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피하면 할복이다
* * *
스에모리에 도타 고젠과 오이치는 남게 되었다. 그러나 노부유키를 필두로 한 소위 노부유키 파 가주들 전원은 일영과 함께 기요스로 향해야 했다.
당연한 일이다.
어찌보면 그들이 저지른 것은 적법한 후계에 반기를 든 것이기에, 용서를 받아도 직접 만나서 받아야 했으니까.
스에모리 성에서 기요스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때문에, 그들은 최대한 군사를 간추려 이른 아침에 출발해서 해가 지기 전에 기요스의 인근 평원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그들의 걸음은 실로 가벼웠다.
이로써 오와리를 통일한 것이나 다름이 없기에 습격을 받을 일도 없었고, 사실 애초에 고생이란 고생도 일영과 그의 호위무사들이 다 한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덕분에 이미 일영의 권위는 일전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일영은 휘하의 무장들에게 명령했으니.
“노부유키 아가씨 측에 섰던 이들에 대한 비난은 단속해라. 앞으로 함께 싸워야 할 이들끼리 사이가 틀어져서 좋을 건 없으니.”
“예, 주군.”
이츠키를 필두로 한 이들은 어느 정도 일영의 분위기를 읽는 데에 익숙해진 상태였기에, 그가 단순히 정치적으로 명령한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말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덕분에 일영이 하야시에게 했던 것을 지켜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리라 생각했던 노부유키 측 가신들은 의외의 준수한 대우를 받으며 기요스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고마워요. 히카게.”
물론, 그것에 대해 노부유키가 직접 감사를 표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기요스까지 1시간 즈음 남았을까.
앞서 보냈던 척후병들이 달려오며 선두에서 말을 몰던 일영에게 향했다. 그러곤 말에서 내릴 새도 없이 그에게 외쳤다.
“히, 히카게님! 지금……!”
다급한 그 모습에 혹 습격이라도 받은 건가 싶었으나 상처는커녕 낙오자조차 없었다. 때문에 일영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그 순간.
투다다다!
평원을 내달리며 울리는 연기와 함께 묵직한 말발굽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동시에 척후병은 본능적으로 말을 비틀어 곁으로 피했고, 그 빈자리에는 검은 말을 타고 푸른 갑주를 입은 여자가 곧바로 말에서 내렸다.
“허억, 허억!”
너무나 빨라 누군지 순간 알아보지 못했던 일영은 머지않아 그녀의 정체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고, 그녀가 말에서 내려 달려오는 동시에 마찬가지로 말에서 뛰어내려 그녀를 반겼다.
“일영!”
일영.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어찌 못 알아볼까. 그녀의 애달픈 목소리에 일영 역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름으로 화답했다.
“요시나리!”
단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그녀의 걱정과 기다림으로 가득했던 얼굴에 미소를 되찾아 준 것일까. 그녀는 언제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회색빛이 가득한 눈동자에 일영을 가득 담고는 곧바로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머.”
그 당돌한 돌진에 일영의 곁에서 말을 타고 돌아오던 니와 나가히데는 그런 추임새를 내뱉으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고, 노부유키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한동안 일영의 곁에 있지 못했던 모리 요시나리에게 그런 문제는 부가적인 것일 뿐이었고, 그녀는 다급히 일영의 몸을 살피며 말했다.
“미쳤어? 어? 거길 왜 들어가!”
이미 스에모리에서 있던 일은 모조리 기요스로 전해진 후였기에 모리 요시나리가 내뱉을 말은 어찌 보면 정해졌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질타에 담긴 것은 오직 일영에 대한 걱정뿐이었기에 그는 품 안에 안긴 모리 요시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고는 말했다.
……잘못하긴 했으니까.
“괜찮아. 다 잘 풀렸어.”
그의 말대로였다.
물론, 하야시가 반란 아닌 반란을 벌이지만 않았다면 훨씬 깔끔하고 무탈하게 끝날 수 있던 일이었으나 어디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던가. 일영으로서는 이 정도로도 충분히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모리 요시나리라고 그것을 모를까.
자꾸만 다쳐오는 주제에 괜찮다고 웃는 일영의 모습이 괜스레 얄미웠지만, 그녀는 투덜거림을 삼키며 조금이라도 더 일영의 품을 만끽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1시간만 더 달리면 그녀보다 훨씬 강한 적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일영은 알까.
아니, 모를 것이다.
