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폭풍전야(2)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머,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일영은 두 여인에게 간결한 인사를 건냈다. 그러자 둘은 곧바로 전각 안쪽으로 그를 안내해 자리를 옮겼다.
덕분에 그는 전각 내부를 꽤 자세히 살필 수 있었고, 곧 그녀들이 머무는 이곳이 히라테 가에 비해서도 그리 뒤떨어지지 않음을 확인하고 미묘한 감상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다 노부나가가 두 여인을 대하는 것이 소홀하지 않다는 걸 뜻하는 말이 아닌가.
노히메. 그리고 이코마 키츠노.
원래의 역사였다면, 두 여인 모두 오다 노부나가의 여자들이었으니까 말이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긴 지 얼마나 되었을까. 복도를 지나 그녀들을 마주했던 곳보다 더욱 안쪽에 다다르자 곧 시종들이 문을 열어주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곳입니다.”
일영은 방 내부를 훑었다.
간단한 다과가 올려진 작은 반상이 전부였으나, 척 보기에도 꽤 신경을 쓴 티가 났다.
때문에, 그는 고개를 조아린 여 시종들에게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맙네.”
이곳에서 지난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일까.
이젠 구태여 신경을 쓰지 않아도 하대가 꽤 자유롭게 내뱉어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에게 인사를 건네받은 시종들은 남몰래 얼굴을 붉혔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각자 자리에 앉은 그들은 곧 차를 따르고 시종들이 밖으로 나가자 서로를 마주며 시선을 나눴다.
“…….”
찰나의 정적이 흐른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연 것은 다름이 아닌 은발에 은안을 가진 노히메키쵸였다.
“큰일을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녀는 앞에 놓인 다과는 쳐다도 보지 않고, 왜인지 조금은 수척해진 일영을 걱정이 섞인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아마 스에모리에 관한 일을 들은 것이리라.
“운이 좋았습니다.”
진심이었다. 과정은 조금 삐걱거렸으나,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일이 잘 풀렸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잘은 모르지만, 정말 다행입니다. 오와리에서도 혹 미노와 같은 일이 벌어질까 우려했어요.”
하지만 노히메의 얼굴엔 여전히 걱정이 깊었다. 그리고 일영은 곧 그것이 이젠 노히메라고 불리는 키쵸의 트라우마에서 기인했다는 걸 깨닫고 쓰게 웃었다.
‘미노는 솔직히……. 콩가루이긴 하지.’
오와리라고 다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꽤 좋은 결말이 난 오와리와는 달리 미노는 최악의 결과가 났으니까 말이다.
딸이 아비를 죽이고 권력을 찬탈했다.
따르지 않는 이들을 모두 죽였고, 심지어 권력을 포기하고 도주하는 혈육마저 자객을 보내 목숨을 끊으려 하지 않았는가.
때문에, 일영은 어떤 말로 그녀를 위로할지 몰라 말을 골랐다.
그러나 그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일영의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아케치 미쓰히데가 입을 열었다. 이제 일영에게 묶인 그녀가 주군이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입을 연 것은 엄연히 주제를 넘는 짓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개의치 않고, 선명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미노에도 곧 봄이 올 것입니다.”
구태여 많은 말을 나열하진 않았다.
그러나, 가족을 모두 잃었다는 공통점을 가진 아케치 미쓰히데와 노히메는 서로를 바라보며 위안을 얻었다.
“그럴 겁니다.”
일영이라고 어찌 모를까.
때문에, 그는 구태여 아케치 미쓰히데를 나무라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
“……으음.”
다소 무거운 이야기를 나눠서일까.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고, 일영은 언제쯤 본론을 꺼낼지 가늠하며 찻잔을 쓸었다.
그때였다.
“그런데 한창 바쁘신 히라테 공이 단지 안부를 전달하러 오시진 않았을 거 같고…….”
조용히 두 남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코마 키츠노가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일영과 시선을 마주했다.
갈색빛이 도는 그녀의 시선이 일영에게 닿고, 그녀는 선뜻 말해보라는 듯이 일영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환기하고, 그에게 말을 꺼낼 기회를 주었다. 덕분에 일영은 역시 연상은 다른가 따위의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만 노히메님이 아니라 이코마 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어머, 저요?”
그러나 그런 그녀의 도움에 내뱉어진 말이 꽤나 의외였는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일영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코마님께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어. 그럼 잠시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노히메라고 어찌 눈치가 없을까.
