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전란의 서막(6)
* * *
“그러니까 그런 경우에는…….”
“하지만, 일단 수성을 한다는 가정을 한다면…….”
회의는 밤이 다가옴에도 끝나지 않았다.
꽤 많은 수의 가신이 제각기의 이유로 자신의 봉토나 거처로 돌아갔지만, 일영을 비롯한 무장들은 여전히 기요스 내성의 회의실에서 밤을 세우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단순 전력상으로도 4배에서 5배 되는 적을 상대한다는 건 그만큼 쉬이 볼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도 사람인 이상 휴식은 취해야 했기에 오다 노부나가는 잠깐 회의를 쉴 것을 택했고, 일영은 그녀와 함께 천수각으로 올라와 간단히 식사했다.
“요시나리도 함께 했으면 좋았을 것을.”
“쩝, 그러게나 말입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말에 일영은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리 요시나리는 본가에 급히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웠다.
물론, 그녀가 하기엔 다소 묘한 말이긴 했다.
사랑하는 남자와 식사를 하는데 다른 여자가 없어서 아쉽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의 시선 아니겠는가.
‘……이미 한 남자를 같이 먹어본 입장에서 무슨 내숭을 떨고, 또 견제를 해.’
오다 노부나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은근히 조선식으로 차려진 반찬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문득, 그녀의 시선 끝에 일영의 얼굴이 들어왔다.
“음.”
오물거리는 입술.
맛이 썩 괜찮은지 살짝 커진 눈.
그러면서도 때때로 그녀를 응시하는 눈동자까지.
일영의 면면을 훑던 그녀는 이윽고 국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는 생각했다.
‘……차라리, 다른 년들을 견제하는 것이 더 옳겠지.’
노부나가는 무심결 입술을 훑다가 이빨로 잘근 깨물었다.
걸리는 년들.
……아니.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모리 요시나리는 애초에 그와 처음으로 배를 맞춘 관계이기도 하기에 그렇다고 쳐도 그의 주변에 어디 여자가 한둘이냐는 말이다.
……많지. 많고말고.
‘먼저 정략결혼을 제안한 노부유키.’
물론 언니인 그녀 자신을 도발하고, 또 히라테 가문의 양자인 그를 홀려 가문 내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던 수작질이었지만 말이다.
거기에 이미 혼인까지 약속했기에 그나마 너그럽게 넘어가 줄 수 있는 범위다.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시바타 가쓰이에.’
오니 시바타(???)라고 불릴 정도로 용맹한 무장이며, 잘은 모르겠으나 가린 얼굴 역시 빼어난 외모를 갖췄다 들었다.
그뿐인가?
미노에서 도망친 히메, 일명 노히메 ‘키쵸’는 아예 그에게 혼인해달라고 말하지를 않나, 니와 나가히데도 몇 번 같이 전장에 서더니 묘하게 의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하여튼,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여자가 꼬이는 것인지 아니면 제가 여우 짓을 하고도 뻔뻔하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 것인지.’
멈칫.
그때였다.
‘잠깐.’
질투가 담긴 투정을 속으로 삭히며 막 젓가락의 끝으로 생선구이를 집으려던 그녀는 무심결 그가 최근 다녀온 미카와아니 마츠다이라 가문에 대해 생각했고, 곧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으니.
‘모토야스도 여자잖아?’
일전 오다 가문에서 인질 생활을 하기도 했었던, 마츠다이라 가문의 당주이자 친했던 동생인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역시 여자라는 점이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호위인 핫토리 한조도…….’
핫토리 한조는 닌자라는 특성 덕인지 때문인지 얼굴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기에 넘긴다고 해도 모토야스는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충분히 귀엽고 예쁜 아이였다.
오죽하면 한창 망나니 소리를 들었던 그녀도 적대 가문인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앞에선 맥을 못 추렸을까?
‘생각해보니.’
거기에 걸리는 것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일영이 워낙 급하게 미카와로 향한 탓에 그녀는 그가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얼굴을 보러 다녀왔다는 사실 밖에는 알지 못했었던 것이다.
물론, 가늠되는 이유야 많았다.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에게 자신과의 친분을 빌미로 도움을 구한다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마가와 가문의 첨병이 된것이나 다름이 없는 마츠다이라 가문을 정탐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 그러겠지.
늘 자신을 위해 몸을 던졌던 그였기에 일말의 의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민하는 부분은 다름이 아니라…….
‘그럼 물어봐야 하나?’
이미 의도를 얼추 가늠하고 있음에도 그가 다녀온 이유를 묻는다면 일영이 혹여 그녀가 자신을 의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아니지. 그래도…….’
주군이 된 입장에선 충분히 물을 수 있는 물음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젠 부군이기도 한데?’
아직 식은 못 올렸다고 하나 배를 맞춘 순간, 아니 이미 기요스 도성 앞에서 선언한 순간 일영은 그녀의 부군이었다.
