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전란의 서막(1)
* * *
일영, 아니 히라테 히카게가 모토야스에게 남긴 편지에는 어디서 언제 만날지 적혀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우려는 머잖아 사라졌으니.
채 하루가 지나기 전, 언제 섞였을지 모를 쪽지가 다과 밑에 깔려 간략하게 약속 장소를 알려왔기 때문이었다.
오늘 축시(01시~03시), 뒷산의 폐 사찰로.
“폐 사찰이라.”
꽤 유려한 필체로 적혀있는 종이의 내용을 가녀린 손가락으로 한번 가볍게 훑은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는 이윽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히라테 히카게라는 사내는 알까.
종이에 적힌 이 시간에 폐 사찰까지 가는 것이 늘 감시받다시피 하는 자신에게 얼마나 크나큰 부담이고 모험인지를 말이다.
‘모르진 않겠지.’
애초에 첫 쪽지와 두 번째 쪽지를 이렇게 비밀리에 보냈다는 대목부터 히라테 히카게는 그녀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대략 가늠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핫토리 한조 역시 그것을 눈치챘는지 다소 조심스러운 눈으로 모토야스에게 말했다.
“……위험이 너무 큽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물론, 히라테 히카게라는 사내의 명성은 미카와 국에도 닿을 만큼 꽤 대단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뿐, 모토야스에겐 그저 옛적 오다 가문의 인질 생활 시기 친하게 지냈던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 부군이 되었다고 했던가?’
그렇다고 한들 이 부름에 응할 이유는 없었다. 조부의 말씀이라는 대목이 조금 걸리긴 해도 자칫 이마가와 측에 밉보일 정도로 큰 부담을 안아야 할 정도로 그녀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아니, 애초에 이 명분이 사실이긴 할까? 그것마저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모토야스의 입꼬리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재미있네.”
“예?”
재미있지 않은가.
모토야스는 반문하는 핫토리 한조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윽고 밖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간략하게 속삭이니.
“준비해. 나가야겠어.”
그녀의 말을 들은 핫토리 한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인 채, 야밤에 그녀를 빼낼 길을 미리 확인하기 위해 곧바로 자리를 비웠다.
또 한 번의 반문이나 설득은 없었다.
‘주군의 명은 절대적인 것.’
언제나 주군의 명령은 절대적이니 말이다.
핫토리 한조는 일전에 읊조렸던, 핫토리 가(家)의 명운을 그녀에게라는 구절을 다시금 속삭이며 빠르게 전각 밖으로 나갈 길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
찌리리, 찌리리.
오오오옹…….
풀숲 사이에 숨어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가지에 앉아, 새벽이슬에 몸을 여미며 낮게 울어대는 올빼미의 울음이 귓가를 스친다.
스산한 새벽녘의 바람이 뺨을 지나 허공을 맴돌았다.
머지않아 바람은 일영과 아케치 미쓰히데를 지나 폐 사찰의 기울어진 문에 닿았고, 곧 끼긱하는 섬뜩한 소리가 야밤의 산속에 울려 퍼졌다.
새벽이라 그런가.
살짝 쌀쌀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때문에, 일영은 겉에 입은 옷을 여미며 살짝 손을 비비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힐끔 바라보곤 시간을 가늠했다.
‘대충 1시 30분 정도인가.’
그들이 폐 사찰에 도착한 것은 대략 12시 30분 즈음이었고 약 1시간 즈음을 기다렸으니 얼추 그 정도 시간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시계가 없기에 달빛과 자체적인 추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늦는데.’
일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일전에 조사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처소 쪽을 응시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쪽에서 올라오는 산길을 바라본 것이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후우. 정말 올까요?”
아케치 미쓰히데는 쌀쌀한 몸을 옷으로 더욱 여미며 일영에게 물었지만, 이번엔 딱히 확신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곤 답했다.
“글쎄……. 이왕이면 와주면 좋겠는데.”
이번에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지 못하면 기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마츠다이라,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이마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은 아직 전쟁 중이 아니었으나 거의 직면해 있는 만큼, 상인의 호위로 암행하는 것도 일영에게도 큰 부담이었던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또 온다면 꼬리를 잡힐 가능성이 커. 놈들도 아예 머저리들은 아닐 테니까…….’
이번 일만큼은 일영도 나름의 도박을 건 만큼, 그는 괜히 마른 입술을 혀로 한번 가볍게 훑으며 생각했다.
결국 이번에 최상의 기회다.
아니, 사실 이미 일영은 이번이 마지막 잠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 나오면 좀 곤란한데 말이지.’