그녀는 일영이 이코마 키츠노와 단 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어함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고, 그런 그녀의 물음에 일영은 다정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얘기가 끝날 때까지 적적하시지 않게 아케치를 붙여드리겠습니다.”
“아……! 네!”
다행히 정답인 듯싶었다.
일영은 꽤나 좋아하는 노히메의 모습에 여동생을 바라보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아케치 미쓰히데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고개를 숙인 채 노히메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끼이익, 탁!
그렇게 노히메와 아케치 미쓰히데가 밖으로 나서자, 꽤 넓은 방에는 일영과 이코마 키츠노, 그리고 호위를 위한 이츠키만이 남게 되었다.
스윽.
일영은 손을 뻗어 찻잔을 쥐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이코마 키츠노는 여전히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말을 꺼냈다.
“그래서, 부탁하실 게 뭐죠?”
이코마의 말에 일영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갈색빛이 도는 머리와 눈은 여느 미인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조금 처진 눈은 그녀의 인상을 언뜻 유약하다고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다만, 일영은 그녀를 쉽게 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전에 노히메를 데려오던 그때, 함께 사지를 넘었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보통의 여인이라면, 보일 수 없는 반응이었지.’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은, 조금 전 자신의 의도를 간파함으로써 확신이 되었다.
“일단, 먼저 여쭤보겠습니다.”
때문에 그는 구태여 말을 돌리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런 일영의 말에 이코마 키츠노 역시 좋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께선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일영의 말에 이코마 키츠노는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차를 마시기 위해 찻잔을 쥐었다. 그러자 살짝 뜨겁게 달아오른 찻물이 그녀의 손을 데웠고, 곧 그녀가 입에 잔을 가져대려던 그때.
“다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일영 역시, 찻물이 들어있는 찻잔을 쥔 채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미노와 오와리, 미카와, 토토우미, 스루가…….”
그가 나열한 곳은 이코마 상단이 상행하는 곳 중 오와리 일대를 감싼 지역들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찻물에서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그를 응시했고, 일영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곳 중에. 아니.”
그리고 뒤이어 그가 내뱉은 말은.
“어느 영지를 가진 다이묘가 교(교토)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코마 키츠노 역시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누가 교(교토)에 다다를 것인가.
그것은 달리 말하면, 누가 쇼군에 닿을 것 같냐는 물음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이코마 키츠노는 여전히 웃은 낯으로……. 그러나 조금은 경직된 표정으로 그에게 답했다.
“일개 미망인이자 상인이 답하기엔 너무나도 무거운 주제인 듯한데요.”
“글쎄요. 일개 상인이라.”
하지만, 이미 대화를 꺼낸 순간부터 일영은 그녀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이번 일을 위해선 그녀가 필요하니까.
“다이묘들의 입장에서 상인들은 쉽사리 적대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당장 칼과 총으로 겁박을 한다 한들,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무리 막강한 다이묘라고 한들, 열도 자체를 삼키지 않는 한 쉽사리 상인들을 적대할 수 없다.
“전쟁을 위해선 물자가 필요하고, 그것을 충원해주는 상인들을 어찌 적대하겠습니까.”
식량이야 자급자족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란 단순히 병사들을 배불리 먹인다고 끝이 아닌 것이다.
“입힐 갑옷이 있어야 하고, 쏘게 할 화살이 있어야 하며, 말과 여물이 있어야 하지요.”
전란의 시기가 도래하면, 득을 보는 것은 권력자와 상인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괜히 미국이 2차 세계 대전에서 돈을 쓸어 담았겠는가.
말이 길어졌지만, 요점은 하나다.
탁.
“말을 바꾸죠.”
그리곤, 곧 그녀와 시선을 맞춘 채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꺼내 들었으니.
“오다 노부나가를 택하십시오.”
일영은 자신의 말에 답하지 않고, 묵묵히 응시하는 이코마 키츠노의 시선을 무덤덤하게 넘기며 손에 쥔 찻잔을 내려놓았으니.
“절대 후회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곤, 자신감으로 가득찬 웃음을 흘렸다.
“……정말.”
때문에, 그런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코마 키츠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고는 입을 열었으니.
“그거 알아요? 당신은 상인을 했어도 잘 했을 거라는 거.”
“예?”
그건 일영으로선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대답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