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인간 세상 오십 년(5)
* * *
“뭐?”
오다 노부나가를 필두로 한 일영과 모리 요시나리가 젠쇼지 성채로 들어선 직후, 그녀와 일행들은 한 가지 비보를 전달받고 말았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젠쇼지 성채의 주인이었던, 비록 육신은 늙은 노신이었으나 다른 이들과 달리 도태되지 않고 엄연히 노부나가의 파벌에 속해 있던 가신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노부나가는 아직 오와리의 모든 군세를 모으지 못했기에 시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노신이 내린 선택은 간결했으니 바로 그 시간을 벌어주겠다는 것이었다.
“300명의 아시가루를 이끌고 요격을 나섰다니. 그 무슨 무리한…….”
노부나가는 그렇게 중얼거렸고, 모리 요시나리는 그녀에게 구원하러 갈지를 물으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일영은 달랐다.
‘사무라이는 일부러 남겼나.’
와시즈 성과 마루네 성이 놈들에게 넘어간 이상 젠쇼지 성채는 놈들이 함락하고자 한다면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의 시선이 성채 곳곳으로 향했다.
곳곳이 낡았고, 무너졌다.
생활하기에는 큰 불편이 없었는지는 몰라도 몰려오는 마츠다이라와 이마가와의 대군을 막기엔 턱없이 모자르지 않겠는가.
때문에, 그것들을 훑어본 일영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듯한 노부나가에게 말했다.
“당주님.”
“……후. 그래.”
그녀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가신이 어떤 마음으로 전장으로 내달렸는지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정녕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는가.
……쯧, 우둔하기는.
그녀는 괜스레 입이 쓴 것을 느끼며 곧바로 말 위에 올랐고, 성채에 남아있는 사무라이들과 아시가루들에게 외쳤다.
“젠쇼지 성을 비워라! 우리는 나카지마 성채로 후퇴한다! 말 그대로 성 자체를 비우는 거다!”
예!
되돌아오는 우렁찬 대답.
성 내에 남아있던 아시가루와 사무라이들은 물론, 모리 요시나리를 뒤따라 온 사무라이들도 빠르게 성채를 비우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백성까지 피란 행렬에 동참하고, 노부나가와 일영, 모리 요시나리는 시선을 맞춘 후 동시에 말 위로 올라탔다.
히이잉!
우렁찬 말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동시에, 그들은 아무런 말 없이 고삐를 쥔 채 박차를 가할 뿐이었으니.
목표는 나카지마 성채.
일영은 그것을 곱씹었고, 곧 시선을 옮겨 젠쇼지 성채 너머에서 분투하고 있을 이름 모를 이들에게 명복을 빌어주며 부탁했다.
‘부디.’
한 놈이라도 더 죽여주기를.
*
“죽어!”
“커허억!”
비스듬하게 찌른 카타나의 칼끝이 겹겹이 쌓인 사무라이의 갑주 사이를 꿰뚫고 나약한 인간의 육신을 찔렀다.
촤락!
피가 혈조를 따라 미끄러진다.
“쿨럭!”
폐를 비스듬하게 찔렸기 때문일까? 기침 속에 피가 섞이고 놈은 눈을 부릅뜨다가 이윽고 무릎을 꿇었다.
“……하아, 하아.”
살아남은 사무라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죽어가는 놈을 멍하니 응시했다.
찰나의 순간 삶과 죽음이 갈린다.
그 두렵고도 두려운 명제 속에서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선 전장의 광기에 몸을 맡기는 방법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붕대로 감은 손에 다시금 카타나를 쥐려던 그때였다.
푸욱!
“뒈져버려!”
“끄윽!”
아시가루의 창끝이 정확히 정강이를 부수며 찔러졌고, 그 모습을 본 거구의 사무라이가 곧바로 진로를 틀어 그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죽기 싫다.
살고 싶다.
여기선, 죽어선 안 된다.
막아야.
생각은 찰나의 순간 무수한 경우의 수를 도출했으나, 불행하게도 늙어버린 그의 육신은 주인의 다급함을 온전히 따라주지 않았다.
“아.”
내뱉은 단말마의 읊조림.
동시에 회전하는 시야.
‘그런가.’
눈을 깜빡이고, 점차 멀어지는 현실 감각과 부질없이 기울어지는 자신의 육신을 본 그는 이윽고 현실을 인식하곤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직후.
데구르르.
잘린 목이 바닥을 굴렀고, 그것을 기점으로 지지부진하던 전장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적장을 죽였다아!”
사무라이, 아니 젠쇼지 성채의 성주의 목을 날려버린 사무라이가 일갈했고, 그것을 기점으로 그가 데려온 300의 병력은 마치 설탕이 물에 녹아내리듯이 빠르게 와해되고 말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 소식은 곧바로 이마가와 요시모토,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에게로 향하니.
“하하핫! 나의 창끝에는 오니와 야차도 대적하지 못할 것이야!”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흡족해하며 술잔을 기울였고,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저린 발을 주물렀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는…….