모리 요시나리는 일영의 품 안에서 실로 오랜만에 맡는 그의 살 내음을 어렴풋하게나마 뇌리에 각인시키며 생각했다.
……그동안 못한 만큼, 잔뜩 괴롭혀주겠다고 말이다.
*
모리 요시나리가 합류한 이들은 더욱 박차를 가해 기요스로 향했고, 곧 이전보다 더욱 활기를 띠는 기요스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사전에 나와 있던 백성들은 승전하며 돌아오는 일영을 향해 환호성을 보냈다.
와아아아아!
오다 가문 만세!
그들을 바라보는 노부유키의 시선이 복잡했다. 작게는 오와리의 통일이 실감이 났고, 크게는 이들의 환호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묘한 아쉬움을 머금었다.
‘어머니가 이 모습을 봤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노부유키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때.
저벅.
일련의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이의 얼굴을 본 일영은 이윽고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으니.
“그렇게 반가우십니까.”
그런 일영의 모습에 무심결 이츠키가 장난처럼 물었다. 하지만 일영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그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반갑지 않을 리가.”
“하긴요.”
이츠키 역시 일영의 심정을 백분 이해했다.
그가 지금까지 달린 전장이 몇 개며, 그로 인해 기요스를 떠난 시간이 얼마인가. 아무리 불가피한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전원, 말에서 내린다.”
전원 말에서 내려라!
일영의 명령에 사무라이들 전원이 말에서 내렸다. 동시에 그는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검은 단발의 여인. 자신의 주군이자 연인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당연하게도, 명목상 이 군의 최고 지휘관인 일영이 이렇게 예를 갖출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신(?) 히라테 히카게.”
환호하던 백성들의 목소리가 잦아지고, 조금은 해이해졌던 군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군율을 되찾으며 일제히 군례를 올린다.
“오다 가문의 당주이자 저의 주군이신 노부나가님의 명령에 따라 스에모리로 출진.”
일영은 그 모든 것을 느꼈다.
불어오는 바람의 내음.
침을 삼키며 자신을 응시하는 가신들의 경계와 존경, 나아가 두려움이 섞인 시선들.
그리고 어느새 마음의 울타리 안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의 기쁨까지.
그 모든 것을 느끼며 일영은 입술을 열었다.
“당주님의 모든 명령을 이행하고…….”
첫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 기분이었다.
이곳으로 넘어온 지 한 해가 지났고, 마침내 원래의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오와리를 통일하였다.
환희와 설렘, 두려움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사실, 그도 내심 느끼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검을 들고 적들을 베어갈수록 점점 지쳐가는 자신을 느끼며, 떨리는 손을 느낀다.
그럼에도 앞으로 걷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주저앉을 수는 없으니까. 그러기엔 이미 손에 쥔 것이 너무 많았고, 얻은 이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일영은 어느새 소중한 사람이 되어버린 그녀에게 말했다.
“돌아왔습니다. 상처 없이.”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것은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내려보던 노부나가였으니.
“일어나라.”
일영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꿇었던 무릎을 펼쳤다. 그리고 그 순간.
터벅.
노부나가는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어딘가 불안한 눈으로 일영의 뒤에 서서 힐끔 둘을 올려보는 모리 요시나리에게 아주 작게 속삭이니.
“미안하구나. 모리.”
그런데 너도 이해할 거라 믿는다.
이런 남자를 어찌 놓치고 싶겠느냐.
그래도 걱정은 말거라.
“다른 여우 년들에겐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테니까.”
“예?”
갑작스러운 노부나가의 말에 일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러나 그때.
턱.
노부나가의 작은 손가락이 일영의 턱을 쥐었다. 동시에, 그녀는 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피하면 할복이다. 히카게……. 아니, 백일영.”
그리고.
읍!
노부나가의 붉은 입술이 일영의 입술에 부드럽게 포개지고, 곧 가드런한 치아를 혀로 훑었다.
가벼운 입맞춤이라고 하기엔 깊다.
짙은 키스라고 하기엔 아쉽다.
그런 찰나의 순간이 스친 후, 살짝 입술을 떨어트린 노부나가는 그저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영에게 속삭이니.
“너는 내 것이다. 나만의 사루(さる:원숭이)이며, 나만의 가신이다. 그리고…….”
그녀는 살짝 눈가를 가린 일영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곤 피식 웃었다.
“나만의 남자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히라테 마사히데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덤덤하게 선창했고.
“부군을 뵙습니다.”
부군을 뵙습니다!
뒤이어 기요스에는 뜻밖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