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아쉽지 않습니까
* * *
하야시 가문은 멸문했다.
정확히는 뿌리조차 남기지 못했다.
“허, 허허, 허허허…….”
하야시 미치토모는 가솔들이 모조리 죽은 사형장에서 미친 듯이 웃다가 목이 베였고, 그 모습에 노부유키 측에 섰던 가신들 모두가 히라테 히카게라는 이름을 뇌리에 각인할 수밖에 없었다.
분노가 차오른다.
하지만, 분노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다.
이미 노부나가의 군세가 스에모리 성을 가득 채운 지 오래이기도 했고, 노부유키와 도타 고젠이 무릎을 굽힌 순간부터 그들에겐 어떠한 명분도 희망도 없었다. 단지, 바랄 뿐이다.
제발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기를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향후를 결정하기 위해 노부유키는 일영을 독대하고 있었다.
쪼르륵…….
노부유키가 손수 따라준 찻물을 받아 든 일영은 한 모금을 머금었다. 예전부터 느끼는 건데 차에 맛을 들이다 보니 꽤 맛있다.
……물론, 현대의 음료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말이다.
그때, 자신의 잔에도 찻물을 채운 노부유키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언니가 절 죽이진 않을까. 걱정하는 가신들도 많아요. 저도 솔직히……. 조금쯤은 걱정이 되고요.”
노부유키의 붉은 입술에 살짝 녹색기가 도는 찻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동시에 그녀는 묘한 씁쓸함이 맴도는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뭐, 설마 죽이진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말이에요.”
그녀도 일영도 노부나가를 알았다.
겉으로는 막 나가고 때때로 흉폭한 광기가 엿보인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노부나가는 묘하게 여린 구석이 있다.
‘원 역사에서도 도타 고젠의 읍소에 노부유키를 한 번 살려주기까지 했으니까.’
일영은 반쯤 남은 찻물을 재차 머금으며 생각했다. 읽었던 책이나 자료에 따라 다르긴 했지만 후대에 도타 고젠은 노부나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어머니의 부탁을 받아들일 정도로 작금의 노부나가는 아직 인간적이었다.
그러니 걱정을 할 필요는 없으리라.
노부유키도 아주 태연한 일영의 태도에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때, 일영이 말했다.
“마음속으로는 아직 노부나가 님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걸 압니다.”
“……예.”
직설적인 말에 노부유키는 순간 무어라 답해야 할지를 가늠하는 듯 조금 머뭇거렸으나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덧붙였다.
“연유를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그저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앞으로 함께해야 할 것이라는 건 정해진 미래나 다름이 없기에 물은 것이다.
“연유라.”
일영의 물음에 노부유키는 손에 쥔 찻잔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그의 말을 곱씹듯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설득이 된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스에모리를 함락하는 것은 공멸하는 길이라는 말과 심상치 않은 주변의 정세. 그러나 그게 결정적이진 않았다.
“문득 궁금해져서요.”
“예?”
“솔직하게 말하면, 아직도 저와 어머니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언니는 당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작금의 난세는 이미 전국을 두고 벌이는 쟁탈전이다. 평온한 세상이었다면 조금은 불만이 있어도 그저 숙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세이기에, 주변의 강국들에 비해 한없이 약한 오와리이기에 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꿀꺽.
노부유키의 붉은 입술에 닿은 찻물이 미끄러지듯 흘러 목젖을 적셨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일영을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켜볼 정도의 마음은 들었어요. 언니가 과연 당주로서 적합한 인간인지. 그리고 그런 언니를 주군으로 섬긴 히카게의 선택이 옳았는지 말이에요. 뭐, 무도하게 죽어선 의미가 없다라는 말에 동의를 했지만요.”
“그렇습니까.”
일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유키의 말을 요약하자면 결국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고 들이 박아 엎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이 딱히 불쾌하진 않았다.
‘노부나가를 알아본 노부히데와 마사히데가 미친 거지, 솔직히.’
노부나가의 어린 시절은 분명 망나니다.
당주가 된 지금이야 카리스마를 어느 정도는 발휘하지만,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더욱이 노부유키가 누군가.
원 역사에서도 2번이나 반역을 모의했다가 결국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사무라이에게 죽임을 당하는 인물이다. 즉, 원래 이런 성격을 가진 여자라는 뜻이다.
“걱정마시길.”
때문에 일영은 한마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요.”
*
노부유키와 짧은 독대를 마치고 나온 일영을 반기는 이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혹시 또 다른 마음을 품을 이가 있을지도 모르기에 스에모리 곳곳의 가문을 단속하는 데에 바빴으니까.
인원이 워낙 적어 이츠키를 비롯한 이들까지 모조리 니와 나가히데가 데려간 탓에 일영은 꽤 오랜만에 홀로 있다는 기분에 미소를 지었다.
물론, 이때를 노려 그를 습격하면 어쩌는가에 대해 가신들이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지만.
