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폭풍전야(1)
* * *
일영의 부름에 시바타 가쓰이에는 내심 거리가 꽤 됨에도 단번에 알아본 것이 기분이 좋은지 성큼 다가오며 답했다.
“예, 접니다.”
일영에게 다가온 시바타 가쓰이에는 하관을 가리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환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특유의 딱딱한 말투가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이제 꽤 친해진 덕인지 아니면 앞으로 같은 깃발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 덕분인지 한층 살가워진 느낌이었다.
“운신의 자유가 있으시군요.”
“덕분입니다.”
때문일까.
‘……!’
평소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던 일부 사무라이들은 내심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일영과 시바타 가쓰이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
한편, 시바타 가쓰이에는 일영의 곁에 서 있는 아케치 미쓰히데와 이츠키에게도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고, 이내 일영이 묻기도 전에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건 다름이 아닌 도타 고젠에 관한 이야기였다.
“도타 고젠님과 오이치님께서는 스에모리에 있으십니다. 아마 노부나가……. 아니, 노부나가님과 노부유키님께서 대략적인 협상을 끝내시면 그때 들르실 듯싶습니다.”
도타 고젠.
전대 당주인 오다 노부히데의 처(?)이자 오와리의 차기 당주 자리를 두고 싸운 자매의 어머니인 그녀는 일단 대외적으로 두 자매의 다툼에는 책임이 없었다.
물론, 그게 눈 가리고 아웅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칫 일이 잘못 처리되면, 훗날 오다 노부나가의 정통성에 흠이 갈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습니까.”
그 점을 어찌 일영이라고 모를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시바타 가쓰이에를 무심결 훑어보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띤 채로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다름이 아닌 일영의 시건이다.
때문에, 시바타 가쓰이에는 갑작스러운 그의 시선에 괜스레 볼을 붉히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스윽.
일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로 향했고, 순간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바타 가쓰이에는 무심결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러나 그 순간.
톡.
“잘 쓰고 다니시는군요. 어림짐작으로 맞춘 거라서 혹시라도 안 맞을까 걱정했는데.”
일영의 손이 시바타 가쓰이에의 가면, 그중에서도 오니(도깨비)의 코 부분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
그제야, 시바타 가쓰이에는 일영이 자신을 본 게 아니라 스스로 선물한 가면을 확인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다행히 가면을 썼기에, 일영은 그저 눈동자를 굴리는 그녀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만을 흘릴 따름이었다.
‘…….’
‘……어.’
한편,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아케치 미쓰히데와 이츠키는 생각했다.
‘만약 저게 정말로 의도 없이 던진 거라면, 조선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던 건 아닐까?’
왜, 그런거 있지 않은가.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이라거나…….
흔히 경국지색(?國之色)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나라를 망하게 할 만큼의 미인이라고 말이다.
이츠키와 아케치 미쓰히데는 거의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생각임을 알지만 왜일까.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이 아닐 것 같은 이 느낌은.
물론, 그동안 일영을 곁에서 지켜본 둘은 알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정말 마음에서 우러져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걸 말이다.
‘만약 저게 연기라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엄청나게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어?”
그렇게 이츠키와 아케치 미쓰히데가 각자만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왜인지 모르게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던 아케치 미쓰히데는 문득 시선을 들자 보인 여자를 응시했고, 곧 그녀의 정체를 깨닫고 무심결 그녀의 이름을 읖조렸다.
“모리 공?”
“아!”
모리 요시나리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중얼거림에 웃음을 지으며 일영을 향해 달려왔고, 곧 시바타 가쓰이에와 대화를 나누던 일영 역시 그녀를 발견하곤 시선을 옮겼다.
“요시나리.”
“일영!”
일영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줬기 때문일까.
요시나리는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달려왔고, 이내 그의 팔짱을 낀 채로 배시시 웃었다.
“헤.”
살짝 달아오른 뺨.
