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미카와로(2)
* * *
“허.”
한 손에 조악한 단검을 쥔 채, 멍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던 상인은 입을 벌리며 얼빵한 표정으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그가 일영에게 접근한 이유는 입으로 내뱉었던 것과는 다른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상인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평소 눈썰미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그는 달랐다.
평소 만났던 낭인들과 느낌이 다르다.
단순하게 허름한 옷을 입는다고 전부가 아니다.
시로이와 모모마루라고 불린 그들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하관만 보더라도 숨길 수 없는 귀티가 났다고 할까.
……그리고 그의 추측은 대화를 나눈 직후, 확신에 가깝게 변했다.
그가 꺼낸 돈은 통상적으로 오가는 보수보다 훨씬 적었음에도 그는 크게 개의치 않고 그것을 받았다.
즉, 원래 낭인으로 일하던 이가 아니라는 뜻이다.
‘제일 잘 싸울 거 같다는 말. 당연히 거짓말이었는데.’
그저 상대를 치켜세우기 위한 아부 섞인 말이었을 뿐이었다.
애초에 싸움이라곤 해본 적도 없고, 그저 제 몸 하나 지킬 작정으로 조악한 단검이나 들고 다니는 상인 나부랭이가 무슨 낭인의 무력을 가늠하겠는가.
그저 바란 것은 하나.
‘뭔가 있어 보여서, 친분이나 쌓을까 했던 거였는데……!’
겸사겸사 호위로 보이는 이들에게 함께 보호를 받으면 더 좋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척 보기에도 덩치가 좀 좋은 거 말고는 귀하게 자란 듯 보이는 사내가 대뜸 검을 뽑고 앞으로 걸어가자 그는 말려야 하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말리기도 전에 웬 우락부락한 놈이 핏물이 그득하게 묻은 갑주를 입고 사내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본 상인은 곧 그의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사무라이니, 뭐 다이묘니 하는 윗사람들은 모른다. 오래 도적 생활을 한 놈들은 그 자체로 인간을 죽이고 해하는 데에 전문가가 되어있는 법이라는 걸 말이다.
끄르르륵!
그러나 그의 생각은 곧 일영이 단 한 수만에 거구의 도적을 죽임으로써 부정되고 말았다.
아니, 그뿐인가.
“흐읍!”
이어지는 공격을 흘리고, 도적들이 어찌할 새도 없이 목숨을 수확하는 것은 비단 일영 뿐이 아니라 다른 낭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들의 진짜 정체는 히라테 가(家) 소속 사무라이들이었지만 말이다.
수준의 차이라는 것이 있다.
도적들이 주로 베고, 싸운 것은 기껏해봐야 어설프게 검을 배운 낭인들이거나 제 한 몸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쥔 농민들이다.
그들에게 도적들은 공포의 대상이다.
하지만, 당장 근 몇 년 사이에 수없이 많은 전장을 오가며 적들의 피를 대가로 살아남은 사무라이들에게 도적들의 움직임은 어지간한 아시가루보다 못한, 허우적거림일 뿐이었다.
“커헉!”
“이, 이게 무슨?!”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순식간에 30명이 넘던 도적의 수가 20여 명으로 줄고 말았다.
그에 반해 상인들은커녕 그들을 호위하는 낭인들은 단 한 명도 당하지 않았다.
“뭐, 뭐시여?”
“낭인들 맞어?”
그 압도적인 전력 차에 도적들은 물론 상인들도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저, 저 덩치 큰 놈부터 죽여!”
이윽고 도적 중 한 명이 너무나 여유롭게 도적들을 도륙하는 일영을 가리키며 이를 악물며 외쳤고, 곧 다른 이들에 비해 꽤 우수한 무장을 갖춘 몇몇 도적들이 일제히 그를 노리고 무기를 휘둘렀다.
“죽어라아!”
창이라고 부르기도, 또 언월도라고 부르기도 모호한 무기를 든 놈이 일영의 어깨를 노리고 긴 궤적을 그렸다.
그러나, 그 순간 일영은 단 두 발자국을 옆으로 움직임으로서 그 공격을 피하고 입을 열어 외치니.
“모모마루!”
“흡!”
일영의 외침에 곧바로 도약한 모모마루아케치 미쓰히데는 대지를 미끄러지듯 내달려 놈의 허리를 베었다.
“커헉!”
복부는 수많은 장기가 있기에 자그마한 상처라도 치명상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놈은 당황하며 그녀의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일개 도적 따위가 사이토 가(家)의 무장들에게 사사받은 아케치 미쓰히데의 검격을 막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허, 허리가!”
조악한 갑주 사이로 핏물이 흐르고, 놈은 고통과 급격히 빠져나가는 핏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물러서진 않고 다시금 일영을 향해 창을 내지르려던 찰나였다.
“흡!”
일영은 놈이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 빠르게 파고들어 검의 손잡이 끝으로 턱을 가격했다.
퍼억!
“컥!”