그런 관계인데도 캐묻듯이 물어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만약 그것으로 오해한다면? 그, 그건 싫은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니,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옳을까?
이미 그녀는 일영이 먹던 젓가락을 내려놓은 채 ‘의심을 하고 계셨군요. 실망입니다.’라고 말한 채 밖으로 나가 때마침 들어오는 모리 요시나리의 가슴으로 안정을 찾는 모습까지 보고 있었다.
깨작.
오다 노부나가는 멍한 눈으로 나무 그릇에 정갈하게 놓여 있던 나물을 몇 번이나 헤집었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일영은 무심결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뭐하십니까?”
“오해다.”
“예?”
당연히 일영은 그녀가 본 망상 속의 그가 아니었기에 그저 피식 웃으며 되물을 뿐이었고, 너무나도 태연한 그의 화답에 마찬가지로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던 그녀는 이내 자신이 본 것이 망상이었음을 깨닫고 탄식했다.
“아, 어……. 크흠.”
가뜩이나 하얀 피부가 살짝 달아오른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일영의 시선을 어색하게 피한 후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흠.”
“그렇습니까?”
잠깐 무슨 생각을 그리 했냐고 물으려던 일영이었으나 시선까지 피하는 모습에 그녀를 배려하기로 한 그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곤 때마침 식사를 마친 밥그릇을 탁자 위에 턱하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일전에 미카와로 갔었던 일 말입니다.”
“어?”
“이코마 상단의 도움을 받아 국경을 넘은 후, 마츠다이라 가문의 새 당주를 만나 이야기를 좀 나눴습니다. 덕분에 얻을 협력도 충분히 얻었고 말입니다.”
그런 일영의 말에 오다 노부나가는 순간 반짝인다기에는 깊은, 금색 눈동자를 살짝 깜빡거리다가 이내 새된 소리를 내었다.
“일이 잘 풀렸으니, 패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차하면 플랜 B, 아니 두 번째 계획도 준비했으니까요.”
물론, 일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왜 그러는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말을 끝마쳤지만 말이다.
당연히 노부나가는 바보가 아니었다.
때문에, 자신이 쓰임 따위는 하등 없는 고민을 했다는 것과 여기서 어색하게 답하면 더욱 어색해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는 손을 허리춤으로 내렸다.
다가올, 오와리의 미래를 결정지을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눈앞의 사내에 동화라도 된 것일까.
스윽, 타악!
허리띠 대신 묶고 다니는 밧줄에 동여져 있던 호리병 안에 담아놓은 술을 한 모금 입에 머금는다.
“그렇구나. 그럼 어떤 도움을 받아왔지?”
그리고 그에게 화답한다.
어느새 허황한 망상을 하던 여자는 사라지고, 전쟁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을 오다 노부나가만이 자리에 남아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마, 내부에서 반역을 획책하는 일이겠지.’
당장 떠오르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아니, 아마 대부분 일영이 미카와를 다녀와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를 만났다고 말한다면 같은 예상을 하며 이번 전쟁에서 오다 가문의 승패를 점쳐 볼 것이었다.
그리고 그너 오다 노부나가 역시 마찬가지.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마츠다이라 가문이 내부에서 봉기한다면 오와리로 진입한 이마가와 가문은 앞뒤로 막히는 형세가 되기에 충분히 놈들을 섬멸할 수 있었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이마가와 요시모토도 바보는 아닐 테니, 마츠다이라 가문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겠지.’
이마가와 가문의 거점인 스루가 국의 수도, 슨푸에 인질로 잡혀 있는 친족들은 물론 어쩌면 미카와라는 영토 역시 잃을 수 있을 정도로 위험이 큰 작전이었다.
“솔직히 믿기 힘들구나. 히카게. 모토야스, 그 아이가 그런 결정을 내리게 설득하는 것이 가능할 줄은…….”
때문에, 그녀는 큰 결정을 내렸으리라 생각되는 옛 동생을 떠올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이십니까. 당주.”
“응?”
아니, 말하려고 했다.
“반역 같은 건 없습니다. 마츠다이라 가문이 호구도 아니고 그런 것을 해주겠습니까?”
식사를 마친 일영이 태연하게 찻잔을 들고 입을 가시고 있는 모습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당연히 그녀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뭘……?”
내부에서 호응하는 것이 아니면 대체 무엇을 거래하고 왔다는 말인가?
그런 의문은 당연한 것이다.
비단 그녀만이 묻는 것도 아니었고, 여기엔 없는 거래의 당사자인 모토야스 역시 그것을 짐작하며 섣불리 거절했다가 이내 그것을 사과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확실한 건 하나.”
이번에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녀와 한 거래는 너무나도 간결하고도 애매한, 서로 존재하지도 않는 신뢰를 바탕으로 저지른 일이었지만 일영은 확신했다.
“마츠다이라, 아니…….”
후룹.
“관동의 너구리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마지막 남은 찻물을 입안에서 굴리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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