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인간 세상 오십 년(1)
* * *
회의가 시작되고 며칠이 흘렀을까.
기요스에선 한창 전쟁을 앞두고 날이 서 있었으나 오와리의 전역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날이 선 쪽이 더 적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떼잉, 어린 년이 아버지를 따르던 가신들을 뭐로 보는 건지 거참. 애초에 전쟁이 장난인가!”
기요스나 나고야에 비해선 꽤 허름한 전각 안, 척 보기에도 관에 박히기 직전이다 싶은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에 주름 진 노신이 투덜거렸다.
“너무 괘념치 마세요∼.”
“크흠.”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는 최근 기요스의 유명한 유곽에서 이곳으로 파견 온 유녀가 술을 따르고 있었으니, 그녀는 특유의 교태 넘치는 얼굴로 노신의 투정을 능숙히 받아 넘겼다.
“후웃.”
주도(??)에 따라 유려한 손길로 술잔을 채우면서도 늙은 사내의 눈길을 훔친다.
“설마 전쟁이 난다고 하더라도, 항복하시면 그만 아니겠어요?”
그러면서도 경박하거나 천박하지 않으며 나아가 은연중 하고 싶었던 말까지 대신해주니 실로 요부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허!”
그러나 곧바로 긍정하기엔 사내로서, 또 가문의 가신이라는 입장이었기에 노신은 마음에도 없는 호통을 내뱉으며 술을 따르는 그녀를 나무라듯이 말했다.
“아무리 계집이라 생각이 없어도 그렇지, 경을 칠 소리를 하는구나!”
“에이, 우리 솔직해지자고요. 어르신.”
“에, 에이?”
하지만 유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호통을 친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저의를 모두 알아 우습다는 듯이 말하니.
“막말로 작금의 오다 가문이 어르신께 무엇을 해주었나요? 제가 어렸을 적, 오다 노부히데님께서 가문을 지휘하셨을 때 살기 좋았다는 것 정도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글쎄요…….”
또륵.
일개 유녀가 내뱉기에는 말이 너무 충격적이기 때문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말을 하면서도 흘린 눈웃음이 늙은 사내의 아랫도리를 불끈하게 만들어서일까?
“크, 크흠.”
그는 유녀의 말에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헛기침만을 내뱉었고, 그 사이 유녀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곤 주도에 맞지 않게 꽉 채운 잔을 힐끔 흘겨보며 말했다.
“드셔요.”
“그, 그러자꾸나.”
……아무래도 후자인 듯했다.
꼴에 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남자는 남자라는 것인지, 그는 제 딸보다 조금 어린 듯한 유녀의 색기에 홀려 이어진 술잔도 넙죽넙죽 받아먹기 급급했다.
그렇게 얼마나 술을 마셨을까.
“크흐, 그래. 끌끌……!”
“어머, 정말요?”
둘은 언제 무거운 이야기를 나눴냐는 듯이 각기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으며 술잔을 오갔고, 이윽고 노신이 유녀의 드러난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슬슬 야릇한 분위기를 잡아갈 무렵이었다.
타다다다다닥!
노신도 체면이 있기에 최소한의 호위만 남긴 채 비워둔 복도의 끝에서 다급히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에 자연히 둘은 멈칫한 채 시선을 문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노신의 얼굴은 와락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한창 역사를 쓰려던 와중이거늘, 대체 어떤 빌어먹을 놈이 방해한단 말인가!
“대체 어떤 놈……!”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갈을 터트리려던 그때였다.
콰아아앙!
“크, 큰일 났습니다!”
감히 주군이 허락하지도 않았거늘 거칠게 문을 열었다고 들이닥친 사무라이를 나무라기엔 사색이 된 그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으레 그렇듯이 평소와 다른 일탈에는 늘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서, 성밖에 마츠다이라 가(家)의 가몬을 단 군세가……!”
“뭐, 뭣이?!”
챙그랑!
사무라이의 말에 노신은 순간 귀를 의심한 듯이 되물으며 손에 쥔 술잔을 떨어트렸고, 그 직후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연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아…….”
와아아아아!
성벽을 올라가!
막아! 막으라고!
끄아아아악!
전각에서 내려보는 전황은 척 보기에도 그들에게 불리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 불을 지르다니!”
나름 튼튼한 요새라 생각했던 성 곳곳이 하늘을 덮을 듯이 쏘아진 불화살에 의해 불타고 있었고, 난생 처음 화공을 눈앞에서 본 노신의 아시가루들은 싸워 볼 전의조차 잃어버린 채 무기를 버리거나 도망치기에 급급한 것이다.
아니, 도망친 이들은 차라리 현명했다.
불을 꺼라! 아니, 일단 놈들부터 막……! 끄억!
몇몇 사무라이들이 아시가루들을 독려하며 공격을 막아내려 했으나, 그들은 곧 의문의 공격에 피를 흘리며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기습, 기습!’
이쯤 되면 바보라도 알 수 있다.
노신의 봉토, 그의 성은 지금 야습을 당한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무너질 위기라는 절망적인 현실을 말이다.