“도합 몇이지?”
“대략 3천이 조금 안 됩니다. 당주.”
일단 급하게 모은 병력이었다.
때문에, 일영은 물론 대다수의 가신과 사무라이들은 사기가 개판이라는 걸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사무라이들에겐 차라리 명분이라도 있다.
주군에게 충성한다거나 전장에서 이기면 큰 보상이 걸렸다거나 말이다. 애초에 칼잡이를 업으로 삼는 만큼 그들은 다가올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시가루들은 다르지.’
최소 반절은 농사나 짓다가 끌려온 이들이다. 어제까지 호미 들고 쟁기 들던 이들에게 갑작스럽게 창 쥐여주면서 벼 대신 사람 모가지나 추수하라고 하면 누가 달가울까.
하지만, 대책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일영은 군세의 좌측으로 시선을 옮겼고, 곧 나름의 군율을 갖춘 채 다른 병력과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이들을 응시했다.
대략 5백이 약간 안 되는 놈들.
그들의 정체는 다름이 아닌, 오다 노부나가가 직접 직업 군인으로 키운 아시가루들이었다.
‘원 역사에서도 큰 활약을 했지.’
사무라이와 견주어도 크게 전력상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야말로 믿고 맡길 수 있는 말들이었다.
그리고 그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일영은 어느샌가 노부나가가 성채에 모여있는 병력들이 가장 잘 보이는 언덕으로 올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은 저녁에 군량을 사용하여 밤새 오타카 성으로 달려갔고, 와시즈, 마루네 성채에서 격전을 치러 이로 인해 손발이 모두 지쳐 있다!”
말 위에 오른 그녀는 당당하게 외쳤다.
내뱉는 목소리가 제각기 어지럽게 섞여 있던 병력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에 비해 우리는 팔팔하지 않은가!”
특유의 비단과도 같은 검은 단발이 찰랑인다.
황금색 눈이 번뜩이고.
붉은 입술은 마치 달콤한 과실을 앞에 둔 것처럼 열렸다가 닫힌다.
“적은 군사로 큰 적을 두려워하지 말라. 운은 하늘에 달린 것이다! 적이 공격하면 도망치고, 적이 도망치면 공격해라! 적을 쓰러트려라! 전리품을 챙기지 말고 그 대신 보다 거대한 것을 보아라!”
채애앵!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카타나를 뽑았다.
잘 관리가 된 듯한 청명한 금속음이 귓가를 스쳤고, 곧 그녀는 어느새 홀린 듯이 자신을 멍하니 응시하는 이들을 향해 드높게 검을 치켜세우며 외쳤다.
“일전에 승리한다면, 이 위대한 전투에서, 우리의 땅을 침략한 저 버러지들의 엉덩이를 차서 내쫓으면 여기에 모은 모두가 후대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을 빛내리라!”
후대에 이름을 알리리라.
자식에 자식이 아이를 낳을 때, 증손주의 자장가는 나의 분투요 아이의 꿈은 내가 되리니.
어느샌가 그들의 눈에는 열망이 맴돌았다.
비루한 현실에 대한 거부감은 적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어째서 전쟁에 끌려와야 했는가에 대한 의심은 찬탈자에 맞서야 한다는 대답으로.
그리고, 누구를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눈앞의 당주에게로.
“틀렸는가! 내 말이 틀렸느냔 말이다!”
낯선 은빛의 갑주를 입고, 흔히 적포도를 연상시키는 낯선 망토를 두른 그녀는 하늘 높이 검을 치켜들곤 그들에게 되물었다.
동시에, 그들은 화답하니.
“아닙니다!”
“오다 노부나가 만세에!”
“빌어먹을 버러지들을 무찌르자!”
“모조리 죽여버리자!”
그것은 광기에 가까운 호응이었고, 나아가 다가올 전투를 막을 수 없음을 나타내는 직관적인 정보였다.
‘얼추 5천인가.’
일영은 그 광경을 나름 뿌듯하게 응시하면서도 속속들이 합류하는 병력들을 빠르게 셈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원 역사보다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2배가량 늘었다. 그리고 그건 일영이 설계한 그대로였다.
내분에서 적은 피를 흘림으로써 병력을 온존했고, 미노의 혼란을 틈타 영토를 삼킴으로써 오와리의 동원력을 높였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해볼만 하다.’
전면전이나 대규모 회전(會戰)은 자살 행위겠지만, 계획대로라면 문제가 없다.
그리고 그때.
“도련님. 이걸.”
일영은 때마침 자신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쪽지를 건네는 아케치 미쓰히데에게서 쪽지를 받아들었고, 그것을 확인한 그는 이윽고 하늘 위로 시선을 옮겼다.
서서히 회색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그것을 확인한 일영은 이윽고 피식 웃음을 흘리며, 손에 쥔 쪽지를 망설임 없이 화톳불에 던지며 중얼거렸다.
“일단, 하늘은 돕는군.”
그건 사뭇 안도가 섞인 한 마디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