물론,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고 그가 그린 큰 그림이 전부 어그러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획한 그림을 그대로 가져가려면 그녀가 나와야 한다는 것은 엄연히 사실이었기에 그는 내심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찌리리, 찌리리…….
지치지도 않는지 울어대던 풀벌레 소리조차도 서서히 멎어갈 때가 되고, 일영은 잠시 달빛을 바라보곤 앉아 있던 폐 사찰에서 일어나 가볍게 먼지를 털었다.
탁, 타악.
오랫동안 쓰이지 않아서 그런지, 나뭇잎은 물론이고 벌레의 시체나 흙먼지가 뒤엉킨 것들을 가볍게 털어낸 일영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곤 말했다.
“돌아가…….”
아니, 말하려 했다.
사박.
그 순간 귓가를 스치는 인기척과 함께, 언덕 아래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후하, 조금 늦었네요.”
미성이라고 하기엔 앳되고, 아이라고 하기엔 사뭇 성숙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다.
일영은 자리에서 일어난 그 모습에서 그대로 멈춰서 서서히 가까워지는 그림자를 응시했고, 곧 예상했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오해를 사지 않게 천천히 손을 들어 머리에 쓴 진가사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마터면 엇갈릴 뻔했군요.”
“그래도 기다려주셨네요. 사실 이미 갔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럴리가요.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한 일영은 어느새 폐 사찰의 마당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의 모습은 어째서 늦었는지 이해가 되는 몰골이었으니까 말이다.
일영은 크흠하고 낮게 기침을 하곤 말했다.
“몰래 나오는 것이 꽤 힘드셨나 봅니다.”
“……예.”
마침내 달빛이 둘의 모습을 비춘다.
덕분에 일영의 앞에 온전히 모습을 드러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는 그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뺨에 묻은 하천의 모래를 살짝 털어내며 말했다.
“몰래 나오다가 들킬 뻔해서, 하천에 잠시 숨었거든요. 하핫.”
하지만 그녀의 몰골은 차라리 나았다.
핫토리 한조는 검은 옷임에도 물에 젖은 것이 대놓고 보였기에 아케치 미쓰히데조차도 은근히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큼.”
일영 또한 그녀를 의도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암행복이 젖으며 몸의 굴곡을 여과 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천에 빠졌을 당시, 모토야스를 그녀가 감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
“…큼.”
거진 2시간을 넘게 기다린 일영.
상대를 만나러 엉망인 채로 온 모토야스.
둘 다 어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한동안 정적이 폐 사찰의 공기 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그런 묘한 정적도 잠시, 일영은 아주 자연스럽고도 능숙하게 입을 열어 침묵을 깨고 본론을 꺼냈으니.
“어찌 되었든지 나오셨으니, 제가 전한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고 해석해도 괜찮겠습니까?”
“달리 이유가 있을까요?”
그의 말에 모토야스는 답했다.
애초에 일영이 그녀라는 물고기에게 던진 떡밥의 내용이 바로 그것 아니었던가.
“그래서, 우리 조부께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기에 제게 그런 쪽지를 보내신 거죠? 생각해보면 당신은 저희 조부와 연도 없을 텐데 말이에요.”
그녀 특유의 갈색과 금색이 섞인 듯한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동시에 매우 합리적이고, 그녀가 당연히 할 수 있는 의문을 내뱉는다.
“설마, 그 먼 조선에서 들었을 리도 없고 말이에요. 제 말이 틀렸나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웃었다.
동시에, 핫토리 한조는 의도적인지 아닌지 모를 움직임으로 역수로 쥔 단검의 날에 달빛을 반사 시켰다.
“감히…….”
뻔하디뻔한 도발이다.
하지만, 아케치 미쓰히데는 참지 않고 마찬가지로 검의 손잡이를 틀어쥐곤 핫토리 한조를 마주 바라보았다.
다소 어색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모한다.
하지만 정작 그 주체인 일영은 자신에게 의문을 담아 묻는 모토야스의 물음과 핫토리 한조의 적대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말했으니.
“틀린 말은 없습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으니까요.”
“무슨…….”
그의 말을 들은 핫토리 한조는 미간을 좁혔다. 어찌 사람이 저리도 뻔뻔하단 말인가.
하지만 그때였다.
“오.”
그녀는 문득 곁에서 울리는, 익숙하고도 귀에 익은 목소리로 터트리는 감탄사에 시선을 내렸으니.
“흥미롭네요. 더 해보세요.”
그건 다름이 아닌, 모토야스의 목소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