어찌 사무라이들이라고 그걸 모를까.
때문에, 그를 찾아온 사무라이는 외쳤다.
“어, 어쩌시겠습니까!”
“……아, 아아.”
노신은 답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에겐 이 혼란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매우 큰 일이었기에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과연 권력을 쥔 일말의 기량은 남아 있었는지, 그는 머지않아 혼란을 나름대로 잠재우곤 사무라이에게 말했다.
“시, 식솔들을 데리고 성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당혹감에 마른 입술 사이로 침을 삼키곤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이미 술기운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아니, 정확히는 만취한 몸뚱아리가 두려움에 흔들리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나갔다는 표현이 더 옳으리라.
‘오, 오다 가문에 가면 죽는다!’
그래도 꼴에 오다 가문에 몸을 담고 있다고 기요스로 달려가 몸을 의탁할 생각을 했으나 조금만 생각해도 그쪽은 자살이었다.
오다 노부나가. 그년이 어디 보통이던가.
비록 말로는 어린 년이 싸가지가 없네, 뭐네라고 말해도 그는 그녀가 두려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거침없는 성깔과 그것을 실행할 수많은 무장들의 칼날이 두렵다.
‘변변찮은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성을 빼앗겼다고 한다면 아마 조선 백정놈한테 내 목을 따라고 할 게 분명해! 아니, 아니지. 어디 내 목으로 끝이 날까!’
그 빌어먹을 년놈들의 성깔이라면 사촌은 기본으로 묶고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다.
때문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가와.”
“예?”
“이마가와한테 몸을 의탁한다. 밑에 있는 농민이든 아시가루든 다 성벽으로 던져서 시간을 끌고, 우리는 패물은 다 긁어모아서 이마가와 가문에 투항하는 게야.”
물론, 눈앞에 마츠다이라 가문이 있긴 하다.
하지만 비록 오다 가문 내부에선 밀려났다고 해도 아직 성 하나를 건사하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닌 정치력이었다.
‘마츠다이라의 어린 계집년은 어차피 이마가와 가문의 노리개나 다름이 없다. 그러면 차라리 본가에 투항하는 편이 더 나을 터!’
이왕 배신할 거라면, 비루한 늙은 몸뚱어리가 어디에 더 비싸게 팔릴지를 가늠하는 것이다. 애초에 그에게 충성 따위는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에 불과했기에 가능한 사고방식이었다.
계산은 빠르게.
행동은 더 빠르게.
“움직여!”
“아, 알겠습니다!”
노신의 일갈에 사무라이는 그나마 현실성이 있는 해답이라는 듯이 허겁지겁 움직였고, 곧 노신은 당황한 듯 묵묵히 서 있는 유녀를 떠올렸다.
어차피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찾으려면 짧아도 며칠, 길게는 몇 달을 움직여야 한다.
겸사겸사 시종을 들어주고 물도 뺄 계집을 하나 챙기는 편이 더 나으리라.
“너도 함께 가자꾸나, 일단 이 자리를 피하고…….”
그런 생각으로 노신이 고개를 돌렸다.
푸욱!
“꺽.”
아니, 돌리려 했다.
그 순간 목에 정확히 박힌 날카로운 단검과 함께 입과 코를 틀어막는 유녀의 부드러운 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끄르읅.”
핏물이 기도에 들어차는 신음과 함께 노신의 눈에는 ‘어째서?’라는 감정이 맴돌았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그의 숨이 멈출 때까지 기다리다가 이윽고 나지막이 속삭이니.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어르신.”
그 안에 담긴 것은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미건조한 닌자의 그것이었다.
털썩.
그녀는 노신의 시체를 무심하게 바닥으로 던져버리곤, 이제까지 그를 속이기 위해 했던 유녀 연기 따위 집어치우곤 허벅지와 속옷에 은밀하게 숨겨왔던 무기를 꺼냈다.
그러곤, 이내 신속하게 자리를 떠나며 속으로 하달받은 명령을 다시금 되짚으니.
‘성주 암살 후, 마츠다이라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의 진격로를 계속 살필 것.’
서, 성주님이 죽었다!
항복하겠습니다!
그녀가 막 성을 빠져나왔을 때, 성주가 죽은 것을 확인한 사무라이들이 항복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때문에, 막 성에서 벗어나 숲에 들어선 그녀는 무심결 뒤를 돌아본 채 미간을 좁혔다.
‘대체 어째서?.’
그녀도 자신이 한 일이 오다 가문에 당장 불리한 일이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거늘 상부에선 어째서 이런 일을 시킨 것일까.
하지만 의문은 잠시.
‘상관없지.’
그녀는 이내 미리 준비한 낭인의 의복으로 빠르게 옷을 갈아입으며 살짝 고개를 든 의문을 다시금 빠르게 가라앉혔다.
‘닌자는 그저, 주인이 시킨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것이 닌자의 본분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읊조린 채 숲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미카와 국 서부에 있던 데라베 성이 다시금 미카와의 품으로 되돌아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