고개가 돌아갈 때마다 살짝씩 흔들리는 회색 묶음 머리는 그녀가 가진 강아지 같은 매력을 한층 더 부각 시키기에 충분했다.
때문에, 일영은 그런 그녀를 애정이 담긴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당주님께서 부르셔서요. 히.”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이제 둘 다 직위가 있기에 존대를 입에 담음에도 거리감은 오히려 한없이 가까웠다.
……그 때문일까.
잠시 그 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던 시바타 가쓰이에는 마치 누구보고 들으라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백 공께서 직접 장인께 부탁하셔서 선물해주신 이 오니 가면이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데, 혹 제가 보답해드릴 길이 없겠습니까?”
어딘가 쓸데없는 미사여구가 많이 붙었다.
그것을 느낀 이츠키와 아케치 미쓰히데는 눈동자를 굴리며 모리 요시나리의 표정을 살폈고, 아니나 다를까.
“…….”
일영을 바라보며 꿀이 떨어지는 회색 눈동자에는 묘한 불쾌함이 섞였고, 곧 시바타 가쓰이에 역시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묵묵히 시선을 마주했다.
한편, 그런 두 여자의 신경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영은 시바타 가쓰이에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다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
“딱히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호의를 받기만 한다면 제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런 그녀의 말에 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때문에, 그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그녀에게 말했다.
“생각을 조금 해보고, 추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언뜻 듣기엔 완곡한 거절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시바타 가쓰이에는 일영이 한 입으로 두말을 할 사내가 아님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모리 요시나리 역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고 말이다.
덕분에 이츠키와 아케치 미쓰히데를 비롯한 호위무사들이 그나마 잘 해결이 됐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였다.
“아, 그런데 일영.”
모리 요시나리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힐끔 바라보다가, 이윽고 배시시 웃으며 일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 자리에 있는 이들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나긋이 물으니.
“아기 이름은 정했어요?”
“어……?”
당연히, 시바타 가쓰이에를 비롯한 모두가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
모리 요시나리는 그 말을 끝으로 어딘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천수각으로 들어갔고, 그 모습을 난감하게 지켜보던 일영의 모습에 시바타 가쓰이에 역시 간단한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덕분에 일영은 뒤늦게 두 여자가 신경전을 했음을 깨닫고 쓰게 웃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이츠키는 말했다.
“……업보이십니다.”
차마 일영은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다.
어찌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내심 자신이 눈치가 없는 편인지 고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는 왜인지 게슴츠레한 눈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터벅.
다만, 그가 향한 곳은 히라테 가(家)의 저택이 아니라 성 내의 거주구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경비를 서던 사무라이들과 아시가루들은 곧 일영을 발견하고 황급히 달려왔고, 곧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히라테 공을 뵙습니다! 여긴 어쩐 일로…….”
“안에 둘 다 계시나?”
“예. 계십니다.”
“뵙고자 한다고 전해라.”
“예!”
그의 명령에 사무라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전각 안으로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곧 안에서 시중을 들던 여시종이 나와 예를 갖춘 몸짓으로 일영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일영은 구태여 답하지 않고, 단지 고개를 끄덕인 채로 전각 안으로 향했다.
저벅.
내딛는 걸음에 채이는 돌과 자갈, 흙이 바닥을 구르고. 그는 곧 중정이 보이는 마루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여인을 확인하곤 자세를 바로했다.
“히카게님!”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에 은안을 가진, 체구가 작아 히메(ひめ : 아가씨)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키쵸는 오랜만에 보는 일영이 반가운지 환하게 미소를 지었고.
“히라테 공.”
갈색빛이 도는 중단발에 성숙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이코마 키츠노는 특유의 여유로운 자태를 흘리며 그를 반겼다.
때문에 일영은…….
스륵.
“노히메님, 이코마님.”
품이 넓은 소매를 손으로 끌어 잡고, 허리를 적당히 숙이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들의 이름을 읊조리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일영은 그렇게 인사를 건네며, 자신을 바라보는 두 여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