압박하고, 동시에 모든 가신과 유녀, 유남들의 시선이 둘에게로 향한다.
“끄, 끄윽……! 아, 아파요!”
하지만 정작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쏠린 시선에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이 특유의 힘으로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억눌렀고, 그의 힘을 버티지 못한 유녀는 마침내 눈물까지 터트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시, 신첩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도 살려만……!”
“다, 당주님! 일단 진정을!”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진심이다.
그것을 눈치챈 가신들 역시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바로 그 순간.
“연기는 그쯤 해도 된다.”
“예?”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눈앞의 가신들이 아닌 고개를 조아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녀에게 말했고, 그 순간 정면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가신들은 보았다.
스릉.
발목 아래에 숨기고 있던, 손바닥보다 작은 비수를 뽑는다. 동시에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이 그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향해 빠르게 손을 뻗는다.
“다, 당주님!”
“이, 이게 무슨!”
찰나의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은 환각이 그들을 괴롭힌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칼날이 당주의 목을 꿰뚫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막사를 순식간에 맴도는 것이다.
“안돼애!”
하지만 유녀도, 가신들도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비록 얼굴에 흰 분칠을 하고, 이빨을 검게 물들이며, 전장에 꽃가마를 타고 오는 등의 지극히 과시적인 행동을 하는 인물일지언정.
콰드득!
눈앞의 사내가 도카이 제일의 무사(??一の??り)라고 불린다는 점을 말이다.
막사 안에서 울려 퍼지는 섬뜩한 피륙음.
그리고, 비수를 따라 흐르는 핏물.
그것을 응시한 유녀는 손에 쥔 비수가 닿은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심결 읊조렸다.
“……손으로 잡았다고? 이 거리에서?”
훈련된 닌자는 출수 후 상대를 제거할 때까지 단 한 호흡이면 충분하다.
특히, 이렇게 가까운 거리일 때 갈고닦은 암살법은 어지간한 반응속도로는 보기도 전에 목이 꿰뚫리곤 하는 것이다.
그래, 분명히 그래야 할진데.
“음, 다른 년놈들이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유곽 전체의 짓이라기보단 네년의 소행이겠구나.”
어째서 눈앞의 사내는 갈라진 손바닥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좌중을 훑고 있는 것인가?
“일단.”
유녀는 순간적인 상황변화에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고, 그것은 그녀의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곁에 있는 년놈들을 모조리 베어라.”
“뭐?”
유녀는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가득 담긴 것은.
“사, 살려주세요! 저, 정말로 몰랐어요!”
“아, 아아아악!”
“배, 배가, 배가 아파요. 제, 제발…….”
언제 곁에 끼고 술을 마셨냐는 듯이 무표정으로 유녀와 유남들의 목과 배를 갈라버리는 이마가와의 사무라이들과, 자신을 원망하며 죽어가는 수많은 소년 소녀들이었다.
“아, 아아. 커헉!”
그리고 그때,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그녀의 절망어린 눈을 보지도 않은 채 손에 쥐고 있던 비수를 단번에 그녀의 목 뒤쪽에 꽂핬고, 그녀는 꿀렁이며 역류하는 핏물을 느끼며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진다.
‘목 뒤에 비수가 박히면 눈에도 핏물이 차는 걸까?’
그녀는 붉게 물들어가는 시야 너머로 싸그리 절명한 유곽의 아이들을 눈에 담았고, 곧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죄송, 합니다……. 모토야스님, 그리고……. 한조님.’
그렇게 그녀의 시야는 꺼졌다.
“쯧. 술맛이 떨어졌군.”
한편,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곁에서 끼고 놀던 소년 소녀들을 모조리 베어버린 사무라이들을 가볍게 훑으며 그렇게 읊조렸고, 곧 벌벌 떨고 있는 한 가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고로. 네놈이 준비했다고.”
“그, 그렇습니다.”
“네놈은 할복을 할 가치도 없다. 이이 나오모리.”
“옙!”
“죽여.”
“자, 잠깐 자비를……! 커헉!”
구릿빛 피부를 가진 여 사무라이, 이이 나오모리는 단번에 고로라는 이름을 가진 가신의 목을 베어버렸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완전히 숨이 끊어진 유녀를 잠시 내려보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오다인가, 아니면…….”
그러나 그때.
와아아아아!
모조리 죽여버려!
이, 이건 뭐야아!
막사 밖에서 갑작스럽게 울리는 괴성에 그의 몸이 순간 멈칫거렸고, 조금 전까지 무표정을 고수하던 그의 가신들 역시 제각기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밖을 바라보았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친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펄럭!
“크, 큰일입니다!”
막사의 천이 거칠게 열림과 동시에, 팔 한쪽을 베인 사무라이가 다급히 달려오며 외치니.
“암습입니다! 하나같이 너무 강해서!”
이마가와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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