‘글쎄…….’
일영은 힐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부유키가 머무는 곳이기에 그에게 그나마 호의적인 사무라이밖에 없었음에도 분위기는 정적이고 딱딱했다. 다만, 그건 적의가 아니라 두려움에 가깝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리라.
당장 그의 검 손잡이에 묻은 핏물이 채 마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끈을 갈아야 할 정도로 말이다.
그때였다.
“……나오셨군요.”
한쪽에 기대어 묵묵히 그를 기다리고 있던 금색 장발의 여장수가 걸어왔다. 붉은 갑주를 입고 일영이 선물한 멘구를 쓰고 있음에도 특출난 몸매나 타고난 분위기를 가리진 못했기에, 은연중에 시선을 끌었다.
“아, 시바타 님.”
그러나 정작 그녀를 반기는 일영은 그녀의 몸매나 분위기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그런 편한 화답이 반가웠던 것일까. 시바타 가쓰이에는 가면 아래에서 자신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성큼 다가갔다.
“기요스에서 전령이 왔다고 합니다. 아마 내일쯤 출발을 해야 할 듯싶습니다만.”
“그래야겠습니다. 다행히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오다 노부유키를 필두로 한 가문 항쟁이 막을 내렸으니, 그녀를 지지했던 이들 모두 기요스로 향해 노부나가를 알현해야 했다.
꽈악…….
시바타 가쓰이에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꽉 쥔 채 씁쓸하게 웃었다. 이전부터 알게 모르게 노부나가를 멀리한 그녀였기에 티를 내지 않아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일영은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그러길 바라야 하겠지요.”
“아, 그나저나 이제 같이 싸우게 될 텐데. 선물이 있습니다.”
일영은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곧 무언가 딸려 나와 그의 손에 쥐어지니.
“이건……?”
“마침 스에모리 성에 실력이 좋은 장인이 있어 하나 구해 왔습니다.”
그가 건넨 건 다름이 아닌 멘구(めんぐ:가면)이었다. 다만 시바타 가쓰이에가 평소에 쓰는 것과는 사뭇 달랐으니, 하관만을 가리는 멘구임에도 보통의 것보다 코 위쪽을 가리는 부분이 살짝 길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시바타 가쓰이에가 이걸 왜라고 물으려던 찰나.
“전원, 눈 감아.”
일영은 주변에 자신을 바라보는 사무라이들을 한번 훑어 명령했다. 그러자 은연중에 둘을 힐끔힐끔 바라보던 사무라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하나 둘씩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확신할 수 없었기에, 일영은 웃으며 덧붙였다.
“혹 실눈을 떠서 본 놈이 있다고 해도 평생을 비밀로 간직해라. 소문이 퍼지는 순간 대대로 맹인 가문을 만들어 줄 테니까.”
“……!”
반쯤은 장난으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지난 새벽에 그가 저지른 살육을 본 사무라이들에겐 그만큼 서늘한 경고가 없었다. 때문에, 겁 없이 눈을 뜨는 이는 전무했다.
“……백 공. 무슨.”
그런 일영의 행동에 당황한 것은 사무라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시바타 가쓰이에조차 가면 너머로 지금 일영이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때.
스윽.
뻗어진 일영의 손길이 시바타 가쓰이에의 뺨을 스쳤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시바타 가쓰이에는 돌이라도 된 듯이 굳었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듯 변했다.
‘이, 이 무슨?’
뭘까.
뭐지? 대체 뭐란 말이야.
갑자기 손을 뻗다니.
설마,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대낮에?
아니, 듣기론 전장에서 모리 공과…….
그,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공개된 곳에서?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남자에 대해 면역이 없기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 건지 학습된 루트가 없는 탓이었다.
그러나 그때.
스르륵.
갑작스럽게 얼굴을 스치는 바람과 귓가를 스치는 끈의 감촉에 굳어있던 그녀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흉터를 가리려던 그녀의 손이 얼굴에 닿았으나.
턱.
그 순간, 일영은 혹여 다른 이들이 볼까 재빨리 얼굴에 가면을 씌우며 손을 그녀의 뒤통수로 넘겨 끈을 묶어주었다.
동시에, 어딘가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로 손을 가져대 흉터가 보이지 않게 자리를 잡아주곤 말했다.
“가면을 쓰면 시야가 좁아지지 않습니까. 특별히 조금 긴 것으로 사왔으니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일영은 어딘가 어색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옅은 웃음과 함께 덧붙이니.
“이렇게 예쁜 얼굴을 평생 가리고 사는 것도 조금은 아쉽지 않습니까.”
휘이잉.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눈가를 가린 앞머리를 치웠고, 이윽고 드러난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이 멘구 아래로 흘렀다.
동시에,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화답하니.
“……좋은 선물입니다.”
시바타 가쓰이에는 한참이나 일영이 선물한 멘구를 손으로 쓸었다.
* * *