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잠깐의 휴식(9)
* * *
노부나가의 부끄러운 고백을 들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상 그다음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새 술병과 안주들이 놓인 탁자는 구석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고 둘은 서서히 남색으로 변해가는 하늘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어깨를 마주했다.
그렇다고 바로 관계를 가지진 않았다.
물론,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밤은 아직 길었고 서로에게 궁금한 것이 적잖았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조선은 어떤 나라지?”
“글쎄.”
일영과 노부나가.
이미 미래가 약속된 둘은 서로를 읊조림에 거리낌이 없었고, 일영은 어쩌면 이젠 죽었을 ‘진짜’ 백일영과 자신의 지식을 동원하여 말을 이어나갔다.
“조선은 뭐랄까. 신기한 나라라고 하면 되려나.”
국뽕이나 개인의 사소한 역사관을 모두 버리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본 결과다. 물론 그가 모든 자료와 사료, 역사적으로 정설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할 수는 없기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가끔가다 보면 이렇게 머저리 같을 수 있을까……. 싶다가도 용케도 위기를 넘기지. 그런 나라야.”
물론 위기와 극복, 그로 인한 성장……. 그런 건 어느 나라나 있을 거다. 유럽이나 미국, 중국이나 일본. 남미나 동남아도 제각기의 성장이 있고 또 많은 시련을 겪었겠지.
그런데 뭐, 잘 알지도 못하니까.
일영은 그저 개인이며 대한민국이란 나라만을 겪어본 사람이기에 단순한 감상을 읊조릴 뿐이다.
“그건 우리와 사뭇 같구나.”
일영의 말에 오다 노부나가는 피식 웃었다.
아마 난세에 태어나 평화롭던 과거를 찬사하고 다가올 피비린내를 마주할 그녀는 더욱 짙게 그 말을 듣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잡담으로 시작된 대화의 무게는 어느새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었다. 때문에, 일영은 목이나 축일 겸 곁에 두었던 호리병을 뽁하고 따고는 한 모금 머금은 후 창밖을 보았다.
“해가 지네.”
“그러게 말이다.”
휘이잉.
창가를 스치고 천수각의 최상층에 다다른 바람은 서늘하게도 뺨에 닿았다. 문득 일영은 오다 노부나가가 특유의 그 행색을 하고 있음을 깨닫고 무심하게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고.
“흐.”
곁에서 만족하는 듯한 작은 웃음이 흐른다.
그런 노부나가의 모습이 사뭇 귀여웠지만, 일영은 구태여 내색하지 않은 채 묵묵히 창밖을 응시했다.
천수각(???)
사실 대놓고 하늘 천(?)자가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기껏해야 그리 높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본디 군사적인 목적이 섞여 있는전황을 파악하려는 용도임은 분명하기에 낮지도 않지만 말이다.
요점은 뭐냐.
결국, 주변의 자연경관을 보기에 부족하진 않다는 거다. 덕분에 일영은 기요스 저 멀리 보이는 산세와 마을 등을 감상하며 생각했다.
‘이제 초반은 지났나.’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분위기의 여파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이야기에 결말이 있다면, 지금은 어디쯤일까.’라는 생각이 말이다.
우선적으로 보자면 오케하자마가 있고, 그 이후에는 기요스 동맹. 그리고 미노 공략과…….
생각하던 일영은 이윽고 피식 웃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너무 가시밭길인 거 아닌가. 해도 해도 이건 좀 너무한데 말이야.
그때였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
곁에 앉은 오다 노부나가의 나긋한 물음에 일영은 잠시 하던 생각을 멈추고 그녀를 응시했다. 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그녀가 그의 눈동자에 맺히고, 그는 무심결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노부나가.”
“응?”
“네가 바라는 건 뭐야?”
그 순간, 노부나가의 고개 역시 일영을 향했다. 그녀는 일영의 물음에 대한 저의를 파악하려는 듯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이윽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라는 것?”
“왜, 그런 거 있잖아. 가령 오와리를 벗어나 교토에 다다라 쇼군이 되고 싶다거나. ……바다를 건너 조선을 지나 명나라를 먹고 싶다거나.”
덧붙이는 말은 일영으로서도 내심 걱정하면서, 또한 궁금한 것이기도 했다.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이 물음이 앞으로의 여정에 이정표가 됨과 동시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으음.”
일영의 물음에 노부나가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말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야망이었으니.
“뭐.”
침묵은 길지 않았다.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몸에 걸쳐진 일영의 의복을 잠시 부드럽게 쓸다가, 이윽고 그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곤 답했다.
“글쎄다. 쇼군이 되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마치 장래희망이 가정주부랍니다 따위의 소박한 감상을 읊조리듯 답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일영이 웃음을 지으려던 그때.
“그건 단지 방향성이고, 야망이라고 치기엔 아쉽구나.”
그러면서도 일영이 말한 조선 정벌에도 한 마디를 덧붙이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조선을 정벌한다. 글쎄다. 그것이 가능한가를 떠나서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을까.”