둔탁한 소리와 함께 놈의 시야가 흔들렸고, 그 순간 일영은 빠르게 검을 쥔 방향을 틀어 놈에게 속삭였으니.
“잘 가라.”
“자, 잠깐!”
죽음의 공포를 느낀 도적이 아무리 애절하게 외친다고 한들, 그에게 와닿지는 못했다.
푸욱!
일영은 정확히 갑주의 빈틈으로 검을 찍어 내렸고, 곧 정확히 심장에 박힌 검은 그의 손길을 따라 비스듬하게 돌려지며 그대로 뽑혔다.
“끄르륵…….”
심장을 찌르며 역류한 핏물이 입가로 흘러나오고, 일영은 검을 뽑고 가볍게 털었다.
그 사이, 일영의 호위무사들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기에 도적들의 수는 몇 명이 더 줄어 이제 채 20명이 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 그들의 피해는 미처 공격을 피하지 못해 얕은 상처를 입은 상인 몇 명과 진짜 낭인들이 전부였다.
“……무, 무슨.”
“…….”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정적이 흘렀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치고 지금 상황을 예상할 수 있던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허어.”
상인들은 이코마가 붙여준 낭인들의 수준에 놀라면서도 우리가 이 정도 대우를 받을 급이었나에 대해 고민했고.
“무, 무슨 낭인 새끼들이.”
도적들은 다이묘들에게 몸을 의탁하지도 못한 채 전국을 떠도는 낭인들에게 이토록 압도적으로 밀렸다는 사실에 어찌할 방법도 없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스륵.
일영은 살짝 벗겨진 진가사를 더욱 깊게 눌러쓴 채로 도적들을 향해 입을 열었으니.
“자.”
그의 하관에 튄 핏물이 갸름한 턱선을 따라 흐르고, 그는 섬뜩하리만큼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정해.”
동시에 아케치 미쓰히데는 그를 따라온 5명의 호위들에게 눈짓했고, 곧 제각기 도적들을 죽인 그들 역시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와 일영의 곁에 섰다.
“투항하든지, 전부 죽든지.”
대략 20명의 도적과 단 7명의 낭인.
혹자가 본다면 낭인들의 불리함을 성토하겠지만, 정작 그 앞에 선 도적들은 그저 몸을 떨며 선택을 강요당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투, 투항하겠습니다.”
도적단의 수괴로 보이는 놈이 제일 먼저 손에 쥔 일본도를 바닥에 내려놓음으로써 상황은 단 10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
도적들은 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밧줄로 몸이 묶인 채, 마침 가까운 마을이 있어 그곳에 넘기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물론, 모두 죽이자는 이야기도 나오긴 했으나 일영이 유한 웃음을 지으며 반대하자 그 화두는 순식간에 가라앉고 말았다.
당연한 일이다.
고용된 입장이었지만, 일영의 무력은 상인과 낭인들 너나 할 거 없이 모두 직접 보았으니 말이다.
다른 상인들 역시 바보가 아니다.
일영을 비롯한 그를 따르는 나머지 낭인들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일영은 바뀐 분위기를 전혀 개의치 않고 잠시 도적단의 수괴로 보이는 이에게 물을 것이 있다며 상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를 끌고 숲으로 들어갔다.
저벅.
일영은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그를 데리고 숲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남자는 일영에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것인지.”
“닥쳐.”
그러나 그 순간.
일영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은 조금 전 부드럽게 살려주라 했던 것과 다른 싸늘하고도 서늘한 경고였다.
“……예.”
포식자 앞에 서 있는 피식자가 이런 걸까.
수없이 많은 이들을 죽이고 약탈했던 도적 두목조차 몸을 떨며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 얼마나 걸었을까.
일영은 적당히 상인들에게서 멀어진 곳에서 멈춰섰고 곧 허리에 넣어 두었던 검을 스릉하고 뽑았다.
푸른 빛이 번뜩인다.
“……살려주십쇼!”
그러자 도적 두목은 언제 약탈을 하려 했냐는 듯이 그대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얼었던 흙이 녹아 진창이 된 바닥인지라 머리가 더럽혀졌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당장의 목숨을 구명하는 것.
그것이 그가 바라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일영은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약탈하고 죽이던 놈이 자신이 죽을 때가 되니 망설임 없이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은 심히 역겨웠으니까 말이다.
스윽.
일영의 칼날이 바닥에 엎드린 놈의 목에 닿았다.
“지금부터 질문을 할 거다.”
일영은 단번에 놈을 베어버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놈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화답했다.
“알겠습니다! 아는 대로 전부 대답하겠습니다!”
덩치에 맞지 않을 정도로 비굴하고 한심한 외침이었으니. 때문에, 일영은 놈을 경멸 섞인 얼굴로 응시하면서도 물음을 던졌다.
“미카와 상황에 대해, 사소한 소문이라도 들은 걸 전부 말해봐라. 네 정보가 가치가 있다면 살려주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