당장 그녀의 머리에서 떠오르는 문제점만 수십 가지다.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그야말로 원정일 터. 그것이 몇 년만 지나도 세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건 물론이고 다이묘들의 원성도 자자할 것이다. 그뿐인가. 그로 인해 얻을 이득은 장기적으로 보면 많을지도 모르나 단기적으로 들어가는 돈이 엄청날 것 아닌가.
그로 인한 이득이 많다고 한들 그렇게 구미가 당기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이다.
“그렇구나.”
“그렇다.”
일영은 고개를 끄덕였고, 노부나가 역시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이내 살짝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그래 주기를 바라는 것이냐?”
뒤늦게 일영이 조선에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왜로 넘어오게 된 이유가 이유이지 않은가.
“그럴 리가.”
일영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는 조선에 아무런 감정이 없을뿐더러, 있다고 하더라도 예견된 불행을 부추길 미친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안도하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조선으로 갈 생각이 없다.’
적어도 지금은이라는 전제가 붙지만, 일영은 그녀를 믿었다. 과거 역사 속의 오다 노부나가가 아닌 자신의 곁에 있는 오다 노부나가를.
“그래서, 야망은 뭔데?”
때문에, 그는 그녀가 삼켰던 뒷말을 물었다.
그녀는 분명 쇼군을 방향으로 여겼으나, 그걸 야망이라고 치기엔 아쉽다고 답했지. 그렇다면 그녀가 바라보는 야망이란 무엇일까.
“흐음.”
그의 물음에 오다 노부나가는 힐끔 일영을 바라보다가, 곧 피식 웃었다. 그러곤 이내 그의 손에 쥔 술병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당연히 일영은 그녀에게 그것을 건넸고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
스륵.
오다 노부나가의 손길이 부드럽게 일영의 뺨을 스쳤고, 그녀는 곧 일영의 귓가에 부드럽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후.
가벼운 바람이 그의 귓바퀴를 따라 흘러들어온다. 시선을 돌려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자 그녀는 옅은 홍조를 띤 채로 답하니.
“나중에 말해주마.”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일영은 피식 웃었고, 곧 그녀의 뺨을 지나 뒷목을 부드럽게 감싼 일영은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초옥.
물기에, 그리고 숨결에, 나아가 술기운에 적혀진 둘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는다. 그리고 머잖아 둘의 혀가 서로 얽히고.
하웁.
야릇하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옅은 숨소리가 흘렀다.
*
오다 노부유키.
현재 기요스에서 가장 애매한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은 단연코 그녀였다. 비록 세력을 양분한 장본인이긴 했으나 오다 노부나가는 그녀를 구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혹여 모를 암살이나 이간질을 대비하기 위해 호위까지 붙여주며 자유를 보장했다.
그뿐인가.
군권과 같은 민감한 요소를 제외한 권리를 기존 가문과 같은 위치로 유지 시켜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그녀는 노부유키 파의 가신들과 달리 운신이 어느 정도는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오다 노부유키는 그런 언니의 호의가 부담스러운 동시에 약간은 허탈했다.
한때의 경쟁자가 자신의 본거지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꽤 많은 의미를 담는다.
먼저, 오다 노부유키는 더 이상 자신에게 대립할 수 없는 위치임을 천명하는 동시에 기존 오다 노부유키를 따르던 이들은 여전히 구속함으로써 내부적인 갈등마저 획책하는 그런 의도 말이다.
때문에, 그녀는 하룻밤 사이의 고민을 끝내고 자신의 언니이자 항복한 당주를 뵈러 천수각을 올랐다.
물론 일부 시녀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으나…….
“비록 패했지만, 나는 당주의 배려로 가문 내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런 나를 무슨 권리로 막는 것이냐?”
그녀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었고, 결국 시녀들과 사무라이들이 난처해하는 틈을 지나 천수각의 제일 상층으로 다다를 수 있었다.
“음?”
그러자 제일 먼저 느낀 것은 한적함…….
아니, 공허함이었다.
천수각의 제일 상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로막는 시녀들은 물론, 최소한의 경비조차 없는 모습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저 언니의 또 다른 기행인가정도의 감상으로 넘길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 .”
상층의 수많은 방 한쪽에서 무언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때문에, 그녀는 그곳에 노부나가가 있으리라 생각해 걸음을 옮겼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온 것이었기에 일단은 마주할 생각이었다.
아마, 그녀도 그걸 바라고 배려를 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그녀가 오다 노부나가의 방문 앞에 다다른 그때.
“……당.”
막 그녀를 부르려던 그때.
“나중에 말해주마.”
아주 낮은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오고, 일영이 들어오며 문을 닫을 때 미처 닫히지 않은 틈새 사이로 시선을 옮긴 노부유키의 시선에 들어온 모습은.
우읍.
오다 노부나가.
그리고 열도의 남자라고 보기 힘든 널찍한 등을 가진 남자.
다름이 아닌 백일영이 입을 맞추는 모습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